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장하도록 화창했던 작년 5월,
경복궁에서 동료들이랑 중전 마마와 무수리 놀이를 하고 있는데,
엄청나게 시선을 끄는 한 남자가 지나갔습니다.
같이 간 동료들의 성원에 힘입어
저는 파파라치로 돌변,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지요.
몰래몰래 찰칵 찰칵

그는 멀어져만 갔습니다.
우리 일행은 그의 앞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싶은 욕구에 사무쳤습니다.
어떻게 생겼을까?
그래서 이 여성 일당은...
파파라치에서 스토커로 또다시 돌변했습니다.
열나게 뛰어서 쫓아갔습니다.
핵핵, 자아~ 땀 닦고~~~

그는 생각보다 상냥하고 친절했습니다.
기분 좋은 목소리로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요정) 레골라스와 무척 닮았습니다.

요리 봐도 멋있고...
조리 봐도 멋있고...

그는 스코틀랜드-독일인이라고 했습니다.
어찌나 반가왔던지 더듬대던 영어를 집어던지고
그나마 제겐 좀 편한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몇 마디 나누었는데, 목소리도 좋고 참 착했습니다.
여러모로 좋은 인상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그가 '같이 찍을까?'하고 물었습니다.
잘생긴 거시 왜 매너까지 좋은 거시야.
그래서 같이 간 동료를 함께 세웠습니다.
대한민국 여성 표준 체격보다 약간 늘씬훤칠한 아가씨와 비교해보면,
경복궁 레골라스(가명)의 놀라운 체형이 더욱 잘 짐작될 겁니다.
본명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기억이 안 납니다.
아주 평범한 독일식 남자 이름이었는데...
저런 미남의 본명을 잊어버리다니, 아직 때가 안 되었나 봅니다. 하핫~
한편!
아무리 봐도 엘프(요정)같은 구석이 없는 이 남자가,
'진짜 레골라스' 역을 맡았던 올랜도 블룸입니다.

'진짜 레골라스'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고 느껴집니다.
레골라스는 '실재(實在)'하는 인물이 아니니까요.
'진짜', '실제', '현실', '사실', '진실', '정말', '진정'
이 단어들은 비슷한 뜻을 담고 있지만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어떤 때에는 서로 완전히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영화나 연극, 예술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이 단어들을 어떤 경계와 기준으로 구분지어 사용할지
조심스러워질 때가 많아서 여러번 생각하게 됩니다.
찰리 채플린이 휴양차 어느 마을에 잠시 들렀을 때,
그 마을에서는 '찰리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난기가 발동한 채플린은 참가자로 등록해서,
대회 당일에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열심히 연기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3등상을 차지했습니다.
그 조그만 마을에서 찰리 채플린 본인보다
더욱 '진짜' 찰리 채플린처럼 연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
두 명이나 있었던 것입니다.
'찰리 채플린이라는 사실'과 '찰리 채플린적인 진실'이
항상 같은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 실례이지요.
레골라스 역을 맡았던 올랜도 블룸의 스크린 밖 모습과,
영화 속 레골라스보다 더 레골라스같이 느껴졌던 경복궁 레골라스(가명)의 모습.
이들을 동시에 떠올리니 찰리 채플린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진정 '레골라스성(性)'을 담고 있는 것은 누구의 모습일까요?

얘 하는 짓 좀 더 보실래요?
배꼽을 드러낸 우리의 레골라스, 올랜도 블룸!
현실에서는 엘프이기를 완전히 거부하는 듯 합니다.

엘프가 아니라 오히려 호빗에 가까운 것 같군요.
호빗들 셀카하는 데 끼어들어
주인공 엘리아 우드(프로도 역)가 화면에서 잘려나가게 만들다니!
혀를 내밀고 장난치는 모습이 골수까지 진짜 호빗같은
도미닉 모나한(메리 역)의 표정도 재미있네요.
주인공 밀쳐내고 그저 좋다는 올랜도 블룸 뒤에서
웃을지 울지 난감해하는 엘리아 우드의 표정도 그렇구요.
이 두 사람과 작가 톨킨과 감독 피터 잭슨을 생각하다보니,
몇 가지 질문들이 머리 속에서 왔다갔다하기 시작합니다.
다음의 질문에 대해 각각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진짜 레골라스'는 누구일까요?
레골라스는 진짜 누구일까요?
실제로 누가 레골라스일까요?
현실 속 레골라스는 누구일까요?
누가 더 사실적인 레골라스의 모습을 하고 있나요?
레골라스적인 진실은 무엇일까요?
그가 레골라스라는 사실은 정말일까요?
그가 레골라스와 닮았다는 사실은 정말일까요?
그가 레골라스 역을 맡았다는 사실은 정말일까요?
진정한 레골라스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레골라스에 대한 당신의 그 견해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나요?작성자 : 유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