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참던 나날
리디아 유크나비치 지음, 임슬애 옮김 / 든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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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죽은 딸의 슬픔에서 솟아오르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당신은 나 같은 여자들을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그냥 몸을 던져 보는 것 말고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알지 못한다. 나는 수류탄 같은 사랑을 했던 여자, 삶이 자동차 사고의 연속 같았던 여자다. 나라는 여자아이와 내가 가진 여자아이를, 작은 인형 같은 딸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리디아의 글은 물 같다.

물처럼 흐르는 대로 길이 된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은 문체 속에서 헤매었다. 사실인지 꾸며진 것인지가 중요했었다.

이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이 이야기를 꾸몄다고 하기엔 너무나 적나라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한 쪽 다리가 짧은 엄마의 다리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던 리디아.

엄마 같은 언니에게 무한한 사랑을 느꼈던 리디아.

수영 선수였던 리디아.

아버지에게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딸이 된 리디아.

 

아름답지만 착한 필립과

말론 브란도 같은 데빈과

마지막 안식처인 앤드류

그 외의 무수한 스쳐간 인연들

솔직한 이야기가 때론 점점이 각인되는 때가 있다.

불편하지만 불편한 대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

리디아에게만 있는 물의 힘이다.

 

내 몸속 피의 강물을 따라 아버지의 지성이 흘렀다. 그때 내 안에 있는 두 명의 나는 전면전을 벌였다. 하나는 가족과 몸을 떠나기 위해서, 세상으로 가는 길을 닦아내기 위해서 구축했던 나였고, 또 하나는 만난 적 없고 존재하지는지도 몰랐던, 어쩌면 손가락 사이에서 웅크린 꿈처럼 숨어있던 나였다. 내 아버지의 딸이었다.

 

 

아버지의 성적 학대를 피해 일찍이 집을 나가 자신의 삶을 개척한 언니.

자신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몇 번의 자살을 선택했던 엄마.

엄마는 두 딸을 지켜주지 못했지만 멀리 도망갈 수 있게 도왔다.

리디아를 텍사스에 있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입학원서를 써준 사람은 엄마였으니까.

 

약에 취해 섹스에 취해 수영 선수의 꿈마저 날려 버린 청춘은 아이까지 잃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가슴속에 담긴 이야기들은 언젠가 글이 되기 위해 꾹꾹 눌러져 담겨 있었다.

그녀의 물속에.

 

아무리 부정해도

결국 리디아에겐 엄마와 아빠의 피가 흐른다.

건축가이자 예술가였던 아버지와 한때 글을 쓰고자 했던 엄마의 피가 리디아를 따라 흘렀다.

그래서 그녀는 물처럼 아무렇게나 흘렀지만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아 한없이 흐르고 있다.

 

되풀이되고, 두서없고, 난장판 같은 글은 사실 꽤 정교하고 논리적이고 흐름이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이 되면 의식의 흐름처럼 그녀의 글이 읽힌다.

언제나 아웃 사이더였던 그녀는 세상을, 삶을, 사람을, 사랑을 보는 관점이 물 같다.

모든 걸 안고 흐르는.

 

한 사람에게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게 사실이라면

리디아는 한 번의 생으로 여러겁의 생을 살아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 시킨 사람이다.

수영으로 몸의 근육을 단련시켰다면, 글로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킨 시켰다.

그래서 정신없이 읽고 나면 정신이 사나워지는 게 아니라 정돈이 된다. 정숙하게.

 

차로 돌아오는 길에 어찌나 웃었는지 둘 다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어찌나 웃었는지 옆구라가 아팠다.

우리가 웃은 웃음은, 마침내 자신의 뿌리에서 해방된 여자들의 웃음이었다.

 

아버지의 재를 뿌리고 돌아오는 길에 자매는 웃는다.

기억을 잃고 오랜 시간을 살다 간 아버지를 강에 뿌리 고야 자매는 웃을 수 있었다.

가해자는 기억을 잃었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없는 세상에서야 비로소 웃을 수 있다.

이 가족의 이야기가 절절하게 다가오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로를 보듬고 살았다는 이야기.

 

글을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자신의 치부를 이렇게도 거리낌 없이 까발리고도 아름답게 살 수 있구나.

그 자신감과 당당함 앞에서 사람들은 그녀를 응원할 뿐이다.

 

고통은

모두에게 늘 주어진다.

삶과 고통은 쌍둥이와 같으니까.

그 고통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거 같다.

소리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칠 거 같음을 뱉어 내라고 말한다.

소리 낼 수 없다면 글로 소리치라 말한다.

그것이 자신을 비워내는 길이므로.

그렇게 비워내야 살 수 있음으로.

 

숨을 참던 나날들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날들로 내 인생을 바꿔갈 수 있다.

무수히 남모르는사람들에게 덜어낸 그녀의 고통이 희석되어 그녀에겐 활기찬 삶으로.

누군가에겐 이겨낼 수 있는 힘으로.

그렇게 전달되리라 믿는다.

 

내 안에 숨어있는 나를 끄집어 내야 하는 시간인 거 같다.

이 가을은.

 

숨을 참던 나날들에서 숨을 쉬는 나날들로의 전진.

자신을 다 쏟아낸 사람의 자유를 느껴보고 싶다.

한 문장에 생명과 죽음을 함께 담아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한 몸에 담아내는 것도. 사랑과 고통을 모두 끌어안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물속에서, 내가 갖게 된 이 몸은 꼬리에 과거를 단 채 촉촉함 속으로 미끄러져 왔다. 뭐 어쩌겠나, 그 속에 희망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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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초
T. M. 로건 지음, 천화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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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에 대한 책임 없이 뭔가를 할 수 있는. 평생 한 번 있을 기회라는 거지.

 

세라는 대학 강사로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녀의 상사 러브록은 BBC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대학 내에서 가장 많은 연구비를 따내는 학자로서 명망이 자자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많은 여성들을 성희롱했으며 이제는 승진을 미끼로 세라에게 접근해오고 있다.

점점 참을 수 없는 수위의 성희롱 앞에서 세라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꾹꾹 참아내기 신공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승진의 고삐를 쥐고 있는 러브록은 그녀의 아이디어로 연구비 프로젝트까지 차지하고 말았다.

게다가 승진에서 탈락할 거라 경고하고 대학 내 비용 감축으로 인해 인원 감축이 있을 거라 말하며 그녀의 이름이 맨 위에 있다고 협박까지 하며 잠자리를 요구한다.

 

확~ 까발려서 러브록이 어떠한 인간인지 만천하에 알리고 싶지만 그랬다가 번번이 찍혀서 학계에서 모습을 감춘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대학은 늘 러브록의 편을 들었고, 결국 대항한 여자들은 자신들의 일자리와 명예를 잃고 사라져가는 수모를 겪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

그 찰나에 세라가 우연히 쫓기던 아이를 도망치게 도와준 일이 생기고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남자가 세라 앞에 나타난다.

 

내 고향, 러시아에서 나는 발세브니크라고도 불렸어요. 마술사. 난 뭔가를 사라지게 할 수 있거든.

 

72시간 내에

한 사람의 이름을 대면 그 사람을 사라지게 해주겠다.

이 솔깃한 제안에 세라의 머릿속에 뱅뱅거리는 이름은 하나였다.

 

뭔가 강단 있어 보이지만 참 우유부단한 세라 때문에

징글징글한 러브록의 희롱 때문에 속에서 천 불이 나는 이야기 한 판이었다.

밥줄이 걸린 우유부단함 앞에서

아무런 도움 없이, 아무런 힘도 없이, 홀로 모든 상황을 헤쳐나가야 하는 세라를 보며 그녀의 무력감에 나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한 달, 1년, 얼마나 그랬는지가 중요한가요? 러브록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가 어떤 인간인지가 중요하죠. 러브록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대학도 마찬가지고. 절대 먼저 변하지 않을 거라고요.

 

철옹성 같은 러브록을 무너뜨리기 위해 세라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당하기에는 그녀가 지켜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세라는 어떤 결정을 할까?

그리고 그 결정은 어떤 파장을 몰고 올까?

 

뭐. 읽어가면서 대충 예상을 했지만 그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 때문에.

그리고 더 당황스럽게 흘러가는 상황 때문에 정말이지 끝을 볼 때 가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조마조마 함의 힘을 가진 책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 일을 지키기 위해 러브록과 잘 수 있을까? 내 아이들을 위해서? 대출금을 계속 갚아나가려면?

 

밥줄이 걸리고, 가족이 걸리면 우유부단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교묘히 파고들어 자신의 힘을 그런 더러운 일에 쏟아붓는 자들이 언제나 득세하는 세상은 언제쯤 사라질까?

현실이 반영된 이 이야기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하니 분노 게이지가 상승한다.

현실에선 세라처럼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많은 여성들의 두려움과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옳지 않은 일을 서로 감싸주고 덮어주는 더러운 인맥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여자들이 밖에서 그런 대접을 받는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당신들도 손대지 못할 높은 인맥들 때문에 당신의 여자들이 수모를 당하고 수치심에 밤 잠을 못 자도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느냐고.

 

무엇이든

내 일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

결국. 그 어떤 책임도 내가 질 수밖에 없으니까.

 

29초.

그 짧은 통화에서 내가 얻은 건 그것이다.

결국 내 인생은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나는 내 인생을 강제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

그것이 무엇이 되더라도 말이다.

솟아 날 구멍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할당되는 삶의 선물이다.

단. 그것은 싸울 태세가 된 사람에게만 열리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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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천사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4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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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양, 저를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런 제안을 제시하는 제가 나쁜 놈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베일 양에게 살아 있는 동안 매년 5천 파운드를 지불할 계획입니다. 2만 파운드를 우선 지급하고, 또 베일 양이 결혼하는 순간부터 남편 문제로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게 확실히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마치 아침 막장 드라마나 할리퀸 시리즈의 한 대목을 읽는 거 같다.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4번째 이야기는 공포의 천사다.

공포와 천사가 합쳐진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

 

리디아는 삽화 그리는 일을 하며 나름 독립적으로 살고 있지만 뜻하지 않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을 떠안게 되면서 빚독촉에 시달린다.

죽을 때까지 일해도 다 갚지 못할 거 같은 빚을 진 리디아에게 핑크빛 앞날은 없어 보였다.

누군가 그녀를 납치하기 전까지는.

 

납치당한 그녀를 구해낸 사람은 변호사 잭 글로버.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살인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메레디스를 위해 리디아를 찾아냈다.

메레디스가 서른 살을 넘길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모든 재산이 사촌인 진 브리거랜드에게 상속될 처지에 있다.

메레디스는 바로 그 진 브리거랜드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진의 목격자 진술로 살인 혐의를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아름다운 얼굴과 기품 있는 모습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빼앗은 진 브리거랜드.

그녀의 본모습을 알아채고 그녀를 의심하는 사람은 잭 글로버 한 사람뿐이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리디아에게 결혼을 부탁하는 잭.

이 결혼으로 인해 모든 빚을 탕감하고 막대한 재산까지 손에 쥐게 되는 리디아.

그들의 음모(?)를 막으려 온갖 악행을 일삼는 진 브리거랜드.

 

마치 휴양지에서 근심 걱정 없이 휴가를 즐기는 와중에 종종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 사건 사고를 접하는 기분이랄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단연 진 브리거랜드이다.

월리스가 만들어낸 팜 파탈의 원조랄까?

아름다운 모습으로 많은 이들을 속이며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여자.

교묘하게 남들을 설득해서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종하는 여자.

어떤 위험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여자.

미워하고 싶지만 미워하지 못하게 선수 치는 여자.

모든 걸 완벽하게 계산해서 움직이는 여자.

 

이 완벽할 거 같은 여자의 속내를 간파한 남자 잭 글로버.

그는 친구를 지키고자 했지만 결국 친구의 재산만 지키게 되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꿩 먹고 알 먹은 사람은 잭뿐인 거 같다.

그가 진 브리거랜드가 쳐 놓은 그물을 어떻게 쳐내는지 알고 나면 빵 터지게 된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월리스의 기상천외한 소재에 있다.

물론 지금에서야 읽는 월리스의 이야기가 현대인들에게 얼마큼의 감동을 주는지 알 수는 없으나

만약 내가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에 태어나 월리스의 이야기를 읽었다면 감탄에 감탄을 금하지 못할 거 같다.

지금 읽어도 그가 택한 소재나 캐릭터의 독특함은 엄지 척~ 이 모자랄 만큼 혁신적이다.

 

정통 미스터리 추리물이라기보다는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 딱! 알맞은 느낌의 미스터리 추리물이다.

그가 다방면으로 글을 썼다는 것에 기인하면 그의 추리물들이 모두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할만한 것들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마지막에서 진의 선택은 지극히 그녀 다웠다.

그리고 500만 프랑의 돈 가방이 유유히 사라진 것 또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는 월리스식 교훈인 거 같다.

마치 연극 무대에 올려진 연극 한 편을 눈으로 읽는 느낌이었다.

 

월리스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눈에 선하다.

주인공이지만 주인공 자리를 빼앗긴 리디아는 진의 그늘에 가려 매력을 잃고 말았지만

그녀 때문에 진이 더 돋보였으니 그녀의 역할을 다했다 할밖에.

어쨌든 이 이야기는 묘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난 미스터리 추리물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가장 알맞은 포지션을 택한 이야기.

공포의 천사!

고전에서 현대물로 넘어오는 그 징검다리에 가장 걸맞은 이야기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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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어머니의 날 1 타우누스 시리즈 9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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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게 악은 사람들의 눈에 뜨지 않게 나타나는 법이죠.



오랜만에 만난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나이가 좀 더 들었다.

여덟 번째 이야기 여우가 잠든 숲이 보덴슈타인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춰낸 거라면

이번 아홉 번째 이야기는 피아가 알 수 없었던 가족의 비밀이 담겨 있다.

신문배달부가 발견한 한 노인의 죽음이 자연사에서 연쇄살인범의 흔적으로 뒤바뀐다.

견사에 갇혀 있던 노인의 개가 파헤쳐 놓은 건 사람의 시체가 묻혀 있던 곳이다.

시립화된 랩핑된 시체들이 발견되고 그저 평범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사건이 살인사건으로 변질되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자행되어 온 연쇄살인범의 소행으로.

하나의 사건을 주축으로 또 하나의 이야기를 숨겨 두는 노이하우스는 이번에도 그렇게 사건과 별 관계없을 거 같았던 사람이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서는 트릭을 보여준다.

이번엔 등장인물이 꽤 많다. 그만큼 용의자가 많단 뜻이다.

노인이 죽은 저택은 전쟁 때엔 수녀원이었고, 그곳에서 전쟁고아들이 키워졌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 장소를 사들인 라이펜라트 부부는 그곳에서 보육원에서도 두 손든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웠다.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리타 라이펜라트와는 달리 남편 테드는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그곳에 살았던 입양아들을 면담하면서 감춰졌던 리타의 두 얼굴을 만나게 된다.

어머니의 날에 자신이 책임졌던 입양아들을 불러 모아 파티를 즐겼던 리타는 그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았을 때 무지막지한 체벌을 가했다.

욕조에 처박고, 아이스박스에 가두고, 우물에 가두고, 랩으로 싸두는 벌들은 연쇄살인범의 흔적이 되었다.

오래전 실종자 명단과 일치하는 시체들이 나오고, 그들과 같은 수법으로 죽은 여자들의 시체가 스무 명이 넘는다.

모두 어머니의 날 전날에 실종된 여자들이었다.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는 언제나 사회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사건의 본질은 늘 사회 문제의 민낯을 드러나게 한다.

그래서 타우누스 시리즈를 읽으며 나는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다는 걸 느낀다.

미국 범죄소설이 범인이나 형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타우누스 시리즈는 끔찍한 범죄를 해결하는 상황에서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이 잔혹한 어머니의 날의 연쇄 살인범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낀 불안감이 한 발 한 발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더욱 강해졌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은 그냥 느낌이었다.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어렴풋한 느낌.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불안한 느낌은 이 집의 과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피아의 사건에 대한 직감은 늘 적중한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직감을 늘 무시하려는 엥엘과장과 사사건건 부딪힌다.

이번에도 정치놀음에 능한 엥엘과장은 죽은 노인을 범인으로 정하고 사건을 종결하려 한다.

난 산더 형사가 훌륭한 경찰이라고 생각해요.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선악을 구별하는 감각도 탁월하고...



동생의 연인이자 상사인 엥엘과 늘 대립관계에 있던 피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말이 엥엘의 입에서 나왔을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용의자의 범위가 좁혀지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클라스의 정신감정을 맡았던 사람이 피아의 여동생 킴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자기중심적이고, 분노조절이 안되며, 폭력을 휘두르고 입양아들 중에서 가장 잔인했던 클라스는 오래전 노라라는 또래 여자아이를 죽인 혐의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처와 변호사와 심리 상담사를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 나서 킴이 사라진다.

나는 그들의 공포를 느낀다. 그 공포는 차 안을 가득 메우고 내 살갗과 머리카락에 들러붙는다. 나는 그것의 냄새를 맡고 맛볼 수 있다. 그리고 황홀함에 취한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중심으로 수사가 이루어지는 과정 중간중간 범인의 속내가 나온다.

어딘가 숨어 있지만 알 수 없는 범인의 마음은 수사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낸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마음은 자식을 버린 어미에게 벌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커간다.

한 번의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을 불러왔다.

뭐든 처음이 어려운 법이니까.

버림받고 학대당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슬픔과 고통을 잊지 못한다.

그럼에도 양부모가 되어 주었던 그들과의 끈을 놓지 못한다.

그 뿌리라도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그들의 심리를 자기 편할 대로 농락한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애쓰는 형사들과 그들의 눈을 피해 새로운 살인을 계획하는 범인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버려진 아이와 비밀을 간직한 어른은 마지막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 직전이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과연 그들을 살려 낼 수 있을까?

이번 이야기는 전작에 비해 번역이 매끄러워서 예전의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가급적이면 시리즈의 번역은 한 사람이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왜냐하면 캐릭터의 이미지가 아주 미묘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작 여우가 잠든 숲은 읽는 내내 생소한 느낌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죠.

예를 들면 파트너와의 문제, 사회적 궁핍, 정신적으로 감당이 안 되는 경우도 있고요. 아이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경우가 대다수죠. 과거에는 집안의 압박이 컸습니다. 임신한 미혼 여성들은 부모에 의해 강제로 보육원에서 출산하고 아이를 입양 보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들.

그 사각지대에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운 어른들...

늘 그렇지만 읽고 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게 노이하우스의 매력이다.

재밌는 건 용의자들로 지목된 사람들 중에 항상 범인이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숨겨진 비밀들이 감정을 조여오는 느낌이 이 시리즈의 묘미다.

그 모든 묘미들을 한곳에 몰아넣은 것이 바로 이 잔혹한 어머니의 날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문제들을 다룬 노이하우스 매력의 극치!

잔혹한 어머니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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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 조금 덜 젊은 이가 조금 더 젊은 이에게 전하는 사연
성신제 지음 / 드림팟네트웍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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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정한 '잘남'과 '못남'의 기준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마음 속으로 무시할 뿐, 보듬어 주진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편한 글이 읽고 싶어진다.

몰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스며드는 그런 글들.

 

 

70대 덜 젊은이가 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들이 자근자근 비처럼 내린다.

누구나 잘 나갈 때가 있다. 인생에서.

그리고 인생은 늘 생각지도 않은 굴곡이란 복병을 숨겨 놓는다.

그것이 경제적 어려움이던, 건강이던, 인간관계이던 누구나 그 복병을 무사통과하는 자는 없다.

 

 

저자 성신제는 경제와 건강의 복병을 만났다.

18번의 수술과 바닥까지 내딛은 상황 속에서 묵묵히 걸었다.

포기하지 않음이 그가 가진 용기였다.

 

 

이 에세이가 아주 잘 쓰인 에세이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최근에 아주 잘 쓰인 에세이들을 많이 읽어서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프로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아마추어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좋은 글은 멋지게 포장된 글도 아니요

화려한 문체로 쓰여진 글도 아니다.

소소한 글 속에 담긴 글쓴이의 진심이 느껴지는 글이 정말 좋은 글이다.

 

 

이 작은 책엔 저자의 이야기와 저자가 만나 이야기를 나눈 더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담담한 삶의 이야기들이 공감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

 

 

 

혼자 먼저 가서 좋을 것 하나도 없다.

함께 가야 좋은 것이다.

 

 

보조를 맞춰 걷는다는 건 마음이 맞는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의 걸음에 발을 맞추는 엄마의 걸음엔 질문이 없다.

나이 든 엄마의 걸음에 발을 맞추는 자식의 걸음엔 질문이 따른다.

"더 천천히 갈까요?"

 

 

말없이 발맞추어 걸으면 되는 것을.

내 발걸음에 발을 맞춰 주었던 엄마처럼.

 

 

글을 읽으며 많은 부분에서 놓치고 살고 있던 것들을 발견한다.

그 발견이 이 책의 가치다.

어떤 글은 굉장한 필력으로 사람을 압도하지만

어떤 글은 잔잔함으로 사람에게 스민다.

 

 

나는 압도하는 글보다 스미는 글이 좋다.

 

 

70생을 살아낸 어른의 이야기엔 삶을 살아낸 지혜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읽는 사람의 몫이다.

 

우리 모두 내가 먼저 제대로 해야 할 일을 하지도 않고서, 받을 것만 생각하며 투덜대고 상대방을 비난할 때가 많은 것 같다.

 

반성하게 하고

깨닫게 하고

이해하게 하는 글이었다.

 

 

아빠가 멀리서 편지 한 장 보내주신 거 같다.

내가 지금껏 살아 보니 인생이란 게 이런 거 같더라... 는.

 

 

오늘,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한 발짝만 내디뎌 보자.

어느 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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