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도윤 지음 / 한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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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마다 돌아오는 행진을 집 안에서 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쳤다. 비닐봉지를 하나씩 손에 들고 가는 것은 익숙해졌다. 그러나 교회에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절대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사이비 종교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책은 읽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한사람 마을 초등학교에 부임한 이준은 어릴 때 화재로 부모님과 동생을 잃었다.

혼자만 살아남은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지닌 채 그는 교사가 되어 첫 부임지로 시골을 선택했다.

도시를 떠나 조용한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던 이준의 눈에 정감 있고, 공동체처럼 보이는 마을은 이장이자 목사를 중심으로 화목한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일요일마다 교회에 비닐봉지를 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익숙치 않았다.

게다가 교회는 이장의 초대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마을 입구에도 철문이 있어 문지기의 허락 없이는 들고 날 수 없는 한사람 마을.

이름처럼 한사람을 위한 마을일까?






"제물을 바친다면서요."

"그래야 좋아하시니까요."

"좋아하시다니. 누가요?"

나는 이장을 떠올렸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위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올려봤지만 천장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신께서죠."



'영광의 방'에 있는 건 무엇일까?

매주 교회에서 벌어지는 추첨.

그 추첨에 당첨된 사람들은 영광의 방에 들어갈 수 있고, 그곳을 다녀온 사람들은 병이 낫거나 굽어진 허리가 펴서 나온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이준은 믿고 싶지 않지만 믿어지고, 믿는 게 어리석어 보이지만 눈에 빤히 보이는 것을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런 그도 영광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고, 불에 타서 화상을 입은 손이 말끔히 나아버리는데....



자신들은 사이비가 아니라는 그녀의 말과는 다르게 내게는 점점 교회가 꺼림직한 곳으로 느껴졌다.



사이비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이준은 그때부터 추첨일이 기다려진다.

자신을 두고 떠난 가족을 되살려 내기 위해 매주 제물을 바치지만 당첨의 기회는 오지 않는다.

애타가 당첨의 기회를 기다리가 이준은 한 가지 꾀를 낸다.

아무도 모르게 영광의 방에 들어가 직접 신을 대면하기로 한다.

신예 작가님의 작품은 식상한 듯 신선했다.

'신'의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제물로 바쳐야 할지 알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소원이란 무릇 신중하게 빌어야 한다.

그것이 마녀에게 비는 소원이든, 신에게 비는 소원이든

마법이든 신의 가호든

모든 소원엔 대가가 따른다.

사람들의 본성이 이렇다는 걸 <비나이다 비나이다>를 통해서 또 한 번 확인했다.

이장이 그토록 신중하게 지키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인간의 본성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만 하면 그 어떤 못할 짓이 없는 인간의 본성.

영광의 방에 있던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진짜 신이었을까?

천벌받을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신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었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가져갔다.

그 대가를 부지런히 바친 한사람 마을.

소원은 가능한 것만 빌어야 한다.

불가능한 소원엔 또 다른 상처만 남을 테니..

신에게 엿 먹은 이준은 그대로 돌려주었다.

나는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되더라.

받은 대로 돌려준 이준.

어쩌면 신 보다 잔인한 게 인간이지 않을까 싶다.

신도 이준이 그렇게 나올지 모르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 아들을 그리워한 어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것이야말로 '신' 그녀에게 안배한 소원인 거 같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이준에게 한사람 마을로 가는 길을 알려주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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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들
고은지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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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씨만 그런 건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경계가 우리나라를 가르고 있다는 사실. 그것 때문에 세상이 흑백이 되는 거죠. 그래서 성호 씨가 집에서조차 반으로 갈라져 있는 거고요."



80년대부터 2014년까지 한 가족의 이야기에 한국사를 곁들인 <해방자들>

책을 읽고 있으니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떠오른다.

대한민국 안에서 사는 우리들을 밖에서 보는 시선들에서 낯섬과 묘한 반항심이 생긴다.

그런 한편으로 우리가 모르고 있던 우리에 대해 알게 된 느낌이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도 우리와 같았다.

살아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분단국가에서의 삶.

타국에서 조국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역시나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인숙과 후란

며느리와 시어머니

신혼 한 달도 안 돼서 남편이 미국으로 떠나고 시어머니와 남겨진 인숙에겐 아버지를 잃은 상처가 있다.

길에서 끌려가 총에 맞아 죽은 아버지.

80년대 한국은 그런 시절이었다.

아들을 두고 시어머니의 묘한 경쟁의식은 두 사람을 갈라놓고, 그런 인숙의 곁에 로버트가 자리한다.

후란을 보면서 남편의 빈자리를 아들로 채우려 했던 할머니들의 시대가 떠올랐다.

남편보다 아들, 그 아들 중에서도 큰 아들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던 시어머니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후란의 모습이 그닥 생소하지 않다.

하지만 뭔가 다른 표현 방식이 묘하게도 거리감을 준다.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을 때는 아무도 믿으면 안 돼. 다른 사람 말은 절대 듣지 마."



후란과 인숙

인숙과 제니

같은 관계지만 다른 관계로 자리하고

성호와 헨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서먹함을 안고 산다.

이민자들의 삶을 다뤘다기보다는 한국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겪어서 알아낸 것이 아닌 들어서 알아낸 것이라 묘한 괴리감이 있다.

게다가 원래 문장이 그런 것인지, 번역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이라는 말이 와닿지가 않았다.

후란의 죽음으로 성호와 인숙은 그제야 해방이 되었다.

새로운 신혼을 시작한 인숙에게 로버트는 의미 없는 사람이 되었다.

헨리와 제니는 로버트가 그렇게 염원하던 통일을 이루었다.

남남북녀의 만남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

마치 통일에 대한 우리의 염려도 기우일지 모른다는 것처럼.

해외 동포들이 듣는 조국의 소식들은 그 긴 세월 동안 기쁨보다는 슬픔과 아픔이 많았다.

지금 우리의 이 현실도 해외 동포들에게는 다르게 전달될 것이다.

5.18도, 햇빛정책도, 삼품 백화점 사고와 세월호의 죽음도 그들에게 어떤 파장을 주었는지 그저 감히 짐작해 볼 뿐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민낯은 그들에게 또 어떤 짐이 될까?

88년생 재외 한국인 작가의 눈에 비친 한국의 현대사는 불안과 고통과 답답함과 무거움을 담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들을 관통해 살면서도 늘 희망차게 살았다.

불안과 고통과 답답함과 무거움 속에서도 한국인인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늘 희망에 차 있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살아냈다.

인숙과 성호와 헨리와 제니가 꾸려가는 가정처럼

우리는 불안을 잠재우고 고통을 이겨내고, 답답함을 걷어내며 무겁지만 가볍게 나아갈 것이다.

이런 낯선 느낌들 속에서 현대사를 대하는 기분이 묘했다.

그 갭들을 어떤 것들로 해방시킬지 이제는 생각해 봐야 할 시간대에 살고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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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윌리엄!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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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외롭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들에겐 할 수 없다.




평범한 듯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디까지 깊을까?

루시와 윌리엄은 부부였다가 헤어진 사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루시가 집을 나왔다.

어린 두 딸을 두고 집을 나온 건 루시였다.

결혼 생활 중에 가정에 충실하지 못했던 건 윌리엄이었지만.

캐서린도 집을 나왔다.

한 살배기 딸을 두고 독일 포로였던 남자와 함께하기 위해.

그녀는 윌리엄을 낳았고, 버리고 나온 딸 때문에 블루 한 감정을 지니고 살았다.

이혼을 하고도 친구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별로 못해봤다.

어릴 땐 이혼하면 모두 끝인 줄 알았고, 나이 들어가며 외국 영화를 통해 이혼해도 결혼했을 때보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찐친으로 남는 관계를 배웠다.

왜 우리나라는 이혼하면 누구 한 명은 매장되어야 하고, 서로 원수 보듯이 하며, 어느 한 쪽은 아이들을 만날 수 없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결혼을 하고 가끔 내가 화가 왕창 났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사라지고 난 공간에 남은 남편이 그제서야 내 존재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하고 후회할 거라는.

결혼 생활 중에 루시처럼 집을 나오고 싶었던 경험들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오, 윌리엄!>은 루시 바턴이 이혼 후에 자신의 첫 남편 윌리엄과 교류하며 그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친구처럼 지내면서 그의 대소사를 같이 겪고, 상의하며 서로의 고민과 문젯거리를 나누는 관계.

같이 있을 때는 몰랐던 상대방이 나로 하여금 괴로웠던 것들을 캐치하면서 자신의 결혼생활을 돌아보며 순간의 깨달음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 때까지 모른다는 것.



지나고 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당시에는 나에게만 집중되어서 내 위주의 상황만 생각하게 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같은 상황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얼마나 멍청했던지, 얼마나 지독했던지,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 윌리엄!>엔 그런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같이 깨닫게 된다.

나 역시 남편이 사라진 공간에서 그에 대한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그런 과정을 루시를 통해서 대리 체험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신화이며, 신비롭다. 우리는 모두 미스터리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피를 나눈 가족도

살을 부비고 사는 부부조차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감정'

책을 읽으며 내가 책을 읽기 전보다 성숙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투명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루시.

그래서 본의 아니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루시.

정작 본인은 투명 인간이라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을 거라 믿었던 루시.

엄마를 떠나고 싶어서 노력했던 윌리엄은 엄마랑 닮은 루시와 결혼했다.

아마도 그랬기에 루시를 이해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질이 달랐던 두 사람.

윌리엄의 바람은 그런 연유였을 거 같다.

또 하나의 엄마와는 다른 여자를 찾았지만 결국 다른 여자에게서는 결코 안정됨을 느끼지 못했던 윌리엄.

<오, 윌리엄!>

이 제목엔 몰랐던 사실을 깨달은 놀라움의 감정과 안타까운 마음, 연민의 감정이 섞여 있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오, 윌리엄!>, <바닷가의 루시> 이렇게 이어지는 연작 소설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은 이상하게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단순한 거 같은 문장들 속에 심오한 깨달음이 박혀있다.

내가 미처 몰랐던 감정들을 알게 해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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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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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텔레비젼을 보며 산딸기 셔벗에 피터 스타인먼의 뇌를 섞은 디저트를 떠먹는다.



<홀리>

홀리는 <빌 호지스> 시리즈에 나오는 캐릭터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있는 홀리를 엄마의 과보호에서 탈출하게 해준 사람이 빌 호지스다.

빌이 죽고 파인더스 키퍼스 사무실이 홀리에게 남겨졌다.

빌 없이 어떻게 홀리가 일어설 수 있을까 걱정되면서도 홀리를 계속 보고 싶었는데 작가 역시 이 <홀리>를 그냥 둘 수 없었나 보다.

<홀리>를 읽으며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웠고, 이런 엽기적인 이야기도 스티븐 킹이 쓰니 더할나위 없이 우아하게 그려냈다는 생각이 든다.

'식인'이라는 소재를 사용함에도 역겨움과 불쾌함을 과하지 않게 표현한 작가의 솜씨 때문에 역시 '스토리의 킹, 스티븐 킹'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재를 다른 작가가 썼다면 끝까지 못 읽었을 수도 있었을 거 같다.

끔찍하지만 덜 끔찍하게

불쾌하지만 덜 불쾌하게

잔인하지만 덜 잔인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온갖 이야기를 들려준 노련한 작가의 필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코로나가 한창인 시국이다.

마스크를 쓰고, 어떤 백신을 맞았는지 서로 밝히고 조심하는 대목들에서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흐른다는 걸 실감한다.

이제는 먼 옛날이야기처럼 들리는 팬데믹 시절.

홀리는 엄마 샬럿을 코로나로 잃고, 파트너 피트 역시 코로나에 걸려 분투 중이다.

홀리는 잠시 쉬자는 피트의 말에도 불구하고 딸을 찾는 의뢰인의 사건을 맡기로 한다.

이 실종인지 납치인지 모를 사건을 조사하면서 이어지는 또 다른 실종사건들이 홀리를 '식인 교수들'에게 이끈다.



식인 대학교수 부부,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부르겠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건 '식인' 보다 그것을 실행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대학교수 부부가 벌인 이 엽기적인 행태는 오로지 자신들만이 최고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삐뚤어진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편견 덩어리에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다.

젊은이의 뇌와 지방과 간이 자신들의 건강을 지켜줄 거라 굳건하게 믿었고 완전범죄를 계획했다.

사이코패스들이 젊어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늙어서도 명예직으로 학교와 학생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범죄보다 더 악랄해 보인다.

팬데믹의 배경과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과 경찰들의 무능과 공권력 남용을 때로는 토론의 장으로 때로는 드러내지 않으며 이야기하는 작가의 노련함이 좋다.

과거의 현재가 번갈아 이어지며 사라진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그들을 추적하는 홀리의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점점 범인의 윤곽을 잡아가는 형식이 독자들을 들었다 놨다 한다.




"페니 달이요." 홀리는 여느 때와 다르게 목 놓아 운다. "딸이 어떻게 됐는지 달 부인에게 어떻게 얘기해요? 아무한테라도 어떻게 얘기해요?"



정말 이 엽기적인 이야기를 유족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어딘가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두려웠다.




"포유류는 모두 자기 종족을 잡아먹어.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만 그걸 한심하게 터부시하지. 널리 알려진 온갖 의학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지식이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짓을 하게 했다...

곱게 늙고 싶다.

태어나서 가장 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난 <홀리>

이 이야기는 홀리라는 캐릭터가 조연에서 주연으로 우뚝 서게 되는 이야기로,

거부감 넘치는 소재를 잘 다듬어내어 스티븐 킹이 홀리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 같았다.

홀리가 좋은 이유는 아마도 늦은 나이에 자신의 길을 개척해가는 모습에서 이런저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옭아매었던 사람으로서 그 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게 하기 때문인 거 같다.

나 역시 또 다른 재능을 찾아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홀리가 홀리 한 것처럼!

빌 호지스의 잔디를 깎아주며 용돈을 벌던 제롬은 이제 작가가 되어 첫 원고료를 받았고, 제롬의 동생 바버라 역시 자신이 쓴 시로 상을 받는다.

빌 호지스는 갔어도 그가 남겨둔 사람들은 모두 제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다.

이야기를 넘어서는 이야기였고,

조연에서 주연으로 자신의 입지를 다잡은 홀리가 시리즈로 계속될 거 같은 예감이 들고,

홀리가 가는 길은 이제껏 보아온 그 어떤 탐정들과도 다른 길일 거 같아서 더 기대감이 상승했다.

여름 끝자락에서 읽을만한 책을 찾으신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홀리> 한 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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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식료품점
제임스 맥브라이드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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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트 팀블린은 서류상으로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미국의 흑인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그는 평등하지만 평등하지 않은 법과 법령이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었고, 평등에 관한 일련의 규칙과 규정이 그에게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그는 제 나라 없이 유령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네이트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나라, 애디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가 마음을 쓰는 나라는 귀가 들리지 않는 깡마른 12살의 남자아이였다.



위에 발췌 글처럼 1920년대 흑인의 삶에 대해 간결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한 글이 또 있을까.

제임스 맥브라이드의 작품을 <어메이징 브루클린> 다음으로 두 번째 읽게 되었다.

장황하게 긴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건 그 시대를 최대한 간결하게 표현하려 한 작가의 노고이다.

우리나라의 1920년대의 사회 분위기도 잘 모르는 나지만 미국의 소도시 치킨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장소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유대인과 흑인.

백인들의 세상에서 경제권을 움켜쥐고 그들을 쥐락펴락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떠돌이 백인 유대인.

자신들의 나라에서 한순간에 미국이라는 나라로 이송되어 강제 노예살이를 해야 했던 노예들의 후손인 흑인.

그 중립 지대에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초나.

그런 초나의 곁을 지키는 모셰.

사고로 청력을 잃은 아이 도도.

조카를 자식처럼 키우는 네이트와 애디.

이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되는 그 시절의 미국과 그 시절의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은 '살맛 나는 시간'이었다.

마음에 온기가 차서 겨울에 다시 읽고 싶어진다.

추운 겨울에 몸과 마음이 따스해지는 경험이 필요할 때 다시 꺼내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이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한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모두 같은 인류이기 때문이다.



유대교 공동체의 예배당 우물 바닥에서 발견된 유골은 허리케인으로 인해 사라지고, 용의자로 의심받았던 과거의 댄서 말라기도 함께 사라진다.

이것 역시 신이 안배한 일 아닐까?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유대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인지 <하늘과 땅 식료품점>에서 유대인과 흑인들의 관계는 '초나'를 중심으로 뭉쳐지며 이어진다.

차별과 편견의 무지함을 뚫고 자신들의 삶을 이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그때와는 또 다른 현재의 차별과 편견의 모습을 깨닫는다.

우리 역시 지구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는 똑같은 인류인데 어째서 '다름'을 차별과 편견으로 세뇌시키는 걸까?

기술이 발달하고, 배움이 보편화된 세상에서 하나처럼 연결된 글로벌한 세계에 살아가는 우리 인류는 어째서 무지한 차별과 편견의 우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점점 잠겨들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부모 잃고 청력을 잃은 한 아이를 구해내려 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종을 떠나 참 아름다운 찐 인류애를 보여준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는 거 같다.

전작도 그러했지만 맥브라이드 작가님의 작품에선 '수다'가 느껴진다.

어떤 얘기든 맛깔나게 잘 하는 아저씨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마을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분이다.

대도시였다면 이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

작은 마을이 대도시화 되어가는 와중에 그 자리를 지켜내며 자신들의 삶을 버텨냈던 사람들이 가진 정의와 삶에 대한 이야기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차이를 넘어서 서로를 도우며 강해지는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그들에게 피부색과 가진 것에 대한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래 한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끈끈한 유대감이 그 모든 불길한 감정들을 잠재우는 이야기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지금 이 삶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잠시 어릴 때 동네 골목길마다 마주쳤던 어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들의 오지랖이 절로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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