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불안의 책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0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9월
평점 :
1. “어떻게 이 책이 이런 인기를 끌었을까?”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의 첫 페이지를 저 질문과 함께했고 마지막 페이지도 저 질문과 함께했다. 의미는 달랐다. 첫 페이지를 넘기며 던졌던 질문은 아무 배경지식이 없던 페소아 책을 향한 호기심이었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던졌던 질문은 어떻게 이런 카오스적인 글이, 은유로 범벅이가 되어 있어서 이게 시인지 에세이인지 모를 장르적 혼란을 가져다주는 글이, 정서적 혼란과 부정적 정서가 가득해 불안한 사람이라면 오히려 읽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되는 정도의 글이, 모 배우의 추천을 받았다고 재고가 소진되어 중쇄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2. 페소아는 누구인가? 내가 읽은 문학동네 판본은 페소아를 이렇게 소개한다.
[1888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가족 모두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으로 이주했다. 1905년에 홀로 고향으로 돌아와 리스본 대학 문학부에 입학했으나 채 일 년도 되지 않아 학업을 중단하고는 영어 무역 서신을 번역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1912년 “아기아”에 포르투갈 시문학에 대한 글을 발표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1915년 포르투갈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라 평가받는 잡지 “오르페우”를 창간했다. 일생 동안 여러 잡지와 신문을 통해 130여 편의 산문과 30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자신이 직접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몇 권의 영어 시집을 펴냈다. 1934년 생전에 출간된 저서 중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로 쓴 시집 “메시지”를 출간했다. 틈틈이 기록해놓은 단상들을 모아 “불안의 책”을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간질환이 악화되어 1935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엄청난 양의 글이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었고, 아직도 분류와 출판이 진행되고 있다. 포르투갈 문학의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한 페소아는 자신의 존재를 해체시켜 단일한 ‘나’가 아닌 복수적인 존재를 추구했고, 이를 수십명의 이명(異名)을 통해 구현했다. 사후 47년이 흘러서야 출간된 대표작 “불안의 책”은 작가와 흡사한 반(半)이명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영혼의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가가 일평생 끊임없이 추구했던 내면의 성찰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다.]
주목할 만한 키워드를 뽑자면, 페소아는 20세기에 주로 활동했던 포르투갈의 시인이라는 것, 모더니즘 문학의 시초라 평가받는 “오르페우”라는 잡지를 창간했다는 것, 『불안의 책』은 여러 단상들이 모인 책으로서 저자의 사후 출판된 것, 독특한 문학적 스타일로 수십명의 이명을 만들어냈다는 것, 『불안의 책』은 그냥 이명도 아닌 반이명이라 평가받는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라는 화자가 등장한다는 것, 정도겠다. 이명이라는 게 독특한데, 로맹 가리같은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종종 사용한 가명(假名)과는 다르다는 걸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 가명은 특유의 정체성은 비교적 유지하면서 쓰는 가짜 이름이라면, 이명은 페소아가 창조해낸 아예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인물이다. 소설가가 소설 속의 캐릭터를 창조하듯, 페소아는 하나의 캐릭터를 창조해 독립적인 정체성(삶, 사상, 스타일, 문체 등)을 부여하곤 했다. 그리고 이를 한 두명 만들어낸 게 아니라 수십명 만들어내 활동했다. (이게 가능한가?…) 『불안의 책』에도 이런 이명의 화자, 회계사무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가 등장한다. 하지만 『불안의 책』 화자인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는 다른 이명과 달리 페소아의 정체성을 많이 닮았다는 점에서 반이명적 존재로 평가받는다. 그런 점에서 『불안의 책』 대부분을 페소아 본인의 독백이라고 보고 읽어도 괜찮은 것 같다.
3. 이 책엔 서사가 없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도 책의 초반부에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잘 표현한다.
[사실 없는 자서전 - 아무 연관성 없고 연관성을 갖추려는 의지도 없는 단상들 속에 나의 사실 없는 자서전, 삶이 없는 인생 이야기를 무심히 털어놓는다. 이는 나의 ‘고백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할말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텍스트 12에서](11)
어떤 특정한 감각 -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 에서 시작되는, 나무형이 아니라 리좀형 또는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체계없는 사유와 이미지, 그것을 묘사하는 부유하는 언어들. 이렇게 연관성이 없는 카오스적인 단상들의 모음이 이 책을 어떤 점에서 잘 요약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불안의 책이라는 이름은 책의 상태를 잘 묘사한다. 화자의 심리 상태뿐만 아니라 책의 존재 자체가 불안하니까)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한구석에 던져진 물건 같고, 길에 떨어진 넝마쪽 같은 천덕스러운 존재인 내가 삶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 한다.”(52) ‘던져진 물건’, ‘떨어진 넝마’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뭔가 초라한 신세인 것 같다는 느낌을 주지만, 구체적으로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 어떻게 그렇지 않은 척 한다는 건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의 일부가 되고, 육체와 삶의 감각 속에 침투하여 마치 커다란 거미의 침처럼 우리를 가까이 있는 것들에 교묘하게 연결시킨다. 그러고는 천천히 다가오는 죽음이라는 침대, 바람에 흔들리는 그 침대에 우리를 가둔다.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이고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이지만,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닐진대 다 무슨 소용인가?”(219) 이렇게 『불안의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한 일반적인 에세이보다는 은유와 상징이 그득한 시적언어를 주로 차용한, 활자 하나하나가 그 단어가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기의에 가닿지 않아서 모두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기묘한 글에 가깝다.
4. 그래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이 에세이들을 한 편의 시라면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화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감각, 이 감각을 저 부유하는 활자들을 통해 어떻게 표상하려고 했던 걸까. 그가 감각했던 세상은 어떻게 그에게 다가갔던 걸까. 이런 의문을 자아냈으니까. 하지만 이 에세이들이 한 편의 시가 아니라면, 엉성한 지식에 기대어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적 헛소리가 아닌가, 라는 생각도 했다. 개똥철학 같다고 해야 하나. (뭐, 또 그렇게 단정짓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단정을 어렵게 하는 어떤 맥락이 존재하는 것만 같아서. 그가 단정, 확신이란 말을 혐오했듯 말이다.)
그랬던 만큼 처음엔 이런 스타일의 글쓰기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반면교사로 느껴졌으니까. 이렇게 부유하는 활자로 도배된 글은 시를 쓸 때가 아니라면 본인의 생각과 감정을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과 그다지 연관이 없고 흐릿한 상태로 존재하는 감정의 뭉텅이를 배출 또는 배설하는 데에만 목적이 있어서 그 감정의 명확한 실체를 파악하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져오고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등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목적에는 제대로 봉사하지 못한다는 걸, 나름 잘 겪어봤다고 생각하는 나니까.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정말 불안하다면, 오히려 읽지 않는 게 도움이 된다고 해야 할 정도의 책이니까.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화자에게 점점 더 이입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나는 주로 이 카오스적 단상의 가시밭 길을 ‘내가 궁금한 질문’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헤쳐나갔는데, 그건 바로 “페소아는 왜 이런 글을 썼던 걸까? 특히 왜 이런 이명을 자주 사용했던 걸까?”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다시 풀어 써보자면, 페소아는 왜 자꾸만 자신의 정체성을 지우는 글을, 자신을 깊이 파고드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은유적 글을 썼으며, 자아를 통합하지 않고 오히려 자아를 해체하고 분열하는 행위 - 이명을 창조하는 행위 - 를 통해 글을 썼냐는 것이었다.
5. 화자는 이런류의 비슷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한다.
[나의 모든 꿈을 하나의 연속되는 삶 속에 모을 수 있다면, 상상 속의 친구들과 내가 창조해낸 사람들로 가득찬 날들이 이어지는 인생, 이런 가짜 인생 안에서 살고 고통받고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 모든 일이 내 영혼으로 만들어진 도시에서 일어나고 모든 길이 내 안의, 아득히 먼 곳의 기차가 느리게 나아가는 플랫폼까지 뻗어나갈 것이다(…)](155)
[소설 속 어떤 인물들은 평소 현실에서 우리와 대화하고 어울리는 친구나 아는 사람들보다 훨씬 중요해진다는 걸 이미 여러 차례 알아차렸다.](364)
[현기증이 난다. 거친 밀짚으로 촘촘하게 짜 만든 전차 의자는 나를 어딘가 먼 곳으로 데려가고, 나는 공장들, 노동자들, 노동자들의 집, 인생, 현실, 모든 것의 형태로 확장된다.
피곤하고 어지러운 상탱로 전차에서 내린다. 나는 지금 막 인생 전체를 살았다.](376)
[내가 지나가는 모든 집과 별장, 농가에 살고 있는 이들의 모든 인생을 내 안에서 살아본다. 그 모든 개인들의 삶을 동시에 산다. 동시에 다양한 감정과 여러 감각을 느끼는 나의 특별한 재능, 여러 사람의 삶을 - 밖으로는 그들을 보고 동시에 안으로 느끼면서 - 한꺼번에 살아가는 특별한 재능 덕분에 나는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 사촌들, 가정부, 가정부의 사촌 등 한번에 모든 사람이 된다.
내 안에 여러 인물들을 만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인물들을 만들어낸다. 꿈 하나가 시작되면 바로 한 인물이 나타나고, 그 꿈은 내가 아니라 그 인물이 꾸는 꿈이 된다.
창조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파괴했다. 내 안의 나 자산을 너무 많이 밖으로 드러낸 나머지 잊 내 안에서 나는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나는 다양한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을 공연하는 텅 빈 무대다.](377)
화자는 가상의 인물이 현실의 인물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가상의 삶을 살아봄과 동시에 그 삶을 사는 정체성을 지닌 인물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렇게 가상의 인물에 대한 갈망 또는 효용은 여러 소설가의 글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대표적인 작가가 조지 오웰과 쿤데라다. 오웰은 “Why I Write”에서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 그와 대화하는 취미를 가졌다고 고백한 바 있고(“For this and other reasons I was somewhat lonely, and I soon developed disagreeable mannerisms which made me unpopular throughout my schooldays. I had the lonely child's habit of making up stories and holding conversations with imaginary persons”) 쿤데라는 “삶은 다른 곳에”에서 “누구나 단 하나 유일한 자신의 삶 외에 다른 삶들을 살아볼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 당신 또한 실현되지 못한 당신의 모든 잠재적 삶들, 당신의 모든 가능한 삶들을 살아 보고 싶을 것이다. (…) 가능하지만 세워지지 않은 다른 관망대를 우리가 끊임없이 꿈꾸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가상의 인물을 향한 욕망은 어떤 결핍에서 나왔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게 외로움이 되었든, 잠재적 삶 또는 가능한 다른 삶을 살아보지 못한 데에 대한 아쉬움이든, 어쨌든 현실에서 어떤 불만족을 느끼기 때문일 테니까. 생각해 보면 나도 ‘소설 속 어떤 인물은 평소 현실에서 나와 대화하고 어울리는 친구나 지인보다 훨씬 중요’하기도 하고 살아보지 못한 잠재적 삶에 대한 아쉬움에 이리저리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지 않나. 다만, 페소아는 이런 이명을 만들어내는 것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해왔고, 그 이명이 현실보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했다는 점에서 좀 다르지만 말이다. 이는 그만큼 결핍이 더 강했다는 뜻일까? 그 구체적 맥락, 또는 원초적 사건을 캐보고 싶지만 정보가 많지 않아 전문가들도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상상 속의 인물들은 현실 속의 인물보다 더 선명하고 진실하다.
나의 상상 속 세상은 언제나 나에게 하나뿐인 진실한 세상이었다. 나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과 나눴던 사랑만큼 사실적이고 열정과 피와 생명으로 넘치는 사랑을 결코 해본 적이 없다.](512)
6. 현실을 마주하고 살기에 감수성이 지나치게 풍부했던 페소아. 내적세계로의 침잠, 가상의 삶에 대한 욕망, 실존적 고민 등 공감가는 부분과, 신적 자아를 추구하는 자가 겪게되는 각종 부작용, 자아의 분열, 정체성의 혼란, 무책임 등 반면교사로서의 면모가 공존했던 이 인물에 대한 통합된 이야기를 뭔가 더 풀어서 하고 싶지만, 이번엔 여기까지만 해야겠다. 마지막 부분의 발췌로 아쉬움을 달래자.
[인생의 활동과 목적들로부터 자발적으로 도망치고 세상과의 접촉을 일부러 단절한 결과, 나는 내가 그렇게도 피하려 했던 것과 마주했다. 나는 삶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세상과 접촉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기질이 세상과 만났던 경험을 통해, 삶을 느낄수록 고통스럽기만 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접촉을 피해 나를 고립시키자 그러잖아도 예민한 나의 감수성은 고립으로 인해 더욱 극대화되었다.](568, 9)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들과 사물들에까지 그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시간이 도망가버려 고통스럽고, 삶의 불가사의가 아프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찾는 장소에서 일상적으로 마주치던 사람들, 그들을 못 보게 된다면 나는 슬플 것이다. 그들은 그저 모든 삶의 상징이었을 뿐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