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소설 ‘성’과 ‘유형지에서’를 읽고-

소외에 관하여(부제: 성의 차별적 분리 전략과 세 개의 방안)

 

카프카의 우울함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그의 소설들은 모두 음산하고 음울하고 패배감에 가득하다. 인물들이 소외 속에서 고통을 겪기에 악몽과도 같다. 악몽이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총체의 심리적 반영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카프카의 소설이 허구만이 아니라 현실도 담아낸다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카프카의 이야기들은 개인과 사회의 폭력적 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단순히 상상에만 의거하지 않는다.

 

우선 카프카의 우울함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카프카의 소설 “성”에서 드러난 소외를 살펴보자. 소외는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이를 타자의 권위로 대체할 때 발생한다. 즉, 누군가가 독립적이지 못하고 자기 결정권한을 잃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소외에 처한 것이다. (한국인에게 일본 제국주의에 관련한 역사를 언급한다면 바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 본다. 국가와 정부 개념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의 정치권을 자신들의 결정권한으로 이양시켰을 때를 소외의 예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소외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 다른 이들의 도구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1) 각주 : 본고가 쓰고 있는 ‘소외’라는 개념은 루소와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과 유사하다. 루소는, “소외는, 주거나 파는 것을 의미한다.” (루소, 160) 라 말한 바 있다. 그의 맥락에서 이 개념은 설령 인간이 노예가 된다고 해서 자유를 상실하고, 소외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주거나 파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소외는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는, 소외를 대상화가 발생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마르크스, 52) 특히 그의 맥락에서 소외는, 원래 한 사람에게 속했던 것이 그 사람에게서 떨어져 나와 “적대적이고 이질적”인 것이 되는 것을 뜻한다.]

 

소외는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소외를 발생시키는 일정한 전략과 권력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성”의 관료들은 상하관계를 고착화 시킴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자립할 여건들을 파괴한다. K의 실패는 이러한 구조를 잘 보인다. 성은 마을 사람들에게 응답하지 않는 것, 성 자체를 마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권력을 신비화한다. 이로써 마을과 성이 분리된다. 이들의 분리를 보이는 좋은 예시 중 하나가, 마을 사람들이 성의 관료들이 자행하는 성적 착취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현상이다. 이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의 권력은 성 뿐만 아니라 마을에 의해서도 유지되는 구조다. 즉, 마을은 성의 분리 전략에 동참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이처럼 분리전략이 공고하며, 소외 상태가 지속된다면, 카프카의 소설에서 이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긴 한 것일까?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세 가지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카프카를 굉장히 긍정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는 있겠다. 세 가지 답안 중 두 개는 그의 소설 “성”에서, 하나는 단편인 “유형지에서”와 제시되며, 그 내용은 차례로 자기 의심, 자기 긍정,  그리고 연대이다.

 

만약 개인이 자립과 자율, 자치를 상실한다면, 되찾아야 한다. 첫번째로 길은 자김 의심이다. 자기 의심은 권위가 어디에서 그 힘을 창출시키는지 알도록 돕는다. 비록 K의 현재 상태에 대한 지속적인 의심과 질문들이 마을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천덕꾸러기로 생각하게 하지만, 그가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 자체는 매우 중요하다. 마을 사람들은 성 없이 자기들이 살 수 없다고 굳게 믿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믿는 것을 지속적으로 흔들어댈 장치가 필요하다. 두번째 요소인 자기긍정은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아멜리아가 좋은 예시다. 그녀는 소르티니(성의 관료)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용감하게 거절한 자다. 프리다와 그녀의 엄마와는 다르게, 아멜리아는 자신의 몸을 성의 권력에 바치지 않았다. 그녀에게 강한 정신과 자기 확신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못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연대는 “유형지에서”라는 소설에서 끌어올 수 있다. 미완성작인 “성”에는 K나 아멜리아의 가족들이 소외를 극복한다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유형지에서”는 권력의 전환기를 다루며, 이 과정에서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연대가 묘사된다.

 

이방인 K, 불완전한 독립에서 완전한 소외로 전락하다

 

“성”은 이방인으로서 성과 마을의 이상한 관계 사이에 껴버린 K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소설 맨 처음에 한 젊은 남자가 K에게, 성은 마을을 소유하며 마을 사람들은 모두 웨스트웨스트 백작 손 아래 있다고 말한다. (성 3, 4) K가 마을에 토지측량사로 왔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가 성에 속한다고 믿는다. (성4) 그가 어떤 종류의 편지나 전화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그렇게 주장한다. 마을 사람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에 있는 사람과의 전화 연결을 통해 우선 마을에 받아들여진다. (성 6) K는 그때부터 자신이 백작과 곧 만날 거라고 자신만만해 한다. 그래서 그는 성으로 바로 가려고 하나 이상하게도 성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한다. 고통스럽게 방랑하며 그가 깨달은 것은 그저 “마을은 끝도 없이 길기만 했다(성 12쪽)”는 것이다. 이는 성에 닿으려는 그의 노력이 소설 전반에 걸쳐 헛된 것임을 말한다. 그는 성에 가려고 무진 노력을 쓰나 마을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이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그에 따라 K는 생명력과 자신감을 잃어간다.

            K는 극 초반부터 성과 거리를 둔다. 그는 “성에서 사는 건 저랑 안 맞을 거예요. 저는 저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단 말입니다.” (성 8)라고 말한다. 성을 경계하는 그를 보면, 그가 이미 성과 자신이 대적할 운명임을 직감하는 것도 같다. 아래의 인용 부분에서 성과 K 사이의 긴장감이 역력하다.

 

            K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렇지, 성이 나를 토지측량관으로 인정했구나. 다른 한편 생각하면 성이 그에 관한 정보를 다 알고 있고, 모든 가능한 기회의 수들을 계산해 놓은 채, 미소 지으며 이 도전을 받아들이고 있기에 그에게 일들이 유리하게 돌아가긴 힘들다. 그렇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성이 K의 힘을 얕잡아보니 그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이 그에게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 (성 6,7쪽)

 

K는 이미 자신 앞에 놓인 대결을 예감한 것이다. 물론 작품 내내 그는 말 그대로 성과 대적하며 성에 대한 반항적 태도를 유지한다. 그가 만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감히 성과 그 관료들과 만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조언하지만, 그는 그 말들을 무시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성의 임금노동자 그 이상도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한다. 극 초반에 그가 염려한 문제는 임금값을 잘 받을 수 있을지 아닐지의 문제였다. “나쁘게 보수를 지급받아도” (성 7쪽)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이러한 소설의 묘사들을 고려하면 K는 누가 그를 권력으로 누른다 해도 자기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보인다. K는 권력에 길들여진 마을 사람들과는 다르게 스스로 말한 것처럼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려고 분투하는 것으로 보인다.

 

K가 이처럼 처음에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성의 권력 때문이었다. 초반에 성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 보였던 이방인은 마을에 머무를수록 성의 권위에 의존적으로 변한다. 그는 성을 위해 일하는 한, 스스로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모순적인 이중성을 깨닫지 못한다. K는 자신을 성의 노동자로 간주하지만, 그 자체가 그로 하여금 스스로가 자유롭다 믿게 하는 요인이다. 성의 권력이 K가 마을에 머물러도 되는 승인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여관주인 한스와의 대화 중에 K는 자신이 타협적이면서 동시에 반항적인 성격임을 밝힌다. “제가 당신(여관주인)보다 힘 있는 사람들을 더 존중하지 않고,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저는 당신처럼 솔직하게 저 사람들을 내가 따른다, 이렇게 말을 못할 뿐이죠. 제가 힘 있는 사람들에게 온순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별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달까요.” (성 9) 그는 자신이 반항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성의 권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다. 최소한 K를 이곳으로 부른 건 성이다. 그렇기에 K가 자기 자신을 “성에 영향력이 좀 있고, 앞으로 더 생길 거에요”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 36) 만약 K가 생각한 것처럼 일이 돌아갔다면, 그가 성의 관료들 중 하나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게 가능한지 의심했고, K는 증명을 위해 성과 클람을 쫓아다닌다. 토지 측량사로서의 확실한 신분을 보장받기 위해 그는 성과 접촉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찾아다닌다. 이러한 맥락에서, 클람은 K의 잠정적인 “후원자”이다. (성 36)

 

가끔 K가 클람에게 갖는 호기심이 지나쳐 보일 때가 있다. 특히 그가 구멍으로 클람을 훔쳐볼 때 그렇다. (성 38) 클람의 애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프리다에게 접근할 때도 그렇다. 프리다가 자신을 소개하자마자 K는 그녀가 “매우 대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 39) 그의 접근은 매우 의도적이다. 그는 “프리다가 (나 때문에) 모든 것을 져버렸는데 이제 내가 그녀한테서 뭘 기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한다. (성 44) 클람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라면 클람과 관계 있는 모든 것들이 K에게 중요하다. 하지만 프리다가 클람과 아무 관계가 없자 그녀는 그에게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성에 속한다는 K의 믿음은 성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인정 없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불운하게도, 자신이 성에 속한다는 그의 믿음은 시간이 갈수록 부숴진다. 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그의 청원이 전화 상에서 “절대” 불가하다고 거절된다. (성 23) 통화 이후로 성의 전령이라는 바르나바스를 만나게 되나, 그도 성에 속한 자가 아니었다. (성 33) 바르나바스가 전달해준 클람의 편지에 적힌 대로 K는 이장을 만난다. 이장은 K에게 일어난 이 일들이 “가장 사소한 일들 중에서도 가장 사소한 일”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성 68) 그리고 “우리는 토지 측량사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라고 덧붙인다. (성 69) “제가 이곳에 가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 (성 28쪽)다고 말하는 K의 바람과 다르게 그는 철저히 쓸모 없는 사람에 불과하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프리다의 모친인 여관주인이 말한 것처럼,  “당신은 (여기서 K를 의미) 성에서 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을 사람도 아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외려, 참 안타깝지만, 이방인에 불과” (성 50) 하다. 이 문장은 마을에서 K의 위치가 불안정함을 드러낸다. K 혼자 자기 처지가 어떤지 모른다. 그는 곧 성은 물론이요 마을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K는 계속 실패를 거듭하며, 끝에 가서는 매우 피곤해한다. (성 289) 소설의 끝에서, 자신만만 했던 K는 사라지고,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불쌍한 이방인만 그 자리에 남는다.

 

            K는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의 입지는 불안정하다. 초반에 야심만만하고 자신만만했던 그는, 성의 질서가 자신을 이곳으로 불렀다고 생각해 자신이 성에 속한 사람이며 성의 권력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성은 그의 상사, 고용인으로서 그의 정체성을 보장하고 그에게 일거리를 주어야 할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일만 시작하면 성의 구조 안에 편입될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성은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는 성과 접촉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지만, 그러려고 하면 할수록 K는 성과 그 질서에 도전하는 모양새만 된다.

 

            K가 계속 실패하는 이유는 성에 편입되고자 하는 그의 요청이 성과 마을의 분리된 관계에 의해 항상 좌절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K는 이방인이다. 그래서 성, 마을 둘 중 한 곳에 포함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성의 권력으로 작동하는, 뚫을 수 없는 이중 시스템에 반한다.  분리 전략은 마을 사람들에게 특정한 행동패턴을 요구하는데, K는 마을 사람들이 따르는 질서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비정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성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며, 성의 관료들을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상정한다. 이 구조는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이상한 일이 벌어져도 성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말을 걸지 못하도록 한다. 그렇기에 K가 말을 걸려고 하면 할수록,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더욱 멀어진다. 왜냐하면 그가 마을 사람들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성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성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K는 성이 그를 고용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관료 시스템 사이의 오류로 발생한 일이었다. 그는 촌장이 말한 것처럼, 마을에 속하지도 못한 채 그 안에 갇혀버렸다.

 

당신이 이곳에 왔다는 그 자체가 참 난감한 일이에요. 그래서 외려 우리는 당신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로 대우할 예정입니다. 근데 당신은 너무나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어요. 아무도 당신을 여기에 초대한 적이 없긴 해요.  그렇다고 우리가 당신이 여기서 떠나기를 바라는 건 또 아닙니다. (성 76)

 

이 애매한 상황에서 그는 길을 잃어버렸다. 이장의 조치에 K는 “성에게 어떠한 편의를 바라는 게 아니라, 단지 권리만을 원할 뿐”이라고 불평한다. (성 76) 이는 그가 처음에 성의 권력에 기대어 누렸던, 표면적인 독립을 잊지 못했다는 것을 보인다. 그는 여전히 성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초창기의 독립이 성의 권위에 의존적이었기에 불완전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토지 측량관으로 일하기 위해 K는 갖은 노력을 다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클람이 형식적인 편지를 보낸다 하더라도, 그는 꿋꿋이 “직접 만날 것” (성 124)을 주장한다. K는 이처럼 자기로부터 존재의 준거를 찾지 못해 완벽한 소외 속에 헤매고 있다. 그는 성에게 의존하는 것이 소외에서 벗어날 수 없는 길이란 사실을 꿈에서도 알지 못한다.

 

마을을 차별하고 착취하는 성의 전략

 

도입부 문단은 성의 민낯을 잘 보인다.

 

성이 자리한 언덕은 안개와 어둠 속에 가려져, 성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려줄 그 어떤 희미한 빛조차 없었다. 큰길에서 마을로 이어진 나무다리 위에서, K는 위에 자리한 신기루 같은 허공을 한참동안 응시하였다. (성 3)

 

위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성은 숨어있고, 신기루이며, 공허하다. 이는 성과 마을의 관계를 잘 보인다. 성의 권력은 유령처럼 마을 위에 존재한다. 그 위에서, 성은 마을의 자립이라는 핏줄을 조용히 빨아 마신다. 성은 흡혈귀처럼, 환한 빛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희생자인 마을 사람들은 성에게 피를 빨려 자립을 잃고 빈 껍데기로만 남는다. 그들은 소외 속에서 성에 의한 졸병, 하수인에 불과하다.

 

성은 분리된 이중의 위계질서 너머로 숨었다. K는 성이 그에게 먼저 승인 권한을 주지 않는 한, 성에 다가갈 수 없다. 백작으로부터 허가를 받지 못한 K는 성에 들어갈 수 없다. 반면 바르나바스나 K의 조수들인 아서와 제레미야와 같은 마을 사람들은 성의 관료들을 만날 수도 있고 성에 들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들이 꼼꼼히 읽었다면 성의 관료들은 그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일을 맡길 때만 만나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조수들은 성이 내린 업무에 관해 “성으로 다시 돌아가 불만을 피력” (성 234)할 수도 있다. 제레미아는 K에게 클람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갤레이터라는 관료가 조수직을 맡겼다고 했다. 그 일은 K가 너무 진지해서 이 상황에 대해 쓸데 없이 생각하는 게 많으니 그를 “조금이라도 북돋아주는 일”이었다. (성 234) 조수들은 토지 측량사로서의 일을 돕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하는 농담으로 K의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K와 성을 연결해주는 전령인 바르나바스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 경우는 바르나바스가 성에 들어가 누가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더 끔찍하다. (성 239쪽) 바르나바스는 말 그대로 성의 전령이라는 수동적인 입장에 처해 있으며, 성의 허가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성의 관료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은 제레미아가 K한테 한 말들을 믿을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성에 대해 이야기도 하고 관료들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막상 그들이 성의 관료들과 직접 접촉하는 것이 맞긴 한지 의문스러운 경우가 꽤나 많다. 클람의 애인이라는 프리다마저도 “클람은 당신한테 절대 말 안 걸 거에요 … 나한테도 말 안 거는 걸요” (성 49)라고 말한다. 클람에게 말을 걸 수 없는데 도대체 클람이 누군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올가만이 이 수상쩍은 상황에 대해 분명히 집고 넘어간다.

 

“그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는 마을에서 꽤 알려져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를 보기도 했고, 모두가 그에 대해 들은 적도 있고, 곁눈질이나 소문이나 여러 왜곡된 이야기들을 통해 확실히 진짜 있기는 할, 클람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죠. 하지만 그가 있다는 점에서만 그렇고, 자세한 부분들은 죄다 말이 달라서 클람이 진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에요.” (성 177)

 

클람의 생김새 뿐만이 아니라 성의 관료 체계도 수상하긴 마찬가지다.

 

“바르나바스랑 저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요. 바르나바스가 하는 게 정말 성의 업무가 맞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이게 허가를 받은 일인 건지도 모르겠어요. 바르나바스가 들어가는 부서가 진짜 성의 부서는 맞긴 한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부서가 바르나바스가 들어가도 되는 그 부서가 맞긴 한 걸까요? (성 175)

 

그들의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조수들이 클람의 대변인을 한 번이라도 만나긴 한 것인지, 바르나바스가 누구의 말들을 전달하고 있는 건지, 마을 사람들이 성의 체계를 이해는 하고 있는 건지의 여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성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로부터 일을 부여 받는다면, 그 일을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게 조수들이 K가 어디를 가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농을 좀 떨고, 웃기도 좀 한” 이유다. (성 234) 그들은 K가 일들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K가 갤레이터(조수들의 주장에 따르면)가 말한 것처럼 농담을 도저히 이해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임무는 실패했다. 조수들은 그들의 무능함이 아니라 K 탓을 할 작정이었다. 조수들이 불만을 털어놓을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관건은 그들이 성에게 부여 받은 임무를 실패했으며, 마을 사람들은 성의 질서를 따르는 하인들로 존재할 뿐이라는 점이다. 보고를 받는 관료가 누구이든 성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는 하등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의 이와 같은 신비화 전략은 그들이 원하고 필요할 때 하위 가축들을 착취하게 만든다. 성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보의 불균형이 존재하며 이는 성의 착취를 돕는다. 상위층 사람들은 마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죄다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K를 이미 알고 있다. 반면 마을 사람들은 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이 관료의 생김새를 묘사하거나 그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 진술이 다 상반된다 하더라도, 성은 여전히 자신들의 우월한 존재를 유지하기 때문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성은 마을의 주인이며 마을의 승인 권한을 갖는다. 백작은 말 그대로 성을 소유하며 성은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도 좋다는 허가(성 3)를 내린다. 마을 사람들은 그 대가로 성을 하인처럼 섬긴다.

 

이 왜곡된 상호 공존의 확실한 증거는 마을 여자들이 성의 남자들에게 성적 자원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성에 온 신사들만”을 위한 여관 (성 35)은 성의 관료들과 그 수행자들을 위해 여흥을 제공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프리다가 K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이 클람의 애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녀는 성에서 한 자리 차지할 생각 같은 건 없다며 더 높은 신분상승 같은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술집에서의 현재 위치에 만족한다. (성 39) 그녀의 엄마인 여관주인 역시 그녀의 딸이 클람의 애인이라는 사실에 아무런 부끄럼도 없으며 클람을 위해 딸이 봉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 프리다는 아주 특출나고 장해요. 나는 정말 죽을 때까지 우리 딸이 자랑스러울 거예요. 클람이 내 딸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불러봤고, 딸이 원할 때마다 클람이랑 말도 섞을 수 있고, 몰래 구멍으로 그를 쳐다볼 자유도 있다니 얼마나 영광인가요. 하지만 그렇다고 클람이 내 딸한테 말을 걸었던 건 아니지만. 이름을 불렀다고 딱히 사람들이 생각할 만한 일들이 꼭 벌어 났다고 할 필요는 없겠죠. 단순히 프리다 이름을 불렀다 (클람 머릿속을 누가 알겠어요?)는 것과, 프리다가 한 번이라도 그에게 갔다는 것 자체가 그 아이에게는 대단한 일이고, 그 아이가 어떤 문제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건 클람에게 시혜를 받은 일이에요. 클람은 그 아이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불렀고요.” (성 51)

 

이 여관 주인 (부부가 둘 다 여관 주인이라서 아주머니로 호칭하겠다)의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 (1) 독자가 이 문단에서 찾을 수 있는 첫번째 힌트는 성의 관료들에게 향한 봉사가 마을 여자들에게 엄청나게 영예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여관 아주머니가 자신의 과거를 K한테 고백할 때 그 이야기들은 분명 아주머니에게 좋은 추억들이며 잊지 못할 은혜롭고 명예로운 일들이었다. 그녀는 자기 딸은 클람에게 아무것도 받지 못했지만 자기는 선물을 세 개나 받았다며 자랑까지 한다. (성 81) 엄마와 딸이 같은 사람과 성관계가 있었을지라도 당사자들 모두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다. 이들이 이렇게 무신경한 것을 보고, 추정컨대, 독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성관계가 마을에서 꽤나 자주 일어나지 않을까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들을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클람은 마을의 애인들고 어떠한 대화도 없는 듯하다. 위의 문단에서처럼 “프리다에게조차 클람은 말을 하지 않는다.”

 

다음 인상적인 부분은 (2) 프리다가 자신을 클람의 애인이라고 할 만한 물증이 없다는 것이다. 클람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는 올가의 주장을 믿는다면, 클람이 그저 프리다 이름 몇 번 부르고 아무 일도 없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더 심하게 상상하면, 그 남자가 프리다와 여관 주인이 클람이라고 생각한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클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클람에게 봉사했다는 사실을 꾸준히 강조할 뿐이다.

 

이처럼 이 여자들은 진짜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들이 클람의 정부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마을 사람들에게 성과 관계를 갖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의 미묘한 권력 구조와 영향력은 마을의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치며 그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른다. 특히 사람들의 말 속에서 그 권력을 확인할 수 있다. 프리다와 여관 아주머니의 정반대 격인 아말리아는 프리다의 행동 패턴을, 단순히 “모든 곳에서 들은 대로” 반복한다고 표현한다. (성 170) 프리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것을 토대로 성의 권력을 이해한 것이다. 프리다는 자신을 클람의 애인으로 소개하여 얻게 될 마을의 영향력을 바란 것이 아닐까. 이 지점은 왜 프리다가 술집에서의 위치에 만족하며 성으로 ‘올라’가려 하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그녀의 목적은 성의 권력에 의존해 마을에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남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뒷부분에서 더욱 자세히 설명한다)  

 

문제가 되는 지점은 프리다가 하는 행동이 자발적인 노예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녀는 마을 사람들의 대표격이다. 권력으로서의 성의 이미지를 이용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성에서 오는 관료들의 즐거움에 봉사할 뿐 아니라 성과 마을 간의 주종 관계 종속화에 기여한다. 그들은 성의 권력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이 구조에 자기 자신을 내던진다. 마찬가지로 성에게 권력을 부여하면 할수록 마을의 여자들을 향한 착취도 더욱 정당화된다. 올가가 여동생인 아말리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그 편지는 온통 야만스러운 말들로 가득했어요. 살면서 그런 말들은 들어본 적도 없고, 그 절반은 문맥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죠. 아말리아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 편지를 봤다면 분명 편지를 받은 여자가 모욕 받았다고 했을 거예요. 애정 어린 말 따위는 한 글자도 없었고, 분명 구애 편지도 아니었어요. 러브레터가 전혀 아니었죠. 소르티니는 일하는 동안 아말리아가 자기 신경을 산만하게 만들었다고 아주 단단히 화를 내더군요. ” (성 192)

 

성의 관료와 마을 여자 사이의 관계는 “야만스러운 말”로 가득한, 상식적으로 명예롭다고 여길 수 없는 그러한 종류의 것이다. 마을의 여자들은 마을 관료들의 애인이나 연인이 될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관계는 절대 평등하지 않다. 마을은 성을 부를 수 없다. 이 관계는 일방향일 뿐, 상호적이지 않다. 올가는, “프리다와 클람 사이에 … 처음 관계는 아말리아와 소르티니의 것과 비슷했”다고 말함으로써 중요한 부분을 꼬집는다. 물론 K는 그 둘의 관계는 다르다며 이를 부정한다. (성 195) 올가는 질문한다. “클람이 프리다에게는 아말리아가 당한 것처럼 무례하게 글을 쓰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올가에 따르면 클람은 무례함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성 196) 올가는 더 나아가 클람을 “여자들을 폭군처럼 다루는 종류의 남자, 처음에 이 사람을 불렀다가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부르는 … 클람은 애초에 편지 쓰는 노력도 안 하는 사람” (성 197)으로 묘사한다. 하긴 소설 내용에 의하면, 클람은 자기 새 애인 엄마가 자기 옛날 애인이었다는 걸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니, 올가의 설명이 그럴 듯하다. 어쩌면 “애인”이라는 표현 자체가 프리다와 여관 아주머니를 미화하며, 성의 관료들이 하는 짓을 정당화하는 것일지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착취 받는 것을 당연시하며 이를 심지어 특혜로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이 자율성을 잃고 성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메우 오래된 관행처럼 굳어진 듯 하다. 성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마을 사람들은 성의 수호자 노릇을 자청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아말리아, 벌 받다”라는 장을 보면 어떻게 마을 사람들이 아말리아의 가족들을 왕따시켰는지 전반적인 과정이 세세하게 드러난다. 아말리아의 아버지는 아말리아가 성상납을 거절한 이후에 모든 일거리를 잃는다. 아말리아의 가족들은 마을 사람들의 처벌로 고통을 받는데, 성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올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을 사람들의 냉대에 시달릴 동안 성은 우리에게 어떤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어요. 물론 우리가 과거에 성으로부터 호의를 받았다 해도 어떻게 받았는지 알 수 없으니, 지금 냉대를 받는 것도 무슨 수로 알 수 있겠어요?” (성 207) 성은 항상 저 먼 곳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원하는 것을 요구할 때 빼고는 마을에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올가는 마을 사람들이 성을 두려워해서 자기 가족과 절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올가는 마을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과 다시 연결되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했어야 할 일은 마을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가족은 성의 용서를 구하느라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 208, 209) 그들은 극심한 공포에 빠져, 성이 마을 소녀인 아말리아에 관해 어떤 응답도 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성의 차별 전략은 마을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착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마을 사람들에게 무슨 설명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가족은 성의 권력에 사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아말리아의 가족이 마을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복권시키지 못한 이유다. 이는 K의 상황과도 비슷하다. 그들 모두 성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성의 반응만을 기다리며 소외에 빠졌다.

 

어쩌면 외부자의 시선에서나 마을 사람들이 성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쉬울 수 있다. 마을과 성 사이에는 매우 두껍고 왜곡이 심한 구조가 존재한다. 이 구조는 너무 심하게 비틀어져 있어서 외지인들은 이게 왜 이런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아마 그 지점이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왜 이방인들이 마을을 싫어하는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 역시 외지인을 안 좋아하는지 설명한다. (성 11, 14) 다른 환경에서 온 사람들은 곧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 바로 알아챈다. 이방인들은 상황파을 하기 위해서라도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다. 그들은 곧 성이 마을 사람들에게 언제나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모든 권력의 근원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방인들은 마을 사람들의 행동으로부터 이를 읽어낸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것이 익숙해서 이게 문제라고 딱히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프카는 독자들에게 이곳에서는 시공간조차 비틀어져 있으며, 마을과 성이 실질적인 차원에서도 왜곡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성으로 가는 길은 K에게 드러나지 않으며 (성 12), K에게는 얼마 안 된 시간이 어느새 한나절이 지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성 18) 촌장은 K가 경험하는 것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당신이 겪은 일들은 죄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에요. 여기 상황을 잘 모르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전화도 마찬가지에요. 보시다시피 여기 제 집에서는, 성과 상시 연락을 취함에도 전화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 성과 주기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연락망따위는 없어요. 우리가 성에 연락할 수 있는 중앙 연락처 자체가 없다고요.” (성 74)

 

이 말을 들으면, 성과 마을 사이에 직접적인 연락은 불가능한 것 같다. 다만 오로지 모호함만이 왜곡을 발생시킨다. 마을 사람들 입장에선 모든 게 수상쩍고 불확실하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하기를 포기한 것일 수 있다. 누구도 복잡한 일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타인에게 자치와 자립을 내주는 것은 전혀 좋은 일이 아니다. 복잡해 보이는 일들 뒤로 성이 안개 속에 서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온갖 이득을 취하고 있다. 성의 전략이 비록 가시적이지 않을 수 있으나 아말리아의 가족이 겪은 비극에서처럼 착취는 분명 일어나고 있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 (1) 자기 의심

 

이러한 소외 현상을 근원에서부터 뿌리 뽑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 글이 수차례 암시한 것처럼, 사람들은 자신들이 닿을 수 없는 것에 의존해선 안 된다. 그들은 직접 그들의 자치와 결정권한을 되찾아야 한다. 성의 종잡을 수 없는 안개 속을 뚫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마을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내야 한다. 올가가 이를 분명히 밝힌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찾아주기만을 기다렸어요. 아버지가 공방을 다시 열기를 바랐고, 아말리아가 마을 사람들에게 꼭 맞는 예쁜 옷들을 다시 짜주기를 바랐죠. 우리에게 물건들을 다시 맡기기를 바란 거예요. 다들 우리를 배척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한 거에요. 마을에서 존중 받던 한 가족이 갑자기 마을의 삶에서 배제된다는 건 모든 사람들에게 손해니까요.” (성 208)

 

그녀가 말한 이 단락에 문제를 풀 실마리가 숨어있다. 마을 사람들이 한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손해”라는 부분이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을 배제시킨다 해도 아무것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다! 그 지점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치를 이룰 수 있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미 자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 첫번째로 필요한 것은 자기 의심이다. 다른 말로 이는 현재 상황에 질문하는 능력이다. 이 자기 의심에 가장 좋은 예시는 이방인 K다. 그의 위치는 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 그 자체이며, 그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마을을 처음으로 방문한 그는 마을의 규칙과 정보를 알려고 노력한다. 그가 던지는 질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대답을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K는 학교 선생한테 백작을 아냐고 물어본다. 선생은, “내가 왜 알아야 하는데?”라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성과 소작농들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고 대화 말미에 말을 붙인다. (성 11) K의 질문은 이처럼 마을 사람들이 성과 만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같은 집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질문하는 것 뿐 아니라 K의 행동들도 마을에서 그에게 가능한 일이 무엇이고 불가능한 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연장선상이다. 그는 마을 사람들이 해야 한다는 일들을 최대한 거스른다. 하나의 예는 그가 헤렌호프(마을 관료들을 위한 여관)에 들어갔을 때이다. 주인장은 그에게 술 파는 카운터 밖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지만 K는 하룻밤만 머물면 안 되겠냐고 조른다. 그가 집요하게 굴자 주인장이 흥미로운 말을 한다. “당신이 발견되면 나만 망하는 게 아니라 당신도 망해요. 이상하게 들린다는 거 알지만, 진짜 그래요.” (성 35) 마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규칙을 따른다.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여관 아주머니가 말한 것처럼 K는 “온갖 말썽은 다 불러일으키는” (성 50) 문제적인 사람이다. 그는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이며 마을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이다. 그는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토지 측량사이다. K 본인이 성의 보이지 않는 작동과 작동 오류의 한 예시다. 성이 불러 왔지만 그를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구심을 자아낸다. 왜 그가 여기 있는가? 왜 여기로 오게 된 것인가? 누가 그를 불렀나? 부른 게 성이라면, 왜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가? 일련의 질문들은 현 상황을 가능케 한 권력과 승인 권한의 근본까지 파고든다.

 

하지만 비록 자기 의심이 사람들로 하여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 상황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여전히 한계가 있다. 이 글이 말하는 다른 두 요소가 없다면 자기 의심은 현재 지배세력의 위계질서를 답습하며 그 뒤를 좇는 데만 그친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 (2) 자기 긍정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 긍정이다. 이는 자기 의심 안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자아를 고정해주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근거를 두어야 하지 성과 같은 외부 요소에 의존하면 안 된다. 자기 긍정의 가장 좋은 예시는 아말리아이다. 그녀의 성격은 마을 사람들이나 K가 살면서 봐왔던 모든 여자들과 비교해서도 굉장히 독특하고 이질적이다. K는 그녀에게, “정말 이 마을 사람이에요? 여기서 태어났어요?” 라고 묻는다. (성 168쪽) 아말리아가 소설을 통틀어서도 오롯이 자기 긍정으로 차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이다. K는 아말리아를 “너무나 사람을 능숙하게 잘 다뤄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연관된 일이 아니라도 그녀를 염두에 두고 일을 처리할 정도”라고 묘사한다. (성 172) 아말리아는 예외적인 존재이며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인물이기에 소르티니의 말도 안 되는 청원도 갈갈이 찢어발길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의지를 지켜내며 “성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줄 안다. 아말리아와 K간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대화 부분이 있다.

 

“정말 그런 소문들이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마을 사람들 중에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죠. 당신네 두 명 (올가와 K)처럼 서로 머리 맞대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다 떠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그런 사람들 같을 줄이야.” K는 “맞아요,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소문에 관심을 안 가지고 남들은 어쩌든 나 몰라라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내 관심 밖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렇군요.” 아말리아가 말했다. “정말 다양한 종류의 관심사가 있긴 하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옛날에 성에 대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생각하던 젊은 청년이 있었어요. 다른 건 신경도 안 쓰고 그러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이 온통 걱정했죠. 성에 마음을 온통 빼앗긴 것처럼 굴었으니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성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어요. 성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청소부의 딸 때문에 그랬던 거죠. 나중에 결국 그 청년은 그 딸과 잘 풀렸고,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성 206)

 

아말리아는 전체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진 않지만 자기 긍정의 모범 그 자체다. 그녀는 루머나 소문 같은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한 소문들은 보이지 않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의 분리전략 중 하나다. 보이지 않는 말들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더욱 큰 힘을 갖는다. 아말리아는 일부 사람들이 소문을 떠들어대며 즐거움을 얻는다는 사실을 안다. 흥미롭게도 K는 자신도 그런 부류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남들은 어쩌든 나 몰라라 하는” 태도와 다름 없으며, 이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그의 가치관을 보이기도 한다. 다르게 말하면, 그가 소문을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처럼 남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굉장히 신경 쓴다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말리아가 비판한 것처럼 소문들은 틀릴 수도 있다. 소문들을 통해 사람들은 타인의 의도를 멋대로 짐작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이란 것은 실제 상황에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인데, 문제는 그들이 진실에 다가갈 의지도 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의 입장에서는 신기루 같은 공포를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은 소문을 통해 성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내린다. 소문의 이야기가 어떤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도 거기에 살을 붙이고, 그에 기반해 자신들이 따라야 할 규칙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다. 이처럼 이러한 소문이 진짜가 아닐 수 있음에도,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더욱 움츠러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각과 결정을 따라야지, 타인의 환상을 쫓아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환상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설령 성의 관료들이 요청했다 하더라도 무례한 요청은 무시해야 한다. 그래야 특히 소문 떠들어대는 것을 좋아하는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노예화를 막을 수 있다. 근거 없는 무형의 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게 아말리아가 어떻게 프리다랑 다른지의 차이다. 프리다는 자신의 행동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바를 그대로 반영하는 사람이다. (성 170) 프리다는 다른 사람들의 소문에 자신을 포함시키는 법을 안다. 사람들이 그녀를 클람의 애인이라고 인식하게 만듦으로써 그녀는 스스로를 성과 연결짓는다. 페피가 K와 프리다에 대해 해준 긴 이야기는 프리다가 클람의 애인이라는 소문을 통해 이득을 봐왔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녀가 클람의 애인이라는 소문에는 다른 사람들이 제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지 않고 오로지 프리다의 진술에만 의존할 뿐이다. (성 298) 프리다의 권력은 사람들이 그녀를 클람의 정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페피에 따르면 프리다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람들한테 매력적이지도 않고 영향력도 없음을 눈치채고 작전을 바꿔야만 했다. 페피는 말한다. “프리다는 갈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예전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클람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언제나 계속 만들어낼 수는 없는 거잖아요. … 그래서사람들 사이에 스캔들을 불러일으키기로 작정한 거죠.” (성 300) 페피 말이 사실이라면 프리다는 참 안타까운 존재다. 클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 밝히는 성의 본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남자들로부터 얻은 명성이 없으면 그녀는 아무런 밑천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

 

K가 비록 페피의 이야기를 부정하지만 (솔직히 어떤 사람이 결혼 사기극 피해자로 전락하고 싶겠는가?) 페피가 프리다에 대해 제시하는 설명이 올가의 이야기와 더 맞아 떨어진다. 올가와 아말리아는 3년 전에는 “사람들로부터 존중 받는 아가씨들이었고 프리다는 브릿지 여관에서 하인으로 일하는 무시 받는 여자”였기에 그들은 “프리다를 보지도 않고 지나쳤”었다고 말한다. (성 200) 프리다는 K한테 “그 여자(올가)와의 관계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집에 가서는 당신 옷에 그 집 부엌 냄새를 잔뜩 묻혀온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정말 모욕이라고요” (성 247)라고 말한다. 프리다가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프리다처럼 믿을 구석 없는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자기들 두 발로 충분히 서는 자립적인 존재들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이 말이 맞다면 프리다는 사실 너무나 연약한 존재 아닐까? 페피가 생각하는 것처럼 전적으로 거짓말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프리다도 자기의 상황이 싫어서 벗어나고 싶어할는지도 모른다. 프리다가 “나는 토지 측량사랑 같이 있어요!” (성 44)라고 부르짖는 장면에서는 거의 클람으로부터의 해방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후반부에서 프리다는 다시 옛날의 자리로 돌아간다. 페피가 말한 것처럼 프리다는 이미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처음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며 권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프리다가 이미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소외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자기 긍정 역시 이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 긍정은 자기 의심처럼 불완전하다. 만약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렇지 않은데 단 한 사람만 자기 자신에 긍정적이라면, 그 한 명은 오만한 사람으로만 보일 뿐이다. 이 부분이 올가가 후회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과거에 자매는 프리다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성 200) 올가는 가족에게 닥친 일에 대해 프리다를 포함해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마을의 구조에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은 이 소외를 어떻게 끝낼 수 있는지 그 방법은 알지 못하며, 지배 질서에 자신들을 맞춰 살아갈 뿐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 (3) 연대

 

본고가 제안하는 마지막은 연대다. 연대는 한 명의 개인이나 한 가족만이 아닌 모든 공동체 구성원 전부를 아우르는 넓은 개념이다. 아말리아의 가족에게 없었던 것이 바로 이 연대다. 아말리아와 그녀의 가족들은 이미 서로를 충분히 존중한다. 올가는 자기 자매를 “영웅”이라고 표현한다. (성 194) 아말리아가 소르티니의 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완전히 낙오자가 된 그녀의 아버지조차 “가장 힘든 시간에도 아말리아를 비난하는 말은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성 207) 하지만 그들은 마을로부터 스스로를 배제시켰고 처벌로서 모든 일을 받아들였다. 더욱 최악인 것은 그들이 “성의 용서”를 구했다는 것이다. (성 212) 이건 마치 그들이 아말리아가 잘못했고, 그들은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타깝게도 성은 그 어떠한 긍정적인 미래를 약속하는 소설은 아니다. K의 실패와 아말리아의 가족을 기다리는 희망 없는 우울함만이 자리할 뿐이다. 마을 사람들 간 가능한 연대를 이야기하는 부분은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만약 성의 이야기에서 연대를 끌어내려 한다면 그는 합리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마지막 해결 방식을  카프카의 다른 소설인 “유형지에서”로 끌어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는 성에서 나오지 않는 연대가 언급된다. 다른 카프카의 많은 소설들과 다르게 이 단편 소설은 구체제의 낡고 잔악한 제도가 폐지되는 전환기를 다룬다. 이야기에 나오는 두 명의 등장인물은 장교와 여행자이다. 소설에서 장교는 열정적으로 여행자에게 전임 사령관이 발명한 처형 장치의 작동원리를 설명한다. 새로 부임한 사령관은 이 비인도적인 처형 방식을 반대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그런 조치에 찬성하는 지지자들이 여자들(women, ladies라고 표현됨)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벌써 구토물이 기계 장치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 이게 사령관 탓이야!” 장교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멍한 얼굴로 바로 앞에서 동으로 만든 막대를 흔들었다. “내 기계가 무슨 마굿간마냥 지저분해졌어!” 손을 벌벌 떨며 그는 여행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주었다. “내가 사령관한테 사형 직전 날에는 절대 사형수한테 음식을 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는데도 말이야!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규칙을 따른다 이거지. 사령관 옆에 붙어있는 그 여자들이 이 자식의 배대까리에 온갖 달콤한 것을 처맥였어. 이 인간 평생에 비린내 나는 생선 아니면 다른 걸 먹어본 적이 없는데, 단 걸 먹었으니!”  (유형지 208)

 

분명한 사실은 장교가 새 사령관과 그의 지지자인 여성들이 단 걸 먹이는 바람에 사형수가 토했다고 탓을 한다는 것이다. 장교는 여자들이 사령관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말한다. (유형지, 209) 독자들은 그의 말에서 이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전환기를 이끌어내는 주역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왜 여자들은 사형수가 죽기 하루 전날에 디저트를 준 것일까? 보통 달달한 음식들은 설탕으로 만들어지는데, 설탕 가격이 싸지고 흔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단 음식들은 생존에 필요한 음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미식을 위함이다. 게다가 장교가 말한 것처럼 사형수가 평생 생선만 먹었다면 단 음식은 그에게 매우 호화로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인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이 곧 죽을 사람을 위해 준 게 디저트였다는 것이다. 이는 동정의 표현이요, 사형수가 죽기 마지막에 조금이라도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 것이며, 동시에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명한 장교를 향한 저항인 것이다.

 

독자들은 소설에 언급된 여러 상황들을 고려하여 왜 여성들이 연대를 통해 저항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잔인한 사형법은 전임 사령관이 고안한 이후로 꽤 오래 지속되어왔다. 장교의 다음 말에서 이를 유추해볼 수 있다. “수백명이 파리떼처럼 구덩이 옆에 모여 있던 옛날 같진 않아도,시체는 불가해한 방식으로 사뿐히 날아 구덩이에 떨어졌다.” (유형지 211) 게다가 사형수에게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따위 없다. (유형지 198) 더욱이 행한 것에 비해 처벌이 가혹하다. 그의 죄목은 “보초로서 얌전히 서서 경계를 삼엄히” 하지 못한 주제에, 상사에게 산 채로 먹어버릴 거라 고래고래 소리 지른 것이다. (유형지 199, 200)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분명 죽은 사람 중에는 억울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잡범도 섞여 있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이 유형지는 섬이라서 지리적으로 외부와의 왕래가 힘들다. (성 212) 이런 여건을 생각하면 이때까지 죽은 사람들은 마을에 사는 여자들의 아들, 남편, 형제들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즉, 모두 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전제하면 왜 연대를 형성한 여성들이 사람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손해로 여겨 막으려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이 일은 이미 오래동안 발생한, 그들이 참아내고 견뎌내야만 했던 일인 것이며, 그렇기에 그들이 장교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이 여성들은 개인이 아니며, 연대의 형태로 움직인다. 특정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 “여성들”은 사령관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며 (유형지 210) 뜻을 모아 사형수에게 선물을 준다. (유형지 222)

 

줄이면, 소설 “성”에서 마을 사람들이 창출해낸데 실패한 것이 바로 이 연대다. 사람 간의 진정성은 일상의 관계들로부터 생겨난다. 이 관계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야말로 지배 계층이 원하는 것이다. 성과 관료들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는 거리가 멀어 마을 사람들을 위한 절대적 권한으로 기능할 수 없다. 마을 사람들은 소외에 빠져 있는 스스로를 관조하지 못하고 노예로 전락하여 성적 착취를 은혜로 착각한다. 올가의 증언처럼 마을 사람들은 성의 영향력을 두려워 하며 성을 강력하다고 믿고 따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한 가족을 잃는 것이 마을의 손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 “유형지에서” 일어난 일은 소외 상태에 빠진 마을 사람들과 K에게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지침서가 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카프카의 우울함을 달래주는 길은 마을 사람들의 소외를 해결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의 병은 개인이 수동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상위 질서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상황에서 연유한다. 다르게 말하면, 카프카는 성과 같은 강력한 위계질서에 의해 일방적인 폭력을 당하고 있어 괴로운 것이다. 모든 종류의 악몽에서 우리는 말도 안 되고 별 것도 아닌 것들의 기준을 우리가 만족 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워 한다. 그러나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도 아닌 자들에게 농락 당할 이유가 하등 없다.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명령질만 하는 사람은 무시해야 마땅하다. 어처구니 없는 권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허상의 질서에 가담하는 공모자가 되는 것과 다름없다.

 

겉으로만 그럴싸한 힘에 반항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저항전략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권력의 발생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 자기 의심을 실천해야 한다. 이는 해방에 필수적이다. 때로 외부인의 시선이 도움이 된다. 당연해 보이는 것이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단순히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음 단계는 자기 긍정으로서, 중요하지 않는 소문에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부모와 가족을 신경 쓰는 것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하면 된다. 그래도, 자기 긍정이 굉장히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하나 더 필요하다. 그것이 연대다.

 

성에 나오는 사람들과 카프카의 다른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발생한 비극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카프카 자신도 우울함을 떨쳐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들은 강력한 질서의 피할 수 없는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그마한 가망성을 드러낸다. 은밀하게 감쳐진 권력은 카프카 소설의 모든 곳을 관통하며 흐른다. 사람들은 영향력에 압도되어 있지만,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 알지 못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충실히 권력을 사수한다. 더욱 영광스러운 노예가 될수록 소외 속에 침잠한다. 이것이 K가 항상 실패하고 소외 당하는 이유다. 완벽히 혼자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지만 충분치 않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한다. 아말리아의 가족들이 이웃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을 사람들이 성의 권력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눈떠야 한다. 성의 영향력으로 그들이 손해보거나 희생을 감내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뭉쳐서 함께 저항해야 한다. 마치 유형지에서의 여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때가 바로 사람들이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고 소외에서 해방되는 순간이며- 그 때가 오면, 모든 안개들은 걷혀지고, 마을 사람들은 그제야 – 아, 성은 저 위에 있지 않았구나!- 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Reference

Kafka, Franz, Willa Muir, and Muir, Edwin. The Castle. New York: Knopf, 1992. Print. Everyman's Library ; No. 127.

Kafka, Franz, and Joachim Neugroschel. The Metamorphosis, In the Penal Colony, and Other Stories: With Two New Stories. First Scribner Paperback Fiction ed. 2000. Print.

Marx, Karl. [1837-1894] 1978. The Marx-Engels Reader. 2nd edition. New York: Norton.

Rousseau, Jean-Jacques. [1754-1762] 2012. Basic Political Writings: Discourse on the Sciences and the Arts, Discourse on the Origin of Inequality, Discourse on Political Economy, on the Social Contract, the State of War. Cambridge: Hackett Publishing Company, Incorporated.

 

 


내가 영어로 쓴 글을 한글로 직역하고 다시 따로 엄청 다듬었다. 써놓고보니 내가 많이 허술하게 썼구나 싶더라. 디테일한 점들에서 이 문장들이 왜 나오는 거지 여기서?? 이런 게 많았다.ㅋㅋㅋㅋㅋ

아 그리고 영어 원서로 읽었기 때문에 카프카 영어 원서도 내가 따로 번역했다. ㅋㅋㅋ 에러 작렬로 예상해본다 ㅋㅋㅋ 번역 너무 어려워.. 왜냐면 내 영어실력이 고대로 뽀록나니까. ㅎ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