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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김기덕 감독, 조재현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0. 시작 - 김기덕의 말 -
<<김기덕 감독, <뫼비우스> 작의(作意)>>
‘가족은 무엇인가
욕망은 무엇인가
성기는 무엇인가
가족 욕망 성기는 애초에 하나일 것이다
내가 아버지고 어머니가 나고 어머니가 아버지다
애초 인간은 욕망으로 태어나고
욕망으로 나를 복제한다
그렇게 우린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로 연결된 것이고
결국 내가 나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사랑한다.’
-네이버 영화에서-
1. 나는 왜 김기덕을 욕망하는가.
김기덕을 사랑하기 시작했던 그 아름다운 순간부터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어린 나이에 - 몇 살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 양동근이 출연한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불명]을 보게 되었다. 그 영화를 찾아본 이유는 당시에 양동근에 빠졌기 때문이다. [수취인불명]은 처음에는 재미없는 작품이었다. 양동근이 양공주 밑에서 태어나 혼혈인 연기하는 부분만을 띄엄띄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대본을 읽으면서 한 번 집에서 혼자 연기를 해보자 하는 생각에 대본 사이트를 찾았다. 나는 [수취인불명]의 각본 안에서 양동근의 엄마인 양공주 역할과 양동근이 맡았던 소년 역할을 시도했다. 그 때 나는 무척 서투르게 연기를 했는데 이상하게 그녀와 그녀의 아들 연기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안에서부터 깊은 울음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나는 김기덕의 작품 안에서 인간을 울리는 힘을 발견하였다.
사실 김기덕의 작품을 논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냉엄한 위치에서 바라본다면 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는 내가 긍정하는 인간관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이 초기 몇몇 작품들과 가히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나쁜 남자]에서 욕을 먹은 것처럼 그의 작품 안의 여성들은 전형적인 피해자들이다. 그것도 그냥 피해자들이 아니라 가해자들인 남성들에게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도 빠진 것처럼 군다. 그리고 김기덕 감독은 얼빠진 그녀들에게서 구원을 받고자 품 안으로 철없는 강아지처럼 끼어드는 남성들을 그려내곤 했다. 여성을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보는 그 시선에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이 불쾌함을 느끼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나쁜 남자]를 보는데 뒤에서 영화를 보던 두 여학생들이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더러워."라는 말로 묘사하더라. 사실 그들의 반응이야말로 정상적일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이 의도를 했든 안 했든 여성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남자와 같다. 아마 수많은 여성들, 심지어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김기덕 감독과 [나쁜 남자]의 양아치 건달 남자주인공을 큰 차이 없는 인간 군상으로 여겼을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인간은 재미있게도 모순적인 존재이다. 나에게도 두 얼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미워하는 존재를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하는 존재를 미워할 수 있다. 한 남자의 투박한 얼굴과 소인배적 근성을 혐오하는 일과 그가 보여주는 예술혼에 열광하는 일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절제하게 발생하지 않는다. 나는 마치 연애를 하는 여자와 같다. 사랑에 빠졌지만 우리 모두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자신의 몸을 인당수에 빠트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는 이 남자와의 만남을 지속할지 아닐지 고려하기 위해 저울을 준비한다. 이 저울에는 기준이 있다. 이 남자와 있으면 좋은 게 더 무거운지 나쁜 게 더 무거운지가 관건이다. 나에게 김기덕은 이 저울에서 좋은 쪽이 나쁜 쪽보다 훨씬 더 무거운 남자이다. 김기덕의 작품들은 나에게 새로운 일정과 장소를 제공하는 김기덕과의 데이트나 마찬가지이다. 그는 불친절하고 날 것 위주이며 서툰 욕망을 제시하지만 언제나 솔직한 남자이다.
사랑에 빠진 여자답게 그라는 남자의 매력을 좀 더 자랑해보고 싶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 더 많다. 그는 아름다운 짐승이다. 대한민국의 어떠한 영상 예술가들 중에서도 뮤즈 여신들의 옷 자락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이미 엇비슷한 유형으로 범람하는 대한민국산 영화들 속에서도 자신만의 얼굴을 잃지 않은 개성남이다. 김기덕만이 갖고 있는 정적인 배경들과 인물들의 충격적인 행동들은 많지 않은 대사들 속에서 아우라를 빛낸다. 그는 언어와 논리로 설명하고 재고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맞지 않는 옷임을 본인도 잘 아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코드이자 매개체인 언어를 배격한다는 것에서부터 그가 얼마나 인간이 부리는 도구를 신뢰하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심장을 꿰뚫기 위해 영상으로 도전한다. 그는 인간이 아직 자연과 분리되기 이전의 에덴동산에 살았던 아담처럼 군다. 그에게서 우리가 원시성과 신화적 성격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점에 근거한다고 본다.
김기덕 감독이 우리의 눈에는 유럽적이며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에 근거한 사랑을 받는다는 지적은 그렇기에 더 의미가 있다. 그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의 정서와는 멀어 보이는 유럽남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유럽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동양인의 면모를 유럽인들에게 팔아먹기 좋은 형태로 내놓기 때문인 것일까?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흥미롭고 가치 있는 지적이라 생각하지만 그 지적은 내 생각에 김기덕의 아우라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나의 남자는 그렇게 매력 없는 남자가 아니거든!
그러나 이는 사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쉬운 문제일 수도 있다. 김기덕 감독이 예술의 방식으로 선택하는 방식은 인간의 치부와 욕망에 대해 우리가 즐겨 쓰는 자제하고 돌려말하는 방식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밑바닥을 긍정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니다. 예로부터 말 잘 하는 사람들을 사기꾼으로 생각했던 동양의 문화가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 아니다. 말 하나도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 당연했던 우리 사상 속에서 우리가 제정신이 박혔다면 절대 입 밖으로도 꺼내지 않을 구질구질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으니, 원! 김기덕 감독은 마치 미국 교포 출신이라서 성생활에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겉만 한국인처럼 생긴 여학생이나 똑같은 꼴이다. 한국인들은 그 여학생에게 대놓고 감히 뭐라 말은 못하지만 뒤에서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대놓고 그러한 말들을 일삼는지 입방아를 찧어대기 마련이다. 다만 그 여학생은 자신의 일상 언어로 그것을 표현할 뿐이지 김기덕 감독은 예술언어로 표현한다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김기덕이 또 재미있는 것이 그렇게 솔직하게 자기 하고 싶은 말들을 풀어놓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뱉어진 말들의 향방은 또 묘하게 동양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불교적 감수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죄의 사함과 죽음, 징벌, 욕망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에서 발생한 한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초월시키는 것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절대 그러한 한들이 악귀처럼 이승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영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구원해주고 싶어 하는 선한 마음의 창조주이다. 아마 이는 자신의 마음속의 번뇌를 승화시키고자 하는 한에서 온 것일 터이지만 말이다. 자기 자신의 죄를 이고 손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한의 승화 혹은 한의 초탈은 뫼비우스에서도 죽음과 탈속으로 또 한 번 드러나는 바이다.
내가 김기덕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의 철학적 고민과 치열한 질문들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러한 작품들에 매료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김기덕 감독이 뫼비우스로 제시하고 싶었던 질문은 0에서 감독 본인이 밝힌 글, 그대로이다. 그는 대로변에 SEX를 써놓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성性이 음지의 늪지대와 같은 존재인데도 그는 그에 관해 큰 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성욕은 음지에서 그림자를 먹고 사는 욕망인가? 성기의 자극과 우리의 이성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성기의 욕망에서 우리가 정말 자유로운가? 아니다. 우리는 성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아마 자기부정에 가까울 것이라 본다. 성욕이 이미 다른 식으로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는 성기에서 오는 그 뜨끈뜨끈한 자극이 우리에게 수많은 상상과 부정하고 싶은 더러운 짐승의 욕망들을 소환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싶어 한다. 적어도 부정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그에 대해 침묵으로 다스린다. 나는 음담패설이 강력한 유머라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데, 그 이유는 침묵으로 여겨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 그 정도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그러나 음담패설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색을 하고 분명히 질문한다. 배우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는 것, 그것도 자기 아내의 젊었을 적 모습과 상당히 닮은 동네 슈퍼마켓 아가씨와의 섹스. 혹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지는 몰라도 커다란 가슴을 부끄럽지도 않게 보이는 아가씨와의 섹스. 집단 윤간, 아버지의 여자와의 섹스.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 가족에게 느끼는 성욕. 그리고 그러한 상상들과 욕망들에서 오는 죄책감까지 김기덕은 하나하나 집어내며 묻는다. 우리가 민망해하고 숨기고자 하는 것들을 그는 면전에서 대놓고 깐다.
왜, 우리가 깨끗하고 깔끔하고 이성적인 짐승이라 그러한 성욕은 없고 더러운 상상들은 해본 적 없다고 부정하는가? 감히 부정하지 말라. 방금 내가 열거한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상상해 본 적조차 없다면 포르노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수요가 많다고 알려진 근친상간 포르노물들 역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김기덕이 위대한 이유, 내가 김기덕을 사랑하는 이유, 김기덕을 열망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김기덕은 우리가 음지로 몬 것들, 말하면 안 된다고 딱지 붙인 모든 것들에 반기를 들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입에 붙여진 청 테이프를 뗀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용감하고 그만큼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마주한 자이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그러니까 김기덕인 것이다.
2. 김기덕은 남자로서 여자를 어떻게 욕망하는가
사랑, 사랑은 애증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김기덕을 어떻게 내가 사랑만 할 수 있을까? 김기덕이 남성으로서 갖는 욕망은 남성의 사랑의 대상인 여성으로서 필연적이게도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김기덕 감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돌을 던질 때 나는 그 돌들을 유심히 보았다. 분명 날카로운 지적들이 몇 있다. 공감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 특히 페미니스트들이 하는 지적은 그대로 옳지 않은 경우가 있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김기덕은 여성을 소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성을 파괴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여성을 괴롭히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는 연인의 마음을 시험하는 사람처럼 구는 것에 가까울 뿐이다. 내가 어쩌면 관대한 평을 내리는 지도 모른다. 이것은 인정하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원래 사람은 자신이 애정을 갖는 대상에게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가 힘든 것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과한 애정도, 과한 미움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만 그래도 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에 나오는 남성들은 (우리 그냥 여기서 앞으로 김기덕 감독 작품 안에서의 성별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가 이성애자들임을 상정하자, 뫼비우스에서 성적 소수자들이 나오는 경우는 없다고 본다) 섹스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좌절하는 보통의 우리 주변 남성들이다. 남성들이 거세당하는 것에 얼마나 큰 공포심을 갖고 있는지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섹스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기본적으로 섹스는 인류 모두에게 중요한 행위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나는 여성들보다는 남성들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남성이 느낄 수 있는 쾌락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남성 인물들이 차고 흐른다. 여성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남성을 안음으로써 쾌락을 얻으려는 감옥 인물, 끝없이 검색하면서 계속 정보를 얻어 아들을 쾌락 없는 세상에서 구제해주려는 아버지, 돌로 상처내서 쾌락을 느끼는 거 보면 마음이 짠해져서 잔인하다는 생각보다는 실소가 먼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섹스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그러한 의미로 대상이다. 남성이 주체로 상정되는 순간 여성은 객체이다. 여성은 남성과 분명 생물학적으로 다른 구조이다. 슈퍼마켓의 젊은 아가씨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묘하다. 그녀의 옷은 하얀 가슴과 살결, 매끈한 다리를 부각시킨다. 카메라는 회피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젊은 아가씨 역할을 한 배우 이은우의 다리 사이로 보이는 하얀 팬티는 여과 없이 드러난다. 김기덕이 보는 여성은 현대 남성들의 시선에 존재하는 보통의 여성상이다. 그녀들은 모델이 아니고, 그냥 평범한 주변의 여성인데 문제는 일상의 순간에서 그들이 자신의 여성성을 계속 섹스어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섹스어필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들이 스스로 노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시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시선의 대상에 존재하는 여성은 남성들에게 미지의 존재이며 파악되지 않는 신기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성적인 측면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여성과 남성이 다른 이유는 신체적인 측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갖고 있을 인격이라는 측면은 그렇기에 뒷자리로 밀려난다. 여성이 남성에게 줄 수 있는 신체적인 쾌락이야말로 남성들이 강렬하고 짧은 시선으로 포착하고자 하는 무엇이다. 그러한 지점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구원인데 문제는 시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뫼비우스에 나오는 여성들 역시 시선의 대상,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그녀들 본인은 상황 속에서 욕망의 주체로 그려진다기보다는 상대방 남성이 갖고 있는 욕망에 반응하는 유기물들로 그려진다. 남성의 바람이라는 욕망에 복수로 반응하고, 아들의 성욕에 해소로서 반응하는 것, 자신을 보고 흥분하지 않는 남성에 대해 좌절하고 자신을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남자에게 성욕 해소를 제공하는 것이 그러하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성욕은 우리와 다르게 존재하는 것 같다. 우리가 만약 대상을 존중하지 못하고 영원한 객체로 만드는 것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성욕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대상을 객체로 남겨두는 것을 폭력이 아닐까? 우리는 이에 대해 우리의 머리가 성욕을 조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 이는 당연히 맞는 말이다. 정당한 주장이며 합리적인 대안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비록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지언즉 적어도 머릿속에 떠도는 순간의 욕망마저 차단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들이 어머니와 하는 상상을 몽정으로 꾼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서 그렇게 쉽게 탈출할 수는 없다.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강박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욕망을 가진다는 것, 그것에서부터 우리는 이미 죄인이다. 우리의 죄를 스스로가 알고 있다. 만약 신자라면 하나님도 알고 있는 것이다. 직접 행동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죄책감이 생긴다. 뫼비우스에서 아들과 어머니가 유사성행위를 한 이후 오열하는 장면에서 나는 결코 놀라지 않았다. 욕망을 풀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 이는 동물로서 당연하다. 해소되지 않은 욕구불만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면 뫼비우스의 아버지가 선택한 자살도 어떻게 보면 꽤 괜찮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을 자살 권장의 문장으로 읽는다면 안 됩니다, 정말) 우리의 욕망은 무조건 추잡하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 속에 허락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대상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들 속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로 두기 마련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이기심과 유치함은 추잡하다. 아버지가 권태와 욕망에서 도망치지 못해 젊은 여자와 바람피운 것을 보자. 우리는 자제하지 못하는 욕망들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이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갈구는 그들의 육체적 쾌락에 대한 갈증과 같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욕망은 사랑이 아니다. 즉 세련되고 문명화된 인간의 입장에서 정제되고 아름답진 않은 것이다. 남성들 중 잔인한 자들은 욕망에 대해 원시인과 같아서 여자를 마치 음식 먹듯 돌려 먹는 걸 즐겁게 행한다. 그들은 더 나아가 자신들의 부하 남성에게 강간의식에 참여할 것을 강요한다. 뫼비우스에서 그러한 짓을 행한 욕망의 “주체”는 결국 거세라는 징벌을 당한다.
거세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분명한 주제의식이다. 예로부터 성기를 잘라버린다는 것은 인간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성기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특히 성욕이 여성보다 많다고 알려진 남성의 성기를 떼버리는 것은 욕망에 대한 징벌인 것이다. 감히 더러운 생각을 품었다는 것에 대한 강박적 복수이다. 바람피운 남편의 성기를 거세하는 것에 실패한 아내는 자위 멀쩡히 하며 남자 구실 제대로 잘 하는 아들의 성기를 잘라버린다. 아들은 아버지와 남자들의 대리로서 배신당한 여성인 어머니에게 의해 벌을 받았다. 그는 그 벌로 인해 카인처럼 경멸당한다. 다른 남성들은 거세당한 아들을 비웃지만, 그들 역시 성기가 다리 사이로 달려 있다는 점 때문에 똑같이 거세라는 징벌의 대상자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결국 끔찍한 윤간을 이끈 욕망의 주체는 거세로서 응징을 당하게 되는데, 그 강간범이나 아들이나 재미있는 점은 거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쾌락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즉 남성들의 욕망은 사실 바로 “성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게 반전 요소이자 아이러니하고 동시에 희극적이며 해학적인 지점이다. 이것이야말로 김기덕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뫼비우스의 띠이다. 애초에 성기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는 그저 형식과 관습의 차원인 것이다. 종족 번식의 훌륭한 예시로서 존재하는 것이랄까? 남성의 성기에서 나온 정자가 여성의 질을 통해 난자와 만나 착상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성기를 잘려서 이제 여자가 필요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 여전히 여성을 간절히 필요로 한다. 이들은 여자라는 대상이 없으면 당최 온전한 즐거움을 못 느끼는 인간들이다. 왜 그러한 것일까? 이성애자 남성들은 도대체 왜 성기가 없어서 상처를 마찰시켜서 얻는 자위질에도 만질 여성의 가슴과 만지지 못하면 적어도 보기라도 해야 할 여성의 몸이 필요한 것일까?
이는 말한 것처럼 김기덕 감독이 쓴 작의와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자아는 자기만의 세계에 철저히 갇혀 있다. 우리는 외부자극이 없으면 우리 자신의 존재 여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여성이 필요한 이유는 남성이 자신의 자아를 남성으로서 여기고 느끼기 위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여성은 이성애자 남성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가슴과 질을 갖고 있다. 남성들은 그 안으로 자신의 성기를 삽입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욕망에 대한 성취를 이룬다. 그렇기에 여성의 존재 자체가 남성에게는 구원을 상징한다. 여성을 통해 남성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신이 강간해서 거세라는 징벌까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징벌을 내린 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에게 찾아가 쾌락을 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리는 남성의 모습은 김기덕 감독이 이때껏 구축해온 연약한 짐승이라는 남성의 이미지와 적확하게 부합한다. 김기덕의 카메라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연약한 짐승들을 내치지 못한다. 김기덕 감독의 생각 안에서 여성의 존재 이유는 마찬가지로 여성들 역시 자신의 자아가 존재함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질과 가슴을 필요로 할 외부자극의 존재일 지도 모른다. 즉, 여성은 자신이 구원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부분까지 김기덕 감독에게 공감하지는 못한다. 여기서부터 김기덕 감독과 나의 갈림길이 시작된다. 김기덕 감독은 여성을 남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사실 갈림길은 당연한 것이며 나는 이를 비난할 생각도 없다. 왜냐하면 김기덕 감독이 남성이라는 점을 내가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남성의 시선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자유가 있고, 이 정도의 표현력과 예술적 능력이라면 언제나 환영일 뿐이다. 실생활에서도 남성과 여성으로서 만나 그 정도의 다름이라는 간격 없이 좁혀질 정도라면 애초에 성적으로 다르다는 긴장감도 발생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3. 끝
어머니는 아들을 거세한 다음 길에서 본 중을 쫓아 떠났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누워서 코를 골아대는 그녀, 결국 그녀가 욕망을 절제하는 길을 동경하였지만 결국 현실로 만드는 것에는 실패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마 욕망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은 엄청나게 피곤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녀처럼 우리가 속세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욕망을 버리고 사는 것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김기덕이 제시한 결말은 언제나 그러했듯 아름다웠다. 자신의 집에서 내놓아진 부처의 얼굴을 플래시로 비춘 아들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라. 중처럼 욕망을 버리고 내면을 비워내는 삶. 뫼비우스 띠에서 탈출하는 것은 욕망의 끈을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길이거나 혹은 권총으로 스스로의 머리를 저격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들의 미소는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인간이 정말 그렇게 쉽게 초연해질 수 있을까? 인간은 욕망을 동력으로 삼고 선로 위를 항해한다. 가끔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게 인간이기도 하지만,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씨를 상징하는 그 인자한 미소 아래에 시퍼런 칼이 숨겨져 있는 게 인간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성기를 자른 그토록 위험한 물건을 집 밖으로 버리지 않았다. 욕망에 대한 교만함, 욕망을 언제든 끝낼 수 있다는, 그 구렁텅이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어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애초에 그렇게 쉽게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는 것이 운명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욕망에서 태어나 욕망 속에서 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