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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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계기는 영화였다.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 장편 영화.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혹해 영화관에서 본 ‘The Room Next Door’. 하지만 타이틀을 감안했을 때 감독의 미적 감각과 탁월한 연출을 제외하고 서사나 주제적인 측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진 못한 작품이었다. 마침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었고, 생각보다 감응받지 못한 작품에 대해 내가 놓친 건 없는지, 원작 소설을 읽어 보면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이 책까지 손에 들게 되었다. ‘What are you going through’라는 소설이다.


그런데 웬 걸. 당연히 달라야 겠지만 책과 영화는 생각보다도 더 달랐다. 영화는 잉그리드와 마사의 관계, 그리고 죽음과 탄생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춘 반면 책은 초점이 영화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그만큼 영화가 메시지가 뚜렷했던 것에 비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이야기가 산재했고 그 통일성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관찰자적 화자’라는 줄기가 힘겹게 엮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점에서 ‘사실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이야기의 초점은 흐렸고 그만큼 흐린 활자 사이로 이야기의 줄기를 솎아내는 데 집중하며 읽어야만 했던 작품이었다.


2. 처음 읽었을 때는 화자와 친구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주로 언급하는 소설로 읽혔다. 그런데 이렇게 읽었을 때 이 소설은 그닥 흥미를 끄는 구석이 없었다. 죽음을 주제로 한 매우 훌륭한 소설인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은 적이 있었고 두 작품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 깊이와 방식에서 더 탁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가 굳이 새로울 게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 소설을 썼을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다르게 읽힌 건 발췌를 위해 다시 간단히 훑어보던 때였다. 소설을 읽을 때 화자든 주인공이든, 등장하는 인물의 어떤 결핍과 그 결핍을 어떤 조금 더 나은 상태로 바꾸고자 하는 욕망에 주목하는 편인데, 다시 읽어 보니 흐릿한 초점 사이로, 화자의 각종 회상과 판단 등의 편린들 사이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암에 걸린 친구와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변화하는 화자의 태도가 눈에 띄었다.


3. 소설은 화자가 한 남성의 강연을 들으러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국제적인 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다. 화자의 옛 연인이다. 먼 곳에서 옛 연인을 위해 찾아온 건 아니었다. 화자는 암에 걸린 친구를 수년 만에 만나러 왔다. 다만, 마침 그 지역의 대학에서 그가 강연을 했고 별다른 연락없이 찾아가 강연을 들은 것이었다. 


이때 화자의 태도는 소설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시몬 베유의 말 -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 하고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 이 풍기는 아우라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지내요 묻는다는 건 분별하고 판단하기 전에 상대의 맥락을 궁금해한다는 것,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화자는 그런 시도 전에 상대를 가볍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프레임에 맞춰 해석한다. 강연장에 오자마자 홍보물 사진 속 그와, 그를 소개하는 학과장에 대한 인상의 언급에서 그런 화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나이 들어가는 백인 남성들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갖게 되는 그 인상. (...) 꼭 와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부디 와주시면 좋겠어요! 도무지 이런 말은 할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이런 식에 가깝다. 명심해, 내가 당신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아. 그러니 내 말 새겨들어. 그러면 뭐가 뭔지 좀 알게 될 테니.](11)


[익숙한 유형의 여성이다. 매력 넘치는 학자, 지적인 요부, 똑똑하고 고등교육도 받았지만, 페미니스트이고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여성이기도 하지만, 결코 촌스럽게 옷을 입지도 않고, 따분한 공부벌레이거나 무성적인 드센 부류도 아님을 알리려고 기를 쓰는 그런 사람. 그러다가 특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 딱 달라붙는 치마와 굽 높은 신발, 빨갛게 칠한 입술과 염색한 머리 (...) 그 모든 것이 ‘난 아직 섹스할 만한 여자야’라고 주장하고 있다.](11, 12)



이 인상은 특정 성에 대해 본인이 지닌 부정적 이미지를 투사한 것이다. 자세한 관찰이나 맥락을 캐려는 노력없이 가볍게 단정짓고 판단해버리는 태도. ‘그럼 그렇지. 어차피 뻔하지.’와 같은 태도다. 그의 강연을 향한 화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강연의 흐름을 여러번 놓치고도 어차피 대부분 아는 내용이니 괜찮다고 말한다. 자기가 지닌 이미지, 관념 등을 통해 현실을 ‘이미 재단해버리는’ 화자의 태도는 그의 강연이 단정적이며 어떤 대안과 희망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그 자신의 분별과 모순된다. ‘어차피 끝났어.’라는 외침과 ‘어차피 그렇지.’라는 말은 그 근본에 있어서 유사하다. 화자는 자신이 비판하는 것과 닮았다.



[다 끝났다고 그가 말했다. (...) 인간 이전에는 숲, 인간 이후에는 사막. 대재앙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희생을 해야 하든, 인류에게는 그렇게 해보려는 의지가, 집단적 의지가 없음이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지능 있는 외계생명체에게 우리 인류는 죽음 소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15)


[그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의견이 아니라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신들이 내 말을 믿건 말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이 자리에서는 그래도 뭔가가, 낙관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차피 완전한 파멸이라는 예언이 아닌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뭐라도 해볼 수 있는 길이 있다든가, 하다못해 한 가닥, 다만 한 가닥일 뿐이라도, 희망이라든가.](18)



책을 다시 훑으며 새로 보게 된 결핍이 바로 이거였다. 시몬 베유의 말 뒤로 등장하기에 더 괴리되어 보이는 화자의 태도.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당신들은 틀렸고 잘못되었지만 나는 더 많은 걸 알고 우월하기에 판단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 듯한 아우라. 화자가 관찰한 타자, 화자가 들은 일화에는 이러한 태도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4. 결핍은 명확했다. 다만, 그 결핍에 대한 자각이나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분명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변화의 계기도 불분명했다. 그게 이 소설이 한편으론 단순하게 느껴지면서도, 깊이 읽어 보자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기도 했다. 산만하게 등장하는 에피소드들 사이로 화자가 지닌 태도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를 야기하는 화자의 내적 맥락을 어떻게 추적할 수 있을까. 분명 핵심은 암에 걸린 친구와의 만남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뜬금 없지만 화자가 초반에 그려내는 세상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그 세상이 어떤 곳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화자를 비롯해 우리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 작가는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어떤 태도를 견지하며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흐름으로 이 책을 재미나게 읽어보기 위해서. 


일단, 화자가 그려내는 세상은 시기적으로도 현재와 가까운 만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화자의 연인이 이를 강연에서 묘사하고 있다.



[화석연료 기업, 그들은 몇이나 되고, 우리는 대체 몇입니까? (...)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세력의 선두에 서서 활개 치고 있으니 우리 지구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전 지구적 생태계 재앙에서 비롯한 식량과 식수 부족 때문에 생겨난 수많은 난민 (...)](17)


[사이버테러리즘. 바이오테러리즘. (...)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으로 인한, 치료법이 없는 치명적 감염병. 전 세계적인 극우 정권의 발흥. 선전선동과 속임수가 정치 전술과 정부 정책의 기반이 되고, 그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상황. 전 지구적 지하디즘을 제압하지 못하는 무능 (...)](18 19)



이를 단순하게, 우리가 어떤 지구적, 사회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말로 요약해보자. 지구적, 사회적 위기를 해결해나가 위해 우리는 서로 타협하고, 합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할 테다. 하지만 사람들은 봉합되기 어려운 수준의 갈등으로 분열을 겪고 있고 적대와 증오가 일상이 되었다. 회의감에 빠졌다. 개인적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고통에 서로 공감하기보다 싸우고, 단절되어 있다. 개인의 증오를 타인과 세상에 투사한다. 남과 세상을 탓하기만 한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고통속에서 좋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자도 마찬가지다. 앞서 화자의 결핍이 분별하고 판단하는 태도라고 말했다. 이는 이해와 공감이 아닌 단절이 기본값인 태도다. 많은 에피소드들은 사람들의 고통, 그 고통을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그 에피소드들에 깔린 화자의  태도도 회의감, 단절, 비아냥과 같은 키워드들로 묘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게 화자가 읽는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하다.



[침대에 누워 불을 끄려다가, 협탁에 쌓여 있는 미스터리 소설 중 맨 위쪽 책을 집었다. 1970년대 뉴욕의 지저분하고 누아르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하이스미스와 심농의 전통을 잇는 심리 스릴러.](32)



심리 스릴러 미스터리 소설. 분위기는 을씨년스럽다. 등장인물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나아가 죽이려고 한다. ‘양심과 공감 능력이 결핍된, 잔인하고 가학적인 인물’이자 그나마 ‘자기향상의 열망’까진 지닌 인물이다. 소설의 분위기나 등장인물은 지구적 위기나 혐오와 증오에 빠진 사람을 향한 은유다. 은유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태도나 화자의 태도나, 다시 말하지만 닮았다. “굳이 더 알아내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었다. (...) 살인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36)고 말하는 화자는 어차피 이런 소설은 결말이 뻔하며, 그 결말은 대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절, 회의가 디폴트 값인 태도다.


그 뒤로 화자가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화자의 ‘자기향상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판단하고 분별하고, 단정짓기보다 처음 보는 것처럼 궁금해하고 뭔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향한 열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흐릿한 욕망이 보이는 포인트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에 요양원에 사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책이 한 권 있는데, 미스터리물인 그 책을 매번 새로 읽듯 읽고 또 읽을 수 있었다. 그 책을 끝마칠 때쯤이면 읽은 내용을 다 잊어버려서, 다시 읽더라도 결론이 어떠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36)



5. 고통 속에서 저마다 갈구하던 건 무엇이던가. “인물들이 드러내는 것은 끝 모를 고독과 슬픔과 자신에 대한 회의였다. 다들 절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듯했다.”(59)는 말처럼, 사람들은 연결되기 바랐고, 행복하길 바랐으며, 사랑을 바랐다.


6. 친구와의 첫 만남. 치료를 시도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의 암 치료는 실패했고 암이 전이됐다. 친구는 다시 입원했다. 화자는 다시 친구를 보러왔다. 죽음과 맞서는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한 후 함께 보는 분홍색 눈송이. 인간의 삶과 닮았다. 잠깐 존재했다 사라지기에 슬프지만, 또 그렇게 유한하고 순간적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눈송이. 누구나 연결되고 행복하길 바라고, 사랑을 바라는데, 왜 단절하고 불행해만 하고 증오에 삶을 내맡기는 걸까. 묘사되지는 않지만 화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병실의 협탁에는 우연하게도, 전에 읽던 미스터리 소설이 놓여 있었다. 굳이 그 뒤가 궁금하지 않다던 화자는 소설을 집어들고 읽는다. 변화가 느껴진다. 궁금해하고, 살펴보려 한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서로 증오하고 단절되어 있는 뭇사람의 모습을 보며 내적으로 어떤 계기가 생겨난 게 분명하다.


7. 소설이 중반부에 이르기 조금 전 여든이 넘은 노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암에 걸린 친구와의 관계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 에피소드다.


할머니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속임수에 걸리거나 사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아가 아들이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들은 직장 때문에 떨어진 곳에서 산다. 혼자 계신 어머니가 걱정된다는 아들의 말에, 할머니와 이웃이던 화자는 “그 남자에게 어머니를 가끔씩 찾아보고, 비상사태가 생기면 가서 살펴보겠다고 했다.”(112) 시몬 베유의 말,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하고 물을 수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지내요?’라는 물음으로 이웃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그것이 어렵지 않은 임무라고 보았다. 대부분 그렇듯이 할머니도 대화를 원할 거라고 보았다.](113)


[하지만 나중에 내가 깨달은 사실은 (...) 전혀 옛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입힌 일이라면 특히 더 그랬다. 누가 그런 일을 떠올리고 싶을까?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듣고 싶을까?](115)


[할머니는 입만 열면 불평이었다. (...) 세상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몇 글자로 요약될 수 있었다. 지옥행 특급열차.](116, 117)


[할머니의 행동에서 가장 기이한 점은 내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 대개는 아예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 말을 들어주는 데는 성공적이었던 듯하지만, 어떤 진정한 인간 관계는 없는 것 같았다.](119)


[바깥세상에 적들이 진을 치고 당신을 노린다며 잔뜩 겁먹은 채 그들을 향한 원한과 억울함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계시잖아요. (...)  난 할머니 잘못이 아니라고, 내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런 일이 정말 내게 일어나기 전에 난 먼저 죽어버릴 것이다.](120, 121)



노파는 암에 걸린 친구와 같이 죽음과 가까운 인물이지만 고통과 마주한 방식은 친구와 많이 다르다. 노파는 고통을 좋지 않는 방식을 마주하는 모습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삶에서 겪은 고통이 내적으로, 또는 관계에서 적절히 해소되고 승화되는 게 아니라 곪아 무한히 확장되는 두려움으로 이어졌고, 잘못 단단해진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생긴 분노, 증오, 혐오의 감정을 세상에 투사했다. 노파가 지닌 투사의 기본태도는 단정과 분별, 그리고 단절이다. 노파는 자신이 지닌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그 프레임은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단정하며, 단정의 확신으로 자아가 부정적으로 단단해진 만큼 타인과 단절됐다. 내가 옳고 세상이 틀린데 타인 또는 세상과 대화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화자는 노파를 보며 느끼지 않았을까. 자기가 그동안 보여준 태도가 할머니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금이라도 바뀌지 않는다면, 노파처럼, 또는 자신의 은사처럼 남을 증오하다가 두려움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지금까지 저러신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선거 때문에 그렇게 열을 내신 적도 없고,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대개 민주당에 투표하셨거든요. 어머니는 한때 페미니스트이기도 했고요. (...) 그리고 여성 행방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많은 여성들이 공직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말씀하신 기억도 나고요.

미친 소리 같지만, 요즘 어머니 말씀을 듣고 있으면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동안 누가 머리에 칩을 박았나 싶기도 해요.](118)


[젊은 시절 내내 인권을 위해 싸웠던 대학 은사 한 분이 긴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쓰는 단어가 겨우 몇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그것도 악을 쓰며 말했다) 그중 하나가 ‘호모 새끼’였고 다른 하나는 ‘검둥이’였다.](121)



화자의 태도에 내적 균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게 다음의 문구다. 노파와의 에피소드가 끝난 후 화자는 시몬 베유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122)



단순히 타인의 고통에 집중하겠다는 건 아니다. 자기 보호와 타인에 대한 이해 및 공감 사이의 어려운 저울질 속에서 그 지난함을 감내하고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묻고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냐고 물을 수 있는, 그런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소박한 다짐의 시작이다. 삶은 원래 그런 이율배반과 지난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8. 인생에서 확실한 게 무엇이 있나.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불확실하며 우리의 능력 또한 그러하다. 화자는 죽음과 마주한 친구를 보며 유한한 인간의 삶, 불확실한 인간의 삶, 또한 유한하며 불확실한 인간의 능력에 대해 자각한다. 삶은 미스터리 소설처럼 미스터리하며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 ‘뻔하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는 말은 오만하고 단정적이다. 뭐가 뻔한가? ‘놀라운 우연의 일치’를 마주하는 화자가 느끼듯, 인생에는 불확실하면서도 신기한 것들이 가득하다. 우리에게 뭔가를 ‘단정’할 만한 능력이 있나? 친구와 과거의 기억이 엇갈리듯, 자기기만으로 파국을 맞는 한 교수의 에피소드처럼, 우리는 틀릴 수 있고,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는 존재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166, 167)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는 단절의 태도다. 나는 남과 다르다.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는 공감, 이해, 연결의 태도다. 나 또한 남들과 같은 유한한 인간에 지나지 않음에 대한 자각.

 

9. “난 치욕스럽게 고통에 시달리다 가지는 않을 거야.”(126) 노파와의 에피소드가 끝나고는 얼마 뒤, 친구의 이 선언이 등장한다. 고통에 맞서 싸우겠다는 듯한 뉘앙스의 선언. ‘그래,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라며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화자는 안락사 약을 사두었다는, 세상을 떠나려는 자신의 곁을 지켜달라는 친구의 말에 화들짝 놀란다. 그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된 건지, 솔직히 내적 맥락이 자세히 그려지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화자는 몇번의 거절과 고민 후 받아들인다. 관찰 및 회고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행했던 타인을 향한 가벼운 평가와 판단을 넘어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깊은 교류가 시작되는 첫 계기다. 노파와의 관계는 관계까진 이어졌지만 진정한 교류로 이어지진 않았으니 말이다.


10. 에어비앤비를 통해 잡은 뉴잉글랜드에 있는 은퇴한 부부의 집. 화자는 친구와 여기에 함께 머문다. 신기하게도 마침, 이 집에도 전에 읽다가 말았던 스릴러 소설이 있다. 화자는 집어들고 읽는다. 처음엔 관심없다더니 읽고보니 50쪽이 남았다. 하지만 아직도 머뭇거림과 망설임이 있다.



[그 후로도 소설은 50쪽은 더 이어지지만 살인자의 운명까지 결정이 된 마당에 마저 읽게 될지 모르겠다. 뭔가 반전이 있겠지만 난 미스터리물의 반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156)



반전은 내 분별, 판단, 예측이 틀렸다는 이야기다. 화자는 아직까지 자아가 단단하다. 삶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삶에 대한 통제욕을 버리지 않았다.


11. 함께 먹고, 자고, 대화하고. 화자와 친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정말 이상해. 얼마 전 산책하다가 친구가 말했다. 때로는 우리가 이곳에 몇 년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슨 뜻인지 나도 알았다. 한 주 만에 우리 관계는 젊은 시절의 우정을 다 덮어버릴 정도로 훌쩍 자라났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이 친밀감 때문에 비밀이나 거짓말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185, 186)



둘은 깊은 대화를 나눈다. 주로 화자가 듣긴 하지만 말이다. 후회와 한탄, 어릴 적 이야기, 원망,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고통 등. 대화를 통한 교류에 판단과 평가보단 경청과 공감이 자리한다. 변화는 미스터리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미스터리물이 너무 좋으니 책을 읽어 달라는 친구. 소설의 시점이 삼인칭에서 일인칭 으로 변경된 건 외부자적 관점에서 판단하던 화자가 타인의 맥락에 깊이 들어왔음을, 자기 일처럼 공감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인칭 시점이 일인칭으로 바뀐다.](199)


[하, 친구가 말했다. 반전이네. 결혼식으로 행복하게 끝나리라 봤는데 절벽이 마련되어 있었군.](200)



소설에는 반전이 있었다.


12.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최근 출간된 소설이 전자책으로 몇 권 있었지만 친구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요즘 소설가들의 파괴적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삶의 참상에 사로잡힌 것을 삶의 전망과 구분한 존 치버의 말을 인용했다.

요즘 소설은 대개 참상에 사로잡혀 있어. 친구가 말했다. 아니면 전혀 설득력 없는 진부한 정서든지.

현대 삶의 참상에 대한 그 모든 책들은, 그래, 뛰어난 책들도 많지, 나도 알아. 말 안해도 안다고. 하지만 난 자기애와 소외와 남녀 관계의 허망함에 대한 얘기는 이제 그만 읽고 싶어. 인간의 추악함, 특히 남자의 추악함에 대한 글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아. 작가의 임무는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교양시키는 일이라고 포크너는 당대의 젊은 작가를 얼마나 심하게 꾸짖었는지. 마치 인간 사이에 서서 인간의 종말을 바라보듯이 글을 쓴다고.

가슴이 아니라 분비선에 대해 글을 쓴다고. 작가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건 두려워서라고 포크너는 말했다. (...) 하지만 작가라면 그러한 두려움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 포크너가 요구했던 건 용맹함이었다. 그다음에는, 오랜 보편적 진리 -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으로 돌아가기. 그것이 없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포크너는 경고했다.](201, 202)



고통, 혐오, 증오, 단절, 싸움… 작가는 통합을 위한 보편적 진리를, ‘친구’의 입을 통해 말하고 싶던 걸까. 다만, 화자는 그런 친구의 말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멋진 말이다. 정말 멋진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늘날의 작가들을 바라보는 여러 방식 중에서 그런 말이야말로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가장 생뚱맞게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린다.](202)


13. 고통과 두려움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연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친구와 화자는 그걸 보여준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이나 위기, 긴급 사태, 특히 죽음이나 죽음의 위협과 관계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전혀 모르는 타인들끼리도 강렬한 친밀감이 생겨나고 때로 이후에도 유대 관계가 지속되는 그런 일은 늘 있다.](208)



죽음을 앞둔 고통과 두려움, 그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 때로는 그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무너져 정서적으로 흔들리고, 딸을 원망하기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화자는 그런 친구의 삶의 맥락에 깊이 개입하고, 그에 공감함으로써 친구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내겐 그 말이 들렸다. 난 강해지고 싶었어. 내가 알아서 제어하길 바랐어. 가능한 한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고 내 식대로 죽고 싶었다고. 평온함을 바랐어. 질서 정연함을 바랐고.](211)



하지만 그러기엔 인간은 나약하고, 삶은 불확실하고, 정서는 쉬이 통제되기 어려울 정도로 이리저리 날뛰고, 추상적 담론으로는 쉬워보이는 일들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친구는 이제 악을 쓰고 있었다. 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그게 사는 거야.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당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게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213)


부조리해보이지만 이게 삶이다.


14.


[내가 아무리 기를 써봐야 언어는 전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어서, 실제 벌어지는 현실을 결코 정확히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겨우 무언가 묘사해내더라도 기껏해야 결국 실재의 옆자리를 차지할 뿐임을 (...)](217)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작가들 - 이들만이 내가 계속 읽고 싶은 작가이고, 나를 고양시키는 작가이다.](218)



누네즈가 특이한 방식으로 소설을 쓴 이유일까. 에세이처럼, 화자의 온갖 편린, 회상이 어느 중심적인 줄기 없이 산만하게 등장하는 듯하게 소설을 쓴 이유가. 그게 더 사실적이니까. 의도는 뭘까? 이게 현실이다?


15.


[친구가 말했다. 지독히 잘못됐잖아. 그 사람의 감정을 그렇게 부정해버렸고, 정말 도움이나 위로가 될 말이라고는 다들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고. 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느낌이냐면, 수치스러워서 역겨워. 그 여자가 세상을 뜨기 전에 누구라도 그 사람을 진정 적이 있었을까, 그 의문이 떠나질 않아. 그 사람을 본 적이.

이것은 내가 지금껏 들은 가장 슬픈 이야기다.]



다름아닌 집단치료의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 진정한 공감과 위로는 없었다. 피상적으로 오고갔던 위로의 말. 친구는 분노했다.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가족.”

“사랑.”

“옳은 일을 하는 것.”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긍정적인 마음으로 꿈을 좇는 것.”

삶의 의미는 삶이 끝난다는 것이죠. 물론 그 답을 생각해낸 건 작가일 거예요. 그 작가는 카프카겠죠.

아니, 당신 자신에게는 무엇이냐고요. 사회복지사가 말한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카프카와 같아요.

하지만 질문은 당신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거예요.

끝난다는 것이라고요. 친구가 말한다. 카프카가 말했듯이(나직하고 새된 웃음소리).](235)



친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아마 화자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차에 짐을 잔뜩 싣고 멀리로 차를 몰았다. 아무 말 없이 몇 킬로미터를 달렸을 때 불쑥 비통하고 낮은 목소리로 친구가 내뱉었다. 죽어라 애쓰고 죽어라 계획해봐야.](243)



계획대로 풀리지 않고 꼬여버린 인생. 딸과 화해할 수 없는 사실과의 화해. 친구는 그저 받아들인다.


16. 친구의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 얼마 전 한 지인의 부고를 떠올리던 화자의 모습은 소설의 초반에 등장했던 모습과 사뭇다르다. 태도가 바뀌었다. 



[비와 자루가 긴 쓰레받기를 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는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공원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이웃이다. 그에게 축복이 있기를.

매일 다람쥐와 새에게 먹이를 주러 오는 여자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다람쥐와 새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하지만 지금 건너편의 저 젊은 연인들. 젊은 두 연인이 앉아 말싸움을 하고 있다. (...) 그들은 젊고, 그들은 아름답다 - 화를 내는 와중에도 아름답다.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싸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런 건 늘 알 수 있다.

오, 제발 싸우지들 말아요, 젊은이. 여기서는 평화를 좀 누릴 수 있게.](248, 249)


[나 역시 바로 오늘 아침에 누군가와 싸웠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 

그가 폭발했다. 정말 딱 당신다워. 역시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 당신은 가망이 없어. 그가 말했다. 

정말 딱 당신다워. 무슨 일로 짜증이 나건, 우리 사이에서 뭐가 잘못되건 늘 딱 당신답다고 했다.](249)



화자는 친구가 안락사 약을 먹을 때 곁에 없어야 한다는 전 연인의 말에, 그런 친구의 행위와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전 연인의 말에, 납득할 수 있는 거짓말을 하는 게 너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돌아온 건 단절, 판단의 태도. 화자가 초반에 보여준 태도다. 그냥 좀 들어주면 안 되나? 쉬운 일은 아니다. 노파의 사례에서 보지 않았나?



[젊은 연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 얘기를 대체 왜 우리한테 하는 건데?

아니, 그들이 상냥한 사람이리라 상상할 수도 있다. 싸우던 것도 잊고, 자기들 문제는 제쳐두고 내 말을 듣는 것이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공유 정신병. 전 애인은 친구와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 표현했다.](250)


17. 소설의 마지막이다. 화자가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연결되었기에 너무나 행복했지만,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 연결이었기에 너무나 슬펐다.


정서적 무너져내림. 자아의 균열. 화자의 뭔가가 바뀌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같다던 그 보편적 진리를 간절하게 외치는 듯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공포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곧 끝날 거야. 이 동화 같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장 슬픈 이 시간은 지나갈 거야. 그러면 혼자가 되겠지.

애도하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251)



화자의 말인지, 작가의 말인지 불분명한 마지막 말.



[독자들이 소설로 이끌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기로 떨리는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덥히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베냐민은 말했다.

나도 애를 썼다. 단어를 차례로 놓았다. 그 모든 단어가 다른 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다른 삶이 그렇듯 친구의 삶도 다른 식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 - 

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251, 252)



18. 내용보다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작가를 계속 읽고 그런 작가가 본인을 고양시킨다고 했던가.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이라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새로울 게 없던 소설이 독특한 방식 덕이었을까 다채롭게 읽혔다. 앞서 말했듯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액자식 구성. ‘우리가 세상을 보는 모습을, 아니, “삶”이란 걸 그대로 그려내고자 했던 것 같다’는 말로 퉁치기엔 가독성을 떨어뜨렸던, 왜 등장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다양한 생각, 관찰, 회상. 산만한 이야기. 단상을 최대한 줄기를 잡은 채로 끼적이려고 노력했지만 화자의 편린이 산만했던 만큼 단상도 산만했던 것 같다. 다채로운 만큼 뭔가 더 깊이 읽지 못한 것 같고 다양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반응과 감정의 맥락을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로 읽으니 이 소설을, 작가의 의도를 아주 조금은 이해한 것 같다. “오랜 보편적 진리 -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으로 돌아가기” 물론 그 길을 걷는 게 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은 용맹함을 필요로하지만.


19. 작가가 그려낸 다양한 삶의 모습이 우리네의 삶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상당히 유사하지 않나. 혐오와 증오, 적대가 디폴트값이 된듯한 상황. 고통, 그리고 고통의 경험이 만들어낸 적절한 근거없이 무한대로 확장하는 공포와 두려움. 부적절한 인과관계의 설정과 부적절한 책임전가에 따른 분노와 혐오, 증오. 왜곡된 감정의 부정적 정서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구체적인 사실과 맥락, 공익을 위한 담론은 실종된지 오래다. 게다가 그런 부정적 정서가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첨단이 정치적 공간이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타인과 관계맺으며 살 것인지, 어떻게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사실상 부재하다. 이미 머릿속에 깊게 프레임화된 틀로 세상을, 타인을 재단해버리니 구체적인 맥락으로의 개입,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할리가.


갑작스레 타인을 향한, 세상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정서적 동요속에서 축복을 외치던 화자의 모습은 내게도 어떤 정서적 감응을 일으켰고 나는 그런 화자를 따라서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오, 제발 싸우지들 말아요. 이럴 때가 아니라구요.’


하지만 이래놓고 나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싸우겠지. 출근 길 혼잡한 전철 안에서 다리를 크게 벌리는, 어쩔 수 없던 신체접촉이 짜증나는 듯 팔꿈치로 찌르는 누군가가 싫어지고, 누군가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고, 소통에 실패하고, 관계맺기를 실패하고, 나아가 누군가를 원망하겠지. 그럼에도 타인의 맥락을 궁금해 하고, 고통을 궁금해하고, 자기연민을 기반으로 한듯한 단절의 담론에 기대지 않고 ‘오랜 보편적 진리’를 향해 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자 노력할 것. 그거 자체로 나름의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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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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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떻게 이 책이 이런 인기를 끌었을까?”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의 첫 페이지를 저 질문과 함께했고 마지막 페이지도 저 질문과 함께했다. 의미는 달랐다. 첫 페이지를 넘기며 던졌던 질문은 아무 배경지식이 없던 페소아 책을 향한 호기심이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던졌던 질문은 어떻게 이런 카오스적인 글이, 은유로 범벅이가 되어 있어서 이게 시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장르적 혼란을 가져다주는 글이, 정서적 혼란과 부정적 정서가 가득해 불안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읽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되는 정도의 글이, 모 배우의 추천을 받았다고 재고가 소진되어 중쇄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2. 페소아는 누구인가? 내가 읽은 문학동네 판본은 페소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가족 모두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이주했다. 1905년에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학업을 중단하고는 영어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12년 “아기아”에 포르투갈 시문학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라 평가받는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일생 동안 여러 잡지와 신문을 통해 130여 편의 산문과 30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자신이 직접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몇 권의 영어 시집을 펴냈다. 1934년 생전에 출간된 저서 중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로 쓴 시집 “메시지”를 출간했다. 틈틈이 기록해놓은 단상들을 모아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질환이 악화되어 1935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아직도 분류와 출판이 진행되고 있다. 포르투갈 문학의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한 페소아는 자신의 존재를 해체시켜 단일한 ‘나’가 아닌 복수적인 존재를 추구했고, 이를 수십명의 이명(異名)을 통해 구현했다. 사후 47년이 흘러서야 출간된 대표작 “불안의 책”은 작가와 흡사한 반(半)이명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영혼의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가 일평생 끊임없이 추구했던 내면의 성찰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주목할 만한 키워드를 뽑자면, 페소아는 20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포르투갈의 시인이라는 것,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라 평가받는 “오르페우”라는 잡지를 창간했다는 것, 『불안의 책』은 여러 단상들이 모인 책으로서 저자의 사후 출판된 것, 독특한 문학적 스타일로 수십명의 이명을 만들어냈다는 것, 『불안의 책』은 그냥 이명도 아닌 반이명이라 평가받는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것, 정도겠다. 이명이라는 게 독특한데, 로맹 가리같은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종종 사용한 가명(假名)과는 다르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가명은 특유의 정체성은 비교적 유지하면서 쓰는 가짜 이름이라면, 이명은 페소아가 창조해낸 아예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다. 소설가가 소설 속의 캐릭터를 창조하듯, 페소아는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해 독립적인 정체성(삶, 사상, 스타일, 문체 등)을 부여하곤 했다. 그리고 이를 한 두명 만들어낸 게 아니라 수십명 만들어내 활동했다. (이게 가능한가?…) 『불안의 책』에도 이런 이명의 화자, 회계사무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불안의 책』 화자인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는 다른 이명과 달리 페소아의 정체성을 많이 닮았다는 점에서 반이명적 존재로 평가받는다. 그런 점에서 『불안의 책』 대부분을 페소아 본인의 독백이라고 보고 읽어도 괜찮은 것 같다. 


3. 이 책엔 서사가 없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책의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잘 표현한다.


[사실 없는 자서전 - 아무 연관성 없고 연관성을 갖추려는 의지도 없는 단상들 속에 나의 사실 없는 자서전, 삶이 없는 인생 이야기를 무심히 털어놓는다. 이는 나의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할말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텍스트 12에서](11)


어떤 특정한 감각 -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 에서 시작되는, 나무형이 아니라 리좀형 또는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체계없는 사유와 이미지, 그것을 묘사하는 부유하는 언어들. 이렇게 연관성이 없는 카오스적인 단상들의 모음이 이 책을 어떤 점에서 잘 요약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불안의 책이라는 이름은 책의 상태를 잘 묘사한다. 화자의 심리 상태뿐만 아니라 책의 존재 자체가 불안하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한구석에 던져진 물건 같고, 길에 떨어진 넝마쪽 같은 천덕스러운 존재인 내가 삶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 한다.”(52) ‘던져진 물건’, ‘떨어진 넝마’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뭔가 초라한 신세인 것 같다는 느낌을 주지만, 구체적으로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어떻게 그렇지 않은 척 한다는 건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되고, 육체와 삶의 감각 속에 침투하여 마치 커다란 거미의 침처럼 우리를 가까이 있는 것들에 교묘하게 연결시킨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침대, 바람에 흔들리는 그 침대에 우리를 가둔다.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이고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이지만,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닐진대 다 무슨 소용인가?”(219) 이렇게 『불안의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한 일반적인 에세이보다는 은유와 상징이 그득한 시적언어를 주로 차용한, 활자 하나하나가 그 단어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기의에 가닿지 않아서 모두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기묘한 글에 가깝다.


4. 그래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이 에세이들을 한 편의 시라면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화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감각, 이 감각을 저 부유하는 활자들을 통해 어떻게 표상하려고 했던 걸까. 그가 감각했던 세상은 어떻게 그에게 다가갔던 걸까. 이런 의문을 자아냈으니까. 하지만 이 에세이들이  한 편의 시가 아니라면, 엉성한 지식에 기대어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헛소리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다. 개똥철학 같다고 해야 하나. (뭐, 또 그렇게 단정짓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단정을 어렵게 하는 어떤 맥락이 존재하는 것만 같아서. 그가 단정, 확신이란 말을 혐오했듯 말이다.)


그랬던 만큼 처음엔 이런 스타일의 글쓰기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반면교사로 느껴졌으니까. 이렇게 부유하는 활자로 도배된 글은 시를 쓸 때가 아니라면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과 그다지 연관이 없고 흐릿한 상태로 존재하는 감정의 뭉텅이를 배출 또는 배설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어서 그 감정의 명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져오고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등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목적에는 제대로 봉사하지 못한다는 걸, 나름 잘 겪어봤다고 생각하는 나니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정말 불안하다면, 오히려 읽지 않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해야 할 정도의 책이니까.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화자에게 점점 더 이입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나는 주로 이 카오스적 단상의 가시밭 길을 ‘내가 궁금한 질문’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헤쳐나갔는데, 그건 바로 “페소아는 왜 이런 글을 썼던 걸까? 특히 왜 이런 이명을 자주 사용했던 걸까?”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다시 풀어 써보자면, 페소아는 왜 자꾸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는 글을, 자신을 깊이 파고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은유적 글을 썼으며, 자아를 통합하지 않고 오히려 자아를 해체하고 분열하는 행위 - 이명을 창조하는 행위 - 를 통해 글을 썼냐는 것이었다.


5. 화자는 이런류의 비슷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한다.


[나의 모든 꿈을 하나의 연속되는 삶 속에 모을 수 있다면, 상상 속의 친구들과 내가 창조해낸 사람들로 가득찬 날들이 이어지는 인생, 이런 가짜 인생 안에서 살고 고통받고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 모든 일이 내 영혼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일어나고 모든 길이 내 안의, 아득히 먼 곳의 기차가 느리게 나아가는 플랫폼까지 뻗어나갈 것이다(…)](155)


[소설 속 어떤 인물들은 평소 현실에서 우리와 대화하고 어울리는 친구나 아는 사람들보다 훨씬 중요해진다는 걸 이미 여러 차례 알아차렸다.](364)


[현기증이 난다. 거친 밀짚으로 촘촘하게 짜 만든 전차 의자는 나를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가고, 나는 공장들, 노동자들, 노동자들의 집, 인생, 현실, 모든 것의 형태로 확장된다.

피곤하고 어지러운 상탱로 전차에서 내린다. 나는 지금 막 인생 전체를 살았다.](376)


[내가 지나가는 모든 집과 별장, 농가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모든 인생을 내 안에서 살아본다. 그 모든 개인들의 삶을 동시에 산다. 동시에 다양한 감정과 여러 감각을 느끼는 나의 특별한 재능, 여러 사람의 삶을 - 밖으로는 그들을 보고 동시에 안으로 느끼면서 - 한꺼번에 살아가는 특별한 재능 덕분에 나는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 사촌들, 가정부, 가정부의 사촌 등 한번에 모든 사람이 된다.

내 안에 여러 인물들을 만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인물들을 만들어낸다. 꿈 하나가 시작되면 바로 한 인물이 나타나고, 그 꿈은 내가 아니라 그 인물이 꾸는 꿈이 된다.

창조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파괴했다. 내 안의 나 자산을 너무 많이 밖으로 드러낸 나머지 잊 내 안에서 나는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나는 다양한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을 공연하는 텅 빈 무대다.](377)


화자는 가상의 인물이 현실의 인물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가상의 삶을 살아봄과 동시에 그 삶을 사는 정체성을 지닌 인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렇게 가상의 인물에 대한 갈망 또는 효용은 여러 소설가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대표적인 작가가 조지 오웰과 쿤데라다. 오웰은 “Why I Write”에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그와 대화하는 취미를 가졌다고 고백한 바 있고(“For this and other reasons I was somewhat lonely, and I soon developed disagreeable mannerisms which made me unpopular throughout my schooldays. I had the lonely child's habit of making up stories and holding conversations with imaginary persons”) 쿤데라는 “삶은 다른 곳에”에서 “누구나 단 하나 유일한 자신의 삶 외에 다른 삶들을 살아볼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당신 또한 실현되지 못한 당신의 모든 잠재적 삶들, 당신의 모든 가능한 삶들을 살아 보고 싶을 것이다. (…) 가능하지만 세워지지 않은 다른 관망대를 우리가 끊임없이 꿈꾸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가상의 인물을 향한 욕망은 어떤 결핍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게 외로움이 되었든, 잠재적 삶 또는 가능한 다른 삶을 살아보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이든, 어쨌든 현실에서 어떤 불만족을 느끼기 때문일 테니까. 생각해 보면 나도 ‘소설 속 어떤 인물은 평소 현실에서 나와 대화하고 어울리는 친구나 지인보다 훨씬 중요’하기도 하고 살아보지 못한 잠재적 삶에 대한 아쉬움에 이리저리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지 않나. 다만, 페소아는 이런 이명을 만들어내는 것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해왔고, 그 이명이 현실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했다는 점에서 좀 다르지만 말이다. 이는 그만큼 결핍이 더 강했다는 뜻일까? 그 구체적 맥락, 또는 원초적 사건을 캐보고 싶지만 정보가 많지 않아 전문가들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상상 속의 인물들은 현실 속의 인물보다 더 선명하고 진실하다.

나의 상상 속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하나뿐인 진실한 세상이었다. 나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과 나눴던 사랑만큼 사실적이고 열정과 피와 생명으로 넘치는 사랑을 결코 해본 적이 없다.](512)


6. 현실을 마주하고 살기에 감수성이 지나치게 풍부했던 페소아. 내적세계로의 침잠, 가상의 삶에 대한 욕망, 실존적 고민 등 공감가는 부분과, 신적 자아를 추구하는 자가 겪게되는 각종 부작용, 자아의 분열, 정체성의 혼란, 무책임 등 반면교사로서의 면모가 공존했던 이 인물에 대한 통합된 이야기를 뭔가 더 풀어서 하고 싶지만, 이번엔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마지막 부분의 발췌로 아쉬움을 달래자. 


[인생의 활동과 목적들로부터 자발적으로 도망치고 세상과의 접촉을 일부러 단절한 결과, 나는 내가 그렇게도 피하려 했던 것과 마주했다. 나는 삶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세상과 접촉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기질이 세상과 만났던 경험을 통해, 삶을 느낄수록 고통스럽기만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접촉을 피해 나를 고립시키자 그러잖아도 예민한 나의 감수성은 고립으로 인해 더욱 극대화되었다.](568, 9)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과 사물들에까지 그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시간이 도망가버려 고통스럽고, 삶의 불가사의가 아프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찾는 장소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던 사람들, 그들을 못 보게 된다면 나는 슬플 것이다. 그들은 그저 모든 삶의 상징이었을 뿐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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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사회적 비용
우자와 히로후미 지음, 임경택 옮김 / 사월의책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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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특히 독일이나 프랑스같은 선진국은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면 자동차를 이용하기 불편한 곳이다. 도시 자체가 조성된 지 오래라 넓은 도로는 외곽이 아니면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도시의 구조를 계속해서 보존하려고 하기에 차를 운전하기에 편할 만큼 널찍한 도로나 많은 주차장을 바라긴 어렵다. 운전 문화도 보행자 중심으로 영국같은 경우엔 무단횡단이 합법이다. 반면, 한국은 무척이나 자동차 친화적인 나라다. 좁은 땅덩어리에 차도 꽤나 많은데 도시 자체가 자동차 위주로 구조화되어 있고 문화도 자동차 위주다. 보행자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고, 초롯불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게 아니면 위험한 일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이렇게 자동차 친화적으로 구조화된 도시, 각종 문화, 국가 정책들에 익숙해져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 사실 보행자 친화적인 나라들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자동차 위주로 살아가고 있는 지를 깨닫는 게 어렵진 않다.




2. 이 책의 저자 우자와 히로후미는 1928년에 태어나 2014년에 타계한, 일본을 대표하는 진보적 경제학자로,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급격히 성장했던 자동차 산업과 그런 분위기와 함께 자동차 위주로 구조화되어가던 일본의 모습을 불안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봤던 인물이다.

자동차가 현대문명을 상징하고 많은 사람에게 편리함을 가져다줬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런 이익이 분명히 있었기에 우리나라만 해도 2023년 기준, 자동차 누적등록대수가 2594만 9000대로 인구 1.98명당 1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1970년대에는 13만대에 불과했으나, 1997년 말 1천만 대를 넘어선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했다) 하지만 우자와 히로우미 교수는 겉으로 보이는 그 화려함과 편리함 뒤로, 자동차가 발생시키는 각종 해악과 그 해악이 제대로 비용화되지 않은, 사회적 비용에 주목했다.

자동차가 발생시키는 해악으론 어떤 게 있을까? 우선, 앞서 언급한 보행자의 권리, 즉 ‘시민적 권리의 침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은 기본권 중에서 안전하고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는 보행권은 시민사회에서 불가결한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위주로 구조화된 도시는 보행자의 보행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한다. 특히, 우리나라가 보행권에 대한 시민의식이 낮은 곳인데, 도로교통공단이 발간한 “2021년판 OECD 회원국 교통사고 비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교통사고 사망자 중 보행 중 사망자 구성비가 38.9%로 1위를 차지했고 이는 OECD 회원국 평균 19.3%의 두 배 수준이다. 일본은 36.6%로 우리나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스쿨존, 보행안전법의 시행, 교차로 우회전 통행방식의 변경 등 보행권을 위한 여러 정책, 제도 등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이를 그저 귀찮은 것으로만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보도 바로 곁을 스칠 정도로 건물이 가까이 늘어서 있고, 사람들은 배기가스와 소음을 뱉어내며 달리는 자동차와 회색 건물 사이의 좁은 길을 조심스레 걸어가야 한다. 게다가 차도를 횡단할 때는 보행자의 편의를 무시한 신호에 겨우 의지할 수밖에 없다. (…) 육교만큼 일본 사회의 빈곤, 저속함, 비인간성을 상징하는 시설은 없을 것이다. 가로 설계에서부터 이미 자동차의 효율적 통행만을 주된 목적으로 삼고 있고, 보행자가 자유롭고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길고 가파른 그 계단들을 노인, 유아, 신체장애자가 어떻게 오르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86, 87)


다음으로는 각종 공해다. 자동차가 직접적으로 배출하는 오염물질부터, 소음, 그리고 자동차의 생산 및 운행을 위해 간접적으로 발생하는 공해까지, 그 종류는 다양하다. 공해의 수준은 각종 통계자료로 잘 살펴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중앙환경분쟁위원회에서 2019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이 체감하는 환경오염 피해 원인의 1순위가 ‘도로의 차량소음 피해’(32.2%)였다. 그리고 환경부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전국 대기오염배출량 중 일산화탄소(CO)의 23.8%, 질소산화물(NOx)의 34.2%, 미세먼지(PM2.5)의 7.1%가 자동차에서 배출되고 있다. 수도권으로 한정하면 이 수치는 각각 36.6%, 48.9%, 13.5%로 더 높아진다.

다음으로 각종 교통사고에 따른 피해다. 한국교통연구원에서 2023년 발표한 2021년 도로교통사고비용 추산액은은 44조원에 달한다. GDP의 2.1% 수준으로 독일(0.7%, 2020년), 영국(0.7%, 2021년)과 같은 교통선진국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다.


[일본의 도로가 이처럼 보행자의 권리를 무시하고 도시환경을 파괴하는 형태로 설계된 결과, 교통사고에 의한 희생자는 해마다 늘어나서 단순히 경제적인 손실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신적 고통까지 낳고 있는 상황이다. (…) 보행자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도로 구조에서는 자동차 운전자가 아무리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교통사고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95)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공 교통의 쇠퇴, 각종 도로 건설로 인한 환경 파괴, 교통체증으로 인한 비용 발생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뒤의 두 가지는 그다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진 않고, 공공 교통의 쇠퇴 부분만 살펴보자. 저자인 우자와 히로후미는 20세기 초만 해도 노면전차를 중심으로 발달되었던 공공 교통서비스가 자동차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쇠퇴하고, 수송분담률에서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인데, 서울 정책실의 “서울 교통정책의 변화”라는 자료에 따르면, 1965년 서울시 교통분담률은 버스가 54.4%, 택시가 26.20%, 전차가 19.4%였다. 이는 자동차의 보급 이전의 수치긴 하지만, 자동차 위주의 정책이 대중 교통 위주의 정책과는 상충되는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특히 수도권에서 더) 현재도 그다지 다르다고 볼 순 없겠다.


3.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자동차가 발생시키는 사회적 비용이 제대로 계량화되지도 않고, 그 제대로 계량화되지 않은 비용마저 운전자가 부담하는 게 아니라 보행자나 거주자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피해는 대부분 힘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보게 되어있다. 


[자동차의 보급이 이토록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에도 그 보유대수가 끝없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동차 통행으로 제삼자가 큰 피해를 입고 희소한 사회적 자원이 소모되고 있는데도 그에 대한 대가를 거의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자동차 소유주나 운전자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을 보행자나 거주자에게 전가하고 본인은 아주 미미한 대가만 지불해도 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동차를 이용하면 할수록 이익을 얻는 셈이 되어 그 수요가 증대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자동차 보유대수가 증가하여 도로가 혼잡해지면 다시 도로의 확충과 건설로 수용력을 높여서 혼잡 현상을 해소해온 덕분에 자동차 통행은 점점 더 편리한 것이 되어 보유대수가 더 한층 증가하고 도로도 다시 혼잡해지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다.](103)


이렇게 발생된 비용을 책임지는 게 아니라 외부로 전가하는 것을 두고 경제학에서는 부정적 외부효과 또는 외부불경제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운전자는 차량을 구입하고 그 차량을 몰기 위해 필요한 비용과 개인이 얻을 편리함과 이익만 생각할 뿐, 그 차량이 사회에 가져오는 각종 피해에 대해서는 제대로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따라서 저자는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을 제대로 산출하고, 그 비용을 제대로 책임지게 하며, 타인의 시민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도로 등을 재정비할 것을 주문했다. 


4. 반세기 전에 쓰인 책이고 저자가 주장하는 각종 방법들이 정치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문제의식은 정말 좋았다. 명확하게 머릿속에 있던 생각은 아니지만, 나도 늘 한국의 자동차 문화라던가 자동차 위주로 구조화된 도시에 대해 어떤 답답함과 불편함,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실용성에 덧붙여 자기과시용으로 사용하는 문화나 후진적인 자동차 운전문화도 그렇고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보행자 친화적인 도시를 설계하고, 그런 곳으로 가꿔나가는 것에 사람들이 관심을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지만 아직 많이 요원해보이는 건 사실이다. 고물가 대응을 위해 유류세 등 각종 자동차 유지비용을 깎으면서, 환경적으로도,  공익적으로도 더 중요한 대중교통은 단순하게 계산된 재무재표상의 적자만을 운운하며 그것이 사회에 가져다주는 편익은 고려치 않고 요금인상의 불가피성이 주장하는 곳이니까. 우회전 구간에서 일시정지한다고 뒤에서 빵빵거리는 곳이니까.

이런 건 결국 올바른 정책적 방향성을 바탕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더 지게끔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공익을 위한 정책적 방향성은 저자가 잘 보여준 것 같고, 그 구체적인 방법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다. 또한, 여기서 책임을 더 져야 할 사람들은 사회에 가져다주는 비용에 비해, 값싼 가격으로 많은 편익을 누리는 자동차 소유자들, 운전자들일 것이다.


[자동차가 편리한 교통수단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자동차를 구입하고 운전하기 위해 각자가 지불하고 있는 비용은 자동차 이용으로 얻는 편익보다 훨씬 작은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라 (…) 수요는 점점 증가 (…) 이 같은 자동차 보급 추세는 도로 건설에 대한 정치적 압력으로 나타나고, 자동차 소유에 따른 사적 편익을 점점 더 크게 만들어서 자동차에 대한 수요를 한층 더 유발한다. 

그러나 자동차 보유대수가 점점 증가하여 국토 면적의 더 큰 비율이 도로 및 관련 시설로 전용되면 될수록 자동차 통행에 수반하는 사회적 비용은 커진다. (…) 시민의 기본적 권리 (…)가 자동차 통행으로 인해 침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도로 건설 등에 얼마만큼의 추가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하는지 (…)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적 비용을 자동차 통행으로 편익을 누리는 사람들이 부담할 때 사회적 공통자본의 효율적인 배분이 실현될 수 있고, 시민의 기본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형태로 자동차 통행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떄 시민의 기본적 권리에 대해 그 구체적 내용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 소득분배의 안전성이라는 기준에 근거 (…) 사회적 비용 개념의 배후에는 우리들이 어떠한 생활 수준을 누려야 하는지, 또한 어떠한 자원배분 및 소득분배의 제도가 바람직한지에 대한 하나의 사회적 가치 판단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다.](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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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1.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이다. 분량도 많지 않고 서사도 단순해 읽는 게 어렵진 않았으나, 파고들수록 난해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11)라고 소설 속 화자가 말했던 것처럼 형식의 독특함 때문이었을까. 예술(영화, 문학, 연극 등)을 다룬 예술(소설)이라는 점, 허구와 현실을 뒤섞는 서술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이 그랬다.

 

2. 이야기해보고 싶은 키워드는 읽고 해석함으로써, 고민하고 씀으로써 치유되는 문학’, ‘여성의 성장 서사’, 노년과 소수자‘, ’전쟁과 정치에 대한 것 등등 꽤 여럿 있었다.

서사는 짧은 분량 상 단순하다. 영화 제작자 고모리와 여배우 사쿠라’, 소설가 겐자부로가 고모리의 주도로 미하엘 콜하스의 영화화를 시도하다 실패하지만 30년 후에 다시 모여 갈무리한다는 이야기다. 서사의 핵심이랄 수 있는 ‘8밀리 판 애너밸 리영화의 무삭제판에 담긴 진실은 초반부터 끊임없이 간접적으로 제시되고 있어서 솔직히 이야기 자체가 흥미진진하진 않았다. 외적으로 몰입감을 부여하는 갈등도 얼마 없는데다가 사쿠라의 정서적 혼란같은 중요한 내적 갈등마저 간접적으로만, 드물게 제시될 뿐이어서 잔잔하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고모리는 () 미국, 독일, 중남미, 아시아의 제작 팀이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각각 영화로 제작해서, 클라이스트 탄생 200주년에 맞추어 동시에 상영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다.“(37)

 

막 소녀기로 접어들 무렵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시키는 대로…… 그것도 미국 군인의 끔찍한 …… 강요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하고 내린 결론으로 늙은 여자가 계획하는 일에, 분명히 협력해줄 것이라고 했네.”(20)

 

3. 앞서 이 소설의 왠지 모를 난해함이 형식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예술을 다룬 예술이라는 사실 자체에서 난해함이 오는 건 아니었다. 그건 형식 자체에서 왔다기보다는 형식에서 파생된 효과에서 왔다.

겐자부로가 소설에서 다룬 예술은 허구의 것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진짜로 있는 것들이다. 애드거 앨런 포의 애너밸 리라던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라던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도 그렇다. 문제는 이런 작품의 역할이 소설에서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이 작품들을 텍스트 외부에서 어느 정도 끌고 와야만 그 역할이 이해가 되고 갈무리가 된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느낀 난해함은 여기에서 일부분 왔다. 포의 애너밸리’, 나보코프의 롤리타’,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모두 읽어본 적이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애너밸 리는 포가 자신의 사촌이자 아내였던 버지니아 클렘이 죽은 후 그녀를 기리며 쓴 사랑 시이고, ‘롤리타는 나보코프가 애너밸 리에 많은 영향을 받아 쓴 소아성애자 험버트에 관한 이야기다.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애너벨 리는 그런 점에서 포의 시에서의 상징보다는 롤리타에서의 님펫에 가까운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물론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애너벨 리이자 롤리타는 사쿠라이고 험버트는 마거섁 교수겠다. 이렇게 소설 안에서 차용된 각종 작품들의 맥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겐자부로가 도대체 이 작품을 왜 끌고 왔는지, 이 작품의 특정 구절들이 소설 안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게 되어있다는 게 난해함의 한 이유였다.

형식적인 난해함 중의 다른 한 요소는, 겐자부로가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직조했다는 점이었다. 히카리는 실제 겐자부로의 아들이고 와타나베 교수도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다. 읽다 보면 소설의 화자는 겐자부로 자체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겐자부로처럼 보이는 이 소설의 화자는 정말 겐자부로인가? 그 의도를 알진 못하겠지만 오히려 이런 질문을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의 화자는 작가와 무관할 수 있는가? 무관하지 않다면, 이렇게 쓴들 무슨 상관이랴, 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역자가 해설에서 언급하듯 작가는 문체를 다듬는 일로 앙가제한 것이며 소설의 리얼리티를 구체화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문학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문학을 현실과 인생으로 만들어나가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4. 주제는 많지만 나는 역자 박유하 교수가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과 치유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보고 싶었다. 역자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요약한 바 있다.

 

영화 제작 과정이 모두에게 하나의 치유 과정이 되고 있다는 것이 오에가 발견한 새로운 형식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위무하는 예술로서의 문학과 영화에 대해 쓴 소설이기도 한 것이다.”(236)

 

마거섁 교수의 의도를 소설 내용만으론 명확히 알긴 어렵다. 하지만 그는 사쿠라에게 자신의 기묘한 성적 취향을 강요한 가해자이자 갈 곳 없는 그녀를 돌본 보호자였다. 그녀는 보호자이자 가해자였던 그에게 느꼈던 양가적이고도 혼란스러운 감정 때문에 트라우마를 갖고 고통을 받으며 살았는데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 각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경험과 감정, 진실, 실체를 조금씩 마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쿠라는 영화의 주인공을, 여성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바꿔버린다.

 

이건 정말 대수확이에요! ‘메이스케 어머니환생한 메이스케를 보좌하는 역할로 봉기에 참가한 것이 아닐 거예요. 억울하게 죽은 메이스케의 리스베트 역할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녀가 진정한 봉기의 주동자였어요. 이건 내 영화예요!”(83)

 

사쿠라 씨는 복수의 일념에 불타 분노하고, 울부짖는 여성으로서의 메이스케 어머니가 자신이 원하던 캐릭터라고 말하고 있어.”(88)

 

사쿠라는 영화의 주인공의 이미지를 설정하면서 동시에 자신 또한 새롭게 만들어나간다. 사쿠라에게는 자신이 점령군의 성적 노예가 아니었다는 확인이 필요했는데 그 계기를 작가의 어머니와 소설 속 여성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통해 찾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쿠라는 가엾은 고아가 아닌 강한 여성으로 자신을 이미지화하고 그 여성을 연기하는 일로 새로운 자신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231, 해설)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사쿠라의 내면과 내적 변화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 암시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아쉬웠다. 사쿠라가 겐자부로 어머니의 연극 공연에 관심을 가지고 특히, ‘넋두리를 통해 자기가 맡은 캐릭터의 이미지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어떻게 보면 그 변화를 드러낸다고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좀 부족해 보인다. 어쨌든 사쿠라는 메이스케 어머니의 위치를 끌어올리고 그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는 그 역할에 자신을 이입했으며 이렇게 소설을 각색하고 영화를 기획하면서 조금씩 치유된다. 이는 와타나베 교수 사후 무기력해졌던 겐자부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렇게 점차 용기를 내고 진실에 다가갔을 때, 약간은 준비되지 않은 채로 마주한 현실은 그녀에게 버거웠던 것 같다.

 

굵은 알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교토의 호텔에서 들은, 꿈을 꾸며 우는 소녀의 호흡으로 그 울음소리는 이어졌다.”(184)

 

애너벨 리 영화를 찍는 순간에 데이비드는 사쿠라에서 저지르면 안 될 짓을 저질렀다. 고모리는 이 영화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인생이 걸린 문제이며 그 문제와 직면해서 근본적인 치유로 나아가야 할 관문이라는 생각에 무삭제판을 사쿠라에게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난 이 장면을 보면서, 작품을 재해석하고 특정 인물에 자신을 대입함으로써 찾아오는 예술이 지닌 치유의 효과가 있지만 그 치유는 갑작스러운 꺠달음보다는 점진적이고도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일종의 성장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사쿠라는 영화를 준비하며 조금은 치유되었지만, 여전히 과거의 상처를 직시할 정도는 되지 않았고, 그렇게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타격은 사쿠라가 정신병동에 가야 할 정도였다. 다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30년 동안 계속한 영화에 대한 생각이라고 고모리가 말했던 것처럼, ‘미하엘 콜하스 계획이 갑작스러운 사건들 때문에 무너진 뒤로도 그녀는 계속해서 영화를 생각했다. 그리고 겐자부로의 동생 아사에게서 메이스케 어머니캐릭터 구체화를 위한 넋두리의 구절들을 계속해서 보고받아왔다. 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속 예술을 읽고, 보고, 만지고, 재해석하고, 각색함으로써 사쿠라가 점차 상처를 받아들이고, 응어리진 부정적 정서를 분출하고, 회복해왔다는 사실을 뜻한다. 원초적 상처가 강렬할수록, 상처에 약을 바르고, 딱지가 앉는 것을 보고, 새살이 돋는 것을 보기까지 정말 지난한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맞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 과정에서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넋두리로 풀어내고 싶은, 엄청난 응어리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넋두리, 숲 속, 숲 주변의 여자들이 총출동해서 너도 나도 울며 몸을 흔들고, 반나절이나 감동했던 거지. () 토지의 여인들 모두에게, 오래된, 그야 말로 봉기가 있었던 그 옛날부터 비탄이며 분노가 쌓여왔다는 것이지! 그리고 사쿠라 씨는, 마음을 정했다는 식으로 말했어. 30년 전, ‘미하엘 콜하스 영화를 찍으려고 했다가, 연극 공연 이야기에 감동받았을 때, 실은 자신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고.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그만큼의 비탄과 분노의 경험이 있다고. 지금이야말로 그걸 하고 싶다고.”(199)

 

5. 사쿠라의 모습은 이런 생각을 하게 했다. ‘이렇게만 하면 금방 바뀐다, 너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빠름과 강박의 시대지만 인간은 그와 맞지 않다. 변화는 천천히 온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렇구나라는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고, 더 나아갈 수 있는 동기와 용기, 구체적인 모습을 제공하는 예술(소설 등)은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개인에게 방법론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이렇게 하라), 정서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느꼈다) 또한, 읽고 쓰는 일이 단기적으로는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 것 같지만, 길게 봤을 때는 변화와 성장을 위한 최선의 길이고 그것은 묵직하게 꾸준히 했을 때만 천천히 찾아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겐자부로에게 소설쓰기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게 아닐까. ‘소속감, 안정감, 치유, 변화와 성장과 같은 키워드의 맥락 속에서.

 

6.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회독하다 보면 늙는 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이와 다르게 보이는 외모, 또는 일부 신체의 특성, 어떤 인격적-행동적 특징은 변화와 성장 뿐 아니라 성숙, 나이듦이라는 키워드와도 연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나 사쿠라 뿐만 아닌 겐자부로와 고모리의 관점에서의 치유와 변화, 성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뤄둬야 겠다.

 

7. 앞서 말한 것처럼, 문학과 치유라는 관점에서, 사쿠라의 내적 변화가 조금은 두루뭉술하게 묘사된 것도 좀 아쉬웠고(예술을 읽고, 재해석하고, 각색하는 과정 자체가 내적 변화의 과정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히 그런 식으로 유추되는 사쿠라의 내면만으로는 예술과 치유와의 관계가 매우 피상적으로 묘사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적어도, ‘가해의 복잡한 동기를 묻지 않았을지 언정 피해자의 복잡한 심리다층적으로 묘사할 필요는 있었다. - 이나라) 이 소설에서 묘사된 여성상 자체도 좀 아쉬운 느낌이 들었다. 소설에서 묘사된 여성상(분노, , 원혼)을 보며 다음의 구절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떠올랐는데

 

관조적인 영화 성장영화에서 주로 앞세워지는 것은 여성의 피해상황과 무력함인 경우가 많다. 혹시 이들 영화가 전시하는 이미지는 이미 한국영화가 순수하고 상처받은 존재로 표상해왔던 여자아이 이미지의 반복이 아닐까? 이때 아이는 순수하기 때문에 세계의 질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순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아이는 상처받은 존재이기에 순수하고, 순수하기에 상처받는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이나라, ‘성장하는 여성, 달라지는 여성서사’)

 

사쿠라의 모습에서 위 구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면 좀 지나친 걸까. 이런 이미지의 한계는 소설 내부에서 미하엘 콜하스 계획의 주인공이 메이스케가 아닌, ‘메이스케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그리고 여성이 봉기의 주동자가 됨으로써 어느 정도 극복이 시도되는 것 같긴 하지만 이는 허구속으로의 도피가 될 여지는 없는 걸까. 다만, 이렇게 읽어버리면 소설이나 예술의 가치가 폄하될 것이다. 그 극복의 시도 자체에서의 의의를 찾는 식으로 읽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다.

 

하 엔야 코라야

돗코이 잔잔 코라야

봉기에 나섭시다

우리들 여인들이여 봉기에 나섭시다

속지마라, 속지 마라!

하 엔야 코라야

돗코이 잔잔 코라야”(219)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의 정서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이자, 한의 정서와 비애미를 한민족 예술의 본질적 특징으로 규정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볼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한민족 예술을 한의 정서나 비애미로만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런 행위는 역설적으로 숙명론을 끌고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이런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야기가, 소설 속의 여성의 이미지와 매우 흡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여성이 봉기의 주동자가 됨으로써 무력함이라는 이미지는 극복될 지언정, ‘피해받는 여성, 상처받은 여성, 그럼으로써 원한이 쌓이고 안에 분노와 한이 쌓인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극복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여성의 이미지도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비판과 똑같은 비판이 적용될 수 있겠다)

 

어머니가 위엄 있는 의상에 큰 가발을 쓰고 메이스케 어머니의 넋이 되어 울부짖듯 분노에 심은하듯 노래를 계속하던 모습 전체가 기억 속에 온전히 되살아나 지금 나와 함께 있었다.”(219)

 

불굴의 저항심을 가진 여성이 한 번은 봉기하여 승리했지만, 다시 한 번 새 시대의 권인 대참사와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거지요. 그 싸움에서도 이겼지만, 함께 봉기한 무리들과 헤어지고 나니, 아들은 구세력에 의해 돌에 눌려 죽고, 자신은 강간, 윤간을 당한 겁니다. 절망감으로 탈진해 누워 있는 여인에게, 좋았느냐고 묻는 남자가 있었던 거예요…… 이후로도,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하더라도 여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고난이 이어지는 거지요.”(171)

 

치유와 성장의 서사 안에서 사용하기 쉽고, 또 벗어나기 어려운 이미지이긴 하지만

 

8. 희망이 없는 건 아니나, 역시나 사는 일은 지난하다는 말로 이번 글을 갈무리해야겠다. 그렇기에 이런 고민과 행동이 가치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읽고 쓰면서 성장하며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사쿠라처럼, 30년을 뭔가에 몰입하고 그에 대해 고민하며 살 수 있을까. “폭력을 경험하고, 폭로하고, 고백하는 인간을 피해자로 환원하지 않고 인간으로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와 픽션의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이나라, 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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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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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인간 또라이 아냐?'

책을 덮은 후 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고는 내 내면에서 이런 소리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실제 내면에서 솟아오른 소리는 저 문장보다 조금 더 과격하고 환멸감이 담긴 표현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저 '또라이'라는 표현에는 환멸감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적 재능을 향한 긍정적 평가도 들어있으니 부정적이기보다는 양가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2. "가면의 고백"에 등장하는 화자처럼 병약하고, 허약하고, 기질이 예민한 캐릭터가 낯설지는 않았다. 조모의 과보호는 주로 여성들 사이에서 자란 니체를 떠오르게 했고 허약하고 기질이 예민한, 자아에 관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홀든 콜필드를 떠오르게 했다. 다만, 이 책의 화자는 동성애자이기까지 하다는 점에서 본 적이 없는 특별한 캐릭터였다. 솔직히 좀 신선했다.


3. 미시마를 찾아보면 따라다니는 키워드들이 있다. '탐미주의자', '우익', '남성문학', '할복' 등. 이 중에서도 나는 미시마가 할복을 했다는 사실이 좀 충격적이었던 탓에, "이것은 역시 미시마의 자화상, 자전적 소설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옳을 것이다."(235)라는 사에키 쇼이치 평론가의 말처럼 이 소설에서 미시마를 찾아 읽어보고자 했다. 즉, 이 소설을 미시마의 자화상처럼 여기고 도대체 미시마의 어떤 요소가 '할복', 나아가 '우익', '전쟁', '남성', '죽음'과 같은 비교적 부정적인 가부장적 모습들로 이어지게 된 것인지에 의문을 품고 읽었다.

이런 또라이스러운(부정적 의미의) 모습에도 어떻게 한국에서 잘 읽히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건지도 궁금했다. 또한, 이 작품이 미시마의 자화상이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면, 작품의 화자가 내적 갈등과 혼란을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할 것인지, 극복이 아니라면 어떻게 실패하는지, 성장하긴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함께 가지고 읽었다.


4. 미시마는 왜 읽히는 걸까. 미시마 할복 사건에서 느끼는 쇼킹함의 영향도 있지만 이 책이나 "금각사"에서 엿볼 수 있는 그의 탐미주의(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의 영향이 더 큰 듯하다. 책의 초반부에서는 그 유려한 문체가 자아도취로 느껴져 거부감이 있었으나 중반 이후로 넘어갈수록 서사의 몰입도가 증가함과 동시에 문체에 대한 거부 반응도 거의 사라져버렸다. 관념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고 좋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대에 썼다는 "금각사"는 이 탐미주의가 어떻게 더 농익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그 손이 나를 두렵게 한 방식은 현실이 나를 두렵게 했던 바로 그 방식과 같았다. 나는 그 손에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사실 내가 공포를 감지한 것은 이 가차없는 손이 내 마음속에 고발하고 소추하는 무언가였다. 이 손 앞에서만은 아무것도 위장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소노코라는 또 하나의 존재가, 이 손에 저항하는 내 유약한 양심의 유일한 갑옷, 유일한 방탄복이라는 의미를 꺼내 들고 나섰다. 나는 반드시 그녀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것이 나의, 예의 깊은 밑바닥에서 느꼈던 양심의 가책보다 더더욱 깊은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당위가 되었다…"(143)

 

5. 미시마의 대리인으로 볼 수 있는 화자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화자 자신이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것은 실로 교묘한 완성성을 띠고 처음부터 내 앞에 서 있었다. 무엇 하나 빠진 것 없이. 무엇 하나, 후년의 내가 나 자신의 의식이나 행동의 원천을 그곳에서 찾아보아도 빠진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완벽한 형태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인생에 대해 품었던 관념은 단 한 번도 아우구스티누스풍의 예정설의 선을 벗어나지 않았다."(23)고 직접 말할 정도로 화자 자신을 잘 설명하는 키워드들이다.

"첫번째는 '분뇨 수거인과 오를레앙의 소녀(잔다르크)와 병사의 땀'이고, 두번째는 '분장욕', 세번째는 동화 속에서 '살해되는 왕자'에 관한 이야기이다.”(255) 그렇다면 이 키워드들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나는 이 키워드들이 화자의 '동성애적 기질',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을 드러낸다고 봤다. 거칠게 보면 동성애적 기질은 거짓 자아에 대한 관념적 갈망,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은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동경,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은 죽음을 향한, 비애-비장의 미와 관련된 성적 충동과 관련된다.

앞으로 돌아가 보자. 화자의 어떤 점이 미시마의 '우익', '남성', '할복', '전쟁', ‘죽음과 같은 비교적 가부장적인 모습들로 이어지게 된 걸까? 헬스에 빠진 이후 강인한 육체와 남성성에 대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미시마의 모습은 이 소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허약하고, 병약했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소설 속의 화자 또한 강인한 육체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남성성에 대한 갈망이 많은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 욕망, 갈망은 동성애적 기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에 조금 더 복잡하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 속의 화자가 미시마의 자화상이라면, 미시마도 분명 강인한 육체, 남성성과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을 테고, 그것을 갈망했기에 헬스로 몸을 단련하고 그것을 촬영하는 등의 행동을 했을 테다. 자신을 오롯이 인정하고 사랑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열등감, 콤플렉스를 지녔고, 그것을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결, 표출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군대도 사기를 쳐 빼 먹은 사람이 우익으로 빠진 이유도 이와 무관하진 않겠다. '전쟁', '우익'이라는 키워드는 비틀린, 부정적 가부장 상과 어울리는 단어니까.

'할복', '죽음'은 화자가 지닌 사도마조히스트적 성향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화자는 인간의 육체를 유물론적으로 해체해 보는 걸 좋아한다. 또한, 그 해체의 과정에서 피학-가학성을 곁들이길 좋아한다. (화자가 자주하는 것 자체가 그 가학의 과정이고 미시마는 실제로 성 세바스티안을 오마주하며 화살에 찔리는 피학성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피학과 가학 사이에는 성적 충동과 죽음에의 충동이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충동이 어떻게 죽음을 어떤 대의, 비장함, 비애의 미와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런 미시마였기에, 그만큼 죽음에 큰 의미를 부여하던 그였기에 할복을 할 수 있던 거 아닐까.


6. 하지만 동성애적 기질,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 사드마조히스트적 경향은 그 자체로는 중립적인 키워드로 볼 수 있다. 동성애 기질은 사랑의 한 스타일일 뿐이고 남성성에 대한 갈망 및 욕망은 그걸 지니지 못한 사람으로서 욕망 할 수 있다. 허약하고 나약하게 자랐기에 강한 남성성을 갈망하는 것도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사드마조히스트적 성향도 하나의 성적 스타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기질과 성향을 수용하고, 때로는 내적으로 잘 해소하면서도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일 테다. 그러나 소설의 화자는 그것을 내적으로 잘 해소하지도 못했고,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보다 끝까지 타인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이 단상의 초반에 언급했던 성장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의 화자는 성장하지도("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동구처럼), 마주하지도(마주하고 수용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콜필드처럼), 실패하지도(실패하고 절규하는 "포트노이의 불평"의 포트노이처럼) 않았다. 철저히 가면 아래 자신을 숨기며 타인을, 나아가 자신도 기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끊임없이 흉내 내고 자신을 기만하고, 인공적인 노력을 하고 정상성을 욕망하고, 자기를 수치스러워한다. 과도한 자의식으로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자기가 바라보는 관념의 세계에 빠져 사는 화자에게 맨 얼굴의 삶은 없었다. 가면이 곧 삶이었다. 맞지 않는 가면을 쓴 만큼 내면은 뒤틀렸다. (이런 삶이 곧 미시마의 삶이 아니었을까) 화자는 왜 자신과 결혼하지 못했을까를 묻는 소노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노코는 아직 세상을 잘 몰라. () 세상이라는 건 서로 좋아하는 이들끼리 언제라도 결혼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아. () 그리고 나는 그 편지 어디에도 확실하게 결혼할 수 없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어. () 그렇게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소노코는 급하게 결혼을 해버렸고."(212)

 

마음이 준비되지 않은, 자기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게 아니라 상황 탓, 정황 탓, 명확하게 말하지 않은 자기 말을 지레 짐작으로 넘겨짚고 다른 사람과 빠르게 결혼을 해버린 상대방 탓을 해버린다. 히라마키를 풀었다가 다시 두르는, 젊고 아름다운 사내를 본 순간 "욕정에 휩싸"이고 "소노코라는 존재를 잊어"버리는 데다가 "저렇게 웃통을 벗은 모습으로 여름이 한창인 거리로 뛰어나가 야쿠자들과 한판 싸움을 벌이고, 날카로운 비수가 저 하라마키를 뚫고 그의 몸통에 꽂히고, 저 더러운 하라마키가 피범벅으로 아름답게 물들고, 그리고 그 피투성이 시신이 들것에 실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상상을 하는 화자는 "지금까지 온 영혼을 기울여 쌓아올린 건축물이 참혹하게 무너져내리는"소리를 들음에도, 재빨리 "가면으로 다시 돌아와, 얼어붙을 듯한 의무관념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상한 질문이기는 한데, 당신, 이미 해보셨죠? 그런 거. 물론 이미 다 아시겠죠? (…)"

즉각 그럴싸한 대답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응…… 알지. 미안하지만."

"언제쯤?"

"작년 봄에."(227)

 

그는 이렇게,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도망쳤다.


7. 소설 속의 인물이니까, 타인의 삶이니까, 어떻게 보면 이렇게 쉽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정상성'의 압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건지, 조금은 더 진실한 나의 모습으로 살고 있긴 한 건지를 묻는다면 떳떳하게 답할 수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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