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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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계기는 영화였다.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 장편 영화.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혹해 영화관에서 본 ‘The Room Next Door’. 하지만 타이틀을 감안했을 때 감독의 미적 감각과 탁월한 연출을 제외하고 서사나 주제적인 측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진 못한 작품이었다. 마침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었고, 생각보다 감응받지 못한 작품에 대해 내가 놓친 건 없는지, 원작 소설을 읽어 보면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이 책까지 손에 들게 되었다. ‘What are you going through’라는 소설이다.


그런데 웬 걸. 당연히 달라야 겠지만 책과 영화는 생각보다도 더 달랐다. 영화는 잉그리드와 마사의 관계, 그리고 죽음과 탄생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춘 반면 책은 초점이 영화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그만큼 영화가 메시지가 뚜렷했던 것에 비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이야기가 산재했고 그 통일성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관찰자적 화자’라는 줄기가 힘겹게 엮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점에서 ‘사실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이야기의 초점은 흐렸고 그만큼 흐린 활자 사이로 이야기의 줄기를 솎아내는 데 집중하며 읽어야만 했던 작품이었다.


2. 처음 읽었을 때는 화자와 친구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주로 언급하는 소설로 읽혔다. 그런데 이렇게 읽었을 때 이 소설은 그닥 흥미를 끄는 구석이 없었다. 죽음을 주제로 한 매우 훌륭한 소설인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은 적이 있었고 두 작품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 깊이와 방식에서 더 탁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가 굳이 새로울 게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 소설을 썼을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다르게 읽힌 건 발췌를 위해 다시 간단히 훑어보던 때였다. 소설을 읽을 때 화자든 주인공이든, 등장하는 인물의 어떤 결핍과 그 결핍을 어떤 조금 더 나은 상태로 바꾸고자 하는 욕망에 주목하는 편인데, 다시 읽어 보니 흐릿한 초점 사이로, 화자의 각종 회상과 판단 등의 편린들 사이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암에 걸린 친구와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변화하는 화자의 태도가 눈에 띄었다.


3. 소설은 화자가 한 남성의 강연을 들으러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국제적인 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다. 화자의 옛 연인이다. 먼 곳에서 옛 연인을 위해 찾아온 건 아니었다. 화자는 암에 걸린 친구를 수년 만에 만나러 왔다. 다만, 마침 그 지역의 대학에서 그가 강연을 했고 별다른 연락없이 찾아가 강연을 들은 것이었다. 


이때 화자의 태도는 소설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시몬 베유의 말 -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 하고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 이 풍기는 아우라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지내요 묻는다는 건 분별하고 판단하기 전에 상대의 맥락을 궁금해한다는 것,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화자는 그런 시도 전에 상대를 가볍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프레임에 맞춰 해석한다. 강연장에 오자마자 홍보물 사진 속 그와, 그를 소개하는 학과장에 대한 인상의 언급에서 그런 화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나이 들어가는 백인 남성들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갖게 되는 그 인상. (...) 꼭 와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부디 와주시면 좋겠어요! 도무지 이런 말은 할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이런 식에 가깝다. 명심해, 내가 당신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아. 그러니 내 말 새겨들어. 그러면 뭐가 뭔지 좀 알게 될 테니.](11)


[익숙한 유형의 여성이다. 매력 넘치는 학자, 지적인 요부, 똑똑하고 고등교육도 받았지만, 페미니스트이고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여성이기도 하지만, 결코 촌스럽게 옷을 입지도 않고, 따분한 공부벌레이거나 무성적인 드센 부류도 아님을 알리려고 기를 쓰는 그런 사람. 그러다가 특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 딱 달라붙는 치마와 굽 높은 신발, 빨갛게 칠한 입술과 염색한 머리 (...) 그 모든 것이 ‘난 아직 섹스할 만한 여자야’라고 주장하고 있다.](11, 12)



이 인상은 특정 성에 대해 본인이 지닌 부정적 이미지를 투사한 것이다. 자세한 관찰이나 맥락을 캐려는 노력없이 가볍게 단정짓고 판단해버리는 태도. ‘그럼 그렇지. 어차피 뻔하지.’와 같은 태도다. 그의 강연을 향한 화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강연의 흐름을 여러번 놓치고도 어차피 대부분 아는 내용이니 괜찮다고 말한다. 자기가 지닌 이미지, 관념 등을 통해 현실을 ‘이미 재단해버리는’ 화자의 태도는 그의 강연이 단정적이며 어떤 대안과 희망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그 자신의 분별과 모순된다. ‘어차피 끝났어.’라는 외침과 ‘어차피 그렇지.’라는 말은 그 근본에 있어서 유사하다. 화자는 자신이 비판하는 것과 닮았다.



[다 끝났다고 그가 말했다. (...) 인간 이전에는 숲, 인간 이후에는 사막. 대재앙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희생을 해야 하든, 인류에게는 그렇게 해보려는 의지가, 집단적 의지가 없음이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지능 있는 외계생명체에게 우리 인류는 죽음 소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15)


[그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의견이 아니라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신들이 내 말을 믿건 말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이 자리에서는 그래도 뭔가가, 낙관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차피 완전한 파멸이라는 예언이 아닌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뭐라도 해볼 수 있는 길이 있다든가, 하다못해 한 가닥, 다만 한 가닥일 뿐이라도, 희망이라든가.](18)



책을 다시 훑으며 새로 보게 된 결핍이 바로 이거였다. 시몬 베유의 말 뒤로 등장하기에 더 괴리되어 보이는 화자의 태도.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당신들은 틀렸고 잘못되었지만 나는 더 많은 걸 알고 우월하기에 판단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 듯한 아우라. 화자가 관찰한 타자, 화자가 들은 일화에는 이러한 태도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4. 결핍은 명확했다. 다만, 그 결핍에 대한 자각이나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분명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변화의 계기도 불분명했다. 그게 이 소설이 한편으론 단순하게 느껴지면서도, 깊이 읽어 보자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기도 했다. 산만하게 등장하는 에피소드들 사이로 화자가 지닌 태도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를 야기하는 화자의 내적 맥락을 어떻게 추적할 수 있을까. 분명 핵심은 암에 걸린 친구와의 만남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뜬금 없지만 화자가 초반에 그려내는 세상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그 세상이 어떤 곳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화자를 비롯해 우리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 작가는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어떤 태도를 견지하며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흐름으로 이 책을 재미나게 읽어보기 위해서. 


일단, 화자가 그려내는 세상은 시기적으로도 현재와 가까운 만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화자의 연인이 이를 강연에서 묘사하고 있다.



[화석연료 기업, 그들은 몇이나 되고, 우리는 대체 몇입니까? (...)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세력의 선두에 서서 활개 치고 있으니 우리 지구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전 지구적 생태계 재앙에서 비롯한 식량과 식수 부족 때문에 생겨난 수많은 난민 (...)](17)


[사이버테러리즘. 바이오테러리즘. (...)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으로 인한, 치료법이 없는 치명적 감염병. 전 세계적인 극우 정권의 발흥. 선전선동과 속임수가 정치 전술과 정부 정책의 기반이 되고, 그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상황. 전 지구적 지하디즘을 제압하지 못하는 무능 (...)](18 19)



이를 단순하게, 우리가 어떤 지구적, 사회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말로 요약해보자. 지구적, 사회적 위기를 해결해나가 위해 우리는 서로 타협하고, 합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할 테다. 하지만 사람들은 봉합되기 어려운 수준의 갈등으로 분열을 겪고 있고 적대와 증오가 일상이 되었다. 회의감에 빠졌다. 개인적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고통에 서로 공감하기보다 싸우고, 단절되어 있다. 개인의 증오를 타인과 세상에 투사한다. 남과 세상을 탓하기만 한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고통속에서 좋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자도 마찬가지다. 앞서 화자의 결핍이 분별하고 판단하는 태도라고 말했다. 이는 이해와 공감이 아닌 단절이 기본값인 태도다. 많은 에피소드들은 사람들의 고통, 그 고통을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그 에피소드들에 깔린 화자의  태도도 회의감, 단절, 비아냥과 같은 키워드들로 묘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게 화자가 읽는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하다.



[침대에 누워 불을 끄려다가, 협탁에 쌓여 있는 미스터리 소설 중 맨 위쪽 책을 집었다. 1970년대 뉴욕의 지저분하고 누아르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하이스미스와 심농의 전통을 잇는 심리 스릴러.](32)



심리 스릴러 미스터리 소설. 분위기는 을씨년스럽다. 등장인물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나아가 죽이려고 한다. ‘양심과 공감 능력이 결핍된, 잔인하고 가학적인 인물’이자 그나마 ‘자기향상의 열망’까진 지닌 인물이다. 소설의 분위기나 등장인물은 지구적 위기나 혐오와 증오에 빠진 사람을 향한 은유다. 은유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태도나 화자의 태도나, 다시 말하지만 닮았다. “굳이 더 알아내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었다. (...) 살인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36)고 말하는 화자는 어차피 이런 소설은 결말이 뻔하며, 그 결말은 대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절, 회의가 디폴트 값인 태도다.


그 뒤로 화자가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화자의 ‘자기향상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판단하고 분별하고, 단정짓기보다 처음 보는 것처럼 궁금해하고 뭔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향한 열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흐릿한 욕망이 보이는 포인트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에 요양원에 사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책이 한 권 있는데, 미스터리물인 그 책을 매번 새로 읽듯 읽고 또 읽을 수 있었다. 그 책을 끝마칠 때쯤이면 읽은 내용을 다 잊어버려서, 다시 읽더라도 결론이 어떠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36)



5. 고통 속에서 저마다 갈구하던 건 무엇이던가. “인물들이 드러내는 것은 끝 모를 고독과 슬픔과 자신에 대한 회의였다. 다들 절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듯했다.”(59)는 말처럼, 사람들은 연결되기 바랐고, 행복하길 바랐으며, 사랑을 바랐다.


6. 친구와의 첫 만남. 치료를 시도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의 암 치료는 실패했고 암이 전이됐다. 친구는 다시 입원했다. 화자는 다시 친구를 보러왔다. 죽음과 맞서는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한 후 함께 보는 분홍색 눈송이. 인간의 삶과 닮았다. 잠깐 존재했다 사라지기에 슬프지만, 또 그렇게 유한하고 순간적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눈송이. 누구나 연결되고 행복하길 바라고, 사랑을 바라는데, 왜 단절하고 불행해만 하고 증오에 삶을 내맡기는 걸까. 묘사되지는 않지만 화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병실의 협탁에는 우연하게도, 전에 읽던 미스터리 소설이 놓여 있었다. 굳이 그 뒤가 궁금하지 않다던 화자는 소설을 집어들고 읽는다. 변화가 느껴진다. 궁금해하고, 살펴보려 한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서로 증오하고 단절되어 있는 뭇사람의 모습을 보며 내적으로 어떤 계기가 생겨난 게 분명하다.


7. 소설이 중반부에 이르기 조금 전 여든이 넘은 노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암에 걸린 친구와의 관계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 에피소드다.


할머니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속임수에 걸리거나 사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아가 아들이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들은 직장 때문에 떨어진 곳에서 산다. 혼자 계신 어머니가 걱정된다는 아들의 말에, 할머니와 이웃이던 화자는 “그 남자에게 어머니를 가끔씩 찾아보고, 비상사태가 생기면 가서 살펴보겠다고 했다.”(112) 시몬 베유의 말,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하고 물을 수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지내요?’라는 물음으로 이웃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그것이 어렵지 않은 임무라고 보았다. 대부분 그렇듯이 할머니도 대화를 원할 거라고 보았다.](113)


[하지만 나중에 내가 깨달은 사실은 (...) 전혀 옛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입힌 일이라면 특히 더 그랬다. 누가 그런 일을 떠올리고 싶을까?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듣고 싶을까?](115)


[할머니는 입만 열면 불평이었다. (...) 세상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몇 글자로 요약될 수 있었다. 지옥행 특급열차.](116, 117)


[할머니의 행동에서 가장 기이한 점은 내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 대개는 아예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 말을 들어주는 데는 성공적이었던 듯하지만, 어떤 진정한 인간 관계는 없는 것 같았다.](119)


[바깥세상에 적들이 진을 치고 당신을 노린다며 잔뜩 겁먹은 채 그들을 향한 원한과 억울함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계시잖아요. (...)  난 할머니 잘못이 아니라고, 내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런 일이 정말 내게 일어나기 전에 난 먼저 죽어버릴 것이다.](120, 121)



노파는 암에 걸린 친구와 같이 죽음과 가까운 인물이지만 고통과 마주한 방식은 친구와 많이 다르다. 노파는 고통을 좋지 않는 방식을 마주하는 모습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삶에서 겪은 고통이 내적으로, 또는 관계에서 적절히 해소되고 승화되는 게 아니라 곪아 무한히 확장되는 두려움으로 이어졌고, 잘못 단단해진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생긴 분노, 증오, 혐오의 감정을 세상에 투사했다. 노파가 지닌 투사의 기본태도는 단정과 분별, 그리고 단절이다. 노파는 자신이 지닌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그 프레임은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단정하며, 단정의 확신으로 자아가 부정적으로 단단해진 만큼 타인과 단절됐다. 내가 옳고 세상이 틀린데 타인 또는 세상과 대화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화자는 노파를 보며 느끼지 않았을까. 자기가 그동안 보여준 태도가 할머니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금이라도 바뀌지 않는다면, 노파처럼, 또는 자신의 은사처럼 남을 증오하다가 두려움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지금까지 저러신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선거 때문에 그렇게 열을 내신 적도 없고,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대개 민주당에 투표하셨거든요. 어머니는 한때 페미니스트이기도 했고요. (...) 그리고 여성 행방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많은 여성들이 공직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말씀하신 기억도 나고요.

미친 소리 같지만, 요즘 어머니 말씀을 듣고 있으면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동안 누가 머리에 칩을 박았나 싶기도 해요.](118)


[젊은 시절 내내 인권을 위해 싸웠던 대학 은사 한 분이 긴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쓰는 단어가 겨우 몇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그것도 악을 쓰며 말했다) 그중 하나가 ‘호모 새끼’였고 다른 하나는 ‘검둥이’였다.](121)



화자의 태도에 내적 균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게 다음의 문구다. 노파와의 에피소드가 끝난 후 화자는 시몬 베유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122)



단순히 타인의 고통에 집중하겠다는 건 아니다. 자기 보호와 타인에 대한 이해 및 공감 사이의 어려운 저울질 속에서 그 지난함을 감내하고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묻고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냐고 물을 수 있는, 그런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소박한 다짐의 시작이다. 삶은 원래 그런 이율배반과 지난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8. 인생에서 확실한 게 무엇이 있나.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불확실하며 우리의 능력 또한 그러하다. 화자는 죽음과 마주한 친구를 보며 유한한 인간의 삶, 불확실한 인간의 삶, 또한 유한하며 불확실한 인간의 능력에 대해 자각한다. 삶은 미스터리 소설처럼 미스터리하며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 ‘뻔하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는 말은 오만하고 단정적이다. 뭐가 뻔한가? ‘놀라운 우연의 일치’를 마주하는 화자가 느끼듯, 인생에는 불확실하면서도 신기한 것들이 가득하다. 우리에게 뭔가를 ‘단정’할 만한 능력이 있나? 친구와 과거의 기억이 엇갈리듯, 자기기만으로 파국을 맞는 한 교수의 에피소드처럼, 우리는 틀릴 수 있고,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는 존재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166, 167)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는 단절의 태도다. 나는 남과 다르다.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는 공감, 이해, 연결의 태도다. 나 또한 남들과 같은 유한한 인간에 지나지 않음에 대한 자각.

 

9. “난 치욕스럽게 고통에 시달리다 가지는 않을 거야.”(126) 노파와의 에피소드가 끝나고는 얼마 뒤, 친구의 이 선언이 등장한다. 고통에 맞서 싸우겠다는 듯한 뉘앙스의 선언. ‘그래,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라며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화자는 안락사 약을 사두었다는, 세상을 떠나려는 자신의 곁을 지켜달라는 친구의 말에 화들짝 놀란다. 그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된 건지, 솔직히 내적 맥락이 자세히 그려지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화자는 몇번의 거절과 고민 후 받아들인다. 관찰 및 회고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행했던 타인을 향한 가벼운 평가와 판단을 넘어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깊은 교류가 시작되는 첫 계기다. 노파와의 관계는 관계까진 이어졌지만 진정한 교류로 이어지진 않았으니 말이다.


10. 에어비앤비를 통해 잡은 뉴잉글랜드에 있는 은퇴한 부부의 집. 화자는 친구와 여기에 함께 머문다. 신기하게도 마침, 이 집에도 전에 읽다가 말았던 스릴러 소설이 있다. 화자는 집어들고 읽는다. 처음엔 관심없다더니 읽고보니 50쪽이 남았다. 하지만 아직도 머뭇거림과 망설임이 있다.



[그 후로도 소설은 50쪽은 더 이어지지만 살인자의 운명까지 결정이 된 마당에 마저 읽게 될지 모르겠다. 뭔가 반전이 있겠지만 난 미스터리물의 반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156)



반전은 내 분별, 판단, 예측이 틀렸다는 이야기다. 화자는 아직까지 자아가 단단하다. 삶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삶에 대한 통제욕을 버리지 않았다.


11. 함께 먹고, 자고, 대화하고. 화자와 친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정말 이상해. 얼마 전 산책하다가 친구가 말했다. 때로는 우리가 이곳에 몇 년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슨 뜻인지 나도 알았다. 한 주 만에 우리 관계는 젊은 시절의 우정을 다 덮어버릴 정도로 훌쩍 자라났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이 친밀감 때문에 비밀이나 거짓말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185, 186)



둘은 깊은 대화를 나눈다. 주로 화자가 듣긴 하지만 말이다. 후회와 한탄, 어릴 적 이야기, 원망,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고통 등. 대화를 통한 교류에 판단과 평가보단 경청과 공감이 자리한다. 변화는 미스터리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미스터리물이 너무 좋으니 책을 읽어 달라는 친구. 소설의 시점이 삼인칭에서 일인칭 으로 변경된 건 외부자적 관점에서 판단하던 화자가 타인의 맥락에 깊이 들어왔음을, 자기 일처럼 공감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인칭 시점이 일인칭으로 바뀐다.](199)


[하, 친구가 말했다. 반전이네. 결혼식으로 행복하게 끝나리라 봤는데 절벽이 마련되어 있었군.](200)



소설에는 반전이 있었다.


12.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최근 출간된 소설이 전자책으로 몇 권 있었지만 친구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요즘 소설가들의 파괴적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삶의 참상에 사로잡힌 것을 삶의 전망과 구분한 존 치버의 말을 인용했다.

요즘 소설은 대개 참상에 사로잡혀 있어. 친구가 말했다. 아니면 전혀 설득력 없는 진부한 정서든지.

현대 삶의 참상에 대한 그 모든 책들은, 그래, 뛰어난 책들도 많지, 나도 알아. 말 안해도 안다고. 하지만 난 자기애와 소외와 남녀 관계의 허망함에 대한 얘기는 이제 그만 읽고 싶어. 인간의 추악함, 특히 남자의 추악함에 대한 글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아. 작가의 임무는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교양시키는 일이라고 포크너는 당대의 젊은 작가를 얼마나 심하게 꾸짖었는지. 마치 인간 사이에 서서 인간의 종말을 바라보듯이 글을 쓴다고.

가슴이 아니라 분비선에 대해 글을 쓴다고. 작가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건 두려워서라고 포크너는 말했다. (...) 하지만 작가라면 그러한 두려움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 포크너가 요구했던 건 용맹함이었다. 그다음에는, 오랜 보편적 진리 -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으로 돌아가기. 그것이 없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포크너는 경고했다.](201, 202)



고통, 혐오, 증오, 단절, 싸움… 작가는 통합을 위한 보편적 진리를, ‘친구’의 입을 통해 말하고 싶던 걸까. 다만, 화자는 그런 친구의 말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멋진 말이다. 정말 멋진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늘날의 작가들을 바라보는 여러 방식 중에서 그런 말이야말로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가장 생뚱맞게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린다.](202)


13. 고통과 두려움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연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친구와 화자는 그걸 보여준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이나 위기, 긴급 사태, 특히 죽음이나 죽음의 위협과 관계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전혀 모르는 타인들끼리도 강렬한 친밀감이 생겨나고 때로 이후에도 유대 관계가 지속되는 그런 일은 늘 있다.](208)



죽음을 앞둔 고통과 두려움, 그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 때로는 그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무너져 정서적으로 흔들리고, 딸을 원망하기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화자는 그런 친구의 삶의 맥락에 깊이 개입하고, 그에 공감함으로써 친구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내겐 그 말이 들렸다. 난 강해지고 싶었어. 내가 알아서 제어하길 바랐어. 가능한 한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고 내 식대로 죽고 싶었다고. 평온함을 바랐어. 질서 정연함을 바랐고.](211)



하지만 그러기엔 인간은 나약하고, 삶은 불확실하고, 정서는 쉬이 통제되기 어려울 정도로 이리저리 날뛰고, 추상적 담론으로는 쉬워보이는 일들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친구는 이제 악을 쓰고 있었다. 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그게 사는 거야.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당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게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213)


부조리해보이지만 이게 삶이다.


14.


[내가 아무리 기를 써봐야 언어는 전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어서, 실제 벌어지는 현실을 결코 정확히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겨우 무언가 묘사해내더라도 기껏해야 결국 실재의 옆자리를 차지할 뿐임을 (...)](217)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작가들 - 이들만이 내가 계속 읽고 싶은 작가이고, 나를 고양시키는 작가이다.](218)



누네즈가 특이한 방식으로 소설을 쓴 이유일까. 에세이처럼, 화자의 온갖 편린, 회상이 어느 중심적인 줄기 없이 산만하게 등장하는 듯하게 소설을 쓴 이유가. 그게 더 사실적이니까. 의도는 뭘까? 이게 현실이다?


15.


[친구가 말했다. 지독히 잘못됐잖아. 그 사람의 감정을 그렇게 부정해버렸고, 정말 도움이나 위로가 될 말이라고는 다들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고. 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느낌이냐면, 수치스러워서 역겨워. 그 여자가 세상을 뜨기 전에 누구라도 그 사람을 진정 적이 있었을까, 그 의문이 떠나질 않아. 그 사람을 본 적이.

이것은 내가 지금껏 들은 가장 슬픈 이야기다.]



다름아닌 집단치료의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 진정한 공감과 위로는 없었다. 피상적으로 오고갔던 위로의 말. 친구는 분노했다.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가족.”

“사랑.”

“옳은 일을 하는 것.”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긍정적인 마음으로 꿈을 좇는 것.”

삶의 의미는 삶이 끝난다는 것이죠. 물론 그 답을 생각해낸 건 작가일 거예요. 그 작가는 카프카겠죠.

아니, 당신 자신에게는 무엇이냐고요. 사회복지사가 말한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카프카와 같아요.

하지만 질문은 당신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거예요.

끝난다는 것이라고요. 친구가 말한다. 카프카가 말했듯이(나직하고 새된 웃음소리).](235)



친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아마 화자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차에 짐을 잔뜩 싣고 멀리로 차를 몰았다. 아무 말 없이 몇 킬로미터를 달렸을 때 불쑥 비통하고 낮은 목소리로 친구가 내뱉었다. 죽어라 애쓰고 죽어라 계획해봐야.](243)



계획대로 풀리지 않고 꼬여버린 인생. 딸과 화해할 수 없는 사실과의 화해. 친구는 그저 받아들인다.


16. 친구의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 얼마 전 한 지인의 부고를 떠올리던 화자의 모습은 소설의 초반에 등장했던 모습과 사뭇다르다. 태도가 바뀌었다. 



[비와 자루가 긴 쓰레받기를 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는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공원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이웃이다. 그에게 축복이 있기를.

매일 다람쥐와 새에게 먹이를 주러 오는 여자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다람쥐와 새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하지만 지금 건너편의 저 젊은 연인들. 젊은 두 연인이 앉아 말싸움을 하고 있다. (...) 그들은 젊고, 그들은 아름답다 - 화를 내는 와중에도 아름답다.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싸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런 건 늘 알 수 있다.

오, 제발 싸우지들 말아요, 젊은이. 여기서는 평화를 좀 누릴 수 있게.](248, 249)


[나 역시 바로 오늘 아침에 누군가와 싸웠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 

그가 폭발했다. 정말 딱 당신다워. 역시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 당신은 가망이 없어. 그가 말했다. 

정말 딱 당신다워. 무슨 일로 짜증이 나건, 우리 사이에서 뭐가 잘못되건 늘 딱 당신답다고 했다.](249)



화자는 친구가 안락사 약을 먹을 때 곁에 없어야 한다는 전 연인의 말에, 그런 친구의 행위와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전 연인의 말에, 납득할 수 있는 거짓말을 하는 게 너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돌아온 건 단절, 판단의 태도. 화자가 초반에 보여준 태도다. 그냥 좀 들어주면 안 되나? 쉬운 일은 아니다. 노파의 사례에서 보지 않았나?



[젊은 연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 얘기를 대체 왜 우리한테 하는 건데?

아니, 그들이 상냥한 사람이리라 상상할 수도 있다. 싸우던 것도 잊고, 자기들 문제는 제쳐두고 내 말을 듣는 것이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공유 정신병. 전 애인은 친구와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 표현했다.](250)


17. 소설의 마지막이다. 화자가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연결되었기에 너무나 행복했지만,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 연결이었기에 너무나 슬펐다.


정서적 무너져내림. 자아의 균열. 화자의 뭔가가 바뀌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같다던 그 보편적 진리를 간절하게 외치는 듯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공포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곧 끝날 거야. 이 동화 같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장 슬픈 이 시간은 지나갈 거야. 그러면 혼자가 되겠지.

애도하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251)



화자의 말인지, 작가의 말인지 불분명한 마지막 말.



[독자들이 소설로 이끌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기로 떨리는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덥히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베냐민은 말했다.

나도 애를 썼다. 단어를 차례로 놓았다. 그 모든 단어가 다른 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다른 삶이 그렇듯 친구의 삶도 다른 식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 - 

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251, 252)



18. 내용보다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작가를 계속 읽고 그런 작가가 본인을 고양시킨다고 했던가.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이라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새로울 게 없던 소설이 독특한 방식 덕이었을까 다채롭게 읽혔다. 앞서 말했듯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액자식 구성. ‘우리가 세상을 보는 모습을, 아니, “삶”이란 걸 그대로 그려내고자 했던 것 같다’는 말로 퉁치기엔 가독성을 떨어뜨렸던, 왜 등장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다양한 생각, 관찰, 회상. 산만한 이야기. 단상을 최대한 줄기를 잡은 채로 끼적이려고 노력했지만 화자의 편린이 산만했던 만큼 단상도 산만했던 것 같다. 다채로운 만큼 뭔가 더 깊이 읽지 못한 것 같고 다양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반응과 감정의 맥락을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로 읽으니 이 소설을, 작가의 의도를 아주 조금은 이해한 것 같다. “오랜 보편적 진리 -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으로 돌아가기” 물론 그 길을 걷는 게 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은 용맹함을 필요로하지만.


19. 작가가 그려낸 다양한 삶의 모습이 우리네의 삶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상당히 유사하지 않나. 혐오와 증오, 적대가 디폴트값이 된듯한 상황. 고통, 그리고 고통의 경험이 만들어낸 적절한 근거없이 무한대로 확장하는 공포와 두려움. 부적절한 인과관계의 설정과 부적절한 책임전가에 따른 분노와 혐오, 증오. 왜곡된 감정의 부정적 정서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구체적인 사실과 맥락, 공익을 위한 담론은 실종된지 오래다. 게다가 그런 부정적 정서가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첨단이 정치적 공간이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타인과 관계맺으며 살 것인지, 어떻게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사실상 부재하다. 이미 머릿속에 깊게 프레임화된 틀로 세상을, 타인을 재단해버리니 구체적인 맥락으로의 개입,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할리가.


갑작스레 타인을 향한, 세상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정서적 동요속에서 축복을 외치던 화자의 모습은 내게도 어떤 정서적 감응을 일으켰고 나는 그런 화자를 따라서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오, 제발 싸우지들 말아요. 이럴 때가 아니라구요.’


하지만 이래놓고 나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싸우겠지. 출근 길 혼잡한 전철 안에서 다리를 크게 벌리는, 어쩔 수 없던 신체접촉이 짜증나는 듯 팔꿈치로 찌르는 누군가가 싫어지고, 누군가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고, 소통에 실패하고, 관계맺기를 실패하고, 나아가 누군가를 원망하겠지. 그럼에도 타인의 맥락을 궁금해 하고, 고통을 궁금해하고, 자기연민을 기반으로 한듯한 단절의 담론에 기대지 않고 ‘오랜 보편적 진리’를 향해 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자 노력할 것. 그거 자체로 나름의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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