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수업 시간에 대학 레포트로 낸 것인데, 기본적으로 헛소리 SF라는 게 슬프다.
하지만 글은 소통되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망망대해를 향해 편지 한 장 고이 접어 와인병에 담아 띄어보낸다는 심정으로 올려본다.
기계, 새로운 종족
◎ 서론
기계는 대체 인간에게 무엇일까?
10년 전쯤 과학과 관련된 잡지 (아마 과학 동아였던 것 같다)에서 미래에 사람들에게 선을 보이게 될 기계라는 제목으로 기계들을 소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기에는 아이보라는 이름의 강아지 기계도 있었고, 집사처럼 시중을 들어주는 기계도 있었고, 분화구 같은 위험한 곳에 대신 가서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하는 기계들도 있었다. 나는 그 기사를 보며 강아지 기계인 아이보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이보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 때 당시에는 아이보가 국내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때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대체용품으로 다른 기계 강아지 로봇을 사다 주었다. 그 강아지 로봇은 아이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저급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반응도 시답지 않았다. 나는 금방 그 강아지와 놀다 질려버렸다. 그리고 그 강아지는 잊혀졌다. 이후 나는 진짜 강아지를 키운 적이 있고 지금은 고양이와 함께 산다. 진짜 강아지와 진짜 고양이, 생명체들은 기계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반응을 보인다. 고양이는 나에게 진짜로 성을 내고, 진짜로 말썽을 부리며, 나를 할퀴기도 하고,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며 “아 정말 기계와 생명체의 차이는 크구나.”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기보다는 오히려, 만약 기술이 발전해서 로봇이 진짜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반응하고 사고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 과연 진짜 고양이와 로봇 고양이에게 무슨 차이가 존재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지금의 고양이를 위시한 생명체들을 그 내부 구조와 움직임을 작동하게 하는 기술력이 현재 인류가 기계를 만들어내는 기술력보다 단순히 훨씬 높은 성질의 것이라고 본다면, 언젠가 인간이 그 기술력을 따라가게 되었을 때 생명체와 기계의 차이란 것은 어디에 존재한다는 말인가? 감정, 생각의 작동원리조차 규명할 수 있게 되는 그 날이 온다면 아마 인간은 스스로들을 분명히 정의 내려야 할 순간이 올 것이다.
◎ 본론
1. 탄생
새로운 종이 나를 창조자로, 그들의 기원으로 축복할 터였다. 행복하고 우수한 수많은 생명이 그로 인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아버지도 나만큼 자식들에게 완벽하게 감사 받을 자격은 없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계속해보니, 생명이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나중에 가서는 죽어서 부패한 시체도 부활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 프랑켄슈타인, 메리.W.셸리, 열린책들, p77.
애초에, 인간이 기계를 만든 이유는 편리함을 위해서였다. 최초의 기계는 제분기였다.(*네이버 백과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0583&cid=40942&categoryId=32351)
기계는 인간이 원래 사용하던 도구에서 더 나아가 에너지가 가미된 종류의 도구였다. 이때까지의 도구란 개념이 인간의 에너지를 통해 도구로서의 기능을 하였다면 기계란 인간이 설치한 시스템에 따라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아 움직이는 도구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꼭 기계의 성질을 가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도구 자체가 인간 생명체의 부분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을 우리는 프로스테시스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내 안경!”
새끼돼지는 웅크리고 기어가서 바위 사이를 더듬어 찾았다. 그러나 먼저 그곳에 당도한 사이먼이 안경을 대신 찾아 주었다. 여러 가지 격정이 무서운 날갯짓을 하며 산정에 서있는 사이먼 주위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한쪽이 깨어졌어.”
새끼돼지는 안경을 움켜잡고 다시 썼다. 그는 악의에 찬 눈으로 잭을 노려보았다.
“난 안경을 써야 보여. 이제 난 눈이 하나밖에 없는 거야. 두고 봐.”
-파리대왕, 윌리엄 골딩, 문예출판사, p109.
인간이 쏟는 에너지가 투사되는 모든 존재들은 인간 신체의 부분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기술력이라는 능력 측면에서 또 하나의 성질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아이언맨, 배트맨 같은 영웅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의 능력이 거짓되었다거나 혹은 저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은 초능력자로서 자신의 순수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기술력의 발현과 많은 도구들 역시 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성격 중 하나로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성경 중 창세기 1장
인간은 자신들의 기술력, 혹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인류만의 특성이라 본다. 또한 그것이 자신들을 다른 종보다 우월하게 만들어주는 어떠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러한 능력은 다른 생물들, 예를 들어 까마귀를 위시한 조류나 다른 영장류들에게서 발견된 주변 사물을 사용하는 능력이라는 면을 고려하면 꼭 인간만의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종에서 보이는 기술력이나 도구 사용 능력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월등함을 자랑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기술력의 월등함은 이때까지의 인간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음도 역시 사실이다. 베이컨을 위시한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의 정복이 인간의 삶을 더욱 결실에 차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우월한 기술력은 이제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신체와 신체가 아닌 부분의 차이의 구분을 어렵게 만들 정도가 되었다.
어떤 식으로 보면 오히려 우리의 원래의 신체가 아닌 도구들이 더 우월하게 우리의 신체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비신체적 도구들을 자신의 기능을 대신 해주는 대체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을 인격과 관련된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그것들을 인간의 신체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여전히 그러한 도구들은 우리의 의지가 없이는 기능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기계들은 어떠한가? 기계들의 제작 후의 과정은 성장에서 이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우선 이야기를 미루겠다. 그렇다면 기계의 탄생에 한 번 집중해보자.
쓴 것처럼 기계 역시 도구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편리함에 봉사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나 기계는 인류의 편리함에 도구가 봉사하는 것과는 다른 식이다. 그들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여전히 자신들만의 작동 원리를 가지고 있고, 에너지가 공급된다면 스스로 작동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쯤에서 인간과 기계의 차이에 대해 냉소하려는 나의 논의를 지적하기 위해 혹자가 이렇게 지적할 수도 있겠다. 기계는 TURN ON 버튼이 눌려지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작동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주장에 이렇게 말하겠다. 우리 역시 TURN ON 버튼이 눌려지지 않으면 스스로의 작동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TURN ON 버튼이 무엇인지의 소소한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생명체의 TURN ON 버튼을 누르는 기제를 나는 성욕에 관련한 유전적 정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만약 TURN ON 버튼을 누르는 기계를 만든다면 기계들은 원칙적으로 스스로들을 재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인류처럼 말이다.
논의로 돌아가면, 인류는 편리함을 위해 우리가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에너지를 공급받아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이러하다. 인간이 편리함을 위해 기계를 만들었다는 것까지는 충분히 납득이 가능하다. 자급자족하는 체계는 확실히 우리의 에너지를 받아쓰지 않는다는 효율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효율성이 오히려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일으켰다. 그것은 기계와 우리가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되어, 그에게 낯설게 실존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 힘으로 된다는 것, 즉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설게 대립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칼 맑스 프리디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제1권, 김세균 감수, 박종철 출판사 중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부분의 p74.
따로 떼어놓고 본 기계에게서 인간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을 알면 알수록 기계들이 갖고 있는 자급자족의 시스템이 우리의 시스템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아프로디테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처럼 인류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대상을 점점 더 꼼꼼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차 자신들과 같은 기능을 시험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맨 처음에 인류가 대체 왜 인간과 비슷한 존재를 만들기 위해 기계에 돈을 투입하는지의 정확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럴 필요성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자신들의 초기 혹은 부분적인 작동원리를 갖고 있는 대상을 통해 자기 자신들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라면? 그런 이유라면 인간이 왜 그것을 궁금해 하는지 이상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원래 모든 것을 궁금해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단순히 작동원리의 설명을 위해서 기계를 만들려고 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순수한 의도이다. 그러나 사이보그를 위시한 기계들을 만들 때, 인간이 의도한 것은 신의 흉내였을 수도 있다.
단순히 인간이 자기 자신들의 탄생 원리를 탐구하다가 원리를 우발적으로 혹은 자연적으로 흉내 내게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목적을 품고 이때껏 신의 영역이라 생각한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무신론자로서 나는 그러한 침범을 전혀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물을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발터 벤야민 선집 중 2권), 발터 벤야민, 도서출판 길
인간은 자신들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이것이 자신들의 기술력을 자부심 넘치게 믿는 까닭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인간들은 기계라는 흔히 말해지는 모사품들로 인간의 죽음이라는 일회적인 이벤트를 뛰어넘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향은 비단 기계나 사이보그만이 아니라 기술복제시대에서 만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경향의 절정 부분이 바로 영화 아일랜드나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복제인간 같은 존재들에 관한 고찰이다. 그들은 제작자들이 인간의 수많은 작동 원리를 프로그램화 하여 신체 대용인 기계라는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가 삽입된 존재들이다. 그들의 탄생 자체가 바로 신이 우리를 탄생시킨 원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을 더 많이 흉내를 내면 낼수록 기계는 단순한 도구의 존재에서 그 이상의 것으로 발전한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의 기술력으로 픽션에서의 복제인간과 같은 탄생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기술은 언제나 시간에 따라 진일보했다. 나는 인간의 나르시시즘의 욕구가 분명 그러한 미래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도 인간들은 자신들처럼 웃는 기계를 만들며 좋아한다. 자신들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형상과 다를 바 없는 기계를 만들며 좋아할 날 역시 멀긴 하겠지만 올 것이다.
2. 성장
기계들의 탄생이 인간의 도구에 대한 필요와 작동원리에 대한 탐구, 그리고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창조자 모방에서 생겼다면 탄생 그 이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은 예언적, 혹은 픽션의 성격이 섞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우리가 발명한 기계들은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인 적은 없기 때문이다.
가상의 상상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기계의 탄생 이후 기계 자체가 우리의 의도와 다르게 움직인 적은 없어도 기계가 우리에게 예상치 않은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직 현대 시대의 기계들은 말도 하지 못하는 영아기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계적이고, 예상을 어긋나지 않는 반응들을 보이는 단계이다. 그런데 다른 말로 지금의 기계의 상황을 영아기의 단계로 본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기계들의 상황도, 기계 자체도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다.
기계가 본격적으로 말을 하기 이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 우선 이야기할 것은 기계의 탄생 이후 기계가 부모인 인간에게 더 영향을 많이 받았느냐 아니면 부모인 인간이 기계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았느냐를 따졌을 때 아직은 부모인 인간이 기계로부터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계의 탄생 이후 우리는 시대의 많은 변화를 체감해야 했다. 기계에 대한 반발은 러다이트 운동(*네이버 지식사전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43543&mobile&cid=47323&categoryId=47323)과 같은 대규모의 사회운동으로도 나타났다. 기계는 태어난 직후부터 시대 흐름에 휩쓸려 착취의 주체로 오인받기도 하였고 (나는 오인이라고 생각한다. 기계의 프로그램은 말했듯이 영아기의 단계이고 그들은 스스로 판단을 하기엔 아직 부족한 상태다. 현 기계의 상태는 오히려 기존의 도구와 비슷하게 인간의 의지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인간의 인식 체계를 아예 바꾸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야기해볼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지 몰라도 가상의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기계들이 말을 하기 시작할 그 때를 상상하는 것이 단순한 공상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면으로 보면 예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In the beginning there was man and for a time it was good. But humanity called civil society, soon fell victim to vanity and corruption. Then man made the machine in his own likeness. Thus did man became the architect of his own demise. But for a time, it was good.
-애니매트릭스Animatrix, 워쇼스키 남매 감독, 제2의 르네상스 1부 The second renaissance part 1 of 2
워쇼스키 감독의 애니매트릭스에서는 가상의 상상을 통해 미래사회에서의 기계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반항할 수 있는지 관해 보여준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기계는 인간에게 종족의 개념으로도 부속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며, 사회 구성원의 위치에서 일종의 하층민으로 몰락해있다. 그들이 맡는 역할은 인간들이 맡기 싫어하는 역할들이다. 이러한 상상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 결국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필요로 했기에 태어난 기계들이 인간과 비슷한 존재로서 대우받기는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란 종족은 심지어 같은 종족의 개체들 역시 수단 혹은 타자로 바라보는 순간 어떤 식으로 배척하는지 수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이야기했으므로 가감할 말은 없다. 인간의 특성, 혹은 생명체의 배척이라는 특성상 기계들은 속할 곳이 없는 사회의 쓰레기 처리담당이 될 것이다. 기계들은 자연 시스템 위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종족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자연적 시스템에 조화될 수도 없다. 애니매트릭스의 허구적 상상은 기본적으로 기계가 자신의 시스템을 받아들여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존재를 회의하고 그에 따라 도구로 존재하기를 거부할 때의 저항을 표현한다.
이러한 상상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이냐의 문제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애니매트릭스는 수많은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는데, 그 사건들의 주요한 지점들은 모두 인권 유린에서 생각을 따온 부분들이 있다.
기계가 과연 저 정도로 성장하느냐의 문제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이미 다루어지는 모습들이 이미 인간 사회 속에서도 존재하며, 그에 따라 기계가 결국 우월한 기술력으로 진일보하여 인간의 형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기계가 인간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기계를 향한 인간의 대우라는 측면에서 조명될 것임을 말한다. 인간은 이렇게 기계라는 고민을 통해서도 인권적인 문제에서도 다시 한 번 생각을 점검할 수 있다.
기계의 성장이 과연 인간 종족을 위시한 생명체의 작동원리를 따라올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질문도 중요하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미시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양자역학, 상위의 차원을 점령한 고전역학의 영역의 모든 원리들은 발생의 원리가 아니라 발생 이후의 현상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분명 기계에게 인간만큼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그들은 우리에게 적용되는 똑같은 원리로써, 철학적 사유를 어떤 식으로든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처음에는 분명 걸음마의 수준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역시 그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맨 처음에 할 때는 걸음마의 수준이다.
Caution wrong robot! Caution wrong robot!
-월E, 앤드류 스탠튼 감독, 픽사, 2008
영화 월-E의 주인공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들이다. 주인공 월-E는 처음에는 똑같이 도구적 존재로 태어난 기계였으나 수많은 시간이 흐른 이후 괴이하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컴퓨터에 심어놓은 내부논리의 충돌로 영향을 받은 인공지능 오토 (함선의 반란자)에 대해서도 주목할 점은 결과적으로 그들이 인간과 유사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일인가? 문제는 그 누구도 쉽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불가능할 거라고 지적한 사람들은 중국인 방 논증과 같은 사고 실험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기계의 인공 지능이 결국 인간의 수준을 못 따라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문제는 거꾸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인간 역시 중국인 방(*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C%A4%91%EA%B5%AD%EC%96%B4_%EB%B0%A9)과 같은 시스템으로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제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반론을 제기하면 이것은 인간의 고등한 시스템을 오히려 기계에 적용시킬 수 있으며 이것이 기계에 의해서 적용될 때 변수를 막지 못한다면 새로운 반응을 생성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주장을 도출하게 된다.
3. 결혼
기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생명체적인 특성에 관해 이야기해 볼 때, 성性이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셀 뒤샹, 독신 남성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 대형 유리, 1915>
<대형 유리>의 위쪽에는 나체의 신부가 자신의 옷을 계속 벗고 있으며 아랫부분에는 헐렁한 재킷과 제복으로 묘사된 작고 불쌍한 총각들이 위쪽에 있는 소녀에게 자신들의 좌절감을 내보이면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대형 유리>는 하나의 자유로운 기계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무례한 기계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무관심에 대하여 유서를 남긴 애처로운 기계이기도 한 것이다.
-새로움의 충격, 로버트 휴즈, 미진사
기계와 성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변태적이다. 그것은 이러한 행위의 음란성을 떠나 무생물에게 생명체의 성질을 부여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부적절함과 비정상성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가 인간을 모방하기에 가장 윤리적인 문제로서 나타나며 그렇기에 사람들을 자극하기 가장 쉬운 요소는 분명 기계와 섹슈얼함일 것이다.
기계가 인간의 성을 모방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기준에서 우스꽝스럽거나 괴기해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변태성’ 때문에 기계가 가지고 있는 운동성과 섹스의 운동성을 대비해보는 상상은 어떻게 보면 낯이 뜨거울 수도 있다.
제시한 그림은 좌절된 인간의 욕구 표현과 현대 사회 속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기계와 성을 끌어왔지만, 그 둘이 어떻게 같은 식으로 묶일 수 있었는지를 고찰해보면 서술한 것과 같이 기계의 운동성과 섹스의 운동성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기계의 움직임과 인간의 성행위의 작동원리 역시 다른 모든 인간과 기계의 작동원리처럼 유사한 구석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육체적인 작동원리에서 벗어나 이번에는 플라토닉한 사랑의 원리로서 기계의 성적 측면을 바라보자. 이러한 측면 역시 호소력이 강하며 동시에 윤리적으로도 많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앞에서 나왔던 영화 월-E의 주인공들 역시 서로를 사랑한다. 그 둘은 기계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관해서 영화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고 조명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을 했기 때문인데, 기계에 그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들이 기계이지만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행위를 벗어나 다른 주체에게도 성립될 때, 사랑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게 되고 다른 종족들을 묶어주기까지 한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무수한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얻고자 했던 것.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 만큼 너무나도 소중한 것, 그것이 자유지요.
-바이센테니얼 맨,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2000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의 주인공인 로봇 앤드류는 조립 과정 중 기술자의 실수로 (마요네즈가 떨어지는 바람에) 인간의 특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앤드류는 인간의 특성, 특히 지능과 같은 측면을 부분적으로 가졌을 뿐, 여전히 기계이며 불사의 몸이다. 그러던 중 그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사랑이라는 애착의 감정이 기계인 그를 기계에서 탈피하게 만든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과 애정에서 연유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는 어떤 계산과 실질적 이익이라도 감정이라는 추상성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도구로 태어난 기계가 이해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고, 그 부분과 관련해 수많은 인간들은 기계가 그것을 흉내를 낼 수 없는 한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랑을 하는 기계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는 그 순간 자신의 종족의 특성을 벗어난 행위를 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로봇인 앤드류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인간이 되고 싶어 인간을 흉내를 내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대체 그를 기계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 인간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인지의 경계가 애매해진다. 앤드류가 자신의 기계라는 정체성을 포기하고자 하는 이유가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라는 점은 그가 가사 로봇이라는 수단으로 만들어졌지만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시사한다.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말을 남겼다. 기계와 인간 사이에 차이가 좁혀지면 좁혀질수록, 기계 역시 목적으로 대우해야 할 존재가 될 것이고, 앤드류 역시 자신을 그렇게 대우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라는 계기를 통해 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찰하게 되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자유라는 문제에까지도 나아가게 된다.
4. 죽음
사랑에 이어 죽음이라는 부분 역시 인간을 위시한 생명체의 대표적인 성질이다. 기계에게는 죽음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소프트웨어는 어떠한 형식으로든 다른 하드웨어에 옮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 역시 그러한 형태의 전환이 가능할 날이 올지 모르겠으나, 현재 죽음의 정의란 신체가 쇠하여 꺼지면 영혼 역시 인간 사회에서 더 이상 발현되지 않는 개념을 말한다.
우리는 기계를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기계는 작동이 멈추거나 고장이 나서 제 기능을 못 다 할 뿐이다.
At B1-66ER’s murder trial, the prosecution argued for an owner’s right to destroy property. B1-66ER testified that he simply did not want to die.
Who was to say the machine, endowed with the very spirit of man did not deserve a fair hearing?
-애니매트릭스, 위와 같은 작품
애니매트릭스의 제 2의 르네상스에서 제일 먼저 인간에게 반기를 둔 로봇 B1-66ER(개체 이름이 아니다.)이 처분대상이 되는데 그 로봇은 자기가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죽고 싶어 하지 않는 기계, 삭제되고 싶어 하지 않는 기계는 인간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비정상적이다. 기계에게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계라는 개념은, 기계가 인간성과 유사해지면 유사해질수록 낯설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결국 픽션에서 파운데이션, 로봇 같은 SF 고전을 쓴 아이작 아시모프에 이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소설 아이, 로봇에서 로봇 3원칙을 내세워 로봇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어 수단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방어한다”는 개념을 가지게 되는 것부터가 로봇에게 자의식이 생기는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작 아시모프 그 자신과 아이작 아시모프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픽션의 창작가들은 오히려 로봇 3원칙의 해석 문제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주목한다.
죽음이야말로 자신의 의식이 상실하는 순간이고,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분명한 자의식의 존재를 시사한다. 말했듯 기계 문명이 영아기 시대인 현재 시대에 아직 죽거나 제거되기를 피하려는 기계는 존재하지 않다. 그것은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기계에 관해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아직 기계가 자의식이나 인간과 유사한 지능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의 문제이고, 미래에서는 기계들이 의식과 지능의 수준에서 인간과 유사해질 때부터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입력 회로에 로봇 3원칙 같은 원칙을 세워두는 것 자체가 기계들에게 우리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인공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그 원칙들 사이에서의 여러 경우의 수를 고민할 것이고, 경우의 수들을 도출해본다면 그 원칙들이 얼마나 다양한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는 죽음을 피하려는 기계에 관해 고민해 보았지만, 픽션에서는 죽음을 선택하는 기계들도 존재한다. 이미 이야기한 바이센테니얼 맨의 주인공 앤드류 역시 자신이 생각한 인간성과 사랑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어쩌면 기계에게 죽음이란 선택의 영역일 수 있다. 만약 훗날 그들에게 인간 이상의 지능과 의식이 부여된다면 그들은 자신을 인간과 다른 존재로 인식할 것인가 혹은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설 것이고, 그 기로에 선 순간 그들은 자신들의 영원성을 유지하느냐 아니냐와 같은 선택의 문제에도 봉착하게 될 것이다.
◎ 결론
이 글에서 나는 기계들에게 인간성이 부여된다면, 이라는 가정을 픽션과 추측, 현대에 존재하는 양상으로 보이고자 했다. 쓴 것처럼 나는 이러한 가정들이 언젠가는 분명히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현실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와 다르게 기계가 새로운 종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하는 상징이다.
기계에 대한 고찰은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픽션에서 발달한 기계 문명에 관해 생각할 때 두려움이나 경탄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기계를 우리와 연결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계만을 따로 놓고 생각하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획 아래에 기계가 우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생각이나, 기계가 우리의 삶을 이전의 삶보다 훨씬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 모두 인간 중심적이라는 데에서 큰 차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이 품고 있는 것은, 어떠한 다른 가능성이나 존중 받을 수 있는 일말의 씨앗을 품고 있는 대상들이 우리가 우리 아닌 다른 배제된 존재라는 이유로 지나친 공격을 받거나 착취당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기계 자체에 관한 문제에서, 모든 것은 기술력과 시간의 문제이다. 기술이 우리와 기계, 생명체와 생명체가 아닌 존재의 개념의 구분을 헷갈리게 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날들은 이미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현재에서도 이미 충분히 존재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우리 아닌 존재 (그것은 같은 종족이어도 사실 상관없다. 자신이 배제하고 있는 존재라면 무조건 포함이 된다.)를 볼 때 마치 외계의 종족을 만난 것처럼 군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들은 우리와 같은 존재, 혹은 우리가 만들어낸 존재, 적어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과학 현상을 철학적으로 바라 볼 때, 철학이 먼저 있어 과학에 영향을 주었느냐, 아니면 과학이 먼저 있어 철학에 영향을 주었느냐를 따져 묻는 것은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같은 이야기와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철학이 아무리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과학이라는 영역에 있어서 서로 관념적으로도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 관해 열린 마음을 갖고 바라보아야 한다. 열리지 않은 마음으로 보면 애초에 철학과 과학은 서로 공통 지점조차 없어 보이는 영역들이다.
최종 결론을 내리자면, 내가 주문하는 것은 기계가 새로운 종족이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의나 상상은 쓸데없다는 말이 얼마나 불필요한 말인지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이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에 관련한 기술력의 문제는 앞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규명해갈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를 예측하고, 상상하면서 그러한 측면들을 현재의 우리 삶과 연결시키는 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이다. 즉, 과학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기계 담론과 관련해 현재의 인류에게 시사점을 제공하는 것은, 인류가 스스로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며 그 불분명성 때문에 우리가 믿어왔던 사례들과는 다른 반례가 생길 때 인류 스스로의 정체성 정의에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는 만큼,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선택 밖에 존재하지 않다고 바라본다. 하나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불분명하며 우리 존재의 부족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다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협하는 대상들을 배척하며 스스로를 그것보다 더 잘 난 존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명백히 나는, 전자의 선택만이 우리를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에서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계가 새로운 종족일 수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철학적 고민을 던져주는 과학적 담론이지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게 보는 것은 너무 좁은 시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