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tilda (Paperback, 미국판) - 뮤지컬 <마틸다> 원서 Roald Dahl 대표작시리즈 4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 Puffin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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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지지자를 만나는 일의 중요성. 성인이 읽어도 좋은 책. 재밌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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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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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계기는 영화였다.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첫 영어 장편 영화.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혹해 영화관에서 본 ‘The Room Next Door’. 하지만 타이틀을 감안했을 때 감독의 미적 감각과 탁월한 연출을 제외하고 서사나 주제적인 측면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진 못한 작품이었다. 마침 원작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었고, 생각보다 감응받지 못한 작품에 대해 내가 놓친 건 없는지, 원작 소설을 읽어 보면 영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이 책까지 손에 들게 되었다. ‘What are you going through’라는 소설이다.


그런데 웬 걸. 당연히 달라야 겠지만 책과 영화는 생각보다도 더 달랐다. 영화는 잉그리드와 마사의 관계, 그리고 죽음과 탄생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춘 반면 책은 초점이 영화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그만큼 영화가 메시지가 뚜렷했던 것에 비해, 책은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이야기가 산재했고 그 통일성 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을 ‘관찰자적 화자’라는 줄기가 힘겹게 엮고 있을 뿐이었다. 어떤 점에서 ‘사실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이야기의 초점은 흐렸고 그만큼 흐린 활자 사이로 이야기의 줄기를 솎아내는 데 집중하며 읽어야만 했던 작품이었다.


2. 처음 읽었을 때는 화자와 친구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주로 언급하는 소설로 읽혔다. 그런데 이렇게 읽었을 때 이 소설은 그닥 흥미를 끄는 구석이 없었다. 죽음을 주제로 한 매우 훌륭한 소설인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과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은 적이 있었고 두 작품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 깊이와 방식에서 더 탁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작가가 굳이 새로울 게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 소설을 썼을까? 그런 것 같진 않았다.


다르게 읽힌 건 발췌를 위해 다시 간단히 훑어보던 때였다. 소설을 읽을 때 화자든 주인공이든, 등장하는 인물의 어떤 결핍과 그 결핍을 어떤 조금 더 나은 상태로 바꾸고자 하는 욕망에 주목하는 편인데, 다시 읽어 보니 흐릿한 초점 사이로, 화자의 각종 회상과 판단 등의 편린들 사이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암에 걸린 친구와의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변화하는 화자의 태도가 눈에 띄었다.


3. 소설은 화자가 한 남성의 강연을 들으러 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국제적인 상을 받은 유명한 작가다. 화자의 옛 연인이다. 먼 곳에서 옛 연인을 위해 찾아온 건 아니었다. 화자는 암에 걸린 친구를 수년 만에 만나러 왔다. 다만, 마침 그 지역의 대학에서 그가 강연을 했고 별다른 연락없이 찾아가 강연을 들은 것이었다. 


이때 화자의 태도는 소설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시몬 베유의 말 -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 하고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 이 풍기는 아우라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지내요 묻는다는 건 분별하고 판단하기 전에 상대의 맥락을 궁금해한다는 것,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화자는 그런 시도 전에 상대를 가볍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프레임에 맞춰 해석한다. 강연장에 오자마자 홍보물 사진 속 그와, 그를 소개하는 학과장에 대한 인상의 언급에서 그런 화자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나이 들어가는 백인 남성들이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갖게 되는 그 인상. (...) 꼭 와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부디 와주시면 좋겠어요! 도무지 이런 말은 할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이런 식에 가깝다. 명심해, 내가 당신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아. 그러니 내 말 새겨들어. 그러면 뭐가 뭔지 좀 알게 될 테니.](11)


[익숙한 유형의 여성이다. 매력 넘치는 학자, 지적인 요부, 똑똑하고 고등교육도 받았지만, 페미니스트이고 힘 있는 자리에 있는 여성이기도 하지만, 결코 촌스럽게 옷을 입지도 않고, 따분한 공부벌레이거나 무성적인 드센 부류도 아님을 알리려고 기를 쓰는 그런 사람. 그러다가 특정한 나이를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 딱 달라붙는 치마와 굽 높은 신발, 빨갛게 칠한 입술과 염색한 머리 (...) 그 모든 것이 ‘난 아직 섹스할 만한 여자야’라고 주장하고 있다.](11, 12)



이 인상은 특정 성에 대해 본인이 지닌 부정적 이미지를 투사한 것이다. 자세한 관찰이나 맥락을 캐려는 노력없이 가볍게 단정짓고 판단해버리는 태도. ‘그럼 그렇지. 어차피 뻔하지.’와 같은 태도다. 그의 강연을 향한 화자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강연의 흐름을 여러번 놓치고도 어차피 대부분 아는 내용이니 괜찮다고 말한다. 자기가 지닌 이미지, 관념 등을 통해 현실을 ‘이미 재단해버리는’ 화자의 태도는 그의 강연이 단정적이며 어떤 대안과 희망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그 자신의 분별과 모순된다. ‘어차피 끝났어.’라는 외침과 ‘어차피 그렇지.’라는 말은 그 근본에 있어서 유사하다. 화자는 자신이 비판하는 것과 닮았다.



[다 끝났다고 그가 말했다. (...) 인간 이전에는 숲, 인간 이후에는 사막. 대재앙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든, 어떤 행동을 취하고 어떤 희생을 해야 하든, 인류에게는 그렇게 해보려는 의지가, 집단적 의지가 없음이 이제는 분명해졌습니다. 지능 있는 외계생명체에게 우리 인류는 죽음 소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일 겁니다.](15)


[그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의견이 아니라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신들이 내 말을 믿건 말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 이 자리에서는 그래도 뭔가가, 낙관적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어차피 완전한 파멸이라는 예언이 아닌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뭐라도 해볼 수 있는 길이 있다든가, 하다못해 한 가닥, 다만 한 가닥일 뿐이라도, 희망이라든가.](18)



책을 다시 훑으며 새로 보게 된 결핍이 바로 이거였다. 시몬 베유의 말 뒤로 등장하기에 더 괴리되어 보이는 화자의 태도.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당신들은 틀렸고 잘못되었지만 나는 더 많은 걸 알고 우월하기에 판단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 듯한 아우라. 화자가 관찰한 타자, 화자가 들은 일화에는 이러한 태도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4. 결핍은 명확했다. 다만, 그 결핍에 대한 자각이나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분명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변화의 계기도 불분명했다. 그게 이 소설이 한편으론 단순하게 느껴지면서도, 깊이 읽어 보자면 난해하게 느껴지는 이유기도 했다. 산만하게 등장하는 에피소드들 사이로 화자가 지닌 태도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를 야기하는 화자의 내적 맥락을 어떻게 추적할 수 있을까. 분명 핵심은 암에 걸린 친구와의 만남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뜬금 없지만 화자가 초반에 그려내는 세상을 먼저 살펴보기로 했다. 그 세상이 어떤 곳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화자를 비롯해 우리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 작가는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가 어떤 태도를 견지하며 사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흐름으로 이 책을 재미나게 읽어보기 위해서. 


일단, 화자가 그려내는 세상은 시기적으로도 현재와 가까운 만큼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화자의 연인이 이를 강연에서 묘사하고 있다.



[화석연료 기업, 그들은 몇이나 되고, 우리는 대체 몇입니까? (...)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세력의 선두에 서서 활개 치고 있으니 우리 지구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전 지구적 생태계 재앙에서 비롯한 식량과 식수 부족 때문에 생겨난 수많은 난민 (...)](17)


[사이버테러리즘. 바이오테러리즘. (...) 무분별한 항생제 사용으로 인한, 치료법이 없는 치명적 감염병. 전 세계적인 극우 정권의 발흥. 선전선동과 속임수가 정치 전술과 정부 정책의 기반이 되고, 그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상황. 전 지구적 지하디즘을 제압하지 못하는 무능 (...)](18 19)



이를 단순하게, 우리가 어떤 지구적, 사회적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말로 요약해보자. 지구적, 사회적 위기를 해결해나가 위해 우리는 서로 타협하고, 합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야 할 테다. 하지만 사람들은 봉합되기 어려운 수준의 갈등으로 분열을 겪고 있고 적대와 증오가 일상이 되었다. 회의감에 빠졌다. 개인적 수준에서도 마찬가지다. 살면서 마주하는 다양한 형태의 고통 속에서 사람들은 고통에 서로 공감하기보다 싸우고, 단절되어 있다. 개인의 증오를 타인과 세상에 투사한다. 남과 세상을 탓하기만 한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고통속에서 좋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다양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화자도 마찬가지다. 앞서 화자의 결핍이 분별하고 판단하는 태도라고 말했다. 이는 이해와 공감이 아닌 단절이 기본값인 태도다. 많은 에피소드들은 사람들의 고통, 그 고통을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그 에피소드들에 깔린 화자의  태도도 회의감, 단절, 비아냥과 같은 키워드들로 묘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이를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게 화자가 읽는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하다.



[침대에 누워 불을 끄려다가, 협탁에 쌓여 있는 미스터리 소설 중 맨 위쪽 책을 집었다. 1970년대 뉴욕의 지저분하고 누아르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하이스미스와 심농의 전통을 잇는 심리 스릴러.](32)



심리 스릴러 미스터리 소설. 분위기는 을씨년스럽다. 등장인물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나아가 죽이려고 한다. ‘양심과 공감 능력이 결핍된, 잔인하고 가학적인 인물’이자 그나마 ‘자기향상의 열망’까진 지닌 인물이다. 소설의 분위기나 등장인물은 지구적 위기나 혐오와 증오에 빠진 사람을 향한 은유다. 은유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태도나 화자의 태도나, 다시 말하지만 닮았다. “굳이 더 알아내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었다. (...) 살인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36)고 말하는 화자는 어차피 이런 소설은 결말이 뻔하며, 그 결말은 대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단절, 회의가 디폴트 값인 태도다.


그 뒤로 화자가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화자의 ‘자기향상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판단하고 분별하고, 단정짓기보다 처음 보는 것처럼 궁금해하고 뭔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향한 열망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흐릿한 욕망이 보이는 포인트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에 요양원에 사는 한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그에게는 책이 한 권 있는데, 미스터리물인 그 책을 매번 새로 읽듯 읽고 또 읽을 수 있었다. 그 책을 끝마칠 때쯤이면 읽은 내용을 다 잊어버려서, 다시 읽더라도 결론이 어떠했는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36)



5. 고통 속에서 저마다 갈구하던 건 무엇이던가. “인물들이 드러내는 것은 끝 모를 고독과 슬픔과 자신에 대한 회의였다. 다들 절절하게 사랑을 갈구하는 듯했다.”(59)는 말처럼, 사람들은 연결되기 바랐고, 행복하길 바랐으며, 사랑을 바랐다.


6. 친구와의 첫 만남. 치료를 시도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친구의 암 치료는 실패했고 암이 전이됐다. 친구는 다시 입원했다. 화자는 다시 친구를 보러왔다. 죽음과 맞서는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한 후 함께 보는 분홍색 눈송이. 인간의 삶과 닮았다. 잠깐 존재했다 사라지기에 슬프지만, 또 그렇게 유한하고 순간적이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눈송이. 누구나 연결되고 행복하길 바라고, 사랑을 바라는데, 왜 단절하고 불행해만 하고 증오에 삶을 내맡기는 걸까. 묘사되지는 않지만 화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병실의 협탁에는 우연하게도, 전에 읽던 미스터리 소설이 놓여 있었다. 굳이 그 뒤가 궁금하지 않다던 화자는 소설을 집어들고 읽는다. 변화가 느껴진다. 궁금해하고, 살펴보려 한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서로 증오하고 단절되어 있는 뭇사람의 모습을 보며 내적으로 어떤 계기가 생겨난 게 분명하다.


7. 소설이 중반부에 이르기 조금 전 여든이 넘은 노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암에 걸린 친구와의 관계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 에피소드다.


할머니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속임수에 걸리거나 사기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나아가 아들이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아들은 직장 때문에 떨어진 곳에서 산다. 혼자 계신 어머니가 걱정된다는 아들의 말에, 할머니와 이웃이던 화자는 “그 남자에게 어머니를 가끔씩 찾아보고, 비상사태가 생기면 가서 살펴보겠다고 했다.”(112) 시몬 베유의 말, ‘이웃을 오롯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저 “어떻게 지내요?”하고 물을 수 있다’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지내요?’라는 물음으로 이웃을 오롯이 사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그것이 어렵지 않은 임무라고 보았다. 대부분 그렇듯이 할머니도 대화를 원할 거라고 보았다.](113)


[하지만 나중에 내가 깨달은 사실은 (...) 전혀 옛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라우마를 입힌 일이라면 특히 더 그랬다. 누가 그런 일을 떠올리고 싶을까? 그런 이야기를 누가 듣고 싶을까?](115)


[할머니는 입만 열면 불평이었다. (...) 세상사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몇 글자로 요약될 수 있었다. 지옥행 특급열차.](116, 117)


[할머니의 행동에서 가장 기이한 점은 내 말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 대개는 아예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 같았다. (...) 말을 들어주는 데는 성공적이었던 듯하지만, 어떤 진정한 인간 관계는 없는 것 같았다.](119)


[바깥세상에 적들이 진을 치고 당신을 노린다며 잔뜩 겁먹은 채 그들을 향한 원한과 억울함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계시잖아요. (...)  난 할머니 잘못이 아니라고, 내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그런 일이 정말 내게 일어나기 전에 난 먼저 죽어버릴 것이다.](120, 121)



노파는 암에 걸린 친구와 같이 죽음과 가까운 인물이지만 고통과 마주한 방식은 친구와 많이 다르다. 노파는 고통을 좋지 않는 방식을 마주하는 모습을 대표하는 캐릭터다. 삶에서 겪은 고통이 내적으로, 또는 관계에서 적절히 해소되고 승화되는 게 아니라 곪아 무한히 확장되는 두려움으로 이어졌고, 잘못 단단해진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 생긴 분노, 증오, 혐오의 감정을 세상에 투사했다. 노파가 지닌 투사의 기본태도는 단정과 분별, 그리고 단절이다. 노파는 자신이 지닌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그 프레임은 틀리지 않았을 거라고 단정하며, 단정의 확신으로 자아가 부정적으로 단단해진 만큼 타인과 단절됐다. 내가 옳고 세상이 틀린데 타인 또는 세상과 대화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화자는 노파를 보며 느끼지 않았을까. 자기가 그동안 보여준 태도가 할머니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금이라도 바뀌지 않는다면, 노파처럼, 또는 자신의 은사처럼 남을 증오하다가 두려움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어머니가 지금까지 저러신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선거 때문에 그렇게 열을 내신 적도 없고,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은 대개 민주당에 투표하셨거든요. 어머니는 한때 페미니스트이기도 했고요. (...) 그리고 여성 행방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많은 여성들이 공직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말씀하신 기억도 나고요.

미친 소리 같지만, 요즘 어머니 말씀을 듣고 있으면 어머니가 입원해 계신 동안 누가 머리에 칩을 박았나 싶기도 해요.](118)


[젊은 시절 내내 인권을 위해 싸웠던 대학 은사 한 분이 긴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쓰는 단어가 겨우 몇 개밖에 남지 않았는데(그것도 악을 쓰며 말했다) 그중 하나가 ‘호모 새끼’였고 다른 하나는 ‘검둥이’였다.](121)



화자의 태도에 내적 균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게 다음의 문구다. 노파와의 에피소드가 끝난 후 화자는 시몬 베유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122)



단순히 타인의 고통에 집중하겠다는 건 아니다. 자기 보호와 타인에 대한 이해 및 공감 사이의 어려운 저울질 속에서 그 지난함을 감내하고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묻고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냐고 물을 수 있는, 그런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소박한 다짐의 시작이다. 삶은 원래 그런 이율배반과 지난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8. 인생에서 확실한 게 무엇이 있나. 인간의 삶은 유한하고 불확실하며 우리의 능력 또한 그러하다. 화자는 죽음과 마주한 친구를 보며 유한한 인간의 삶, 불확실한 인간의 삶, 또한 유한하며 불확실한 인간의 능력에 대해 자각한다. 삶은 미스터리 소설처럼 미스터리하며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 ‘뻔하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는 말은 오만하고 단정적이다. 뭐가 뻔한가? ‘놀라운 우연의 일치’를 마주하는 화자가 느끼듯, 인생에는 불확실하면서도 신기한 것들이 가득하다. 우리에게 뭔가를 ‘단정’할 만한 능력이 있나? 친구와 과거의 기억이 엇갈리듯, 자기기만으로 파국을 맞는 한 교수의 에피소드처럼, 우리는 틀릴 수 있고,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는 존재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헨리 제임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166, 167)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는 단절의 태도다. 나는 남과 다르다.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는 공감, 이해, 연결의 태도다. 나 또한 남들과 같은 유한한 인간에 지나지 않음에 대한 자각.

 

9. “난 치욕스럽게 고통에 시달리다 가지는 않을 거야.”(126) 노파와의 에피소드가 끝나고는 얼마 뒤, 친구의 이 선언이 등장한다. 고통에 맞서 싸우겠다는 듯한 뉘앙스의 선언. ‘그래,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라며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던 화자는 안락사 약을 사두었다는, 세상을 떠나려는 자신의 곁을 지켜달라는 친구의 말에 화들짝 놀란다. 그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된 건지, 솔직히 내적 맥락이 자세히 그려지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화자는 몇번의 거절과 고민 후 받아들인다. 관찰 및 회고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를 통해 행했던 타인을 향한 가벼운 평가와 판단을 넘어 구체적인 관계를 맺고 깊은 교류가 시작되는 첫 계기다. 노파와의 관계는 관계까진 이어졌지만 진정한 교류로 이어지진 않았으니 말이다.


10. 에어비앤비를 통해 잡은 뉴잉글랜드에 있는 은퇴한 부부의 집. 화자는 친구와 여기에 함께 머문다. 신기하게도 마침, 이 집에도 전에 읽다가 말았던 스릴러 소설이 있다. 화자는 집어들고 읽는다. 처음엔 관심없다더니 읽고보니 50쪽이 남았다. 하지만 아직도 머뭇거림과 망설임이 있다.



[그 후로도 소설은 50쪽은 더 이어지지만 살인자의 운명까지 결정이 된 마당에 마저 읽게 될지 모르겠다. 뭔가 반전이 있겠지만 난 미스터리물의 반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156)



반전은 내 분별, 판단, 예측이 틀렸다는 이야기다. 화자는 아직까지 자아가 단단하다. 삶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삶에 대한 통제욕을 버리지 않았다.


11. 함께 먹고, 자고, 대화하고. 화자와 친구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정말 이상해. 얼마 전 산책하다가 친구가 말했다. 때로는 우리가 이곳에 몇 년째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슨 뜻인지 나도 알았다. 한 주 만에 우리 관계는 젊은 시절의 우정을 다 덮어버릴 정도로 훌쩍 자라났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이 친밀감 때문에 비밀이나 거짓말을 참을 수 없게 된 것이다.](185, 186)



둘은 깊은 대화를 나눈다. 주로 화자가 듣긴 하지만 말이다. 후회와 한탄, 어릴 적 이야기, 원망, 죽음에 대한 두려움, 고통 등. 대화를 통한 교류에 판단과 평가보단 경청과 공감이 자리한다. 변화는 미스터리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미스터리물이 너무 좋으니 책을 읽어 달라는 친구. 소설의 시점이 삼인칭에서 일인칭 으로 변경된 건 외부자적 관점에서 판단하던 화자가 타인의 맥락에 깊이 들어왔음을, 자기 일처럼 공감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삼인칭 시점이 일인칭으로 바뀐다.](199)


[하, 친구가 말했다. 반전이네. 결혼식으로 행복하게 끝나리라 봤는데 절벽이 마련되어 있었군.](200)



소설에는 반전이 있었다.


12.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는 최근 출간된 소설이 전자책으로 몇 권 있었지만 친구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요즘 소설가들의 파괴적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삶의 참상에 사로잡힌 것을 삶의 전망과 구분한 존 치버의 말을 인용했다.

요즘 소설은 대개 참상에 사로잡혀 있어. 친구가 말했다. 아니면 전혀 설득력 없는 진부한 정서든지.

현대 삶의 참상에 대한 그 모든 책들은, 그래, 뛰어난 책들도 많지, 나도 알아. 말 안해도 안다고. 하지만 난 자기애와 소외와 남녀 관계의 허망함에 대한 얘기는 이제 그만 읽고 싶어. 인간의 추악함, 특히 남자의 추악함에 대한 글은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아. 작가의 임무는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교양시키는 일이라고 포크너는 당대의 젊은 작가를 얼마나 심하게 꾸짖었는지. 마치 인간 사이에 서서 인간의 종말을 바라보듯이 글을 쓴다고.

가슴이 아니라 분비선에 대해 글을 쓴다고. 작가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건 두려워서라고 포크너는 말했다. (...) 하지만 작가라면 그러한 두려움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 포크너가 요구했던 건 용맹함이었다. 그다음에는, 오랜 보편적 진리 -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으로 돌아가기. 그것이 없다면 당신의 이야기는 단 하루도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포크너는 경고했다.](201, 202)



고통, 혐오, 증오, 단절, 싸움… 작가는 통합을 위한 보편적 진리를, ‘친구’의 입을 통해 말하고 싶던 걸까. 다만, 화자는 그런 친구의 말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멋진 말이다. 정말 멋진 말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늘날의 작가들을 바라보는 여러 방식 중에서 그런 말이야말로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가장 생뚱맞게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린다.](202)


13. 고통과 두려움은 누군가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연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친구와 화자는 그걸 보여준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이나 위기, 긴급 사태, 특히 죽음이나 죽음의 위협과 관계된 상황에 빠져 있을 때, 전혀 모르는 타인들끼리도 강렬한 친밀감이 생겨나고 때로 이후에도 유대 관계가 지속되는 그런 일은 늘 있다.](208)



죽음을 앞둔 고통과 두려움, 그 두려움과 고통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 때로는 그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무너져 정서적으로 흔들리고, 딸을 원망하기도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화자는 그런 친구의 삶의 맥락에 깊이 개입하고, 그에 공감함으로써 친구가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무엇을 느끼는지 유추할 수 있게 된다.


[내겐 그 말이 들렸다. 난 강해지고 싶었어. 내가 알아서 제어하길 바랐어. 가능한 한 세상에 누를 끼치지 않고 내 식대로 죽고 싶었다고. 평온함을 바랐어. 질서 정연함을 바랐고.](211)



하지만 그러기엔 인간은 나약하고, 삶은 불확실하고, 정서는 쉬이 통제되기 어려울 정도로 이리저리 날뛰고, 추상적 담론으로는 쉬워보이는 일들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건 너무나 어렵다.



[친구는 이제 악을 쓰고 있었다. 오, 이게 뭐야. 이게 대체 뭐냐고. 


그게 사는 거야. 그런 거야. 무슨 일이 있건 삶은 이어진다. 엉망의 삶. 부당한 삶.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삶. 내게 처리해야 하는.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213)


부조리해보이지만 이게 삶이다.


14.


[내가 아무리 기를 써봐야 언어는 전혀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어서, 실제 벌어지는 현실을 결코 정확히 담아내지 못할 것이다. 겨우 무언가 묘사해내더라도 기껏해야 결국 실재의 옆자리를 차지할 뿐임을 (...)](217)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작가들 - 이들만이 내가 계속 읽고 싶은 작가이고, 나를 고양시키는 작가이다.](218)



누네즈가 특이한 방식으로 소설을 쓴 이유일까. 에세이처럼, 화자의 온갖 편린, 회상이 어느 중심적인 줄기 없이 산만하게 등장하는 듯하게 소설을 쓴 이유가. 그게 더 사실적이니까. 의도는 뭘까? 이게 현실이다?


15.


[친구가 말했다. 지독히 잘못됐잖아. 그 사람의 감정을 그렇게 부정해버렸고, 정말 도움이나 위로가 될 말이라고는 다들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고. 그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어떤 느낌이냐면, 수치스러워서 역겨워. 그 여자가 세상을 뜨기 전에 누구라도 그 사람을 진정 적이 있었을까, 그 의문이 떠나질 않아. 그 사람을 본 적이.

이것은 내가 지금껏 들은 가장 슬픈 이야기다.]



다름아닌 집단치료의 현장에서 일어났던 일. 진정한 공감과 위로는 없었다. 피상적으로 오고갔던 위로의 말. 친구는 분노했다. 



[당신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가족.”

“사랑.”

“옳은 일을 하는 것.”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긍정적인 마음으로 꿈을 좇는 것.”

삶의 의미는 삶이 끝난다는 것이죠. 물론 그 답을 생각해낸 건 작가일 거예요. 그 작가는 카프카겠죠.

아니, 당신 자신에게는 무엇이냐고요. 사회복지사가 말한다.

그게 내 생각이에요. 카프카와 같아요.

하지만 질문은 당신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거예요.

끝난다는 것이라고요. 친구가 말한다. 카프카가 말했듯이(나직하고 새된 웃음소리).](235)



친구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아마 화자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차에 짐을 잔뜩 싣고 멀리로 차를 몰았다. 아무 말 없이 몇 킬로미터를 달렸을 때 불쑥 비통하고 낮은 목소리로 친구가 내뱉었다. 죽어라 애쓰고 죽어라 계획해봐야.](243)



계획대로 풀리지 않고 꼬여버린 인생. 딸과 화해할 수 없는 사실과의 화해. 친구는 그저 받아들인다.


16. 친구의 죽음이 가까워진 순간, 얼마 전 한 지인의 부고를 떠올리던 화자의 모습은 소설의 초반에 등장했던 모습과 사뭇다르다. 태도가 바뀌었다. 



[비와 자루가 긴 쓰레받기를 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는 사람이다. 자발적으로 공원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이웃이다. 그에게 축복이 있기를.

매일 다람쥐와 새에게 먹이를 주러 오는 여자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다람쥐와 새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하지만 지금 건너편의 저 젊은 연인들. 젊은 두 연인이 앉아 말싸움을 하고 있다. (...) 그들은 젊고, 그들은 아름답다 - 화를 내는 와중에도 아름답다. 젊은이들이 그렇듯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싸우고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런 건 늘 알 수 있다.

오, 제발 싸우지들 말아요, 젊은이. 여기서는 평화를 좀 누릴 수 있게.](248, 249)


[나 역시 바로 오늘 아침에 누군가와 싸웠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 

그가 폭발했다. 정말 딱 당신다워. 역시 수없이 들은 말이었다. 당신은 가망이 없어. 그가 말했다. 

정말 딱 당신다워. 무슨 일로 짜증이 나건, 우리 사이에서 뭐가 잘못되건 늘 딱 당신답다고 했다.](249)



화자는 친구가 안락사 약을 먹을 때 곁에 없어야 한다는 전 연인의 말에, 그런 친구의 행위와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전 연인의 말에, 납득할 수 있는 거짓말을 하는 게 너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뿐이다. 돌아온 건 단절, 판단의 태도. 화자가 초반에 보여준 태도다. 그냥 좀 들어주면 안 되나? 쉬운 일은 아니다. 노파의 사례에서 보지 않았나?



[젊은 연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주고받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 얘기를 대체 왜 우리한테 하는 건데?

아니, 그들이 상냥한 사람이리라 상상할 수도 있다. 싸우던 것도 잊고, 자기들 문제는 제쳐두고 내 말을 듣는 것이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공유 정신병. 전 애인은 친구와 내가 하는 일을 그렇게 표현했다.](250)


17. 소설의 마지막이다. 화자가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연결되었기에 너무나 행복했지만,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 연결이었기에 너무나 슬펐다.


정서적 무너져내림. 자아의 균열. 화자의 뭔가가 바뀌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말같다던 그 보편적 진리를 간절하게 외치는 듯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공포로 심장이 쿵쾅거린다. 곧 끝날 거야. 이 동화 같은 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가장 슬픈 이 시간은 지나갈 거야. 그러면 혼자가 되겠지.

애도하는 자들에게 축복이 있기를.](251)



화자의 말인지, 작가의 말인지 불분명한 마지막 말.



[독자들이 소설로 이끌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한기로 떨리는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덥히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베냐민은 말했다.

나도 애를 썼다. 단어를 차례로 놓았다. 그 모든 단어가 다른 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든 다른 삶이 그렇듯 친구의 삶도 다른 식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애를 썼다.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 - 

실패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251, 252)



18. 내용보다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믿는 그런 작가를 계속 읽고 그런 작가가 본인을 고양시킨다고 했던가.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이라는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새로울 게 없던 소설이 독특한 방식 덕이었을까 다채롭게 읽혔다. 앞서 말했듯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액자식 구성. ‘우리가 세상을 보는 모습을, 아니, “삶”이란 걸 그대로 그려내고자 했던 것 같다’는 말로 퉁치기엔 가독성을 떨어뜨렸던, 왜 등장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다양한 생각, 관찰, 회상. 산만한 이야기. 단상을 최대한 줄기를 잡은 채로 끼적이려고 노력했지만 화자의 편린이 산만했던 만큼 단상도 산만했던 것 같다. 다채로운 만큼 뭔가 더 깊이 읽지 못한 것 같고 다양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반응과 감정의 맥락을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로 읽으니 이 소설을, 작가의 의도를 아주 조금은 이해한 것 같다. “오랜 보편적 진리 - 사랑과 명예와 연민과 자부심과 공감과 희생으로 돌아가기” 물론 그 길을 걷는 게 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은 용맹함을 필요로하지만.


19. 작가가 그려낸 다양한 삶의 모습이 우리네의 삶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상당히 유사하지 않나. 혐오와 증오, 적대가 디폴트값이 된듯한 상황. 고통, 그리고 고통의 경험이 만들어낸 적절한 근거없이 무한대로 확장하는 공포와 두려움. 부적절한 인과관계의 설정과 부적절한 책임전가에 따른 분노와 혐오, 증오. 왜곡된 감정의 부정적 정서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구체적인 사실과 맥락, 공익을 위한 담론은 실종된지 오래다. 게다가 그런 부정적 정서가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첨단이 정치적 공간이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타인과 관계맺으며 살 것인지, 어떻게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나갈지에 대한 고민은 사실상 부재하다. 이미 머릿속에 깊게 프레임화된 틀로 세상을, 타인을 재단해버리니 구체적인 맥락으로의 개입, 타인과의 소통이 가능할리가.


갑작스레 타인을 향한, 세상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정서적 동요속에서 축복을 외치던 화자의 모습은 내게도 어떤 정서적 감응을 일으켰고 나는 그런 화자를 따라서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오, 제발 싸우지들 말아요. 이럴 때가 아니라구요.’


하지만 이래놓고 나 또한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싸우겠지. 출근 길 혼잡한 전철 안에서 다리를 크게 벌리는, 어쩔 수 없던 신체접촉이 짜증나는 듯 팔꿈치로 찌르는 누군가가 싫어지고, 누군가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고, 소통에 실패하고, 관계맺기를 실패하고, 나아가 누군가를 원망하겠지. 그럼에도 타인의 맥락을 궁금해 하고, 고통을 궁금해하고, 자기연민을 기반으로 한듯한 단절의 담론에 기대지 않고 ‘오랜 보편적 진리’를 향해 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자 노력할 것. 그거 자체로 나름의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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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iraffe and the Pelly and Me (Paperback) Roald Dahl 대표작시리즈 11
퀸틴 블레이크 그림, 로알드 달 글 / Puffin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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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점 말고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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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장 결정적 시기에서 - 20대가 중요한 이유와 그 시기를 지금 최대한 활용하는 법, 개정증보판
멕 제이 지음, 김아영 옮김 / 로크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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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이런 생각을 했다. 20대는, 20대가 살기에 너무 아까운 시간이 아닌가. 어찌 보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갓 성인이 된 20대가 살아내야 한다는 게 참. 저자의 주장에 모두 공감한 건 아니지만, 내 20대의 곁에 이 책이 있었다면, 조금은 덜 후회스러운 20대를 보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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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4년 독서정산


알라딘에 매년 독서정산을 끼적인 지도 어느새 8년 차다. 매년 반복하는 연말 정리 행위 중에서 가장 빠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행사인 만큼 11월부터 읽었던 책의 목록을 정리하는데, 올해는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책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뭐 붙잡거나 읽은 책이 30권은 넘는 것 같지만 밀도 있게 읽지 못했으니 무슨 소용인가. 부끄럽다. 바쁜 부서에서 갈렸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여유 시간을 주로 내가 어떻게 보냈는지 알기에 할 말이 없다. 작년과 달리 어느 정도 일에 더 적응이 되었고 사회 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각종 스킬을 터득한 터라 작년 정도의 번아웃, 만성피로, 스트레스로 괴로워하지는 않았음에도 많은 여유 시간을 내적 평화 및 성장을 위해 쓰기보다 쾌락을 가져다주는 도파민의 세계에 쓰곤 했다. 이제는 핸드폰 없이 살던 때의 그 느낌이 어땠는지 상상이 잘 가지 않을 정도로, 좋지 않은 습관이 일상이 됐다. 도파민에 절여진 뇌를 구출하는 데에 내 남은 인생이 달려있다는 생각도 든다. 심각하다.

읽었거나 붙잡았던 책 중 그나마 기억에 조금 남는 것들에 대한 단상을 정리한 후 올 해를 구체적으로 반성하고 내년의 독서 계획의 방향성을 검토해봐야겠다. 뭐 어쩌겠나, 이렇게 반성하고 다시 실천하고 하는 수밖에.


2. 기억에 남는 책들


1) 찰스 부코스키 저, 박현주 역, 『호밀빵 햄 샌드위치』, 열린책들, 2016














그러고 보니 작년에 '올 한 해의 책'을 고르지 않았는데 - 지금이라도 골라보려 했더니 김혜진 작가의 "경청"과 로벨리 교수와 라훌라 교수의 저서가 비등비등해서 고르질 못하겠다 - 올 해도 거를 순 없다. 읽은 책이 많지 않아서 다행인 걸까. 그 중에서도 감응을 준 책이 많진 않아서 고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바로 찰스 부코스키의 "호밀빵 햄 샌드위치"다. 찰스 부코스키는 3년 전 독서정산을 할 때 앞으로 읽어야 할 주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정리해뒀던 사람이다.


한때 미국 주류 문단으로부터 외면 당한 이단아, 전 세계 독자들의 열광적인 추종을 받는 작가 찰스 부코스키. 1920년 독일 안데르나흐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엔젤레스에서 살았다. 대학을 중퇴하고 잡지에 첫 단편을 발표하지만 꾸준히 창작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 하급 노동자로 창고와 공장을 전전하다. 그러다 우연히 우체국에 취직해 우편물을 분류하는 사무직원으로 12년간 일했다. 잦은 지각과 결근으로 해고 직전이었던 그가, 전업으로 글을 쓰면 평생 매달 1백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일화는 유명하다.  


방황, 아웃사이더, 정서적으로 어려웠던 어린 시절, 육체노동 등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여러 키워드가 등장하는 이력을 가진 작가로, 거친 삶을 살아왔던 만큼 이렇게 '날 것 그대로' 같은 소설은 처음이었다.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아버지, 정서적으로 나약하고 의존적인 어머니. 누군가의 피해자로 자라나 가해자가 된,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모호해진 상태의 부모들에게서 자라난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 헨리의 주위를 규율하는 규범은 '사랑, 존중, 도덕같은, 가진 게 있는 사람들이나 주장하는 담론'이 아닌 '힘'이다. 

타고난 체격과 담력,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던 환경은 헨리가 힘을 중시하게 했지만, 사실 헨리는 짐승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무엇이 최선이었을까, 어떻게 살아야 했을까, 어떻게 사는 게 맞을까. 헨리는 여린 마음을 냉소로 감추고 날 것처럼 살아가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했던 자기 확신인지도 모르겠다.   


"어디든 삶은 없어, 이 도시에도 이곳에도 이 지친 존재에도 삶은 없어"(370)


"입닥쳐. 무슨 일인지 알고 싶다고!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319)


""어떻게 해야 씨팔 수업을 들을 수 있냐? 뭘 해야 해?"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어떻게? 어떻게 내가 알아? 이런 지식을 내가 안고 태어나기라도 했어야 해? 깨끗이 순서대로 정리돼서 필요하면 딱딱 꺼내 볼 수 있는 줄 알아?"(320)

 


2) 페르난두 페소아 저, 오진영 역, 『불안의 책』, 문학동네, 2015 





 


  



 

 



계획에 있던 독서도 아니었고 첫 인상도 좋지 않았지만 읽으면서 저자의 심리 상태에 점점 더 공감하게 되었던 책. '페소아'하면 이 책이 떠오르고 국내에도 이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조금 긴 단상에서조차 응집력 없는 짧은 편린이 나열된 경우가 많고, 이런 단상을 구성하는 활자도 지칭하는 바를 직접 지시 하지 않는, 은유적인 것들이 많아 편하게 읽어나갈 에세이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느 날 책 한 쪽을 펴고 시를 읽듯, 그렇게 읽어나가면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 정도이니, 이런 책을 한 번에 쭉 읽으려고 시도하는 건 어떤 점에선 좀 고역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에는 딱 두 가지만 기록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하나는 그의 '비행동주의적 특성'과 다른 하나는 '익명주의적 특성'이다.


실용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감성의 결여다. 실용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행동을 추진하는 능력, 즉 의지다. 행동을 방해하는 두 가지 요소는 바로 감성과 분석적인 사고다. 분석적 사고란 결국 감성을 동반한 생각이다. 모든 행동은 개성이 각자의 본성에 따라 바깥세상에 투사된 것이다. 바깥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는 대부분이 인간이므로 개성의 투사, 즉 행동이란 다름아니라 우리의 행동 양식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길을 가로지르고 그들을 방해하고 아프게 하거나 제압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개성과 아픔, 기쁨을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필요하다. 타인에게 잘 공감하는 자는 행동하지 못한다.(381)


페소아는 여러번 자신이 행동하지 않는 자라고 말한다. 그 바탕에는 위와 같은 전제가 깔려 있는데 따라서 그는 일종의 정치적 회의주의를 지향한다. 하지만 행동에 대한 영향이 비단 정치적 지향성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바 행동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인 만큼 그가 통합된 정체성 구성에 어려움을 겪으리라는 것을(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알 수 있다. 아마 상당한 내적 분열을 겪었을 것이다. 이게 좀 추상적일 수도 있으니 예를 들어보자. 어느 정도 인기가 있는 고등학생 A가 있다고 해보자. A가 반에서 어떤 아이와 친해지고자 하는 '행동'은 사실 '선택'이고 선택은 어떤 점에서 '배제'를 함축한다. A가 B에게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고, B와 함께 했던 시간을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두는 것. 이에 대해 C는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A가 감수성이 풍부해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고려하는 사람이라고 해보자. A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부정적 정서를 일으키는 게 걱정되어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A는 반 친구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A는 점점 내면에 부정적 정서가 쌓여가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게 될 것이다. 삶의 원칙이 '나는 어떤 걸 하고 싶다.'(긍정형)가 아닌 '저 사람이 나 때문에 힘들어 하면 어떻게 하지?'(부정형)과 같이 문제의 소거에 있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은 언제나 형이상학적 원인이 있는 질병이었다. 내가 취하는 모든 동작이 이 세상을 방해하고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 같았다. (…) 나는 내 모든 행동에 대해 상상을 초월하는 정직함과 신중함을 취했다. 이러한 자세는 내 의식 안에 굳게 자리잡았고, 내가 현실 세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480)


페소아의 저런 비행동주의적 특성은 익명주의적 특성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두 특성은 또한 페소아의 뛰어난 감수성, 공감력, 그리고 그의 삶의 태도와 습관, 정서적 지향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여러 사건 등 다양한 삶의 맥락과 환경의 결과이자 그런 공간 밖으로 나가는 걸 어렵게 하는 삶의 관성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 익명주의적 특성이란 이명을 창조하고 사용하길 즐겼던 페소아의 습관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현실 속 외로움과 불만족을 투사해 만들어낸 가상에 대한 욕망으로 시작한 부분도 있겠지만 단일하고 통합된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과도 같다. 그게 의도적이었든 비의도적이었든 말이다.

두 특성을 기초 짓는 그의 풍부한 감수성, 광활한 내면 세계, 그리고 그가 느꼈던 각종 고뇌와 내적 분열 등 페소아의 심리적 상태에 공감되는 만큼 분열된 자아에서 겪던 괴로움과 공허함은 반면교사로 다가왔지만 아직 나도 뚜렷한 확신을, 특히 이 분열된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확신을 얻고 있진 못하다.


2) Lewis Carroll 저,『ALICE IN WONDERLAND』, 1865Edition

3) 루이스 캐럴 저, 마틴 가드너 주석, 승영조 역

 『ALICE IN WONDERLAND』, 꽃피는책, 2023


 

 


   


 

   





모처럼 힘들게 읽었던 원전인데 단상을 별로 남겨두지 않아서 독서 때 떠오른 생각과 느꼈던 감정이 상당 부분 휘발됐다. 재밌긴 했지만 뭔가를 끼적이기엔 더 깊게 읽어야 할 텍스트라 느껴졌을 정도로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았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도 굳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몇몇 부분을 키워드로 표현해보자면 '동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뛰어넘은 작품'이자 '캐럴의 소아를 향한 순수성의 환상이 엿보이는 작품'이었다는 것 정도. 후자는 고인 떡밥이고 다른 차원에서 추후 생각을 풀어써보고 이번엔 전자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끼적여보자.

흔히 동화라는 장르에 기대하는 장르적 특성이란 특정한 교훈, 권선징악, 어른이 바라는 모습으로 아이를 교육하는 게 목적인 것 등등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동화 속 앨리스의 모델인 앨리스 리들이 자신을 위해 이야기를 지어달라는 말에 탄생한 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던 만큼 앨리스를 즐겁기 하기 위한 게 목적인 동화였고, 그만큼 이 동화는 동화라는 장르에 기대하는 특성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How doth the little crocodile

Improve his shining tail,

And pour the waters of the Nile

One every golden scale!'

"꼬맹이 크로커다일 악어는요

빛나는 꼬랑지를 팡팡 휘두르며

솟구치는 나일강 물보라로 황금 비늘을 샅샅이 씻는다지요!"

(원서 19, 가드너 주석본 86)


가드너에 따르면 동화에 등장하는 이 시는 원래 아이작 와츠의 시 "게으름과 해코지에 맞서"라는 것으로 부지런함을 강조한 교훈적인 작품이었다.


How doth the little busy bee

Improve each shining hour,

And gather honey all the day

From every opening flower!

바삐 바지런 피우는 꿀벌은요

빛나는 시간을 살뜰히 아껴가며

활짝 핀 꽃송이를 낱낱이 찾아

온종일 꿀을 모은다지요!(가드너 주석본88, 89)


부지런함을 강조하며 "악마는 항상 게으른 일손을 찾아다니며 이런저런 해코지를 일삼거든요"(주석본 89)라고 원 작품을 비틀어 자유롭게 뛰노는 크로커다일의 이야기로 바꾼 셈이다. 아이를 정말 사랑하고, 아이의 시선에서 쓴 동화라는 걸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4) Erwin Schrodinger 저,『What is Life?』, 캠브리지대 출판사, 2012














슈뢰딩거가 1943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수행한 강연에 기초해 출판된 책이다. What is LIfe 다음에 붙어있는 Mind and Matter까지 읽었지만 "마음과 물질"의 경우엔 할 말은 많았으나 생각을 풀어 쓰지 못해 단상을 얼마 남겨둔 것도 없으니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글을 남겨두도록 하자.

슈뢰딩거의 "생명이란"무엇인가"는 거창한 제목과 달리 생명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거나 하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의 부제가 "The physical aspect of the living cell", 즉 '살아있는 세포의 물리적 측면'인 것으로부터 슈뢰딩거가 주로 생명 현상의 핵심인 DNA에 대한 물리적 추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유의해야 할 건 슈뢰딩거가 이 강연을 할 때 아직 DNA의 실체가 규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과학 책의 경우 시간이 지나 저자가 사실과 다른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많은 만큼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만 보면 책에서 얻어갈 것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그보다는 그가 무엇을 당연시 했고 무엇을 당연시 하지 않았는지, 그가 살았던 세계와 읽는 독자의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부단히 자각하며 읽어야 재미도 있고 얻어갈 게 많다고 생각한다.

슈뢰딩거는 염색체도 알고 있었고, 유전자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지만 DNA란 단어를 쓰지 않았고 유전자의 구조와 기초, 성분, 크기, 위치에 대해 '추정'하려는 시도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이는 세포 안의 핵에 염색체가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염색체에 안에 DNA가 있으며, 이 DNA안에는 유전정보를 포함하는 유전자가 있고, 각각의 크기나 위치는 어떠한지, 그리고 성분(단백질인지 핵산인지)은 어떠한지, 현재를 사는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알 수 있는 이런 사실들을 슈뢰딩거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걸 감안해야만 슈뢰딩거가 유기화학자들, 생물학자들의 발견을 토대로 생명현상의 핵심인 유전자를 물리학적으로 규명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독창적이고 흥미로운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5) 폴 오스터 저, 황보석 역,『뉴욕 3부작』,열린책들, 2003 

6) 서머싯 저, 송무 역,『달과 6펜스』,민음사, 2000














두 책도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잘 읽히진 않았다. 그래도 쉽게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을 일으킨 탓에 풀어 쓰지 못해 단상을 남긴 게 얼마 없다. 나중에 다시 읽고 갈무리를 하고 싶으니 여기에 박제 해 두자.


예전에는 퀸에게도 커다란 야망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 이미 서너권의 시집을 내고, 희곡과 평론을 쓰고, 여러권의 장편을 번역했을 정도니까.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퀸은 그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자신의 일부가 죽었는데, 자기로서는 그 죽은 일부가 되살아나 쫓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11)


뉴욕 3부작을 읽다가 남긴 얼마 안 되는 발췌 중 하나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개인적으로 내 내적 상태를 어느 정도 잘 묘사하는 것 같아서. 뉴욕 3부작이나 달과 6펜스나 정체성을 키워드로 다시 읽어보면 좋을 작품들이다.


3. 2024년의 독서를 돌아보며


성장이 아니라 퇴화를 걱정해야 할 때


내 삶을 추동한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성장이었다. 서양의 근대인들이 가졌던 진보를 향한 열망과 비슷하다면 비슷할까. 그리 잘 살아온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여곡절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온 데에는 그 열망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은 힘들지만 내가 조금 더 성장하면,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했고 그 성장의 주요한 동반자는 바로 책이었다.

막연히 책을 많이 읽는다고 성장하진 않았던 것 같다. 때로 책은 진정한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잘 읽는 것이 중요했고, 깊이 읽는 것이 중요했으며 그렇게 깊이 잘 읽은 결과 얻은 성찰의 결과를 내 삶과 적절히 연결할 줄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 연결을 위해서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살아야 했다. 현실을 적극적으로 살지 않고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행위는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장은 뭐랄까, 꾸준히 찾아오는 것 같으면서도 꼭 그렇진 않아서, 때로는 뭔가가 무너져 내림으로써 찾아오는 개안과도 같은 것이었다. 성장 후에는 조금 더 단단해졌고 시야가 넓어졌으며 내가 구체적인 맥락 속에서 내리는 판단이 약간 더 신뢰할 만한 것이 되었다. 물론 내가 주로 지향한 것은 인격적 성장이어서 이 성장이 어떤 물질적인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하고자 했던 다짐들은 있었다. 책을 왜 읽는지도 정리해보고, 지금 이 막힌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도 정리해봄으로써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이 뭔지를 지속적으로 정리해왔으니까. 그러나 어느 하나 제대로 실천한 게 없었고 이제는 성장은 커녕 퇴화를 걱정해야 될 때가 왔다. 어렵사리 깨닫고 체화한 좋은 습관들이 자극적인 인터넷 콘텐츠와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하나 둘 삶에서 희미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그와 함께 나는 깊게, 천천히, 철저히 읽는 법을 잊어버렸다.


4. 2025년을 맞이하며


그래도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어차피 인생에 뚜렷한 답은 없고, 반성하며 하루하루 온전히 살아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주요 문제의식과 읽고 싶은 책들을 작년 독서정산 및 21년 독서정산과 비교하며 다시 점검해보자. 크게 달라진 건 없다.


1) 주요한 문제의식들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에 관하여 : 어느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과 함께 좋은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평생을 다른 공간에서,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살아나가는 것이니까. 대화는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 갈등이 생길 경우는? 의사결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 외에도 함께 살아가는 도중에 새롭게 마주하는 문제가 많을 테다.


원하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원치 않는 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에 관하여 : 살면 살수록 많은 친구(지인)는 큰 의미가 없고 다만 적은 수의 친구라도 잘 사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특히, 좋은 사람을. 그러려면 내가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겠다. 외롭다고 억지로 사람을 만나는 건 피곤한 일이지만 소중한 사람은 연결이 끊기지 않도록 어느 정도 노력할 필요도 있다.


정서적으로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삶에 관하여 : 원해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태어난 이상 최대한 긍정적 정서를 많이 누리고 살다가 미련 없이 떠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긍정적 정서를 적절히 누리는 것 자체가 좋을 뿐더러 긍정적 정서는 내가 이성적인 판단을 하며 타인, 사회와 건전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사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내면에 부정적 정서가 가득한 사람은 그 정서를 외부로 투사 해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의식은 뇌과학, 심리학, 명상 등과 연결되는데 나의 경우 도파민 디톡스가 핵심이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당한 수준으로, 손해는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만큼의 경제 공부에 관하여 : 살면서 조금 아쉬운 게 있다면 '돈'을 좋지 않은 것으로 보고 멀리해왔다는 것. 삶에 중심을 돈에 두고 모든 걸을 돈으로 양화하며 바라보는 태도는 좋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멀리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고민은 이거다. 적당한 수준으로, 손해는 보지 않고 살 수 있을 만큼의 경제 공부라고 했지만, 투자 공부를 통해 번 돈을 통해 내가 정말 더 하고 싶은 걸 하고 살 수 있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그걸 통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버는 게 빠를까, 나을까. 아니면 하고 싶은 것도 조금씩 꾸준히 하면서 경제 공부도 충실히 함으로써 결국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삶을 채우는 게 빠를까. 아니면 잠시 경제 공부에 올인하는 게 나은 판단일까.


그런데 위와 같은 문제의식은 조금은 일반론적인, 독서의 소비자적인 측면의 문제의식이다. 더 구체적이고 생산자적인 측면에서의 문제의식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읽고 쓰는 일로 돈을 버는 일에 관하여 : 어떻게 보면 구체적이고 생산자적인 측면에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 아닐까. 읽고 쓰는 일로 돈을 번다는 것. 중요한 건 나만의 콘텐츠와 수입을 창출해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써내고 싶은가? 나만의 콘텐츠가 뭔가? 내가 읽고 쓴 산출물로 타인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나? 돈을 위해서는, 결국 내 일부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을텐데, 나는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나? 비즈니스 프로세스는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아직도 갈무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너어무나 많다.


삶의 초점에 관하여 : 직장 생활을 하고, 결혼을 통한 안정적인 가정 꾸리기 등 전에는 바랐던 적이 없던 걸 바라면서 필요한 것들이, 감당해야 할 것들이,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내게 많은 돈, 시간, 여유가 주어졌다면 도서관을 여기저기 쏘다니며 지식의 노예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는데, 현생에서는 그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시간과 여유가 제한된 만큼 적절한 분배와 집중이 필요하다. 산만할 수 있지만 적어도 초점은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내 삶의 초점은 무엇인가? 삶에서 평생 가져가고 싶은 우선적인 초점은 SBNR이고, 그 다음엔 투자(라고 요즘 생각하는 중이다)다. SBNR은 내 삶의 태도, 목표, 지향점, 그리고 내적인 안정감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부단히 공부하고 실천해나가야 할 부분이다. 투자는 재밌기도 하고 투자를 통해 불린 돈으로 직장을 그만둔 후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욕망을 꿈꾸게 하는 분야이긴 한데, 모두 다 열심히하고 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놓고 내적 갈등이 아주 심하다.


2) 읽고 싶은 책들


(1) 문학 : 21년에 필립로스, 나쓰메 소세키, 밀란 쿤데라, 찰스 부코스키, 에릭 호퍼, 김경미, 강석경, 최인훈, 이청준, 기리노 나쓰오까지 적었는데 조금 바꾸고 싶다. 김경미까지는 괜찮은데 강석경, 최인훈, 이청준, 기리노 나쓰오는 우선순위(전집을 모두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가 조금 밀렸고, 그 자리에 김혜진 작가와 플로베르를 넣고 싶다. 그리고 전에는 문학란에 순전히 문학 서적만 넣었는데 이번엔 문학이론, 평론과 관련된 서적들도 좀 추가하고 싶다.



  


  


















(2) 심리학 : 문학치유, 감정, 행복, 명상, 관계. 이대로 가도 무방할 듯하다. 감정이나 행복, 명상과 같은 키워드들은 뇌과학과도 연관되어 있다 보니 그 분야에도 좋은 서적들이 많다. 하지만 굳이 그 분야의 책들도 심리학 범주에 넣어둔 이유는, 나는 인간의 행복, 명상, 행복과 같은 키워드들의 물리적 기초를, 순전히 실천적인 이유에서, 그 지식의 심리학적 사용을 위해서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3) SBNR : SBNR은 21년 범주에서 기타로 빼놓았던 부분이지만 그때도 적어놓았듯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독서를 우선하기로 해서' 후순위로 밀렸을 뿐 사실 내 삶의 가장 주요한 줄기라고 할 수 있는 분야다. 이 SBNR에 대해 2020년 연말독서정산에서 처음 언급했던 거 같은데, 그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 바 있다.


내가 알아보고 싶은 길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지복에 이르는 길과 비슷하고, 붓다가 말하는 해탈에 이르는 길과 비슷하다. 또 한편으로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음(SBNR)'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려는 길과 비슷하다. 물론 이 길이라는 것들은 앎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꾸준한 실천이 동반되어야 한다. 인연(因緣)에 대한 자각, 역량의 증대를 위한 노력, 자유를 위한 노력, 읽고 쓰기, 명상하기, 봉사하기 등 부단히 해나가야 할 일들이 많다. 궁극적으로는 그 길 자체에 연연하지 않으면서도 그 길이 체화된 상태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 길을 가는 데에는 심리학, 뇌과학 등과 같은 현대의 과학적 지식이 필요하기에 이에 대해서도 부단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위키백과에서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에 대해 "조직화된 종교를 영적 성장을 위한 유일한 또는 가장 가치 있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영적인 삶의 자세를 규정하고자 사용되는 대중적인 문구이자 두문자다."(is a popular phrase and initialism used to self-identify a life stance of spirituality that does not regard organized religion as the sole or most valuable means of furthering spiritual growth)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영적인 삶을, 조직화된 종교 단체, 제도, 교리에 따르는 게 아닌, 스스로 탐구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핵심은 '영적인 삶'을, '스스로 탐구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삶(Spiritual Life)란 무엇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영적인 삶이란 1. 내 삶의 의미와 목표, 목적에 관심을 두는 것. 2. 내적 평화와 자아 성찰에 관심을 두는 것. 3. 타인과 자연, 세계 사이의 관계(연결감)에 대해 자각하고자 노력하는 것. 4. 윤리적 성장(나는 윤리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당위, 도덕이라는 질감을 싫어한다. 선한 삶, 착한 삶보다는 좋은 삶, 이라고 표현하고 싶다)에 관심을 두는 것. 이런 맥락 안에 존재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런 삶을 사는 데 거창한 철학적 이론에 관심을 꼭 두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구체적인 실천에만 집중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맥락에 대한 이해를 통한 생각의 깊이를 얻을 수 있다, 그럼으로써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라는 말로 표현하면 괜찮을까. 사실 세상을 편하게 사는 건 구체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얻고, 그 능력을 통해 최대한 내게 이롭고 좋은 삶을 구현하는 것일 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을 익히고, 그 방법을 통해 돈을 많이 벌고 경제적 자유를 이뤄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것처럼 말이다. 굳이 자본주의 사회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나? 돈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나? 돈만 잘 벌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렇게 사는 게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문제를 해결하는 독서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개념을 이해하고 자아를 확장하는 독서도 필요하다는 말과 같다. 들뢰즈는 "루크레티우스와 자연주의"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있나?'라고 묻는 이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여야 한다. 자유로운 인간의 이미지를 세우는 일에, 자기의 능력을 그냥 눌러 앉히기 위해 신화와 영혼의 혼탁을 필요로 하는 모든 힘을 고발하는 일에 도대체 철학 말고 그 누가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보이고 있는가? (...) 자연은 신화에는 대립한다." 들뢰즈는 철학이 자유로운 인간을 그려낸다고 하는데, 내가 느끼는 부족함도 그와 관련되어 있다. 내가 그 개념과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나는 더 자유로워질 수 있고, 그만큼 더 많은 걸 직접 고민한 후 선택할 수 있다. 결국 '스스로 탐구한다.'는 말과 연결되는 셈이다. 물론 철학적 담론, 개념어에 잡아먹히는 삶은 원치 않기 때문에 나는 구체적인 삶, 생생한 현실과 연결된 단어들을 더 가까이 하며 살고 싶긴 하지만 말이다.

여튼, 이런 SBNR이란 키워드와 관련된 스승으로 내가 삼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스피노자와 붓다, 들뢰즈와 프랑수아 줄리앙. 나는 스피노자와 붓다를, 그 길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걸어간 사람으로서 존경하고(스피노자는 실천뿐만 아니라 사상적인 체계도 구축한 사람이긴 하지만. 또한, 실천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예수도 그런 길을 걸은 사람 중 한명이겠다), 들뢰즈와 프랑수아 줄리앙을 그 개념적 이해의 기반을 닦은 사람으로서 존경한다. 들뢰즈는 내재성을 서양사상의 내재적 관점에서 탐구했고, 프랑수아 줄리앙은 동서양 사상의 비교적 관점에서 탐구했다. 또한, SBNR에 대한 관심은 삶의 의미라는 키워드를 향한 내 문제의식이 확장된 것으로서, 삶의 의미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과 관련 서적 또한 전부 내 관심사다. 이와 관련해서는 필로소픽 출판사에서 계속해서 내놓고 있는 Meaning of Life라는 훌륭한 시리즈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21년 연말독서정산에 이미 언급해 두었다) 나아가 사실상 심리학, 뇌과학, 문학 등에 대한 관심은 SBNR에 대한 관심으로 종합될 수 있는 만큼, 정리한 문학, 심리학 범주도 SBNR과 무관하지 않다.

뇌과학은 약간의 기록을 더 남겨두고 싶은데, 나는 주로 뇌와 관련된 학문들을  "인간의 행복, 명상, 행복과 같은 키워드들의 물리적 기초를, 순전히 실천적인 이유에서, 그 지식의 심리학적 사용을 위해서 궁금해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심리학의 범주에 넣어두기만 하고 읽고 싶은 책과 관련된 관심사를 제대로 정리한 거 같지 않기 때문이다. 21년 연말독서정산에서는 주로 감정과 관련된 뇌과학 서적만을 올려두었지만 내가 뇌와 관련된 학문, 서적에서 관심을 두는 주요한 키워드는 감정뿐만아니라 의식, 자아가 있고, 뇌과학 전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조지프 르두와 리사 펠드먼 배럿의 책은 21년에 언급했고 여기에 안토니오 다마지오, 크리스토프 코흐, 에릭 캔델, 패트리샤 처칠랜드(뇌과학자는 아니지만) 등의 책을 조금 추가해둬야겠다.















(4) 자기계발 자기계발에서의 핵심은 커뮤니케이션 능력. 읽고, 쓰고, 말하는 방법과 관련된 책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21년에 약간 정리해둔 바 있고, 그 다음으로는 생산성과 관련된 책들에 관심이 많다. 생각을 효율적으로 하거나 잘 정리하는 법. 시간을 효율적으로 잘 관리하고 사용하는 법. 아니면 생산성과 관련된 프로그램(요즘 핫한 AI관련 분야가 대표적이겠다), 앱 등에 관한 책. 이런 것들 모두가 생산성의 범주에 들어간다. 논증의 탄생과 같은 압도적인 책을 제외하고는, 관심 분야의 책들이 너무 많고 아직 교과서로 삼을 만한 핵심 저서들을 잘 모르기 때문에(AI는 트렌드가 너무 빠르게 변한다는 어려움도 있다) 하나하나 찾아가며 읽는 수밖에 없겠다.


(5) 경제 경제 쪽의 핵심은 아무래도 '투자'가 될 것 같고 그 외에 '내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이해' 정도가 되겠다. 투자 쪽으로는 통계와 프로그래밍, 각종 생산성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을 결합해 공부해보고 싶긴한데 시간에는 제한이 있는 만큼 선택과 집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내적갈등이 심하다. 일단, 다음의 세 권의 책을 시발점으로 삼아 이런저런 고민을 이어가보는 수밖에 없겠다. (짧게 썼지만 삶의 초점을 SBNR과 '투자'라고 말했을 정도로, 이 - 투자, 수학, 프로그래밍 등 - 부분에 대한 관심도도 크다. 다만 아직 세부 관심사를 언급할 정도로 많이 알지 못할뿐...)








(6) 사회 사회분야도 늘 주요한 관심 대상 중 하나이고 특히 법, 정치, 사회문제, 젠더, 불평등, 기후와 같은 키워드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확실히 이전보다 관심도가 많이 떨어진 것도 같다. 회의감이 주요한 원인인 것 같다. '이런다고 뭐가 바뀌나? 그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나 집중하자'와 같은. 


3) 2025년의 독서계획 및 다짐


올 해는 작년이나 제작년에 비해 여유시간이 많을 걸로 예상되는 만큼 가능한 읽고 쓰는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다. 올해의 핵심 다짐은, 원하는 삶을 어떻게 살까 고민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이 원하는 삶이 되도록 집중, 노력할 것. 내가 원해서 유튜브를 보고 드라마를 봐 놓고 왜 괴로워하는 걸까. 뭘 복잡하게 고민하는 걸까. 그 행위가 즐겁지 않다면, 그 행위에 관심이 쏠릴 때 내 내면에 집중해보자. 쾌락 뒤에 오는 공허함, 기분 나쁨에 대해 집중해보자. 그리고 읽고 쓰는 활동이 줬던 지속적인 만족감에 대해 집중해보자. 왜 나는 이러고 살까,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복잡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풀릴 문제라는 걸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나.

염두에 두고 싶은 대부분의 다짐들은 22년에 어느 정도 정리한 바 있으나 23년 다짐과 함께 약간 더 정리하자면,


자각하며 읽기 : 자각하며, 그러니까, 머리를 굴리며 읽은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 내 삶에 주는 영향의 차이를 많이 느끼지 않았나.

읽은 책은 기록을 남기되 남기는 기록에 가하는 다양한 제약에서 자유로워지자 : 이게 중요하겠다. 항상 정돈된, 명료한, 깔끔한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에 이제는 책을 읽고도 기록을 편하게 남기는 게 부담스러워졌다. 매번 그렇게 공들여 쓸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기록은 편하게 남기자. 알라딘 서재에 단상을 넘버링을 통해 편하게 끼적이자. 괴로운 글쓰기라는 카테고리의 제목을 행복한 책읽기로 바꾼 이유기도 하다. 이거저거 신경쓰지 않고 아무말이나 편하게 내뱉던, 그렇게 내뱉는 행위 자체에 즐거움을 느꼈던 때의 경험을 떠올리자.

규칙적으로 쓸 수 있는 루틴, 구조를 만들자 : 중요한 내용이다. 조금이라도 매일 읽고 쓰는 게 중요한데, 쉽지 않은 만큼 나는 억지로 그런 환경에 나를 욱여넣으려고 하곤 했다. 가장 쉬운 게 독서모임이나 공부모임 들어가기였다. 문제는 내가 만든 모임이 아닌 이상 나의 문제의식이나 나의 취향을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반영하기는 어렵다는 것. 내가 정말 보고 싶은 책이 있는데, 그냥 보면 좋겠지 하며 이런저런 책에 기웃거리다 보니 정작 중요한 책들을 계속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임에 들어가는 건 임시방편일 뿐, 모임을 최소화하면서 나만의 루틴,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읽고 쓴 걸 어떻게 생산적으로 나눌 수 있는지 고민해보자 : 어려운 일이다.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 많다. 정체성, 드러냄의 어려움,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어떻게. 그 밖의 무엇을 더 부숴야 하나. 어디서, 어떻게 무너져야 더 나아갈 수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


그래, 이런 다짐들을 바탕으로 올 한해 독서계획은 어떻게 꾸려나가고 싶은가. 


재밌는 거 읽자 그냥... 계획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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