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23년 독서정산
나는 왜 책을 읽는 걸까. 무엇을 위해?
내가 우선적으로 읽으면 좋을 책이 뭘까. 이렇게 많은 관심 분야 중에서?
어떻게 하면 꾸준히 밀도 있게 읽을 수 있을까?
책과 관련한 고민이 많았던 한 해였다. 더 많은 책을 밀도 있게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진 못했다. 혼자 하는 읽고 쓰기의 한계를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느낀 한 해였달까. 일에 치이거나 퇴근 후의 고단함이란 벽에 부딪쳐 넘어지기 일쑤였고, 넘어진 후의 시간을 내적 평화 및 성장을 위해 쓰기보다 쾌락을 가져다주는 도파민의 세계에 쓰곤 했다. 결과는 번아웃, 만성피로,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건강악화였다.
마감이 필요했다. 그게 어떤 구조적인 것이든, 세미나 참여든, 기고 일이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간에 나가는 것이든 상관없었다. 책과 관련된 어떤 행위를 하게 하는 데드라인이 존재하고, 나의 그 데드라인과 타인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면 됐다. 그렇게 마감이 존재했을 때, 나아가 내가 하는 그 행위가 즐거웠을 때, 나는 꾸준히,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혼자서는 안 됐다. 계속 실패했다. 무슨 짓을 해도 안 됐다. 동기부여가 안 됐다. 내 욕망만으로는 안 됐다.
마감을 통해 어떤 일에 흥미가 붙어 구조적인 선순환이 만들어졌을 때에야 밀도가 생겼고 제대로 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선순환을 유일하게 만들어낸 게 올해엔 영어공부였다. 처음엔 미약했다. 주에 1회 zoom으로 모여 영어 책을 함께 읽는 것이었다. 내가 발표하는 분량은 A4용지 1/4도 안 되는 적은 내용이었고, 내 발표가 아닌 부분에 대해서는 설렁설렁 읽었다. (읽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으니. 이거라도 꾸준히 해보자.’하는 마음에 조금씩 품을 더 들이기 시작했고, 재미가 붙었으며, 영어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이 늘었다. 덕분에 영어실력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읽고쓰는 일에는 그런 선순환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시도를 안 했던 건 아니지만 정착을 못하거나 흥미가 떨어졌으며, 결국엔 혼자 시도해봤으나 앞서 말한 것처럼 다 실패했다. 무엇을 파고 싶은 걸까? 재미난 주제로 어떻게 1년 이상 꾸준히 공부해볼 수 있을까? 이와 관련된 마감을 어떻게 만들어 볼 수 있을까? 내가 모임을 만들어봐야 하나? 다양한 고민이 스쳤으나 실행한 건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몇 년 동안 제자리인 느낌이다.
올해 붙잡았거나 완독한 책들의 목록을 간략히 정리하고 훑어봤는데 대략 6~70권 정도였다. 이 중에서 끝까지 완독한 책은 20권이 좀 넘는 것 같다. 기록은 10~15권 정도 남긴 거 같은데, 이런저런 글을 구상만 하고 갈무리 하지 못한 게 많은 탓이다. 아쉽다. 분명 더 좋은 책들을 더 많이 읽고, 깊이 감명받고,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만들 기회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2. 기억에 남는 책들
1) 우자와 히로후미 저,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 사월의 책, 2016
난 아직 자동차가 없다. 주변 친구들 대다수가 차를 가지고 다니는 걸 보면, 확실히 난 조금 특이한 케이스인 것 같다. 뭐, 큰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다. 우선, 굳이 차를 살 필요성을 잘 못느꼈고, 다음으로는, 차를 썩 좋아하진 않기 때문이다. 차보다는 뚜벅이, 대중교통을 더 좋아한달까. 뚜벅뚜벅 천천히, 오감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감각하며 걷는 맛, 버스나 기차, 전철같은 걸 떠올렸을 때 느껴지는 어떤 낭만과 달리(아 물론 출퇴근 지옥철이나 만원버스는 좀 힘들긴 하다..) 자동차는 ‘비쌈, 시끄러움, 먼지’와 같은 부정적 키워드가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그런가 이 책의 제목이 유독 구미가 당겼던 것 같다. 자동차의 사회적 비용이라. 저자가 말하는 핵심은, 자동차가 발생시키는 사회적 비용이 충분히 내부화되지 못했고, 이로 인한 외부 불경제 효과를 신고전파 경제학은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니 이 사회적 비용을 내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론적인 부분은 차치하고, 나는 자동차가 발생시키는 사회적 비용이 충분히 내부화되지 못한다는 말이 유독 인상깊었는데, 그도 그럴게 한국은 도시 자체가 자동차 위주로 구조화되어 충분히 내부화되지 못한 비용을 그저 감당하고 사는 게 디폴트가 된 나라기 때문이다.
자동차 위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게 뭘까. 말 그대로 자동차를 이용하기 편하다는 것이다. 도로가 넓고 많은 것, 주차장이 많은 것과 같은 사실이 대표적이다. 자동차 이용이 편하니 자동차를 많이 사고, 자동차 통행량이 많아지고, 통행량이 많아지니 자동차 이용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한 정책을 펼치고, 그러다 보니 자동차는 더 늘어나고, 그렇게 이 비좁은 나라에 자동차 누적등록대수가 2,500만 대가 넘게 됐다. 많은 자동차는 소음, 먼지, 매연, 환경오염, 교통사고로 인한 각종 피해 등으로 이어졌고 말이다.
자동차 이용이 편하다는 건 다른 말로 하자면 사람이 살기엔 불편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특히, 자동차로 인한 불편함은 대개 어렵게 사는 사람이 더 많이 겪는다는 문제점도 있다. 한국의 자동차 위주의 정책에는, 어떤 점에선 자동차로 인한 효용 대부분을 조금 더 여유가 있는 사람이 가져가고, 자동차로 인한 사회적 비용의 많은 부분을 여유가 없는 사람이 더 감당해야 하는 불합리함과 불평등함이 내재되어 있다.
2) 요한 하리 저, “도둑맞은 집중력”, 어크로스, 2023
스티븐 잡스가 2007년 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이폰을 처음 소개했을 때만 해도 세상이 이렇게 변할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 같다, 나쁜 의미로 말이다. 전역 후 첫 스마트폰을 샀을 때 참 신기하고 편리한 게 생겨났다고 생각했을 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핸드폰만 쳐다보고 다닐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내 삶과 관련해서도 그랬다. 끝없이 이어지는 유튜브 쇼츠를 목적없이 쳐다보다가 늦잠자서 다음 날 하루 종일 피로에 저는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요한 하리도 이런 변화가 우리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상화된 스마트 기기와 각종 SNS 어플 등의 영향으로 우리는 집중력을, 몰입감을, 깊게 사고하는 능력을, 숙면을, 건강을 잃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각종 어플 때문에 만성적인 스트레스, 각성 상태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다만, 기기 자체, 기술 자체가 문제인 건 아니다. 저자는 기기보다는 스마트 기기의 각종 어플리케이션, 프로그램이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구글, 유튜브, 인스타 등 각종 플랫폼의 사업의 수익은 대부분 광고에서 나온다. 광고의 효과를 높이려면? 많은 사람이 광고를 오랫동안 보게 하는 게 핵심이다. “이 기업들은 사람들이 핸드폰을 더 오래 들여다볼수록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그게 전부였다.”(181) 사람들이 더 자주, 많이 들여다보게 하기 위해 각종 어플리케이션은 가능한 한 사람들의 집중력을, 시간을 많이 뺏어올 수 있게끔 세밀하게 설계되었다. 대표적 사례가 무한 스크롤이다. “보수적으로 추산하면 무한 스크롤은 트위터 같은 웹사이트에서 시간을 50퍼센트 더 많이 보내게 만든다.”(185)
이 책은 개인의 디지털 디톡스로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왜 문화, 시스템에 내재한 거대한 문제와 관련해 자꾸 단순한 개인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하는가? 이런 해결책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데도 해결책이 실패하면 “개인이 시스템을 탓할 수 없게 만들고, 결국 개인은 자기 자신을 탓하게”(235)된다. 저자는 우리의 집중력을 위해 보다 근본적인 걸 건드릴 수 있는, 거대하고 담대한 목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3) 칼 포퍼 저,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 포레스트 북스, 2023
제목에 혹해 구입하고는 생각했던 내용과 달라 당혹해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럴만 한 게 자기계발서적같은 제목과 달리 과학철학자로 유명한 ‘칼포퍼’의 과학철학 및 역사정치철학적 에세이와 강연집을 모아놓은 책이기 때문이다. 원서를 뒤져보면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의 원문인 All life is problem solving은 단 한번 등장하며, 여기에서의 life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의 ‘삶’이라기보다는 생명체 일반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반증가능성, 구획의 문제 등 과학철학적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포퍼의 대답이 역사, 정치철학적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면, 이 책을 윤리학적으로 읽어볼 여지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포퍼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태도, 비판적으로 논의하려는 태도,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려는 태도다. 정치든 사회든 과학이든 역사든 독단적 태도는 뭔가가 더 나아질 수 있게 하는 걸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도그마를 고수하는 과학자에게 성장이 없었듯, 전제정치와 독재정권처럼 비판적 논의와 건전한 토론이 불가능한 곳은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문제의 직시다. 포퍼가 강조하는 태도들이나 반증가능성 기준이라는 과학철학적 입장같은 것들은 문제의 직시를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문제를 직시해야 독단에 빠지지 않고 더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삶의 디폴트값이다. 중요한 건 문제를 향한 태도다. 문제를 제대로 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행착오와 잘못으로부터 배우려는 자세가 있어야 우리는 배울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으나 문제와 사랑에 빠져 도전하고, 실패하고, 배우고 하는 과정을 통해 저명한 철학자로 성장한 포퍼처럼 말이다.
4) 김영하 저, “작별인사”, 복복서가, 2022와
가즈오 이시구로 저, 클라라와 태양, 민음사, 2021
인공지능, AI라는 키워드가 자주 등장하는 요즘이라 그런가 “인간다움이 뭔가”에 대해 좀 생각하게 됐던 것 같다. 시발점은 이 두 책이었다. 클라라와 태양은 따로 기록을 남겨둔 게 없긴 하지만 무척 따뜻한, 감동적인 소설이었던 거로 기억하고, 작별인사는 내가 생각하던 인간다움에 닿아있는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는 클라라와 태양보다 좋았지만, 그 주제를 소설적으로 펼쳐나가는 데에 많은(너무나도 많은… 이렇게 좋은 주제를… 조금만 더 묵혀서 정치하게 써주셨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움이 있었던 소설로 기억한다.
나는 언젠가부터 인간다움의 핵심이 ‘인간으로서 지니는 나약함, 비참함에 대한 자각과 수용’이라고 생각했다. 이 자각과 수용이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들며, 타인을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주요한 원리들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롤즈가 원초적 입장을 통해 도출해낸 차등의 원칙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내가 나약해질 수 있기 때문에 최소 수혜자가 최대 이득이 되는 기준을 수용하려고 한다) 여튼, 그래서 나는 “작별인사”의 마지막 장면에서 휴머노이드였던 철이가 유한함을,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철이의 주요한 질문인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가 해소됐다고 생각했다. 진짜 인간들이 망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유한함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5. 빅터 프랭클 저,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2020
삶의 의미와 관련된 책이나 각종 인문학 서적에서 정말 자주 봤던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를 드디어 읽었다. 솔직히 큰 감흥은 없었다. 삶의 의미와 관련된 더 좋은, 많은 책들이 나왔고, 그것들을 일부 접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알았던 10년 전에 봤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을 통해 깨달은 바를 기술한 것이다. 그건 바로, ‘인간이란 아주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기 삶에 책임을 지며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핵심은 의미의 발견이다. 어찌되었든 자신 만의 삶의 의미가 있던 사람은 수용소에서의 고단함을 버티고, 결국엔 살아나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게 아닌 사람은 자신을 포기해버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많은 걸 견뎌낼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그래서 삶의 의미란 뭐고, 그걸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관한 방법론의 제시 부분에 대해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점.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게 목표인 책이 아니었던 거 같기도 한데 이건 가물가물하다. 여튼, 나만의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는 게 중요하다~!, 정도로 갈무리하게 넘어가야겠다.
5. 김혜진 저, “경청”, 민음사, 2022
“구체성을 잃지 않은 말이 빚어내는 삶의 복잡성과 모순, 지난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고양이.” 책을 읽고 알라딘 100자 평에 남긴 글이다. 정말 좋게,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었어서 김혜진 작가의 책을 몇 권 더 샀던 기억이 난다. (출간한 작품 전체를 읽어보고 싶은 욕망이 들었던 많지 작가 중 하나가 되었다.) 세상을 아름답게만, 추상적으로만 보지 않으려는 현실적인 태도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더 곱씹고 추가적인 단상들을 남겨놓지 않은 건 아쉽다.
6. 어맨다 레덕 저, “휠체어 탄 소녀를 위한 동화는 없다”, 을유문화사, 2021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준다. 그런데 동화가 장애를 다루는 방식이 특정한 편견을 심어주는 데 일조하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도록 한다면? 저자인 어맨다 래덕은 이야기, 특히 동화가 장애를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며 다른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다리도 없고 목소리도 없는 에리얼(인어공주의 주인공의 이름이다.)이 왕자를 얻을 희망을 꿈꿀 수 없다면, 다리를 절지도 않고 모든 능력을 온전하게 가져야만 고통과 괴롭힘이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면, 나 같은 장애 소녀는 어떤 희망을 품으며 살 수 있을까?”(197쪽)란 말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7. Carlo Rovelli 저, “The Order of Time”, Penguin Books, 2019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완독한 영어원서다. (자잘한 각색 원서 제외하고) 책에 대한 단상은 약 4년 전, 번역서를 읽고 남겼던 독서단상의 일부로 대체. 솔직히 책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 시간을 관계론적인, 사건적인 방식으로 구성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은 내게 그리 신선하거나 충격적이진 않았다. 캉길렘이나 푸코, 펠드먼 배럿, 들뢰즈, 붓다같은 사람들을 통해 ‘변화, 생성, 관계, 사건, 구성’과 같은 키워드의 의미를 엿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내가 보는 세상은 거친 수준에서 말하자면 로벨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평상시에 내가 생각한 시간도 실재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성된 개념에 불과했다. 물론 물리적 기반 없이 마음대로 구성 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이 필요하다. ‘물리적 변화’와 ‘주기’다.
우리가 흔히 ‘시간의 정지’를 묘사하는 방식을 떠올려보자. 나를 제외한 모든 게 잿빛으로 변하고 멈춘다. 즉, 변화가 존재 하지 않는 상태를 시간이 흐르지 않는 상태로 여기는 것이다. 은연중에 시간을 변화(운동)와 관련지어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만, 모든 게 멈춰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절대 시간이라는 뉴턴 이후의 시간관에 익숙해져 잊고 있었을 뿐이다. 시간이라는 건 변화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누군가는 우리가 옆에 두고 보는 시계는 무엇을 가리키는 거냐고 물어볼 수 있겠다. 세계적으로 동기화되어 마치 절대 시간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니까. 그러면 시간을 재기 위한 시계의 시간은 어떤 시계가 재는 걸까? 여기에서 중요한 게 ‘주기’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시계는 자연에서 발견되는 ‘주기를 지닌 변화(운동)’를 기초로 만들어지곤 했다. 해를 예로 들자면, 해가 뜨면 하루가 시작되고, 해가 지면 하루가 끝나는 식으로 해의 주기적 변화를 시계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시계도 자전과 공전이라는 천체의 주기적인 변화를 기초로 만들어졌고, 지금은 이를 더 정밀화하고자 세슘133이라는 원자의 진동주기를 기준으로 1초를 정의하고 있다.
정리하자면, ‘주기적으로 운동(변화)하는 것’이 곧 시계고 그 변화의 기간이 시간인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물리적 변화와 주기를 시간으로 개념화하는 인간이라는 주체도 필요하다.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물체가 있어도 이것을 시간이라는 관념 으로 개념화하지 않는다면, 변화를 기억하고 이를 기초로 스키마를 형성해 끊임없이 앞으로의 일을 예측하려는 뇌의 메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간 또한 없을 것이다.
2. 사실 뉴턴 이후 ‘시간의 동기화’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같이 시간을 변화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더 일반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란 변화(운동)의 척도로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뉴턴과 동시대 인물인 라이프니츠도 시간이란 ‘동시에 공존하지 않는 것들의 보편적 인과적 질서에 부여한 관념’이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뉴턴이 프린키피아에서, 보통사람은 시간을 ‘지각 가능한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식하’며 여기에는 ‘다양한 편견’이 숨어있다고 말한 것을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절대 시간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이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뉴턴은 그런 통속적인 시간 개념과 달리 변화와 상관없이 흐르는 수학적이고 절대적인 시간의 존재를 주장했고, 그 절대적인 시간t가 흐르며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는 방정식을 통해 다양한 운동을 예측했다. 즉, 물체의 상태를 시간(t)에 대한 함수로 나타낸 것이다. 그게 바로 F=ma다. 이런 절대시간 개념은 뉴턴의 권위와 자본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변화(철도 운행을 위한 시간의 동기화, 노동 효율성을 위한 시계의 보급 등)와 함께 상식이 되어 현재 우리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렇게 변화, 사건과의 관계를 통해 시간을 정의하려던 아리스토텔레스나 라이프니츠는 패배한 듯했다.
3. 물론 뉴턴의 시간관에도 문제는 있었다. 뉴턴처럼 시간을 수학적인 존재로 바라본다면 시간의 방향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턴 방정식은 t와 -t를 구분하지 않았다. 우리는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뉴턴 방정식에 따르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도 상관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왜 현실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가? 과학자들은 뉴턴의 운동법칙이 틀린 게 아니라, 시간은 원래 방향성이 없으나 운동의 특성상 방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식의 설명을 하게 된다. 바로 엔트로피의 개념을 통해서다.
엔트로피란 ‘특정 물리계의 무질서 정도’를 뜻하는 단어로, 엔트로피의 법칙인 열역학 제2법칙(델타 S>=0)은 고립된 계의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자면, 물에 물감을 떨어뜨리면 시간이 지나며 물감이 물 전체로 퍼져나가지만, 퍼져나간 물감이 다시 뭉치진 않는다. 이를 비가역성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시간의 방향을 형성하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공기의 분자 하나하나라는 미시적 상태가 아니라 어느 강의실 공기의 압력, 온도와 같은 거시상태(열역학 상태)를 고려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미시상태와 거시상태의 관계를 이해해야 열역학 제2법칙의 의미를 조금 더 명료하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거칠게 예를 들어보자면, 특정한 거시 상태를 표상할 수 있는 미시적 상태의 배열이 10억 가지가 있다고 해보자. 이 10억 가지가 표상할 수 있는 특정한 거시 상태는 1·2·3·4·5로 5가지다. 그리고 1을 표상하는 미시적 상태의 배열이 1가지고, 2는 2가지, 3은 3가지, 4는 4가지, 5는 9억 9,999만 9,990가지라고 해보자. 이런 상황이라면 특정 계의 거시상태는 5에 있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즉, 물감이 물에 섞여 퍼져나갈 확률이 물감이 다시 뭉칠 확률보다 압도적으로 높다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목격하는 시간의 방향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인 셈이다. 엔트로피가 감소하지 않으므로, 미시적 배열이 얽히고 얽혀 발생할 확률이 높은 쪽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시간의 방향인 것. 시간이 과거로 향하지 않고 미래로 향하는 이유는 확률이 낮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확률이 높다는 것, 즉 덜 특별하다는 것은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미시적인 상태를 전부 다 고려할 능력이 없는 데서 오는 ‘희미함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로벨리는 이를 두고 ‘시간은 방향성을 잃었다, 과거와 미래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고 말한다. (엔트로피의 흐름과 우리가 심리적으로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 일치하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도 가능한데 이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4. 아리스토텔레스와 라이프니츠의 짙었던 패색은 과학자들이 빛의 정체를 두고 발싸심하면서 옅어졌다.
과학자들은 입자인 줄 알았던 빛이 파동이라는 사실을 밝혔고 파동을 만들어 전파하는 전자기장인 에테르의 존재를 추정했다. 하지만 에테르의 존재는 광속 차 측정 등의 관측 사실과 모순됐다. 빛이 파동이라면 에테르가 필요한데 에테르를 가정하면 실험 결과와 모순되는 상황이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었다. 1905년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다. 아이디어 자체는 간단했다. 갈릴레이의 상대성 원리를 더 밀고 나가서, 맥스웰 이론에서도 상대성 원리가 똑같이 성립한다고 가정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추론되는 게 빛의 속도는 누구에게나 같은 값으로 나타난다는 광속불변의 원리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와 광속 불변의 원리를 받아들여 뉴턴의 운동 방정식을 재구성했고(로렌츠 변환) 이게 바로 특수 상대성 이론이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직관적으로라도 이해할 능력이 부족한지라 여기에서 딸려 나오는 효과만 조금 정리해보자면, ‘시간의 유일함 상실’(로벨리가 말하는 ‘현재, 지금’의 끝도 여기에서 파생하는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과 ‘흐려진 시간과 공간의 경계’ 정도로 이야기해볼 수 있겠다. 두 효과 모두 광속 불변의 원리를 가정하기에 나타나는 효과로 이제 시간은 속도, 질량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 되었고, 공간과 시간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수 상대성 이론을 등속 운동 뿐만이 아니라 가속 운동에까지 확장한 게 일반 상대성 이론이다. 여기에서도 거칠게 정리해보자면 공간과 시간, 에너지와 물질이 동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정도면 로벨리의 말뜻을 대략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벨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의 시간관이 아인슈타인에 의해 부활해 뉴턴의 시간과 통합되었다고 말한다. 우선, 뉴턴이 말했듯 시간과 공간은 실재한다. 시간과 공간은 물질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시간과 공간 그 자체의 실재성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은 물질들의 관계 자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니까. 로벨리가 중력장이 곧 시공간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와 같을 테다) 반면,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은 상대성 이론에 의해 부정된다. 시간과 공간은 물리적인 씨실과 날실들의 관계망이 직조해낸 네트워크 자체로, 물리적 변화의 양상에 따라 휘고 구부러지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물리적 씨실과 날실의 관계망이라면 양자적인 특성도 지녀야 했다. 즉, 시간은 미시적인 수준에서 입자성, 불확정성, 관계적 양상이라는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간단히 풀어보자면, 시간이 물리적 씨실과 날실의 관계망이 직조해낸 네트워크라면, 해당 물질들을 미시적인 수준으로 봤을 때 양자적인 특성을 똑같이 지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언가와 상호작용하기 전에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로 존재하다가 상호작용이 있을 때만 구체적인 게 되는, 입자적 특성과 파동의 성격을 모두 지닌 무엇이다.
로벨리는 이처럼 양자적인 특성을 생각했을 때, 우리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사물’이라는 정적인 실체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마주침, 되어감 등의 과정 그 자체로 보는 게 낫지 않겠냐는 주장을 한다. ‘사물이 아닌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실체론적인 관점이 아니라 관계론적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자는 말이다. 어느 것과도 상호작용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말은 모든 사물이 사건이라는 말이며(사물 자체가 관계적 상호작용 후에 구체성을 띠니까), 사건이라는 말은 모든 사물이 시간이라는 말이다. 이게 로벨리가 “모든 사물은 시간이다.”라고 말했던 이유다.
‘변해가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인간이 지닌 문법의 부적당함을 지적하고(비동사가 서양의 철학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생각해보자), 시간 변수 t가 없이도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급(“양자중력 이론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물들이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서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상 사물들이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한 로벨리는 마지막으로 그만의 우주론을 통해 시간을 다시 이해하길 시도한다.
여유가 없으므로 로벨리가 요약한 것을 참고하자면, 중요한 건 관점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우주 전체가 아닌 특정한 계에 속해 특정한 계와만 상호작용을 한다. 이 계는 과거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에 있다가(‘우주 초기의 낮은 엔트로피’라는 것 자체가 로벨리에 따르면 관점의 효과다.) 점차 높은 엔트로피의 상태로 변화해간다. 그리고 이런 열적 시간을 ‘시간의 흐름’의 흐름 자체로 재구성할 수 있는 건 우리 인간의 관점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만 정리하는 건 아쉽지만, 거칠게 요약하자면 내가 앞서 시간을 이해하고자 하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7. Walpola Sri Raula저, “What The Buddha Taught”, one world, 1997
하루에 1쪽씩 3달 동안 읽어서 완독(뒤의 발췌 부분 빼고)했다. 붓다의 핵심 가르침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책. 20세기 서양인이 한참 전의 붓다의 가르침을 최대한 오독하지 않게 강조한 포인트들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Among the founders of religions the Buddha (if we are permitted to call him the founder of a religion in the popular sense of the term) was the only teacher who did not claim to be other than a human being, pure and simple. (p1)
3. 2023년의 독서를 돌아보며
앞서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 무의식적으로 자주했으나 갈무리 되지 않은 질문들이다. 이 질문들을 좀 곱씹어보려는 건 최근의 독서경험이 썩 만족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왜 책을 읽는 걸까. 무엇을 위해?
내가 우선적으로 읽으면 좋을 책이 뭘까. 이렇게 많은 관심 분야 중에서?
어떻게 하면 꾸준히 밀도 있게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책을 왜 읽는 걸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쾌감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입이 즐겁고 좋은 향을 맡으면 코가 즐겁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귀가 즐겁고 좋은 풍경을 감상하면 눈이 즐겁다. 책에서 느끼는 쾌감도 이와 같다. 좋은 책을 읽으면 머리가 즐겁다. 뭔가를 알게되고, 이해하고, 배우는 데서 오는 쾌감. 재밌으니까 읽는다.
그리고,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다. 삶을 돌아보면 참 많은 걸 책을 통해 배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었을 때를 떠올려보면, 예전에는 왜 그렇게 힘든지, 더 나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재했기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괴로운 적이 많았다. 그런 악순환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 건 크나큰 경험과 사건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경험과 사건을 해석 및 정리하고 교훈을 이끌어내게끔 하는 어떤 기준과 원칙을 제공해준 독서때문이었다. 책이 제공한 지식으로, 경험을 해석 및 정리함으로써 성장하며 그 지식을 체화했던 게 핵심이었다. 이건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겠다. 지혜로워지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다음으로, 이것도 더 나은 삶을 위해서다. 다만, 지혜로워지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아닌 실용적인 정보와 지식을 얻기 위해서다. 나는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 접근할 때면 늘 먼저 책을 몇 권 읽고 시작한다. 책을 통해 얻은 지식과 내 경험을 조합해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다. 이런 책은 책에서 지혜를 길어내는 목적으로 읽는 게 아니기 때문에 속독이 가능하다. 지혜를 위한 독서는 깨달음과 체화를 위해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반면, 지식을 위한 책은 정보만 얻으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첫째, 정서적 쾌감을 얻기 위해서, 둘째, 지혜로워지기 위해서, 셋째,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서, 라고 정리해볼 수 있겠다. 이렇게 보면 책 만한 것도 없다. 즐거운 데다가 각종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지혜로워지기까지 하니까. 그런데도 요즘 나는 왜 책을 잘, 못 읽고 있는 걸까? 독서경험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는 뭘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도파민 중독’이다. 중독의 대상이 유튜브 쇼츠같은 생산적이지 않은 활동이라는 게 문제다. 천천히, 밀도있게, 집중함으로써 잔잔하게 느껴지던 정서적 쾌감(만족)이 아닌 즉각적으로 손쉽게 느껴지는 쾌감. 거의 남는 게 어려운 데도 그 즉각적인 쾌감을 주는 핸드폰을 손에서 놓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는 ‘비생산적인 대상을 향한 도파민 중독’이 불만족스러운 독서경험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라는 생각도 드는데, 독서경험이 가져다주는 정서적 만족감이 더 컸다면 오히려 더 활자에 중독되었으면 중독되었지 핸드폰을 그렇게 붙잡고 있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미니멀리즘을 위한 별도의 노력이 필요한 것도 맞지만 여기서는 이 질문에 더 집중해보고 싶다. 독서경험을 더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서 어떤 게 필요할까? 어떻게 하면 핸드폰을 쳐다보는 것보다 책읽는 게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
핵심은 결국 ‘환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그리고 이 환경은 다음의 세 가지에 다름아니다. 첫째, 분위기 조성. 둘째, 마감. 셋째, 선택과 집중. 분위기 조성이란, 독서하는 공간이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집중하기에 편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집에서 그 분위기 조성이 잘 되지 않는다면, 그 ‘의지’란 것을 집에서 집중할 수 있게 노력하기 보다, 스터디 카페로 나가는 데에, 카페로 나가는 데에 쓰는 게 맞다.
다음으로 마감. 마감은 읽고쓰기의 동기부여를 위한 어떤 규칙과 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제까지 책을 읽고 글을 쓸지 기한을 정해놓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감 기한은 사적인 것에서 최대한 공적인 게 될수록 좋은 것 같다. 나 혼자 기한을 정해놓고 하는 것보다는 그 기한을 옆 사람에게 알리는 게 좋고, 옆 사람에게 알리는 것보다 함께 기한을 정한 후 읽고 쓰는 게 낫다.
마지막으로, 선택과 집중. 독서와 관련하여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큰 어려움 중의 하나가 선택과 집중이었다. 관심사는 많고, 욕심도 많은데, 시간과 기회는 한정되어 있다. 전에는 충분히 숙고하면 선택과 집중하고 싶은 분야가 조금은 더 명확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여전히 모호하다. 그런데 이렇게 욕망의 과잉상태로 이것저것 붙잡다보니 독서에 대한 흥미가 점점 사라졌다. 만족과 재미보다는 부담감, 강박, 이런 부정적 정서가 더 자주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어디든 상관없겠다, 란 생각. Lewis Carroll의 “Alice In Wonderland”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That depends a good deal on where you want to get to,’ said the Cat. ‘I don’t much care where-‘ said Alice. ‘Then it doesn’t matter which way you go,’ said the cat.” 애초에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명확하지 않다면, 관심있는 수많은 분야 안에서는 어디로 가든 상관없지 않을까. 이 관심사가 적어도 현재의 내 삶과 크게 동떨어진 게 아니라면, 그 안에서는 어디로 가든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직접 뭔가를 선택하고 거기에 집중하기보다 괜찮은 커리큘럼 등의 환경 속으로 나를 여기저기 욱여넣어보고, 하루하루,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보자는 것이다. 즉, 선택과 집중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에 나를 가져다두는 것. 그렇게 살다보면 길이 생기지 않을까.
결국, 2023년의 독서경험에 대한 아쉬움은 이 환경조성의 부재 또는 실패에서 비롯된다는 게 한 해를 돌아보며 주로 들었던 생각이다. 책이 내게 주는 즐거움, 지식과 정보, 지혜를 비롯해 내가 우선적으로 읽어야 할 책, 밀도 있게 읽기 위한 방법은 환경조성을 통한 구조적인 선순환이 형성되면 획득될 것들이다.
4. 2024년의 독서를 생각하며
이것저것 담아보려고 하긴했다. 하지만 역시, 책보다는 문제의식을 위주로 정리하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 읽지도 못할 책. 욕심만 많아진다.
복잡하게 말고 최대한 단순하고 깔끔하게 정리해보자.
1)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에 관하여
2) 원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원치 않는 사람과 적당한 관계를 맺거나 말려들지 않는 것에 관하여
3) 정서적으로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삶에 관하여
4)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당한 수준으로, 손해는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만큼의 경제 공부에 관하여.
5) 의미있는 삶에 관하여
5. 2024년을 맞이하며 하고 싶은 독서 다짐
떠오른 글이 하나 있었다. 6~7년 전에 썼던 글이다. 돌아가신 신용복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 글을 읽고는 떠오른 감상을 끼적였던 거다.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인터뷰를 읽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특히 이 말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인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웹진 <다들>에서 2015년 10월에 신용복 교수와 나눈 대담이 신영복 교수의 마지막 인터뷰. 웹진에서는 신용복 교수에게 깨달음과 공부를 주제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20년의 감옥생활을 견딘 힘이 '하루하루 찾아오는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그 깨달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신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깨달음은 바깥으로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성찰입니다."라고.
신 교수는 깨달음이 많은 지식을 얻는 것, 많은 책을 읽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책이 중요하지 않고,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삶속에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자기 재구성 능력이 훨씬 중요하지요." 자신이 접한 수평적 정보들을 수직화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기 인식을 심화하면서 재구성 능력을 높여가는 게 바로 공부고 학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 교수는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 아래서 책을 읽기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려고 했지요.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썼"다고 한다.
생각을 높이는 것은 '가슴으로 하는 공부'를 강조한 말이기도 하다. 공부 대상에 대한 공감과 애정으로 나아가야 진정한 공부라는 뜻이다.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이야기다.가슴으로 하는 공부에 대한 신 교수의 일화가 인상적이다. "처음 5~6년 감옥살이할 때 함께 징역 사는 숱한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얘기를 들으면서 그 사람들을 대상화하거나 분석하곤 했지요. 그러다 차츰 '아, 나도 저 사람 부모 같은 사람 만나 저런 인생 역정을 거쳤으면 똑같은 죄명으로 감옥에 앉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더라구요. 대상화하고 분석하는 근대적 인식틀이 조금씩 깨져나갔던 것이지요. 그 사람들과의 공감과 애정, 이런 게 생기면서 내 공부가 가슴까지 온 것입니다."
머리로 하는 공부와 가슴으로 하는 공부의 차이는 실천에 있다. "단순히 배우기만 한다고 기쁜 게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지 개인적, 사회적 실천과 연결이 되어야 진정한 공부라는 거지요." 그래서 가슴으로 하는 공부는 개인적 변화로도 이어진다. 또한,"공부는 이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게 되고, 그러기 위해 "당대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 변화시켜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분석이 있어야"한다고 한다. 이 말도 인상적이다.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사유를 학습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부니까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공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터뷰 글을 읽으며 끊임없이 배움을 추구하면서도 내가 변하지 못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슴과 괴리된 지식을 모으는 데에만 열을 올렸던 탓이었다. 넓히는 것에만 열중했지 생각을 높이는 일에는 소홀했다. 며칠 전 일기에 썼던 "생각을 머리로만 하지 말고 느껴보기"라는 이야기와 같다. 생각의 속도가 삶과 괴리된, 생각을 체화하지 못하는 내 삶. '생각의 속도를 삶과 괴리되지 않도록 하는 연습. 내 생각을 곱씹으며 느끼는 연습. 생각을 체화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몇 가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친구가 "생각을 너무 대자적으로 하는 거 아냐?"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참 맞다. 내 삶, 타인의 삶에서 자꾸 거리를 두고 '대상화하고 분석'하려 든다. 이러니 내가 사는 현실에 적극 참여하지 못한다. 생각이 마음과 괴리되고 삶과 괴리된다. 생각을 많이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실천하지 않았던,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생각을 대자적으로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구체적인 현실에 적극참여하면서 공부의 대상에 애정, 공감을 느끼고,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낼 것. 이게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생각을 대자적으로 하는 습관은 삶의 관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내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지 못하고, 나를 대상화 한 후 외부에서 주입한 가치에 빗대어 나를 평가하는 습관.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 게 아니라 억압하는 습관.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안 돼' '아니야' '바꿔야해'라고 외친다. 타인의 시선,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없는 도덕적 기준, 사회적 기준 등 외부의 기준에 맞게 나를 억압하고, 나를 평가한다. 그러니 갈등하고, 소모되고, 공허해지고, 무기력해진다. 종국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인터뷰 글을 보며 책 읽는 방식도 반성하게 됐다.지적호기심에 기대 마구잡이로 책을 읽으며 지식만 쌓길 바랐다. 책 읽는 게 마음을 울리지 못하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못했다. 그것은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듯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며 아무것도 산출하지 않는, 방종한 안일함에 푹 빠진 향락"에 불과했다. 아타루는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라고 하는 데 나는 미치지도 않았고, 불편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바뀌지도 않았다. 내가 섭취한 지식이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지 못하는데,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몸으로, 가슴으로 느끼려 노력하고 느낀 걸 풀어 쓰기. 내가 다다른 결론은 이거였다. 나를 자극하고, 나에게 다양한 느낌을 가져다줄 수 있는 매체는 책이 될 수도 있고, 경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뭐든 머리로만 생각하기보다 몸으로 함께 느끼려하고, 그 느낌을 계속 풀어쓰는 연습을 하다보면 변화가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매일 블로그에 일기 쓰는 연습을 더 게을리 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슴으로 느낀 바를 부여잡고 구체화해 풀어쓰는 연습을 하는 것이기에.
다짐은 이걸 다시 읽고 마음에 새기는 것으로도 충분하겠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어떻게든 규칙적으로 읽고 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거나 그 환경 속으로 나를 욱여넣기.
고생했다, 2023년. 야무지게 살아보자, 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