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만든 책의 일부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장의 프론트 페이지들이예요.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봄볕을 품은 우둘투둘한 종이 위로
봄의 수선화를 그리던 여유로움이 기분좋게 떠오릅니다.
여름의 장미, 가을의 국화, 겨울의 나뭇가지를 마저 그리기 위해
일요일 날 회사에 나갔지요.
회사 가는 길에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의 꽃시장에 들러 도매가에 꽃을 사갔습니다.
봄에 대국을 구할 수 있는 꽃가게는 흔치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회사에 도착하니 꽃을 꽂을만한 화병이 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회사 앞 편의점에 가서 음료수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아, 역시 맥주병이 딱이야, 딱! 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카프리 한병을 홀짝 다 마시고는
물을 받아서 장미 한 대를 퐁당 빠트려두었습니다.
맥주병 속의 물을 꼬록꼬록 마시는 장미를 바라보며 맥주 취화선을 했구요.
장미도 취했는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답니다.
장미를 끝내고 이제 홀로 고고한 국화를 그리고자 대국을 그윽히 바라보니,
어찌 사대부가의 여식된 자로서 풍취에 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국화엔 천국(天菊)이 딱이야, 딱! 하면서
저녁으로 천국과 아구찜을 먹고 들어와 취화선을 했습니다.
다음은 천국 취화선 국화 원본의 일부를 확대한 것입니다.

겨울 나뭇가지는 동동주(冬冬酒?)로 취화선하면 딱! 이었는데
형편이 그렇게까지 너그럽진 못해서
그냥 맥주와 천국이 남긴 약간의 술 기운에 의지하며 그렸습니다.
이것은 동동주 술발을 못 받아
서글픈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겨울 나뭇가지의 원본이예요.

생각해 보세요.
젊은 처자가 그 좋은 봄날 주말에 사무실에 쭈그리고 앉았는데,
맨 정신으로 그림이 그려지겠습니까.
젠틀한(!) 제가 취화선을 하는 것도 다 당위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랍니다.
책에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수선화에 색도 칠해봤구요...

나비도 그려봤습니다.

아래 그림은 대학교 때 그렸던 나비인데,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마감의 압박이 없던 태평한 시절에 그려서인지
한가한 나머지 한결 꼼꼼할 수 있었던 티가 납니다.
색색 꽂혀있는 색연필들과 수채화 물감들을 보다가 삘 받아서
그 색들을 다 쓸 수 있는 나비를 그렸습니다.
하여 스테인드글라스같은 오색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되었지요.

취화선의 계절이 왔습니다.
올해는 무엇의 향기에 취해 붓을 들어볼까요.
흐르는 세월에 오래된 술이 무르익는만큼,
나의 정신과 그것이 쏟아내는 것들도 함께 숙성해 갈 수 있을까요.작성자 : 유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