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람보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계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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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읽은 플로베르. 당연히 <보바리 부인>을 제일 먼저.  이어서 <성 앙투안느의 유혹>과 <감정교육>을 거쳐 <살람보>까지 오게 된다. 앞의 두 개는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책 읽는 것도 컨디션이 중요한 것인지 어쨌는지 하여간 <감정교육>은 읽고 플로베르한테 감정 생겼다. 와 닿지 않았던 것. 새삼스레 다시 읽어볼 정성까진 없어서 다음 작품으로 작가의 최고 히트작 <보바리 부인> 바로 다음에 쓴 <살람보>를 선택했다. 서양 소설을 좀 읽어본 사람들한테 ‘살람보’라고 하면 좀 이국적이면서도 용맹스런 전사를 떠올릴 것 같고, 나도 사실은 그랬는데, 용감한 전사는커녕 동그란 원의 형태로 국경이 그어졌었다고 하는 나라, 카르타고의 최고 집정관 하밀카르 버르카스의 딸이다.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 한니발의 누나이기도 하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역시 19세기 예술인답게 동양에 관한 모호한 호기심과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외과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넉넉한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어서 스물일곱 살 때 1년 반 동안 이집트를 위시한 북아프리카와 중동지역을 답사했던 적이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시기에 플로베르는 알렉산드리아의 흑인 창녀로부터 그를 평생 괴롭힐 이집트 매독을 방문 기념품으로 얻어 가지고 왔다. 프랑스 땅에서 플로베르가 자신의 기념품인 이집트 매독을 널리 퍼뜨렸는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 병의 후유증으로 고생깨나 했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도 같은데, 사실 19세기에 매독은 당시 예술가들 일부에겐 결핵과 더불어 은근한 선망이 되기도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도 않다.
 어쨌든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쓴 다음 곧바로 당시의 경험과 노트를 참고하여 차기 작품으로 <살람보>를 구상해 무려 5년에 걸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말에 의하면 <보바리 부인>과 같은 서구의 “혐오스러운 현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한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고대 동양을 선택했다고, 역자 김계선은 해설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인터넷도 없던 당시에 플로베르가 <살람보>를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바쳤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파리의 도서관을 이 잡듯 싹 뒤졌을 거 같고, 현지답사도 한 번 쯤 더 하지 않았겠는가 싶을 정도다. 이런 인간이 시대가 바뀌어도 “전설적 인물”로 추앙받는 거다. 자신의 대단한 역량을 바탕으로 끈질긴 노력까지 바치는 사람. 천재는 역량과 노력, 둘 다를 요구한다.
 시대적 무대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한테 코피가 나게 얻어터진 카르타고가 거액의 전쟁보상금과 시칠리아 섬의 지배권을 로마에게 양도해서, 그 결과 국고가 완전히 거덜이 난 상태다. 거기다가 로마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박 터지게 싸운 포에니 전쟁에서 영광의 준우승을 하기 위해 다수의 용병을 고용했지만, 거덜이 난 나라 살림으로 용병들에게 파이트머니조차 지불해주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해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일단 카르타고에 총집결한 용병 부대들. 다양한 민족/인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말 그대로 전 세계 싸움꾼이란 싸움꾼들, 강도, 도적떼 같은 인간들이 모두 모여 어쨌든 전쟁에 참가해 용감하게 싸운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가, 어찌어찌해서 최고 집정관 하밀카르 버르카스의 집에서 패전국 수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파티를 즐기고 있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술과 고기를 위장이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들이켜고 뜯어먹은 다음 천생 투사들인 용병들은 하밀카르 집정관이 아끼는 코끼리부대의 코끼리의 코를 싹둑 잘라버리기도 하고, 아무대서나 허리띠를 풀고 용변을 보는 건 물론이며 심지어 자기들끼리 심심풀이로 싸움을 벌이는 난장판을 만들고 있다. 이 때 테라스에서 모습을 보인 살람보. 그녀는 타니트 신을 섬기는데 이 신은 달의 신. 카르타고의 공식 신은 다신교 다알 신(들)으로 해의 신이다. 다알 신은 다들 아시지? 구약성서 속에서 히브리족의 여호수아 신만 만나면 그냥 타도되어 버리는 역할만 하는 신. 신들은 어쨌거나 테라스에서 서성이는 그녀의 모습을 한 번 보고 그만 넋이 나간 사내가 하나 있으니 용병 대장 마토. 그래, 이래야 소설이 된다. 천상의 미모를 갖은 높은 신분의 여인과 용맹하기 짝이 없는 대장 마토. 눈에 불이 튀는 마토는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살람보를 취할 수도 있겠다는 일타이피(一打二皮: 전문용어. 고스톱 칠 때 내 손의 화투장을 쳐서 피 껍데기 한 장 집어오고, 판에 깔린 거 뒤집어 때려서 또 한 장 집어오는 고급 스킬을 일컬음. 동의어, 일타쌍피)의 심정으로 용병들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라고 주장하면서 내전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스 노예 출신의 똑똑한 부하대장과 함께.
 이 정도면 내용은 충분하다. 살람보는 사실 책에서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럼 뭐가 분량을 채우는가 하면, 놀랍게도 플로베르의 상상력. 열 살 먹은 한니발을 제외하고는 모든 등장인물, 모든 사건은 다 플로베르의 두뇌에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책의 70 퍼센트 가량이 전투, 전투원 묘사로 채워져 있어 숨 막히게 긴박한 장면이 처음부터 끝까지 숨 쉴 틈을 주지 않아 읽는 재미를 높여주기도 한다. 내가 왜 거의 전부가 작가의 상상이라고 단정하느냐 하면, 전쟁이란 것이 극적인 반전이 상당히 드물며, 사실 전쟁이 시작하면서부터 거의 대부분 승패를 점칠 수 있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살람보>에선 한쪽이 거의 멸망할 수준으로 떨어졌다가 하나의 계기가 주어져 극적 반전이 일어나고, 그런가 싶다 했는데 또다시 뒤집혀 기적적으로 전세가 재역전이 되는 상황이 자주 나와서 그리 짐작했다. 과연 카르타고에서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용병들에 의한 내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그걸 누가 알랴. 카르타고는 아시다시피 제3차 포에니 전쟁 막바지에 로마에 의하여 아예 민족 자체가 절멸당해 아직도 카르타고가 있었던 정확한 위치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바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480쪽에 이르는 장편소설을 꾸며낼 수 있었던 플로베르의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까지 이르는 것일까. 등장하는 용병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싸움꾼들에게 각자 생김새와 옷차림과 행동양식과 종교 등의 특징을 부여하는데 조그마한 모자람도 없이 상세하고도 그럴 듯하게 묘사하는 플로베르. 참 대단하긴 대단하다. 이런 낭만주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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