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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1.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다. 분량도 많지 않고 서사도 단순해 읽는 게 어렵진 않았으나, 파고들수록 난해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11)라고 소설 속 화자가 말했던 것처럼 형식의 독특함 때문이었을까. 예술(영화, 문학, 연극 등)을 다룬 예술(소설)이라는 점, 허구와 현실을 뒤섞는 서술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랬다.
2. 이야기해보고 싶은 키워드는 ‘읽고 해석함으로써, 고민하고 씀으로써 치유되는 문학’, ‘여성의 성장 서사’, 노년과 소수자‘, ’전쟁과 정치‘에 대한 것 등등 꽤 여럿 있었다.
서사는 짧은 분량 상 단순하다. 영화 제작자 ‘고모리’와 여배우 ‘사쿠라’, 소설가 ‘겐자부로’가 고모리의 주도로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지만 30년 후에 다시 모여 갈무리한다는 이야기다. 서사의 핵심이랄 수 있는 ‘8밀리 판 애너밸 리’ 영화의 무삭제판에 담긴 진실은 초반부터 끊임없이 간접적으로 제시되고 있어서 솔직히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하진 않았다. 외적으로 몰입감을 부여하는 갈등도 얼마 없는데다가 사쿠라의 정서적 혼란같은 중요한 내적 갈등마저 간접적으로만, 드물게 제시될 뿐이어서 잔잔하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고모리는 (…) 미국, 독일, 중남미, 아시아의 제작 팀이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각각 영화로 제작해서, 클라이스트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 동시에 상영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다.“(37)
“막 소녀기로 접어들 무렵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시키는 대로…… 그것도 미국 군인의 끔찍한 …… 강요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내린 결론으로 늙은 여자가 계획하는 일에, 분명히 협력해줄 것이라고 했네.”(20)
3. 앞서 이 소설의 왠지 모를 난해함이 형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예술을 다룬 예술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난해함이 오는 건 아니었다. 그건 형식 자체에서 왔다기보다는 형식에서 파생된 효과에서 왔다.
겐자부로가 소설에서 다룬 예술은 허구의 것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진짜로 있는 것들이다. 애드거 앨런 포의 ‘애너밸 리’라던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라던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도 그렇다. 문제는 이런 작품의 역할이 소설에서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이 작품들을 텍스트 외부에서 어느 정도 끌고 와야만 그 역할이 이해가 되고 갈무리가 된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느낀 난해함은 여기에서 일부분 왔다. 포의 ‘애너밸리’, 나보코프의 ‘롤리타’,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 모두 읽어본 적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애너밸 리’는 포가 자신의 사촌이자 아내였던 버지니아 클렘이 죽은 후 그녀를 기리며 쓴 사랑 시이고, ‘롤리타’는 나보코프가 ‘애너밸 리’에 많은 영향을 받아 쓴 소아성애자 험버트에 관한 이야기다.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애너벨 리’는 그런 점에서 포의 시에서의 상징보다는 롤리타에서의 ‘님펫’에 가까운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물론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애너벨 리이자 롤리타는 ‘사쿠라’이고 험버트는 ‘마거섁 교수’겠다. 이렇게 소설 안에서 차용된 각종 작품들의 맥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겐자부로가 도대체 이 작품을 왜 끌고 왔는지, 이 작품의 특정 구절들이 소설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게 되어있다는 게 난해함의 한 이유였다.
형식적인 난해함 중의 다른 한 요소는, 겐자부로가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직조했다는 점이었다. 히카리는 실제 겐자부로의 아들이고 와타나베 교수도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다. 읽다 보면 소설의 화자는 겐자부로 자체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겐자부로처럼 보이는 이 소설의 화자는 정말 겐자부로인가? 그 의도를 알진 못하겠지만 오히려 이런 질문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작가와 무관할 수 있는가? 무관하지 않다면, 이렇게 쓴들 무슨 상관이랴, 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역자가 해설에서 언급하듯 “작가는 ‘문체’를 다듬는 일로 ‘앙가제’한 것이며 소설의 ‘리얼리티’를 구체화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문학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문학을 현실과 인생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4. 주제는 많지만 나는 역자 박유하 교수가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과 치유’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역자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요약한 바 있다.
“영화 제작 과정이 모두에게 하나의 치유 과정이 되고 있다는 것이 오에가 발견한 ‘새로운 형식’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위무하는 예술로서의 문학과 영화에 대해 쓴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236)
마거섁 교수의 의도를 소설 내용만으론 명확히 알긴 어렵다. 하지만 그는 사쿠라에게 자신의 기묘한 성적 취향을 강요한 가해자이자 갈 곳 없는 그녀를 돌본 보호자였다. 그녀는 보호자이자 가해자였던 그에게 느꼈던 양가적이고도 혼란스러운 감정 때문에 트라우마를 갖고 고통을 받으며 살았는데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 각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경험과 감정, 진실, 실체를 조금씩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쿠라는 영화의 주인공을, 여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바꿔버린다.
“이건 정말 대수확이에요! ‘메이스케 어머니’는 ‘환생한 메이스케’를 보좌하는 역할로 봉기에 참가한 것이 아닐 거예요. 억울하게 죽은 ‘메이스케’의 리스베트 역할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녀가 진정한 봉기의 주동자였어요. 이건 내 영화예요!”(83)
“사쿠라 씨는 복수의 일념에 불타 분노하고, 울부짖는 여성으로서의 ‘메이스케 어머니’가 자신이 원하던 캐릭터라고 말하고 있어….”(88)
“사쿠라는 영화의 주인공의 이미지를 설정하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새롭게 만들어나간다. 사쿠라에게는 자신이 ‘점령군의 성적 노예가 아니었다’는 확인이 필요했는데 그 계기를 작가의 어머니와 소설 속 여성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통해 찾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쿠라는 ‘가엾은 고아’가 아닌 강한 여성으로 자신을 이미지화하고 그 여성을 연기하는 일로 새로운 자신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231, 해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쿠라의 내면과 내적 변화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 암시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아쉬웠다. 사쿠라가 겐자부로 어머니의 연극 공연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넋두리’를 통해 자기가 맡은 캐릭터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그 변화를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좀 부족해 보인다. 어쨌든 사쿠라는 ‘메이스케 어머니’의 위치를 끌어올리고 그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는 그 역할에 자신을 이입했으며 이렇게 소설을 각색하고 영화를 기획하면서 조금씩 치유된다. 이는 와타나베 교수 사후 무기력해졌던 겐자부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렇게 점차 용기를 내고 진실에 다가갔을 때, 약간은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마주한 현실은 그녀에게 버거웠던 것 같다.
“굵은 알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교토의 호텔에서 들은, 꿈을 꾸며 우는 소녀의 호흡으로 그 울음소리는 이어졌다.”(184)
‘애너벨 리 영화’를 찍는 순간에 데이비드는 사쿠라에서 저지르면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고모리는 이 영화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인생이 걸린 문제” 이며 “그 문제와 직면해서 근본적인 치유로 나아가야 할 관문”이라는 생각에 무삭제판을 사쿠라에게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난 이 장면을 보면서, 작품을 재해석하고 특정 인물에 자신을 대입함으로써 찾아오는 예술이 지닌 치유의 효과가 있지만 그 치유는 갑작스러운 꺠달음보다는 점진적이고도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일종의 ‘성장’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사쿠라는 영화를 준비하며 조금은 치유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를 직시할 정도는 되지 않았고, 그렇게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타격은 사쿠라가 정신병동에 가야 할 정도였다. 다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30년 동안 계속한 영화에 대한 생각”이라고 고모리가 말했던 것처럼, ‘미하엘 콜하스 계획’이 갑작스러운 사건들 때문에 무너진 뒤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영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겐자부로의 동생 아사에게서 ‘메이스케 어머니’ 캐릭터 구체화를 위한 ‘넋두리’의 구절들을 계속해서 보고받아왔다. 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속 예술을 읽고, 보고, 만지고, 재해석하고, 각색함으로써 사쿠라가 점차 상처를 받아들이고, 응어리진 부정적 정서를 분출하고, 회복해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원초적 상처가 강렬할수록, 상처에 약을 바르고, 딱지가 앉는 것을 보고, 새살이 돋는 것을 보기까지 정말 지난한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맞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넋두리’로 풀어내고 싶은, 엄청난 응어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 ‘넋두리’에, 숲 속, 숲 주변의 여자들이 총출동해서 너도 나도 울며 몸을 흔들고, 반나절이나 감동했던 거지. (…) 토지의 여인들 모두에게, 오래된, 그야 말로 봉기가 있었던 그 옛날부터 비탄이며 분노가 쌓여왔다는 것이지! 그리고 사쿠라 씨는, 마음을 정했다는 식으로 말했어. 30년 전, ‘미하엘 콜하스 영화’를 찍으려고 했다가, 연극 공연 이야기에 감동받았을 때, 실은 자신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고.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그만큼의 비탄과 분노의 경험이 있다고. 지금이야말로 그걸 하고 싶다고.”(199)
5. 사쿠라의 모습은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이렇게만 하면 금방 바뀐다, 너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빠름과 강박’의 시대지만 인간은 그와 맞지 않다. 변화는 천천히 온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렇구나’라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고, 더 나아갈 수 있는 동기와 용기, 구체적인 모습을 제공하는 예술(소설 등)은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개인에게 방법론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이렇게 하라), 정서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느꼈다) 또한, 읽고 쓰는 일이 단기적으로는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것 같지만, 길게 봤을 때는 변화와 성장을 위한 최선의 길이고 그것은 묵직하게 꾸준히 했을 때만 천천히 찾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겐자부로에게 소설쓰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소속감, 안정감, 치유, 변화와 성장’과 같은 키워드의 맥락 속에서.
6.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회독하다 보면 ‘늙는 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이와 다르게 보이는 외모, 또는 일부 신체의 특성, 어떤 인격적-행동적 특징은 변화와 성장 뿐 아니라 성숙, 나이듦이라는 키워드와도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나 사쿠라 뿐만 아닌 겐자부로와 고모리의 관점에서의 치유와 변화, 성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둬야 겠다.
7. 앞서 말한 것처럼, 문학과 치유라는 관점에서, 사쿠라의 내적 변화가 조금은 두루뭉술하게 묘사된 것도 좀 아쉬웠고(예술을 읽고,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과정 자체가 내적 변화의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그런 식으로 유추되는 사쿠라의 내면만으로는 예술과 치유와의 관계가 매우 피상적으로 묘사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적어도, ‘가해의 복잡한 동기’를 묻지 않았을지 언정 ‘피해자의 복잡한 심리’를 ‘다층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있었다. - 이나라) 이 소설에서 묘사된 여성상 자체도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소설에서 묘사된 여성상(분노, 한, 원혼)을 보며 다음의 구절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떠올랐는데
“관조적인 영화 성장영화에서 주로 앞세워지는 것은 여성의 피해상황과 무력함인 경우가 많다. 혹시 이들 영화가 전시하는 이미지는 이미 한국영화가 ‘순수하고 상처받은 존재’로 표상해왔던 여자아이 이미지의 반복이 아닐까? 이때 아이는 순수하기 때문에 세계의 질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순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아이는 상처받은 존재이기에 순수하고, 순수하기에 상처받는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이나라, ‘성장하는 여성, 달라지는 여성서사’)
사쿠라의 모습에서 위 구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면 좀 지나친 걸까. 이런 이미지의 한계는 소설 내부에서 ‘미하엘 콜하스 계획’의 주인공이 메이스케가 아닌, ‘메이스케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리고 여성이 봉기의 주동자가 됨으로써 어느 정도 극복이 시도되는 것 같긴 하지만 이는 허구속으로의 도피가 될 여지는 없는 걸까. 다만, 이렇게 읽어버리면 소설이나 예술의 가치가 폄하될 것이다. 그 극복의 시도 자체에서의 의의를 찾는 식으로 읽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하 엔야 코라야
돗코이 잔잔 코라야
봉기에 나섭시다
우리들 여인들이여 봉기에 나섭시다
속지마라, 속지 마라!
하 엔야 코라야
돗코이 잔잔 코라야”(219)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의 정서’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이자, 한의 정서와 비애미를 한민족 예술의 본질적 특징으로 규정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한민족 예술을 한의 정서나 비애미로만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런 행위는 역설적으로 숙명론을 끌고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런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야기가, 소설 속의 여성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여성이 봉기의 주동자가 됨으로써 ‘무력함’이라는 이미지는 극복될 지언정, ‘피해받는 여성, 상처받은 여성, 그럼으로써 원한이 쌓이고 안에 분노와 한이 쌓인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극복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여성의 이미지도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비판과 똑같은 비판이 적용될 수 있겠다)
“어머니가 위엄 있는 의상에 큰 가발을 쓰고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이 되어 울부짖듯 분노에 심은하듯 노래를 계속하던 모습 전체가 기억 속에 온전히 되살아나 지금 나와 함께 있었다.”(219)
“불굴의 저항심을 가진 여성이 한 번은 봉기하여 승리했지만, 다시 한 번 새 시대의 권인 대참사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그 싸움에서도 이겼지만, 함께 봉기한 무리들과 헤어지고 나니, 아들은 구세력에 의해 돌에 눌려 죽고, 자신은 강간, 윤간을 당한 겁니다. 절망감으로 탈진해 누워 있는 여인에게, 좋았느냐고 묻는 남자가 있었던 거예요…… 이후로도,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하더라도 여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고난이 이어지는 거지요.”(171)
치유와 성장의 서사 안에서 사용하기 쉽고, 또 벗어나기 어려운 이미지이긴 하지만…
8. 희망이 없는 건 아니나, 역시나 사는 일은 지난하다는 말로 이번 글을 갈무리해야겠다. 그렇기에 이런 고민과 행동이 가치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읽고 쓰면서 성장하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사쿠라처럼, 30년을 뭔가에 몰입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며 살 수 있을까. “폭력을 경험하고, 폭로하고, 고백하는 인간을 피해자로 환원하지 않고 인간으로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와 픽션의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이나라, 위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