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사람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윤성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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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단편들을 모은 단편집 수상한 사람들이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새 옷을 입고 양장판으로 거듭난 단편집의 특징은 정말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특별한 일들을 담았다.

너무 소소한 거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름 돋게 만드는 무언가를 가진 게이고의 단편들은 앉은 자리에서 호로록~ 읽게 하는 재미가 있었다.

7편의 단편들은 정말 지루할 틈이 없이 읽히고, 읽고 나서 한 번 더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자고 있던 여자>

 

 

용돈벌이로 회사 동료에게 집을 빌려주던 가와시마.

어느 날 아침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렀더니 모르는 여자가 침대에 누워있다.

깨워서 내보내려 했지만 어제같이 집에 온 남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왜 내가 아가씨 섹스 상대를 알아봐야 하는 거죠?"

"당신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잖아요. 정 싫다면 여기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당신이 날 여기로 끌고 왔다고 소리칠 거예요."

 

 

이 낯선 여자를 자신의 아파트에 끌어들인 동료는 누구일까?

집을 빌려줬던 동료들에게 모두 물어봤지만 그들도 그녀를 알지 못하고, 동료들의 사진을 보여줬지만 그중에 자신이 만났던 남자는 없다는 그녀.

가와시마는 그 여자를 집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살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의 배포와 마주칠 때가 있다.

그러니 한 길 물속은 알아도 열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판정 콜을 다시 한번>

 

 

편의점에서 컵 라면을 사갔고 돌아온 집에 강도가 숨어 있었다.

이미 아랫동네 할머니네 집을 털다가 들켜서 도망쳐 온 놈이다.

근데 어딘지 낯이 익다.

그놈도 날 알아 본 모양이다.

이 두 사람의 인연인지 악연인지는 어떤 사정이 있을까?

 

 

어떤 상황 때문에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이 읽어 보면 좋을 이야기.

자신의 잘 못은 전혀 보지 못하고 오로지 남의 잘 못만을 헤아리다 인생을 날로 먹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면?

내 인생은 나의 것.

누군가로 인해 망쳤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나의 잘못.

왜?

인생은 내 결정과 판단의 기로에서 갈리는 것이니까.

 

 

 

 

<죽으면 일도 못 해>

 

 

출근 후 커피 한 잔이 가장 절실한 사람들에게 커피 자판기가 있는 휴게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심정은 어떨까?

게다가 그곳에 시체가 있었다면?

 

 

나는 회사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회사는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내가 내린 결론이다.

그러니 일은 적당히 제시간에 끝내세요.

그리고 웬만하면 쉬는 날은 좀 쉽시다!

 

 

일을 열심히 하는 거야 좋지만 거기에 정신이 팔려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끝장이라고.

 

 

 

 


 

 

 

 

<달콤해야 하는데>

 

 

아내를 사고로 잃고, 혼자 키운 딸마저 사고로 잃은 나는 두 번째 결혼은 혼인신고만 하고는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온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신부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들의 신혼여행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뜻하지 않은 사고 뒤에 누군가를 의심하는 건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기방어기재일까?

생각지도 않은 반전이 뇌리를 강타하는 달콤해야 하는데.

 

 

 

"상대방을 생각해서 한 행동을 상대방은 이해하지 못해 톱니바퀴가 거꾸로 돌고 마는 거지요. 그 톱니바퀴를 제자리로 돌리기란 어려워요. 왜냐하면 그러려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등대에서>

 

 

좋은 관계인 친구란 어떤 관계일까?

단편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등대에서.

 

 

처음엔 덩치 큰 그 친구의 뒤에 있는 것이 안전했다.

하지만 점점 자라면서 안전은 그늘이 됐다.

그리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하지만 그 여행조차도 혼자 가게 놔두지 않는 친구. 유스케.

그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여행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나는 중간지점에서 만난 유스케에게 등대지기를 소개해 준다.

 

 

어쨌든 나와 유스케의 '좋은 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과연 어떻게 이어질까?

예전과 같은 관계로?

아니면 전혀 다른 좋은 관계로?

생각할수록 등골이 오싹한 이야기.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

 

 

 

 

 

<결혼 보고>

 

 

 

어느 날 친구에게 편지가 온다.

아무도 모르게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결혼 보고 편지.

그러나 사진 속의 여자는 내 친구 노리코가 아니다!

노리코를 찾아 간 도모미는 노리코를 만나지 못하고, 이상한 이웃을 만나게 되는데...

 

 

"듣고 보면 단순한 사건이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뻔했어요"

 

 

오지라퍼 친구를 욕하지 마라!

가끔 그 오지라퍼가 대단한 건수를 올릴 수 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면 절대 알 수 없었던 살인사건.

세상에 완전 범죄란 없는 법이지!

 

 

<코스타리카의 비는 차갑다>

 

 

 

공포와 흥분과 긴장 때문에 불길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에 떠올랐다. 어쨌든 우리가 목숨을 건질 가능성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유키코는 여기서 살해되고 마는 것이다.

 

 

코스타리카의 치안이 안전하다고 생각한 일본인 부부는 희귀새를 찾아 국립 공원에 가지만

그곳에서 2인조 강도를 만난다.

우여곡절 끝에 목숨을 부지해서 호텔로 돌아오지만 그들은 결정적 단서를 발견하게 되는데... 수상한

 

 

세상에 안전한 곳은 없고, 믿을 사람도 없지만.

찾아보면 안전한 곳은 많고, 믿을 사람도 많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알게 된다.

정말 나의 이웃과 친구가 누구인지를...

 

 

 

추리소설의 대가 게이고의 단편이라 뭔가 사건사고가 난무할 거라 생각했지만

비교적 조용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단편들이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다 읽고 나서야 그 행간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되는 이야기 수상한 사람들.

제목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도 어쩌다 수상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어쩌다 살인자가 될 수 있고, 어쩌다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어쩌다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며 살게 될지도 모른다.

곁을 주지 않는 이웃이어도 내가 힘들 때 가장 큰 의지처가 될 수 있고, 미소 한 번 보내지 않는 동료라 해도 내가 어려울 때 가장 빠르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이야기들은 빠르게 읽히고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 짧은 이야기에도 넘치는 반전이 있어 읽는 시간 동안 즐거웠다.

일본에서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역시 게이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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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 신라공주와 페르시아왕자의 약속
이상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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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석은 벽화 속의 우리나라 사신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순간 가슴이 떨렸다. 천사백 년 전에 한반도에서 여기까지 우리의 선조들이 다녀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곳은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쓰인 소설이다.

방송국 다큐멘터리 PD인 안희석과 선배이자 역사학자인 현철의 이야기는 쿠쉬나메라는 책을 근거로 페르시아와 신라가 실크로드를 통해 왕래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신의 먼 조상일지도 모르는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는 희석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희석과 현철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숨겨진 역사를 살펴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과거의 이야기는 페르시아 멸망 직전 왕자 아비틴이 도망쳐 당나라를 통해 신라에 들어오고 신라의 따뜻한 환대 속에 신라공주 프라랑과 결혼하여 페르시아 제국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소설 속의 소설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아비틴이 처음 만난 신라의 화랑 죽지랑

당나라에서 만난 의상대사

신라에 와서 만나게 되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비중 있는 사랑 이야기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요석궁에서 만나게 되는 아비틴의 배필 프라랑 공주와 설총.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페리둔이 만난 혜초와 고선지.

이들의 등장은 역사의 기록속에서 페르시아와 관련있다고 보아지는 부분을 소설에 녹였냈기에 그 진위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두 사람의 사랑은 어찌 보면 정해진 슬픈 사랑 이야기였지만 프라랑의 긴 인내심과 기다림은 이 가을에 참으로 서럽게 느껴졌다.

 

희석은 우리의 역사를 세계사적 연결 속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을 한반도 안에만 가두는 우리의 식민지 사학이 원망스러웠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이다.

여러 가지 밝혀진 역사적 사실들로 이야기를 꾸려가서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지만 진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란의 신화를 적은 쿠쉬나메에 신라공주 프라랑의 이야기가 있는 거 보면 아주 없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는 없을 거 같다.

그동안 우리는 일제 식민지 사학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지 못했고, 미국의 문화에 심취해 인디언을 미개인으로 생각하고 중동인을 테러범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를 읽으며 이란에 대한서도 다각도로 고려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희석처럼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당나라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신라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역사는 시점을 어디에 두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소설이지만 이야기를 읽는 동안 역사의식이 고취되는 기분이었다.

아주 먼 시절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 발걸음을 남겼다.

한심한 학문에 빠져서 스스로를 이 한반도에 가둬둔 양반들과 강제로 36년의 시간 동안 한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바꾸려 했던 악랄한 식민사관조차도 진취적인 사람들의 발자취를 끊어내지 못했다.

 

우리가 알아내야 하는 이야기들이 세계 곳곳에 감춰져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너는 아직도 기록이 있어야 믿느냐? 기록이 없어도 진짜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역사학도라고 본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역사학자들이 주장하지만 중화사상에 물든 중국은 중국의 대표 시인 이태백을 페르시아에 뺏기고 싶지 않은 거지. 그것이 역사의 딜레마야."

 

 

아주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페르시아의 역사까지도 함께 담아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가 페르시아의 구전 동화라는 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고 그로 인해 많은 부분들이 왜곡되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것을 최대한 올바르게 밝혀내는 것이 후세 역사학자들이 해야 할 일 같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를 올바르게 알고자 하는 마음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가을에 읽은 가슴 아픈 사랑 얘기와 새로 알게 된 역사적 사실들이 마음을 설레게 했던 테헤란로를 걷는 신라공주.

조금 많은 오타가 옥에 티가 되었지만 그것을 눈 감게 해주는 신선한 이야기가 마음을 가득 채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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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사랑 웅진 세계그림책 219
맥 바넷 지음, 카슨 엘리스 그림, 김지은 옮김 / 웅진주니어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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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사랑'에 대한 정의를 보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시간이었다.

 

사랑이 뭐예요?

 

 

사랑이 뭔지를 물어보는 나에게 할머니는 직접 그 답을 찾으라고 한다.

'나'는 사랑이 뭔지 알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사랑의 정의를 듣는다.

하지만 저마다 알려주는 사랑의 정의는 다르다.

 

어부에겐 물고기가 사랑이고

고양이에겐 밤이 사랑이며

시인에겐 너무나 많은 사랑의 정의가 있어서 '나'는 그걸 들어 줄 시간이 없었다.

사랑은 다양했고, 그 다양함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돌아온 답은 항상 똑같았다.

 

 

네가 사랑을 어떻게 알겠니?

 




한때 사랑의 정의를 적은 글을 100개쯤 썼다.

100개쯤 정의를 내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사랑은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환상으로 아름다운 거라는걸.

사랑을 해본 사람들에게 사랑은 영원한 슬픔이거나 상처라는걸.

 

사랑사랑사랑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책을 읽고 다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책을 읽고 나도 몇 가지 사랑의 정의가 떠올랐다.

 

사랑은 초능력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대상을 위해 자신의 한계치를 넘는 행동을 해낸다.

가장 빛나는 초능력은 사랑하는 상대가 위험에 빠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솟아난다.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해서 결국 전부가 되는 것.

하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그 전부를 잃는 것 역시 사랑이다.

 

사랑사랑사랑에 정의된 여러 가지 사랑의 정의 중에서 어부의 사랑이 가장 마음에 남는데 그 이유는 바로 어부가 남긴 말 때문이다.

 

"물고기는 네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며 팔딱팔딱 헤엄치지.

네가 그 물고기를 손에 넣고 나서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깨닫는다면,

아마 너는 그 물고기에게 인사하고 바다로 돌려보낼 거야."

 

 

사랑이 뭔지를 깨달은 어부의 말이 꽤 인상적이다.

사랑은 숨 쉴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

가둬 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것이어야 한다.

가두고 자유를 거둬들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

 

'나'는 사랑의 정의를 위한 여행길에서 다양한 방식의 사랑을 알아간다.

그리고 정말 소중한 사랑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나'의 사랑의 여정은 성장의 이야기였고, 경험의 이야기였다.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간접 경험이 필요하지만 '사랑'만큼은 직접 경험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 가 지나가다 나에게 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다.

 

사랑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누구랑 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

 

그러니 너의 사랑의 정의를 찾는 걸 게을리 하지 말라고 대답해 주고 싶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의 정의를 가지고 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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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으로 빚은 집 - 1969 퓰리처상 수상작
N. 스콧 모머데이 지음, 이윤정 옮김 / 혜움이음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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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는 허리춤까지 벗은 채였고 팔과 어깨에 재와 검댕을 칠해놓았다.

아벨은 달리고 있었다. 여명이 비치는 겨울 하늘과 기다랗고 환한 골짜기를 배경으로 그는 아주 조그맣게, 혼자서, 거의 정지한 듯 보였다.

 

 

1969년 퓰리처상 수상작 여명으로 빚은 집.

서문부터 문장 속에 빠지고 말았다.

이 글들엔 숭고한 무언가가 스며있다.

광활한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지고 인간들은 종족을 구분할 필요도 없이 작은 점에 불과했다.

그런 광활한 대자연을 품고 사는 인디언들.

자신의 자식들뿐 아니라 7세대 이후의 미래 자손들까지를 생각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던 영적인 종족이 백인들의 총칼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 피를 이어 받은 아이들은 백인도 인디언도 아닌 채로 삶을 살아내야 했다.

저급한 그들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들의 말들은 '문명'이 아니라는 이유로 점점 사라져갔다.

 

아벨은 아버지를 모른다.

어머니는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프란치스코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아벨은 말 없는 소년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어른이 없었다. 두 문명 세계에서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전쟁은 그의 순수한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가 전쟁에서 돌아온 그의 나라는 백인의 문명 아래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희미해졌다.

자신을 말할 수 없는 아벨.

자신의 세상을 표현할 길 없는 아벨.

거대한 자연은 침묵했고, 거대 문명은 그들을 잡아먹었다.

 

인디언이 쓴 영문소설은 처음이다.

내가 아는 인디언은 서부영화 속에서 사람의 머릿 가죽을 벗기는 야만인들이었다.

중동의 모든 사람들이 테러범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처럼.

백인의 문명은 자신 들것 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하지 않는다.

남의 문명을 미개한 걸로 치부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미개인이라는 사실을 더 많이 깨달았다.

여명으로 빚은 집을 통해...

 

그는 변하길 원치 않았거나 아니면 변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

 

 

아벨은 탱크 앞에서 춤을 췄다.

백인의 형상으로 찾아온 뱀을 칼로 찔렀다.

조상들의 방식을 따랐을 뿐이었지만 문명의 법은 그걸 이해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전쟁의 트라우마를 지닌 채

백인들의 문명 속에서 백인처럼 살아내야 하는 인디오들의 삶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그들의 언어로 살아야 했던 조상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아벨이 살았던 시대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았던 세상은 같은 세상이었고

아벨처럼 우리도 우리의 모든 정체성을 잃고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아벨을 이해하려 했고, 도우려 했고, 그를 지키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은 그 사람들로 인해 상처가 아물게 되고, 마음이 따스해지게 마련이다.

 

그는 그들을 돕고 싶었다.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그는 그들이 그에게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에게 무엇을 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는 압도적으로 다가왔던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다.

작은 책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에 숨이 막힐 거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손끝에서 표현되는 삶들은 처절하게 슬프다.

그 슬픔은 책을 읽는 동안 점점이 커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먹먹해진다.

 

이것들, 떠나오기 전의 모든 것들을, 그는 온전하고 세세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없는 것은 최근의 과거로, 늘 갑작스럽고 뒤죽박죽인 시간이자 끔찍한 고요와 불일치로 가득한, 의미 없는 몇 날들과 몇 해였다.

 

 

두 세계에 발을 담그고, 두 문명을 이해하고 자란 사람의 시선은 단순한 듯 복잡하고 복잡한 듯 단순하다.

그리고 읽는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느리게 천천히 음미하며 읽게 되는 작품이다.

 

여명으로 빚은 집을 읽으며 우리는 동시에 두 가지 문명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스며들게 된다.

하나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이고 하나는 생소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우리를 경계에 서게 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질 수 있는 시간대에 있으므로...

 

아벨은 인디언이었다.

그는 인디언이었을 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그 다웠으며 가장 생명력이 있었다.

 

아벨이 자신을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은

저들의 저급한 언어로는 자신을 변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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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에코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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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님은 혼자 움직이시는 스타일인 것 같은데. 사립탐정처럼요. 자기가 존경하지도 않는 사람에게서 명령을 받아야 하는 직업이 아니라.

 

 

스릴러 시리즈 중에 유명한 해리 시리즈가 두 종류 있다.

북유럽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주는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그리고 영미 스릴러의 전설처럼 느껴지는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

 

 

해리 보슈를 이제야 만나게 되었다.

해리라는 이름은 고독을 달고 살아야 하는 이름일까?

북유럽 해리는 짐빔과 절친이고, 항상 주변인을 잃고, 나날이 고독해지는 해리다.

영미 해리는 줄담배를 피우고, 사건 중간에 로맨스를 흩뿌리기도 하지만 줄곧 외롭다.

이 두 해리는 경찰이지만 경찰 내에서 그들을 내치지 못해 안달 난 사람들이 많다.

 

 

해리 보슈는 베트남 참전 용사다.

경찰에 입문해서 승승장구하며 LA 경찰의 간판스타가 되었으나 '인형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사건에서

살인범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 사건으로 내사과는 그에게 고의성이 있다고 보고 그를 끌어내리려 했지만 워낙 인기 있는 형사이고, 해리 보슈의 이름으로 영화도 만들어졌기에 그는 할리우드 살인 전담반으로 좌천되었다.

그리고 일요일 당직을 서던 해리 보슈에게 살인사건 신고가 들어온다.

 

 

노숙자들이 자주 쉬었다 가는 저수지 근처의 굴에서 시체가 발견된다.

보통은 약쟁이의 죽음으로 약물 과다로 쉽게 해결될 사건이었지만 그날 담당이 하필 해리 보슈였고

보슈는 절대 무엇 하나도 쉽게 넘기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피해자가 베트남 참전 전우였다면 더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도 해리와 함께 베트남의 땅굴을 누비던 땅굴 쥐였다.

 

 

살인의 촉을 믿고 해리는 여기저기 자료를 요청하고 살해된 메도우스에 대한 수사를 착수한다.

주말 동안 그는 메도우스가 1년 전 온 도시를 떠들썩하게 만든 은행강도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사건을 담당한 FBI를 찾아가지만 FBI는 늘 그렇듯 그에게서 필요한 정보만 가로채고 그를 쫓아낸다.

그러기만 하면 다행이게?

보슈가 쓸데없는 월권행위를 한다고 내사과에 신고가 들어가는 바람에 지난번에 보슈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내사과 덤앤 더머가 이번에야말로 보슈를 해치우리라 작정을 하고 덤빈다.

그러면 다행이게?

보슈가 그러거나 말거나 보통은 그를 신임하고 그를 위해 바람막이가 되어 줄 만한 상관이 한 명쯤 있게 마련인데

보슈는 어째서인지 그 상관들 마저도 그를 쫓아내려고 안달이 나있다.

사면초가 보슈는 그럼에도 꿋꿋하게 담판을 짓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다.

이런 강단을 보았나!

 

 

 

이 남자 알아갈수록 묘한 매력이 있다.

보통은 이야기를 읽으며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지만 이 유명한 보슈는 이미 드라마가 나와있는 바람에

자연스레 드라마 주인공이 떠올라서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로 받은 돈으로 그는 절벽 위에 집을 산다.

배경은 끝내주지만 어딘지 위태위태해 보이는 보슈의 집은 보슈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흔적 없는 범인들을 메도우스라는 실마리 하나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해리는 FBI 여형사와 로맨스를 엮는다.

베트남 참전 용사였던 오빠의 죽음을 간직한 엘리노어 위시는 모두가 해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운데 그를 도와 사건을 추적해간다.

 

 

블랙 에코.

검은 메아리.

베트남에서 그들은 땅굴을 검은 메아리라고 불렀다.

 

 

베트남 참전 용사가 주인공이라니..

엄청나게 오래전에 쓰여진 시리즈라는 사실이 각인된다.

그때의 참전 용사들이 현재 거의 70~80대라는 걸 감안하면.

 

 

실내 흡연이 가능하고

공중전화가 대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전 이야기라는 느낌이 안 드는 것이 마이클 코넬리의 강점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반전.

 

 

이 반전의 묘미는 해리 보슈의 성격 때문에 더 오래도록 각인되는 거 같다.

그는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어떤 일 앞에서도.

담배, 와인, 음악

해리 보슈를 읽으며 흠뻑 취했던 것들이다.

보슈를 떠올리면 담배 연기가 허공에 떠있고 와인잔을 손에 쥐고 음악에 심취한 남자가 떠오른다.

형사보다는 작가 같은 느낌이다.

 

 

누구보다 불우한 환경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그는 누구나 쉽게 빠지는 길 대신 고독한 형사의 길에서 범인을 잡아내는 삶을 택했다.

그리고 그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시리즈 1편은 해리 보슈에 대해서 살짝만 알려준다.

그리고 앞으로 더 알아가게 될 보슈에 대한 갈망을 남긴다.

드라마의 보슈가 어떤지 모른다.

드라마를 보고 보슈를 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해리 보슈는 원작에서 더 진하게 빛나고 있으니...

 

 

 

사진 속에서 미소 짓고 있는 젊은이들은 지옥 속으로 떨어졌다가 돌아와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들은 땅굴 속으로 들어갈 때, 파란 세상에서 암흑 속으로 돌아간다고 말하곤 했다. 땅굴은 검은 메아리였다. 그 안에 있는 것이라곤 죽음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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