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홉스의 Leviathan을 꾸역꾸역 영어로 읽었다. 18세기인가 옛된 영어라서 읽는 데 시간이 더 걸렸다. 학기에 읽지 않는다는 걸 알고 절반 정도까지만 읽고 접어버리긴 했는데, 재미없어 꾸덕꾸덕 읽어도 가끔 많은 부분에서 홉스의 현대 서양에 대한 영향력을 읽어낼 때마다 매우매우 인상적이었다.

은근 집요하게 사소한 것부터, 인간과 감각부터 정치론까지 파고 들어가는 그의 이론을 죽 읽다보면, 사실 그의 생각 자체가 흥미로운 점이 아주 많지는 않아도, 기본적으로 홉스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된다는 최장점이 있다. 

홉스가 인간의 능력에 대해 딱히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고, 인간이 많은 한계를 가졌기 떄문에, 인간 본성에 대해 두려움이 많았다는 점이 나는 근본적으로 그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과학적 이성, 국가, 종교가 그에게 왜 필요한 존재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특히 국가라는 지점에서, 왜 commonwealth가 필요하고, 인간 개별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존재를 필요로 하는지까지 나아간달까? 즉, 그에게 인간은 너무나 불안정하고 너무나 주관적인 존재라서 객관타당한 존재를 상정하여 공동체 운영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의 인간에 대한 불신은, 결국 인간 개별이 자신의 권리를 자연스럽게 포기하여 그것을 국가에게 양도하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낳게 한다. 이것만이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홉스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치를 떨고, 인간은 미개하고 가망성이 없어서 힘으로만 다스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람들. 

사람들의 이중성이 너무나 재밌는 이유는, 사람들은 개돼지라는 말을 들으면 발끈하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인간 계급을 나누며 개돼지와 다를 바 없는 자신들의 행태를 곧 인정하는 경우도 꽤나 많다는 것이다. 즉, 상황에 따라 이중적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열받지 않거나 자신이 이득을 보는 상황이면 개돼지라는 말을 쉽게 한다. 


이 자학적이고, 겁많은 인간 본성에 대한 두려움은 홉스에게 있어 우리가 우리 개인의 자유를 일정 정도 양도하고, 사리분별을 파악할 객관성의 권위를 제3의 기관에게 넘겨버리게 하는 근거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나는, 저번에 내가 읽었던 Purcell (2016) 논문에 동의하면서, 홉스 식의 사회계약론이 우리로 하여금 자율성을 상실하게 하고 엘리트 통치의 정당성과 국가 권력의 강대함을 승인하는 기능으로 전락했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데 홉스가 기반으로 하는 이 근거가 사실 얼마나 빈약하고 비객관적인가? 

우선 홉스 말을 따르면, 인간 지식과 애초에 그 지식을 습득하는 인간 신체기관과 인식기관이 그렇게나 오류에 취약한데, 그 기관들로 축적된 인간 지식, 즉 과학으로 하여금 객관성을 습득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또한 가상적 사회, 모두가 모두의 적이 되는 그러한 상황에 대한 가정은 사실 그의 어림짐작 뿐 아닌가? 공포에 가득찬 두려움 뿐 아닌가? 그의 두려움이 기정사실이라 쳐도, 우리에게 국가라는 제3 기구에게 우리의 권리를 양도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 옳을까? 그저 국가권력의 정당화 뿐 아닐까?


아무튼, leviathan에 대한 질문은 많이 생성시켰는데, 내가 오늘 글에서 마키아벨리 군주론과 연결 시킬 지점은 바로 그의 논의, 즉 공과 사의 개념이 분리되어 도출된다는 주장이다.

27번 글에서 그는 앞에서 말한 일련의 과정, 즉 불안전한 개인의 한계로 인해 개인들이 권리를 몰빵해서 발생하는 공의 개념이 생겨 공적 범죄와 사적 범죄가 생긴다고 표현하다. Public crime / Private crime 

내가 이 논의를 받아들이면 결국 공과 사의 개념은 우리 인간이 인간 개별의 상호작용 과정과는 별도로 운영되는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다. 별로 이 책에 대해서 딱히 많은 할 말이 있지는 않다. 단지 내가 앞에서 말한 공과 사의 구분 개념과 관련하여,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책은 우리가 소위 도덕을 정치 영역에서 분리시켜야 한다고 설파했다는 점이다. 그는 좋은 정치인이란, 보통 그 시대 인간들이 생각했던 악덕에 가까운 행동들은 만약 원하는 목적에 부합하는 이득을 주는 효과적인 것들이라면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시행하는 것도 주저해선 안 된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그래서 어떻게 보이냐에 치중한다. 그에게는 자신이 점령하는 성/도시국가에서의 주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에게서의 사랑은 한편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어렵다. 그리고 사랑받는 것에 실패하면 적어도 두려움의 대상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나는 이러한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공과 사가 구분되었다는 그 개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중인격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한쪽 얼굴을 다른 한쪽 면에서 가릴 수 있기 때문에 가식과 위선이 통하는 것이는 것이다. 가식과 위선이라는 말이 너무 가치중립적이지 못해 불편하다면 타고난 정치적 감각을 발휘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바꾸어보자.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그게 왜 가능하느냐. 상황이 확확 바뀌는 공적 상황과 사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전제가 있다는 것이다.


3.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자. 

나는 이 논의가 과연 현대 정치에 부합한가? 고민을 해보았다. 별로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최근 미투운동에서부터 심지어는 트럼프까지, 모든 종류의 정치와 공동체 이슈를 보자.

아니면 한국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핏발 서는 모습을 관찰해보자.

예를 들어 군대를 안 간 연예인 (공)은 엄청나게 비난 받고 심지어는 연예계 활동(사)에도 지장을 받는다.

왜 그런 걸까?

나는 사람들이 멍청해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게 아니다.

공과 사가 대체 얼마나 갈라지는 것인가? 

이 질문을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것만큼 애매모호한 게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큼 인위적인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나 홉스 시절, 왕정 시절에는 사실 이게 어느 정도 가능했다. 아니 심지어는 내 보기에 9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이게 가능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이슈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도껏 해봤자 카더라 통신 어디 뉴스 정도였고, 소위 인터넷의 파급력이라는 게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가지고 있는 그러한 시대가 도래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일군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당신이 취할 모든 얼굴들이 다 까발려지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저 위쪽에서 행한 일이 아래쪽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오른쪽에서 한 일을 왼쪽 사람들이 알게 된 세상이 온 것이다.

기술이 하도 발달해서, 모든 것을 연결시키고 다 빠르게 접목시켜놓으니, 우리에 관한 정보들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융통되고 알려지고 심지어는 가공까지 되는 시기로 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현대 정치의 신도덕론은, 다름 아닌 푸코가 말했던 자기윤리/자기배려의 시대로의 귀환이다.

나의 현재 생각은, 우리가 고대그리스 시절로 귀환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그것도 매우 역설적인 도식으로 말이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연결되고 있고, 그만큼 자율적일 수 있으나, 그만큼 자율을 포기하는 구조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취해야 하는 가면이 많아지고, 공과 사의 구분이 엄격하면 엄격할수록 자율성은 저 멀리로 날아간다. 

정치구조는 그 구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 구분이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기득권을 누리던 엘리트들의 입지는 사라지니까.

인터넷 어딘가의 누군가가 저 상아탑의 전문가보다 더한 전문가일 수 있게 된 이 시대가 온 것이고, 이제 소위 정치인/고위층들은 우아한 고급 귀족으로서 항상 근엄하고 인자한 얼굴을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뒤에서 갖은 욕과 갑질을 하는 모습들이 우리들 카메라로 찍혀 세상에 나뒹굴 테니까.


이런 시대에 취해야 하는 소위 "정치인"의 모습, 혹은 정치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취해야 할 참된 정치의 신도덕론적 방향은, 말한 것처럼 자기윤리, 자기배려, 우정의 자기자율의 힘으로 스스로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살피고, 그 맥락에 따라 움직이며, 파레지아(용감한 말하기)를 실천하는 언행일치하는 자의 얼굴이다. 이때의 그 얼굴은 모든 면에서 분리된 "현대인"의 얼굴이 아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자유로운 "나"의 얼굴인 것이다.


4.


언급된 참고문헌


Mark Purcell  (2016) "For Democracy: Planning and Publics without th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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