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 김애란, 바깥은 여름


 엇나간 글자가 거슬려 찢고 다시 끼적일 수 있는 노트가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에 안 드는 과거를 찢고 인생을 새로 살 수 있을 텐데. 하얀 백지 위에 새로운 서사를 써낸다는 사실은 상상만으로도 설렌다. ‘오늘부터 새로 시작이야!’라니. 그래서 그런 걸까. 께름칙한 과거가 나이테에 쌓인 만큼 부푼 시간을 안고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지만 나는 오늘에 새로 살고 싶은 욕망을 담곤 했다. ‘오늘이 지나가도 다시 찾아온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오늘이 엉망이었어도 새로운 오늘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들도 그렇게 살고 싶었나 보다. 대신, 그들은 나와 달리 벽지에 새로 살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입동의 부부 이야기다.


 부부는 나그네처럼 살았다. ‘내 집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입에 풀칠하는 데 바빴던 부부는 각자 20여 년간 셋방을 부유한 끝에 집을 산다. 지은 지 20년 된 17평 아파트였다. 집값의 반 이상이 대출이었다. 그래도 기뻐했다. ‘중심은 아니나 바깥으로 밀려나지 않았다는 안도, 아들 영우와 알콩달콩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부부를 감쌌다. 아내는 도배를 가장 먼저 했다. 지긋한 과거를 덮고 새롭게 살길 바랐다. 누런 벽지를 하얀 벽지로 덮으니 눅눅했던 삶이 하얀 벽지처럼 산뜻해지는 듯했다. 비극이 찾아오기 전까진 그랬다. 어린이집 차에 치여 영우가 죽어버렸으니까. 그들이 마주한 건 산뜻함이 아니라 황량한 겨울이었다.


 김애란은 그런 겨울을 상상했다. “없던 일이 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을마주한 이의 삶은 어떨까. 고통으로 얼룩진 내면을 부여잡고,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어 새로운 오늘을 상상하지 못하는 이의 삶은 얼마나 추울까. 김애란의 단편집 바깥의 여름은 이런 질문에서 시작한다.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라는 풍경의 쓸모의 한 구절에서 제목을 딴 만큼, 일곱 단편을 엮는 커다란 줄기는 시차의 상상이다. 작가는, 쿤데라가 말하듯 관망대를 세워놓고 자기가 살아보지 못했던 삶과의 시차를 엿본다.



 엿보기는 관조와 다르다. 김애란은 창문이 관조적이라는 이유에서 문을 표지로 삼았다. 관조란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고 시차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일에 가깝다. 반면, 김애란은 표상되지 않는 저 찡그린 얼굴, 이해할 수 없는 기호를 머뭇거리며 더듬어갔다. 문밖과 문안의 사이에서, 시차를 자각하며 비좁은 자아에서 벗어나 타인의 속을 엿봤다. “합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설명되지 않는 상태로 보여주거나 경험하는 게 문학이 하는 일이라던 고백처럼, 이해를 시도하고 실패한 이야기를 엮었다. 그래서 입동이 소설집 처음에 등장한다. 겨울, 얼어붙은 내면, 즉 상실의 세계로 들어(으로 읽으면)가 엿보자는 것이다.


 상실의 맥락은 다양하다. 입동의 부부는 아들 영우를,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아내)는 도경(남편)을 사고로 잃었다. 영우는 어린이집 자동차에 치여서, 도경은 물에 빠진 학생을 구하다 세상을 떠났다. 노찬성과 에반의 찬성과 건너편의 이수는 경제적 빈곤, 사회적 압박에 떠밀려 상실을 마주한다. 찬성은 아버지와 반려견 에반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암에 걸린 반려견 에반과 안락사를 고민하는 찬성, 둘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가 모르는 사이 할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비극적 선택의 반복이었다. 건너편의 이수는 사랑하는 연인 도화를 잃었다. ‘제철을 잃어서다. 철을 놓쳐 생긴 간극을 도화는 견디지 못했다.


 상실은 흔적을 남긴다. 소설 곳곳에선 흔적의 메타포가 등장한다. 입동에선 벽지에 새겨진 검붉은 복분자액 얼룩이, 노찬성과 에반에선 에반이 찬성에게 새긴 묘한 자국이 흔적을 상징한다. 가리는 손에선 그을음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선 장미색 비강진이 그렇다. 이 흔적들은 상실의 성격을 드러낸다. 상실의 슬픔과 고통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장미색 비강진처럼 나이테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벽지에 밴 복분자액처럼 박박 닦아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괴로움에 미칠 것 같아도 뚜렷한 답은 없다. ‘시간이 약이래라는 자기암시도 소용없다. 황량한 상흔의 계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오늘을 사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상흔을 쉽게 대한다. 입동부부의 이웃은 거대한 불행에 감염될까 두려워하며 부부를 피하고 수군댄다. 꺼이꺼이 들썩이는 등을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꽃매로 때린다. 시차의 상상 없이 감정을 등가교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감정을 돈과 교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린이집은 할 수 있는 조치를 했고 적절한 대가가 지급됐으니 일이 마무리됐다는 듯, 금액으로 감정을 양화할 수 있기라도 하듯 행동한다. 주위 사람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관조다. 그런 태도는 입동에서 슬픔을 훔쳐보는 것으로 나타난다. 타인의 내면을 엿보는 게 아니라 타인을 대상화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다.


 「풍경의 쓸모에선 그 원인이 드러난다. 주인공은 사진 속에서 언제나 어색한듯 자명하게 서있. ‘풍경이 아닌 중심이라는 사실이 자명하다 할 때의 자명이다. 중심, 즉 주체라는 사실의 자명함에 사로잡힐 때 자아는 세계를 대상화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범주화한다. 주인공이 그랬다. 중심에 익숙했던 그는 아버지를 대상화하고 판단하는 데도 익숙했다. ‘전형적으로 사신다.’는 가뿐한 판단은 주인공의 그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풍경이 있기에 중심이 있다는 사실, 중심의 자아가 바라보는 세계가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을 보며 느끼지만 주인공은 외면하는 것 같다. 결국, 그가 받아든 것은 더블폴트였다.


 더블폴트는 실패다. 번역의 실패. “기체인지 액체인지 모를 무언가가 뜨겁게 치밀어올랐다는 물리적 현상은 중심의 언어에 갇힌 탓에 적절한 언어로 번역되지 못했다. 침묵의 미래가 다루는 것은 이 문제다. ‘소수언어박물관에 기거하는 자들의 언어는 중앙말로 번역되거나 번역되지 않은 채 방치된다. 번역도 중앙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이기에 그 관점에서 포착되지 않는 풍경은 전부 날아간다. 그들은 고독 속에서 몸부림치는데 이 모습은 상흔 속에서 괴로워하던 인물들을 떠오르게 한다. 성장, 진보, 힐링과 같은 중앙의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상흔의 감정을 자꾸만 대상화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점점 더 괴롭고 외로워지는 인물들. 정상과 중심을 향한 강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풍경의 쓸모침묵의 미래는 잘 보여준다.


 그럼 이제 상흔을 지닌 자의 내면을 존중하면 되는 걸까. 그 전에 작가는, 타인을 존중하는 과정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분법적, 도덕주의적 사고를 경계하자는 말을 넌지시 던진다. 그런 사고는 역사와 맥락, 분투를 가벼이 판단하는 예쁜 합리성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도덕주의적 사고에 빠질 때 우리는 상흔을 지닌 자가 늘 윤리적이고 늘 소수자일 것이라는 착각에 자주 빠진다. 가리는 손이 그 착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야기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 재이가 견디기 힘들었던 웃음, 그 웃음을 할아버지에게 반복하는 재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복잡한 맥락을 훼손하지 않고 상흔을 사유하며 이해하는 일의 어려움을 마주한다.

 

 “‘세계는 이렇고 사람은 이렇다고 규정하지는 못하고 세계는 왜 이럴까요? 사람은 왜 이럴까요?’라며 (소설 속으로) 들어가는 편인 것 같아요.” 김애란은 이런 식으로 시차를 상상하며 상흔의 맥락을 묻고, 흔적의 괴로움을 묻고, 가벼운 판단의 이유를 묻고, 이해가 어려운 이유를 물었다. 내가 책을 따라 도착한 곳은 어디였나.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고 모색하다가 결국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주려는 태도, 그 태도가 소설가의 직업윤리라는 김애란의 말처럼, 다다른 곳은 실패였다. 실패는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이해와는 달리 공백을 두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일이었다. 판단을 주저하게 하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복잡한 맥락이란 공백 말이다.



 그래서 눈에 들어온 게 예의였다. 예의란 토론하자라는 말로 해결될 수 없는,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일이다. 간극, 즉 공백을 확인한다는 것은 시차를 나의 동일성으로 포섭하는 게 아니라, 그 차이 자체를 내가 살아보지 못한 하나의 잠재적 실재로 존중, 배려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의를 갖춘 사람은 맥락을 사상한 가뿐한 요약, 판단과 같은 예쁜 합리성을 조심한다. 관조하지 않고 타인의 맥락에 자신을 놓아보려고 한다. 그것은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감당할 줄 아는 용기기도 하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명지가 인공지능 시리를 보며 느끼듯 우리에겐 이런 예의가 부족한 것 같다.


 다만, 예의가 상흔을 없애주거나 아픈 인생을 대신 살아주진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싶진 않았다. 예의는 사람 사이의 관계 문제일 뿐, 여전히 상흔 이후에 어디로 갈 것인지, 고통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와 관련한 현실적 문제가 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유독 입동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의 주인공이 눈에 들어왔다. 왜 하필 차에 치인 게 우리 영우인지, 왜 하필 학생을 구하러 뛰어든 사람이 우리 남편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두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 불가해함을 수용하고 내적으로 해소하려고 했다. ‘마주한 중압을 아무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고스란히 짐 지려는 그 정직성에서 비극이 미적으로 승화될 수 있다던 신용복의 말처럼, 그들은 부정적 감정을 외부로 투사하지 않고 정직하게 감당하려고 노력했다.


 “눈물방울이 (...) 허물이 덮였다 벗어졌다 다시 돋은 내 반점 위로, 도무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얼룩 위로 투두둑 퍼져나갔다. 당신이 보고 싶었다.”라는 명지의 독백이 떠오른다. 지은의 편지를 읽고 원망의 감정을 내적으로 해소한 후에야 치유의 눈물을 상흔 위로 흘리는 장면이다. 명지도 그렇고 입동의 부부도 그렇고, 서로의 위로와 눈물을 통해 새로운 오늘을 살 동력을 얻는 걸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받아도 사람은 역시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구나 싶다. 예의 없는 세상에서 고단함을 정직하게 짊어지는 게 쉽진 않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모습에서 원래 세상사는 일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걸 배우고, 새로운 오늘을 살아갈 힘도 얻는다.


2018.09.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깨달음 - 일상을 여유롭게 만드는 마음의 기술
김종의 지음 / 산지니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모두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닌 것을 본다면 여래를 보리라. (금강경 中)


                                    


김종의,깨달음』- 답은 내 안에 있다  

 

3600달러.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다. 이 수치를 봤을 때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잘 살았나? 그런데 왜...?’ 뭐랄까, 이 수치에 맞지 않게 삶의 질이 낮고, 더 많은 걸 갖지 못해 불행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달까. 물질적으로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지금, 사람들의 눈빛이 더 퀭해지고 시름이 더 깊어지는 이유는 뭘까.깨달음의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삶에 대한 진실한 이해나 괴로움을 직시할 의지 대신 사회나 환경을 탓하며 불평을 늘어놓기에 바쁘다. 되풀이되는 상황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다.” , 원인은 내 마음에 있다는 이야기다.


아니 이게 뭔 소린가. 저 이상한 녀석이 나를 무시해 화나게 했는데도 내 잘못인가? 억울한 감정이 내면에서 똬리를 틀 수 있겠다. 하지만 잠시 짬을 내 저자의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선불교를 중심으로 유학과 노장사상을 곁들이며 저자가 조탁한 활자는 우리를 어떤 전율, 깨달음을 향해 이끌 것이다. 이 책은 삼라만상이 어떻게 마음을 통해 구성되는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에 집착하느라 우리가 어떻게 고통에 빠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글자를 더듬다가 마주한 농익은 사유에서 뭔가를 느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원효 대사 해골 물 이야기에서 시작해보자. 서해안 당진의 한 토굴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원효의 일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이 생긴 즉 모든 것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니 모든 것이 사라진다.’라던 원효의 말을 삶과 연결해 곱씹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원효의 깨달음을 조야한 유아론으로 치부하며 오독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랬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생겨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탓이다. 예를 들어,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일부인 전오식(, , , , )은 대상이 없으면 작용하지 않는다. 보거나 들을 대상이 없는데 보거나 들을 순 없다.


따라서 원효의 깨달음은 마음이 삼라만상을 만들어낸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구성에 가깝다. 유식불교의 체계를 세운 바수반두는 같은 물(대상)을 두고 인간은 물로, 물고기는 보금자리로 본다고 말했다. , 인간은 물이라 불리는 온전한 대상 그 자체를 보는 게 아니다. 인간의 필터로 걸러낸 구성된 을 보는 것이다. 저자가 계속해서 세상엔 분별이나 차별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세상은 그 자체로 온전하다.’고 말했던 맥락의 참뜻이다. 우리는 어떤가. 나를 화나게 한 녀석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가 보는 것은 특정한 물리적 대상일 뿐인데 말이다. 그 대상에 를 덧씌우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구성한 허상에 집착하면 저 녀석이 나를 화나게 해서라며 평생을 괴롭게 산다. 왜 주위에 유독 자신을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많은지를 이해하지도 못한다.


마음이 구성한 허상이라는 말은 모든 게 여러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게 불교의 꽃인 연기(緣起). 저자가 말하는 깨달음의 핵심에는 이 연기 사상이 있다. 모든 게 조건에 따라 생멸한다면 조건을 벗어나 스스로, 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연기를 깨달은 사람은 내 밖에 나를 화나게 한 사람이 있다.’와 같은 주객 이분을 넘어선다. 온전한 대상을 채색하는 마음이 있어야 화나게 한 사람이 생겨난다는 인연(因緣)을 알기에 이렇게 질문한다. ‘나는 왜 화났나? 어떤 점에서 그런가? 저 사람은 왜 그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이런 사람은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알아가며 성장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은퇴 후 가장 고생하는 사람 중 하나가 언론인이라고 한다. 위상이 급변한 탓에 유독 나는 언론인이라는 아집과 대접을 향한 욕망을 버리는 게 어려운 탓이다. 언론인인 나, 대접받아야 하는 나, 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괴로운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묻는다. ‘연기에 따르면 세상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조차 없다. 그런데 왜 괴로워하나?’ 고정불변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 생각, 감정의 파편과 신체의 세포는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생멸한다.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조건이 다하면 죽는 게 . 그러면 다시 생각해보자. 은퇴했기 때문에 괴로운 건가, ‘특정한 나의 모습에 집착했기 때문에 괴로운 건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 배려하지 않는,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세상 때문에 괴로운 건가, ‘나는 뛰어나야 해, 존중받아야 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해.’라는 를 향한 욕망 때문에 괴로운 건가?


마음의 원리를 이해했다면 이제 자각을 해야 한다. 자각이란 자신이 세상을 어떻게 색칠하는지 깨닫고, 분별을 걷어내 인과의 사슬로 얽힌 세상의 온전한 모습에 다가가는 일이다. 자각할수록 내가 보던 세상이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타인의 욕망과 내 욕망에 의해 채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나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었는지도 알게 된다. 자각의 궁극적 지향점은 선종 8대 조사인 마조도일의 말처럼 일과 이치에 모두 걸릴 것 없는 경지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받아들이면서 가 없고 현재에 집중하는 행동만이 남은 상태다. 이런 사람은 사회가 문제라고 생각하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현재에 집중하며 최선을 다한다. 다만, 어찌할 수 없는 일은 수용한다. ‘에 집착하지 않기에 세상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도 괴로워 않고 일이 잘 풀릴 땐 감사하며 베풀 줄 안다.


선 수행의 목적은 자아의 확장이다.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바라보는 틀을 부수고 온전한 세상에 가까워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끊임없이 선()을 강조하는 이 책은 비좁은 자아에 갇혀 외부 탓만 하며 분노에 빠진 사람, 사는 게 괴로운 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 사람이 보면 좋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혐오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자아의 입맛에 맞게 바꾸기 위한 말과 관념의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서 남전 선사의 말을 검질기게 되뇌어보자.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실체도 없는 에 집착하면 항상 근심과 고통이 생기는 법이다. 내가 있다면 내 것이 있을 것이고, 내 것이 있다면 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와 내 것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 南傳남전 中部중부 蛇喩經사유경


2018.10.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화된 신
레자 아슬란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서적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세기에 신을 사고한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 (양장) -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대안적 통찰 박이문 인문학 전집 8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며칠 전에는 1885년에 아메리카의 한 인디언이 미국 정부에 보낸 편지를 읽었습니다. 그 속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습니다.

당신(백인)들은 어떻게 하늘을, 땅의 체온을 매매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땅을 팔지 않겠다면 당신들은 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 그러나 신선한 공기와 반짝이는 물은 기실 우리의 소유가 아닙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박이문,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태eco없는 자아ego라는 환상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다. 자연의 이치다. 조선의 명승 보우대사는 그 이치를 거스르려는 탓에 사람들이 구태여 바쁘게 다니며 고통에 빠진댔다. 여름에 더운 건 자연스러운데 좋다/싫다와 같은 마음의 분별로 자연스러움에 저항하니 부정적 감정이 싹트고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더위를 받아들인 후 땀에 푹 전 옷이 덜 고통스러웠던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열대야는 달랐다. 30도가 넘는 새벽 더위엔 이치고 뭐고 없었다. 받아들인다고 새벽에 깨는 일을 막을 순 없었다. 뭐가 문제일까. 미세먼지에 이어 된더위로 고통을 겪으니 생태주의자들의 걱정이 떠올랐다. 그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걱정은 오래됐다. 국내에서 녹색평론의 창간인 김종철, 과학자이자 생태주의자인 장회익과 최재천은 일찍이 생태주의를 외쳐왔다. 하지만 생태주의자로서의 박이문 선생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삶의 궁극적 의미를 탐구한 실존주의자로 뭇사람의 가슴에 불을 지핀 학자다. 웅숭깊은 지적 호기심으로 80년대부터 생태 문제에도 관심을 쏟아왔다. 생태학적 세계관과 문명의 미래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동안 쓴 글 중 생태 문제와 관련된 글을 솎아 엮었다. 문제의식은 일관됐다. 인간중심주의에서 생태주의 세계관으로 문명사적 전환이 없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하다는 이야기다.



 생태위기는 심각하다. 우리는 느끼고 산다. 중국발, 국내발 미세먼지의 영향으로 한국의 연평균 초미세먼지 농도는 28.7/에 달한다. OECD 국가 중 최악 수준이다. 가장 낮은 스웨덴은 5.1/이다. 괜히 숨이 차고 목이 칼칼해지는 게 아니었다. 2018년의 여름은 기상 관측 이래 최고로 더웠다. 열기에 사람들이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무분별한 개발과 소비로 생태계가 망가진 결과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원을 무한한 것처럼 사용하며 망가진 생태계를 외면한다. 저자는 두려움에 몸을 떤다. 인류의 미래를 우려한다.


 생태 위기의 원인은 근대 과학인 것처럼 보인다. 현대 문명 앞에서 바스러진 자연을 보며 몇몇 생태주의자가 반과학주의를 표방하기도 했던 이유다. 저자도 부정하진 않는다. 자본주의의 활동에 근대 과학의 힘이 전제되었기에 생태계가 현재와 같이 망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박이문은 과학 지식/기술이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직접적 원인은 자기 욕망을 위해 가치중립적 과학을 도구로 사용한 인간의 탐욕이고, 궁극적 원인은 그 탐욕을 가능케 한 세계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저자의 요지다. 과학과 과학적 합리성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하다. 문제의 핵심은 과학이 아니라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인류는 원래 자신을 세상 속의 일부로 생각했다. 모든 존재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론적 세계관, 인간과 자연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의 영향력이 강했다. 인간은 겸허, 절제해야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발전과 과학 혁명은 자연을 다스리는 인간의 지위를 드높였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외쳤다. 인간은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자연과 다르다고. 자연을 정복해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고. 자연을 아는 것은 힘이다. 창세기 128절은 자연의 지배자인 인간의 특권을 보증했다. 인간은 욕망을 위해 자연을 헤집었다. 나무가 베이고 사막화가 진행됐다. 지구는 뜨거워졌다. 거북이는 코에 빨대가 박혀 신음했다.


 인간의 특권에는 근거가 없다. 과학 지식은 저자의 말대로 인간 특권의 정당성을 허물었다. 다윈의 진화론, 뇌과학, 천문학 등은 인간이 우주 속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고, 다른 동식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인간이 소중하다면 다른 생명도 소중하다. 생명을 계속 움트게 하는 자연도 소중하다. 생태계라는 둥지가 망가지면 인류도 망가진다. 이것이 생태주의다. 인간중심주의라는 알을 깨뜨리고 새로 태어난 사람은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의 필요성을 자각한다. 그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인류의 미래와 생태계를 우려한다. 생태주의는 인류의 성장을 위한 아브락사스다.


 하지만 성장이 쉽진 않다. 자아ego 때문이다. 저자의 근대 문명 비판이 아쉬운 이유는 에고를 강조하지 않은 데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단순히 인간의 특별한 지위를 강조하며 자연을 대상화하는 세계관이 아니다. 인간주의의 핵심은 강한 에고다. 우리의 에고는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선택해 불확실성을 제거한 후 자아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 익숙하다. 쉽고, 편안하고, 확실하고, 안전한 것만 좇는다. 조금의 불편함, 고통도 감수하려 들지 않는다. 강한 에고에 집착해 나약함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인간애가 사라지고 현대인이 개별화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루소의 말대로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들고 인간애를 싹트게 하는 것은 연약함이다. 에고에 집착하느라 고립된 채로 타인의 고통을 무시하는 사람이 생태eco를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나는 가끔 무섭다. 에고에 집착하느라 우리가 에코 없는 에고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건 아닌지. ‘노 임펙트 맨의 콜린 베번의 말처럼 타이태닉호에서 가장 좋은 의자에 앉으려고 애쓴 사람같이 행동하는 건 아닌지. 썩는 데 한 세기가 걸리는 비닐봉지를 핀란드 사람의 105배나 사용하면서 폐비닐 대란에서 불편함을 호소하고 카페에서 플라스틱을 쓰지 말랬다고 짜증내는 게 우리다. 성숙을 이야기하나 아이 같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아이처럼 버리고 싼 오물이 야기한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듯 산다.


 “우리는 너무 많이 생산하고 소비한다. 많이 먹고 싼다. 너무 많은 것을 쓰레기로 남긴다.” 더위로 뒤척이던 새벽, 저자가 울린 경종을 음미하며 생각했다. 무엇을 위해 많은 것을 욕망하고, 소비하고, 버렸던 걸까. 근거는 없었다. ‘세련됐으니까’, ‘남들이 좋다니까’, ‘편하니까’, ‘좋으니까와 같은 자기합리화에 갇혀 무분별하게 먹고 사고 버렸다. 더 사고, 가지고, 먹는다고 더 행복해진 것도 아니었다. 끊임없이 더 바라는 욕망의 신경증에 시달렸을 뿐이었다. , 나를 괴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와 내 후대의 삶을 위협하는 신경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걸까.


 후회는 소용없다고들 한다. 저자의 걱정은 군걱정이 아니다. 자각이 필요하다. 우리의 무분별한 소비가, 욕망의 신경증이, 강한 에고가, 인간중심주의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보자. 덥다고 에어컨만 틀면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2018.09.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2019년 독서 정산


쓰는 게 맞나, 무슨 말을 써야 할까. 

깜빡이는 커서를 쳐다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들춰본 책이 없던 건 아니다. 성긴 생각만 남기고 휘발된 책들을 애매하게 부여잡는 게 의미가 있을까, 란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을 뿐. 하지만 어차피 이런 글은 다 자기만족 아닌가. 


2. 인상 깊었던 책들


(1) 이지영, 정서조절 코칭북



슬픈 이야기지만, 심리 관련 저서를 읽을 때 국내에서 나온 건 많이 거르곤 했다. 그래도 종종 각종 연구결과를 잘 소화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제시하는 책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책이 그런 책들 중 하나다.

책의 핵심은 '감정'이다. 감정이 뭘까? 감정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하는 걸까? 감정을 어떻게 마주해야 더 잘 살 수 있는 걸까? 저자는 이런 질문에 답한다. 각종 이론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부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싸심한 게 느껴진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가벼운 이야기를, 가볍게 읽고 자기 삶이 바뀌길 바라는 걸까? 적어도 쉬운 이야기를 바라지 않고, 고뇌하면서 자기가 바뀌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빌려봤다가 새해에 샀다. 다시 읽을 계획. 소장할 만한 책이다.


(2) 마크 릴라, 분별없는 열정



마크 릴라는 컬럼비아대학교 교수다. ‘서구 사상사, 그중에서도 정치와 종교의 관계, 근대 서구 계몽주의를 주로 연구하는 정치철학자다. 

읽고 싶어 보관함에 담아만 두다가 기본 예비군과 작계 훈련 상하반기 때 빌려 가 틈틈이 읽어 완독했다. 책 소개란에 나온 것처럼 지식인의 분별없는 열정이 냉혹한 현실 정치와 잘못 만났을 때 어떤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다는 말로 가볍게 퉁 치기는 어려울 정도로, 마크 릴라는 각각의 철학자 앞에서 머뭇거리며, 분석적으로 이들의 생애와 철학, 그리고 정치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으며 떠오른 생각은 많았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아무런 글을 남기지 못해 아쉽다. 다음에 다시 읽고 서평을 꼭 써두고 싶은 책. 아렌트가 하이데거를 보고 자신의 에고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투로 말하던 부분이 기억에 특히 남는다.


3. 19년의 독서를 돌아보며


쓸 말이 없을 정도로 책을 읽지 못한 한 해였다. 뒤적인 책들은 좀 있었다.

 

조던 엘렌버그의 틀리지 않는 법데이비드 베너타의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도올의 스무살-반야심경에 미치다











나가노 히로유키의 (물리가 쉬워지는) 미적분과 (통계가 빨라지는) 수학력제임스 스튜어트의 미분적분학앤더슨의 통계학



















스티븐 내들러의 에티카를 읽는다발타자르 토마스의 비참할 땐 스피노자 등등.



 







이 외에 읽은 건 대부분 수험서적이었다. 각종 경영, 경제, 재무, 회계, 적성 시험 서적들. 먹고사는 데 필요한 책을 읽었던 한 해랄까. 적성 시험공부나 경영전략, 경제학, 재무관리 공부는 적성에 꽤 맞았다. 거시적인 흐름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수학을 좋아하기 때문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알게 되는 지적 쾌감도 있었으니. 하지만 늘 그랬듯 이런 공부는 뭔가 공허하기도 했다. 이미 짜인 규칙, 프레임 안에서 상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필요한 공부보다는 규칙과 프레임의 타당성, 그 규칙이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과 맺고 있는 인과관계 등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 걸 보면 세상 편하게 사는 일은 글러먹은 것 같다. 어휴.


앞으로 어떤 책을,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까.

 

1) 내가 조금 더 밀도 있게 공부해 기둥을 세우고 싶은 분야를 찾고 싶다

 

세상엔 내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세계가 존재하고, 나는 그 세계를 다 엿볼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다. 책도 마찬가지다. 세상엔 읽어보고 싶은 다양한 책이 존재하지만 내 삶은 무척 짧기에 그 책들을 다 읽어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쉽다. 그래서 고민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 

하지만 딱 '이거다!'라는 걸 아직도 찾지 못하겠다. 이것도 재미있어 보이고 저것도 재미있어 보이고, 그러다 보면 여러 선택지 앞에서 어리바리하며 시간만 보내고 정작 끈덕지게 읽지를 못하는 경우가 잦다. 내가 조금 더 밀도 있게 공부해서 기둥을 세우고 싶은 분야를 찾고 싶긴 한데 쉽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더더욱 찾을 수 없으니 눈에 먼저 들오고 잡히는 것들이라도 꾸준히 읽다 보면 뭔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바람과 함께 독서를 해나가고 싶다.


2) 책을 계획적으로 읽는다

 

책 읽기는 내게 오락과도 같기 때문에 모든 걸 계획적으로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밀도 있게 한 주제를 파고들기 위해서는 커리를 작성해 계획적으로 읽어나가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뇌과학, 심리학, 철학 분야에서 가졌던 문제의식이 연결고리가 있는 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하나씩 책을 읽어나가야겠다.


3) 불편한 책을 읽는다

 

책의 내용 자체가 불편해도 괜찮고 어려워서 불편해도 괜찮다. 뒤돌아보면 늘 불편함과 마주했을 때만 성장했다. 불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 불편한 책을 읽자.


4) 작년에 지향하고자 했던 독서 방식을 체화하고자 노력한다

 

첫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또는 강박과 초조에 휩싸여 책을 읽지 않는다. : 전보다 공허함, 강박, 초조 때문에 책을 읽는 경우가 많이 줄긴 했다. 그래도 꾸준히 더 노력하자. 초조는 죄다.

둘째, 책을 읽을 때 ''를 중심에 둔다. : 남이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인가. 책의 핵심은 왜곡하지 않되 책이 내게 주는 울림과 공명에만 신경 쓰자. 

셋째, 당장 내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책에 관심을 둔다. : 전에도 썼지만 무분별한 호기심은 내면에 혼란만 가져다준다. 하루하루 내가 마주한 문제, 또는 의문을 곱씹고 그와 관련된 책을 읽도록 노력하자.


2020.01.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