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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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알제리에 파견나간 프랑스 군인 드강 대위가 현지 왕족의 따님 한 분과 연애를 하더니 딸을 낳았다. 왕족의 따님은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안타까운 명을 다해, 아무리 식민지라도 남의 나라 땅 알제에서 남자 혼자 젖먹이를 키우기 난감한 장교는 두 살 먹은 딸을 데리고 잠깐 귀국, 베르농에서 잡화상을 하는 사촌누이 라캥 부인을 찾아와 어린 딸 테레즈를 맡기고 다시 알제리로 갔다가, 곧바로 전사해버렸다. 테레즈는 군인 아버지와 혈통 좋은 왕족 엄마를 닮아 튼튼하고 씩씩한 떡잎을 자랑하는 건강한 소녀로 자라났다.
 라캥 부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찍이 아들 하나만 둔 과부인데, 테레즈보다 두 살 더 먹은 아들 카미유가 어려서부터 도무지 알통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어 늘 병치레를 해야 했다. 그래서 늘 약을 먹어야 하는데, 불쌍한 카미유가 약을 먹지 않겠다고 징징거리는 걸 마음이 약해 억지로 먹이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던 라캥 여사는, 테레즈더러 카미유하고 같이 약을 먹으라고 은근히 달래서 천애고아 카미유도 약을 먹게 하는 잔머리를 몇 년 동안이나 굴려, 이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고 튼튼하기만 한 테레즈 역시 매일 한 움큼의 약을 입 안으로 털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골골거리는 카미유와 어려서부터 한 방에서 잠을 잔 테레즈는 본능적으로 카미유와 결혼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숙명을 체득하고 있었다. 평생 골골거리는 카미유의 병수발을 할 별자리를 타고났다는 걸. 이 결과로 몸과 마음이 튼튼 강건했던 테레즈는 몸은 몰라도 정신적으로 어딘가 좀 이상한 강박에 휩싸인 청춘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미유와 테레즈가 점점 자라 각 스무 살, 열여덟 살이 되고 이제 각방을 쓰게 되었을 때, 라캥 부인은 카미유에게 테레즈가 스물한 살이 될 때까지는 결혼할 수 없다고 선언을 하고, 기어이 그때가 될 때까지 굳세게 기다렸다가 스케쥴에 따라 둘을 결혼시켜버린다. 아무 사랑의 감정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되기로 예정했던 거니까. 그리고 곧바로 라캥 집안은 베르농에서 25년 동안 운영해온 잡화상과 살림을 접고 파리의 습기 많은 지역, 퐁네프 파사주로 옮겨 역시 작은 잡화상을 운영하기 시작한다. 좁고, 습기 많고, 어두컴컴하고, 끈적이고, 냄새나는 지역. 프랑스 소설 가운데 퐁네프 지역이 가끔 등장한다. 밤이 깊으면 주로 도둑떼, 거지들, 적어도 노숙자들이 행인을 협박하여 금품을 갈취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음습한 지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얼핏 쥐스킨트의 <향수>가 떠오른다, 이 책에서도 결코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 불쑥 나타나는 카미유의 어릴 적 소학교 친구 로랑. 적당한 키에 완강한 몸매와 두텁고 짧은 목. 솥뚜껑만한 손바닥의 건강체질. 일찍이 아버지가 파리로 보내 대학공부를 시켜주었지만 짜식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등록금 가지고 그림 그리는 친구들하고 몇 년 잘 때려 먹었다가 아버지한테 들켜 거의 부자의 연이 끊어지고 만 처지다. 서양의 아버지는 이렇게 겁난다. 한 번 삐딱하면 부자지간도 그걸로 끝. 심지어 로랑이 결혼하겠다고 허락해달라고 편지를 보내자, 베르농의 농부 아버지가 답장을 하길, 결혼을 하든지 목을 매달든지 선생님 마음대로 하세요.
 자, 냄새 나시지? 건강체질의 테레즈와 시들시들, 골골한 남편. 그리하여 결혼은 했지만 숫처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젊디젊은 테레즈의 눈에 근육이 불뚝불뚝한 로랑이 들어온 것. 로랑도 한 눈에 보니까 별로 예뻐 보이지는 않지만 묘하게 끌리는 테레즈의 무뚝뚝한 모습이 눈에 삼삼한데다가 여인을 품어본 지 하도 오래라 밀려오는 욕정이 뿜뿜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그래. 당연히 교통사고 난다. 거의 매일 카미유의 집에 찾아오던 그가 어느 날 하루 방 안에 테레즈와 단 둘이 남겨진 잠깐의 순간, 그녀의 허리를 부여안고 깊게 키스를 해버리고 만다. 안 돼 이 작자야! 거칠게 반항하는 것도 아주 잠깐. 이내 양 팔을 아래로 축 내리고 근육질의 무자비한 입술을 고스란히, 맛나게 받아들이는 테레즈.
 자, 여기까지.
 이 작품으로 스물여섯 살의 에밀 졸라는 처음으로 문제적 작가의 위치에 올랐다고 한다. 소설 자체를 놓고 당시 비평가들은 비도덕적이네, 더럽네, 말이 많았던 반면, 특히 세잔, 마네, 드가 등의 화가들에겐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는데, 화가들과의 교류는 아시다시피 졸라가 평생을 걸쳐 집필하던 루공 마카르 총서의 한 권이며, 제르베즈 아줌마의 장남 클로드가 주인공 화가로 나오는 <작품>의 출판시점까지 계속된다. (솔직히 <작품> 중에서 클로드를 너무 미친놈으로 그려놓기는 했다. 열받은 세잔이 졸라에게 절교를 선언한 것이 이해가 될 정도로.) 그러니까 졸라는 자신의 문학인생이 막 시작하던 시점인 스물여섯 살부터 소위 자연주의적 작품을 생산했던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나는 <테레즈 라캥>도 자연주의 장르에 포함시켜버렸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 한 단어 가지고 다음 스토리를 짐작할 수도 있으리라. 연애 백과사전 8장엔 남녀가 걸어갈 때 서로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나오고, 9장엔 키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10장엔 뭐가 나올까? 그렇다. 테레즈와 로랑 역시 마지막 10장까지 진도를 빼고, 자연주의 작품에 특별한 감미료인 범죄가 나온다. 무슨 범죄? 다 짐작하시리라 믿음.
 범죄는 또 다른 범죄를 부르는 법. 작 후반에 가면 졸라의 장황한 설명에 좀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분명히 그건 마지막 장면의 정당성을 위해 열심히 준비작업을 하는 것일 테다. 나도 눈치 좀 있는 편. 벌써 짐작하고 남음이 있음에도 젊은 졸라, 참 구구절절 말도 많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범죄의 ‘방법’이 의외이기는 했다. 짐작도 못했다.) 그래서, 그리고, 졸라의 루공 마카르 총서를 몇 권 읽어본 내 감상으로는, 나중에 졸라가 그야말로 ‘무르익어서’ 어떤 글을 썼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테레즈 라캥>이 그리 훌륭한 졸라는 아니란 의견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 젊은 졸라의 팔팔한 미숙(‘졸라의 미숙’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작가적 미숙’이란 말은 절대 아니다. 오해 마시라!)을 구경하는 심정이라면 일독을 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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