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후 ㅣ 시대물이 이렇게 재미있을 리가 없어! 3
션 타오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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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황후> 낭만적인 제목에 이끌리고, 시가 마법이 되고 무기가 된다는 설정에 매혹되어 읽고 싶었다.


제1 황자를 제치고 후계자가 된 제2황자 테렌의 후궁을 모집하러 황궁에서 사람이 온다.

3황자의 마법이 기근으로 허덕이는 도시에 과일나무를 만들어내는 걸 보고 웨이는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울 방법은 후궁이 되는 길임을 깨닫고 후궁 모집에 참가한다.

하지만 시골 무지렁이 출신이 후궁으로 간택될 일은 없다. 웨이는 자신을 뽑아 테렌 황자의 먹잇감으로 바치라며 매달린다.

그렇게 궁에 들어간 웨이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진다.

테렌이 웨이를 선택했다!


이렇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으며 테렌의 포악함에 이유가 있고, 웨이가 그 이유를 찾아서 해결하고 둘이는 꽁냥꽁냥 잘 살았다는 익숙한 이야기를 그렸었다.

그게 클리셰에 길들어진 나의 뇌가 내린 오판이었다는 걸 읽어가면서 느끼는데 전율이 흐른다.


벼농사꾼의 딸. 인 웨이.

화려한 궁에서 후궁들끼리의 암투에서 살아남으려 애쓰는 전개를 상상했던 나는 강적을 만났다.

테렌은 전혀 로맨스 주인공이 아니었고, 시도 때도 없이 사람을 기분 내키는 대로 죽이는 망할 인간에 밤마다 웨이를 고문하는 짐승 같은 놈이었다!

뒷배도 없고,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궁궐에서 온갖 방해를 받아 가며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힘든데 밤마다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문을 당하는 웨이!

이 이야기는 어디로 향할까?






"남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죠 ㅡ 어쨌든 옥좌에 앉지도, 조정에서 정사를 논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과소평가야말로 우리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의 이름이 시의 작자로 오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역시 세상을 바꿀 힘을 갖고 있어요. 다만 그림자 속에서, 우리만의 방식으로 움직일 뿐이죠. 첫 번째 왕조 때부터 늘 그래 왔어요."



궁중암투, 폭군, 배신, 견제, 아무런 배경 없는 어린 여자아이가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과정은 곧 인 웨이의 성장과정이기도 하다.

웨이는 자신의 필경사를 통해 글을 배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궁인들에게도 글을 가르친다.

웨이가 글을 배우는 이유는 단 하나.

폭군 테렌을 죽이기 위해서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심혼시를 써야 한다.

심혼시는 사랑의 시다.

자신의 적을 죽이기 위해서는 적에 대해 모든 걸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어 그의 본심을 알아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쓴 사랑의 시이자, 내가 쓴 살해 주문이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지만 가독성이 좋다. 

익숙한 이야기 같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

하루의 먹거리를 걱정해야 하는 촌구석에서 자란 웨이는 황궁에 있는 사람들과는 태생이 다르다.

다 가진 사람들의 걱정이야 권력 유지와 가문의 영광이겠지만 웨이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었나.

'시'가 마법이 되고, '시'가 죽음의 주술도 되는 세계에서 웨이는 테렌을 죽일 심혼시를 써 내려간다.

그리고 테렌의 과거가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독자는 희망을 갖게 된다.

둘이 모든 걸 극복하고 잘 살아가는 해피엔딩을.


그러나 예측하지 못한 전개라는 게 <시인 황후>의 매력이다.

평범한 여자아이가 금지된 지식의 세계에 발을 들이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권력을 맛을 알아가는 웨이의 마음에 이는 변화도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가늠이 안 되는 상태로 마지막을 달리는 기분이 쫄깃하다.

멋진 시가 축복이 되기도 하고 살기를 띠기도 하는 세계.

문자가 힘이 되는 세계.

그 안에서 권력을 독점해온 남자들에 맞서 글을 배우고, 시를 지어내는 웨이의 모습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내는 인간의 의지를 담고 있다.




독특한 배경을 창조해 내고

색다른 엔딩을 만들어 낸 션 타오의 매력은 판타지를 판타지하게 만들어낸 것에 있다.


글의 힘을 

마음을 담은 글의 힘이 어떤 위력을 갖게 되는지를 <시인 황후>기 보여준다.

진실을 담은 시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오로지 진심을 다해 시를 써야만 마법이 발생한다.

그래서 이야기를 읽고 한동안 마음이 멍해졌다.

웨이가 내린 결정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에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른 한 소녀가 품은 원대한 꿈은 이루어질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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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벚꽃
유즈키 유코 지음, 김지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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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일도 있어."



이야기를 읽으며 정말 중요한 건 뭘까?를 생각하게 된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서 더 중요한 건 뭘까?


민원 폭주 전화로 소란한 사무실 풍경으로 시작하는 <지지 않는 벚꽃>은 스토킹 사건을 방치하고 워크숍을 갔던 경찰을 폭로하는 기사 때문에 현경의 업무가 마비되고 주인공 이즈미가 이 사건과 연관이 있을 거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시작한다.

자신의 절친이자 폭로 기사를 쓴 신문사 기자이기도 한 지카를 만난 이즈미는 그녀를 추궁하지만 지카는 의외로 완강하게 자신이 기사를 쓴 게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즈미는 그 사실을 믿지 않고, 지카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다짐한다.


그로부터 일주일가량이 지난 뒤 지카가 시체로 발견된다..






지카의 죽음, 모모세의 자살, 요네자키 신문의 특종 기사와 제보자, 헨미의 수상한 행동, 사이비 교단의 존재, 그것들을 연결하는 실이 아직은 뚜렷이 보이지 않았다. 흩어진 조각들은 어디서 이어지는 걸까. 


4명의 죽음

경찰 조직의 비밀

사이비 종교

그 사이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입는 피해들이 점점이 삐져나온다.


공안 경찰과 형사 경찰.

서로 협조하지 않는 경찰 조직.

나라를 위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공안 경찰에게 민간인은 우선이 될 수 없다.

나라를 위해 그들이 하는 짓이 정의로움에 속한다고 봐야 할까?




"이제 뭘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조직 속에서 양심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그와 동시에 조직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민원인들의 고충을 다 들어주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던 헨미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라를 위해서, 조직을 위해서.

하지만 일어난 일들은 그를 좀먹어 갔다.


상명하복의 조직사회에서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었던 한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는 누구의 책임일까?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무관하지 않아서 소름 끼친다.

일어난 사건보다도 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 때문에 더 소름이 돋는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게 저질러지고 있는 걸까?


경찰 조직은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조직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진실을 감추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거대 조직이기도 하다.

그 사이에서 정직하게 신념을 가지고 일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일을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지지 않는 벚꽃>은 범인을 찾는 단순 미스터리가 아니다.

국가의 이익과 조직의 명예를 우선시하며 진실을 은폐하거나 침묵하는 시스템의 정의가 개인의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다.



벚꽃은 화려하게 피어났다가 바람에 흩날리며 봄의 끝을 알린다.

제목의 지지 않는 벚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공안 경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안에서 상처받은 기억으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과 묻힌 진실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즈미처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천천히 옳은 방향으로 굴러갈 것이다...


이즈미는 경찰이 되기로 결심한다.

다음에 이즈미가 경찰이 되어 거대 조직의 시스템의 빈 곳을 틈틈이 찔러나가는 모습이 보고 싶다.

이즈미의 기죽지 않는 기세가 필요한 세상이다.


이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진정한 정의가 발휘되는 세상이 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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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전트 워크플로우 - 같은 AI로 다른 성과를 내는 단 하나의 변수
로사장(김다솔) 지음 / 필름(Feelm)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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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통했던 일의 문법이 사라지고 새로운 문법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 책에 관심이 갔던 건 바로 동기화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AI를 잘 사용하는 사람은 AI에게 명령을 잘 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프롬프트를 잘 쓰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미 그 시대가 가버렸다고 하니 마음이 갑갑해졌다.

뭘 또 배워야 하는 건데?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작업했던 결과물을 놓고 생각해 보았다.


얼마 전 나는 AI를 활용해서 네이버 이모티콘을 만들었다.

24개의 이모티콘을 만드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젤 힘들었던 건 미세하게 달라지는 캐릭터였다.

원본 사진을 업로드 해놓고 작업을 시작해도 미세하게 달라졌다.

또 하나는 두 개의 AI를 사용했는데 각자가 판단한 네이버 이모티콘의 정의가 달랐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 말하는 NATIVE의 의미를 조금은 알 거 같았다.

모든 AI가 비슷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만 조금 더 특화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작업할 때  사용자가 가진 아이디어를 가장 잘 살려주는 AI를 찾아내는 것도 그 사람의 실력이 되는 것이다.



AI 사용법을 배운 적도 없기에 맨땅에 헤딩한다는 생각으로 덤볐던 과정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바로 STORY BANK였다. 

이 스토리 뱅크를 만들어놓지 않았기에 매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앞으로는 기록이 쌓일수록 더 좋은 판단을 돌려주는 기억의 은행 STORY BANK를 잘 활용해야겠다.



WHY는 무엇을 버려도 되고 무엇은 절대 버리면 안 되는지 알려주는 기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그저 일을 시키기에만 급급했던 나였기에 내가 원하는 바와 결과에 대해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지 못했다.


CYCLE 은 AI가 다음 일을 더 잘하게 만드는 피드백 루프다.


내 작업 방식은 AI에게 내 기준을 공유하지 않고 대화를 끝냈다.

그날의 작업이 끝나면 그걸로 대화를 종료했다.

내가 어떤 부분을 맘에 들어 했고, 어떤 부분을 아쉬워했는지를 공유했다면 다른 결과물이 나왔을까?

다음 날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을까?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앞으로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경쟁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앞으로는 내 생각과 아이디어를 시스템으로 만들어 AI와 공유하는 사람이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될 거 같다.



AI의 시대에 살고 있다.

앞으로는 더 획기적인 AI 기술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기술의 변화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사람의 생각에서 오는 변화가 아닐까.


일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하는 방식을 잘 설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AI를 활용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기 보다 AI와 어떻게 함께 할까를 고민해야 할 시간인 거 같다.





* AI를 사용하고 있지만 활용에 한계를 느끼는 분

* 블로그, SNS, 콘텐츠 제작을 하는 분

* 반복 업무를 줄이고 싶은 분


이 책을 활용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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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
플로렌스 냅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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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운명에 영향력을 발휘할까?

표지부터 세 갈래 길을 뜻하는 <이름들>은 세 개의 이름이 세 개의 삶을 그려내는 모습이라 인상적이었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글은 늘 설레지만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소재를 생각해냈는지 감탄했다.


의사 집안의 아들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이름 '고든'

코라는 아들의 출생신고를 하러 가는 중에 딸 마이아와 대화를 나누며 아들에게 '고든'이라는 이름을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9살 딸 마이아가 생각한 이름은 '베어'

코라가 생각한 이름은 '줄리언'이다.

코라가 아들의 이름을 베어로 지은 경우와 줄리언으로 지은 경우 그리고 고든으로 지은 경우의 세 가지 삶이 7년의 간격으로 그려진다.





위험하단 생각 안 들어?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우리 아들 이름을 고든으로 지었다가 당신처럼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안 드냐고.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정확히 그걸 노린 것이었으니까.



친구 모임에서는 최고의 남편감인 '고든'

의사로서는 환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고든'

집에서는 가정폭력범이자 가스라이팅 범죄자인 '고든'


베어의 삶에서는 아버지가 사라진다.

베어라는 이름을 가진 순간 아이의 이름으로부터 어떤 힘이 생긴 거 같다.

아들의 이름이 베어라는 사실을 안 순간 아빠 '고든'은 폭주했고 아기 배어의 이름은 그 폭주를 막을 힘을 가진 느낌이었다.

엄마와 누나를 지킬 수 있는 한 방의 운명.

그러나 짧고 굵은 삶...

이 삶에서 코라는 정원사가 되고, 마이아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소도시에 정착했고 베어도 꿈을 접고 가정에 정착했다.



줄리언의 삶에선 어머니가 없다.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줄리언에게 할머니의 친구 키언은 아버지 같은 존재로 남는다.

아버지의 피가 자신의 DNA에 낙인을 찍은 거 같은 느낌에 늘 자신의 인생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줄리언.

그로 인해 자신의 가정도 잃을 지경인 줄리언.

이 삶에서 마이아는 늦게나마 자신의 일을 찾아간다.



고든의 삶엔 양친이 모두 존재한다.

대를 이은 직업인 의사가 되진 못했지만 숫자를 가지고 노는 일로 잘 나갔던 고든.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엄마의 잘잘못을 상상해 내던 어린 고든은 어른이 되어 알코올 중독자로 잘나가는 증권맨으로 살지만  자동차 사고 이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마이아는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 의사로서 폭력의 징후를 읽어내며 환자들을 보살피지만 정작 엄마를 구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건 오랜 시간 마음에 자리 잡은 '공포'라는 감정이 현실을 외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코라는 이 삶에서 가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늘 되돌아온다.

고든은 악랄함의 끝을 보여준다. 소름 끼치는 수법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코라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가 되는 아이러니한 감정을 겪게 된다.








고든이 고야의 그림 앞에서 각성했을 때 그는 같은 이름이지만 다른 삶을 선택했다.

고든은 고든이 되지 않기 위해 영리한 싸움을 했고, '고든'으로부터 엄마와 누나를 지켜냈다.


<이름들>은 가정폭력에 멍든 사람들이 치유되지 않은 상처로만 남을 것인지,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갈지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상처는 딱지의 진채로 마음 어딘가에 남는다.

그러다 비슷한 경우를 보거나 같은 일을 당하는 사람들을 빠르게 알아본다.


코라가 가장 큰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나는 마이아가 가장 애달팠다.

차라리 어린 베어, 줄리언, 고든은 그 과정을 지켜보지 않아서 다행이었지만 그 상흔은 그의 인생 어디에나 따라다닌다.

하지만 마이아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며 자신과 동생까지 지켜냈다. 

그녀의 정체성은 어쩜 '고든'때문에 남자를 기피한 결과가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악랄한 고든'이 따라다녔다.

그의 교묘함이 그의 폭력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떤 삶을 살아내던 '악랄한 고든' 같은 사람이 가족 안에 있다면 결코 그 그늘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고든 역시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였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면 더 악랄해지는 법이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엘리트일수록 더 주도면밀하게 폭력을 은폐한다.

코라의 모든 것을 뺏어버린 고든의 교묘함 때문에 속에서 천불이 일고

내 마음에서 살인이 일어나는 충동을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느낌으로 남는 작품이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선택이 따른다.

옳은 선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다.

고든으로 살더라도 '악랄한 고든'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폭력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만약에'라는 설정은 다른 삶을 부여했지만

그들을 괴롭히는 사건과 사고에서 무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힘겹지만 극복하고 이겨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삶의 태도를 보게 된다.


부모로부터 무엇을 물려받던 선택의 몫은 바로 나의 책임이다.

지금의 나는 내 선택에 의한 모습이지 부모의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마음과 태도로 나의 인생을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부록에 담긴 인명 사진이 인상적이다.

이름처럼 살아냈던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오래 남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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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호시스 ㅣ 슬라우 하우스
믹 헤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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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슬라우 하우스가 존재하는 진자 이유다. 슬라우 하우스로 보내면 해고에 따를지 모를 소송이나 분쟁 조정 문제를 회피하며 사람들을 내보낼 수 있는 것이다. 



영국 스파이 하면 007 제임스 본드가 생각난다.

가장 영국적인 스파이이자 가장 성공한 첩보물의 주인공이다.

거침없는 제임스 본드만 보다가 매가리 없고, 흐트러져 있는 루저들을 보니 조금 답답한 마음과 동시에 설레는 마음도 든다.

이 루저들이 뭔가 일을 낼 거 같아서~


믹 헤런의 <슬로 호시스>의 주인공들은 낙오자들이다.

새로운 느낌의 정통 첩보물인데 주인공들은 실수와 실패로 인해 주류에서 밀려난 낙오자들이었다.

이곳의 수장은 잭슨 램.

게으르고 무례하고 거대한 방귀쟁이로 과거는 화려했으나 한물도 아니고 여러물이 간 퇴물. 

그러나. 누구보다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인물로 사건이 터졌을 때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인물이다.


<슬로 하우스>의 첫 페이지는 리버 카트라이트의 실수로 시작된다.

범인 식별을 잘못해서 킹스크로스 역을 날려버린 인물. (테러 방지 훈련)

해고되었어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슬로 하우스로 배정된다.


초반은 인물들의 묘사와 슬로 하우스와 본부인 리젠트 피크의 대립관계를 보여준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납치극으로 시작된다.







자신이 왜 슬라우 하우스에 있는지 아느냐고 물은 것은 자신이 과거에 한 일을 상기시켜 위협하기 위해서였다. 혹여 오늘 밤 일이 잘못되면 램은 뒤처리를 개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나설 것이다.



파키스탄인 하산이 납치되고, 인터넷 동영상엔 하산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협박이 실시간 중계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눈치챈 전직 기자가 있었으니, 그는 공교롭게도 슬라우 하우스에서 감시를 하던 자였다.

납치극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 같은 기자를 감시하던 중 기자를 습격하는 범인을 잡으려다 요원이 총에 맞고 그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전개가 이어진다.



이 이야기의 2부 제목은 "교활한 여자들"이다.

리젠트 파크의 국장과 부국장은 모두 여자다.

수많은 스파이 이야기에서 국장들이 하는 짓을 봐왔다.

고결한 척하면서 뒷구멍으로 사부작사부작 일을 꾸미고 덮어버리는 자들.

남자들의 세계에서 있었던 일들이었는데 믹 헤런의 이야기에선 여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MI5의 부국장 다이애나 태버너. 일명 다애이나 다이로 부리는 자는 슬로우 하우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지만

귀신같은 잭슨 램에게 꼬리를 잡힌다.

이들의 엎치락뒤치락하는 머릿 싸움과 그 사이사이 내 뱉는 그들만의 유머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상대의 수를 다 읽고 있는 자와

상대의 수를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의 싸움.


결국 모든 일은 그들의 쑥덕거림 속에서 묻히고, 와해되고, 교묘하게 수정된다.

그리고 애먼 사람들만 골로가지..


스파이 소설이지만 사실 그 안에 우리가 있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하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해보려 하는 사람들.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다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기회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너무 한직에 머물러서 거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렸다가 사건 앞에서 몸 사리지 않는 사람들.

보통이고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그 안에 비범함을 감춘 사람들..


그래서 이 슬로 호시스 팀을 응원하게 된다.

그들을 배신하는 사람들에게 언젠가 그들만의 펀치를 맛보게 해줄 거라는 걸 알기에...




드라마도 재밌다고 해서 정주행했다.

드라마 보니 캐릭터들 성격이 더 확실하게 각인된다.

영국식 유머도.

게다가 배우들도 출중하다.

원작에 충실한 드라마라 재밌었고, 게리 올드먼의 잭슨 램은 오래 기억에 남을 거 같다.

빵꾸 난 양말을 신은 발을 책상에 올려두고 방귀를 뿡뿡 뀌는 지독한 영감쟁이를 완벽하게 보여주면서도 카리스마를 잃지 않은 배우는 게리 올드먼 뿐인가 하노라~



2편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시리즈 정주행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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