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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라 메탈
박숲 지음 / 하늘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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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기억 끝에 걸린 유년시절의 절박한 기억들을 떠올리게하는 박숲 작가의 글들은 아련하면서도 뭉클한 감정을 자아낸다.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을법한 소외되고 겁먹은 이웃들의 아픔을 정교한 핀셋으로 들춰내는 듯 하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밀려나 땅 없이 허공을 떠도는 아이들이나 비록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디딜곳 없이 지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고 살아야하는 그들의 상처에서 나는 내 삶의 일부를 보았다.
아프고 외면하고 싶지만 한번쯤 들춰 보아야하는 상처들.
내가 아니더라도 내 친구의 상처일 수 있는 그 유년의 파편들은 아직도 누군가의 몸속에 박혀 꿈틀거리고 있을것이다.
스스로 생명력을 지닌 상처가 더 이상 깊어지기 전에 박숲 작가의 다음 작픔은 좀더 밝고 환하게 치유되는 주제들로 채워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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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기르다 청년사 작가주의 1
다니구치 지로 지음, 박숙경 옮김 / 청년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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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와 아무나>
개를 기르고 고양이를 기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신이 키우던 애완동물의 죽음을 바라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요즘처럼 애완동물들이 천대받는 시대에는 애완동물들이 주인의 품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드물다.
병이 들거나 나이가 먹어 힘이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길거리에 내버려진 동물들은 쓰레기통을 두지는 서열에서도 밀려나, 인적 뜸한 길가를 오가다 덩치 큰 차량에 짓눌려버리기가 일쑤다. 아침마다 한번 이상은 보게 되는 자동차 전용도로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애완동물들의 눌린 주검들은 더 이상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다.

<개를 기르다>는 이제 열네 살이 된 (사람의 나이로 치면 고령에 접어든) 잡종견 탐과 탐의 죽음을 지켜보는 한 부부의 이야기다. 뒷다리를 들 힘조차 없어 가끔씩 자기 앞다리에 소변을 묻히거나 대변을 볼 때 조심스럽게 등을 잡아주기 않으면 똥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 마는 나이 들고 힘없는 탐은 하루 세 번, 주인과 산책을 한다.
아직 아이가 없는 부부에게 탐은 가족이자 자식과도 같은 존재다. 하지만 탐의 기력이 빠져나갈수록 책임감과 애정으로 탐을 돌보던 젊은 내외도 조금씩 힘겨움에 젖어든다.
어느 날, 걷기조차 힘이 들어 담벼락에 앉아있는 탐과 여주인에게 이웃집 할머니가 말을 건낸다.
“정말 잘 견디는구나. 너 말이야. 언제까지 살 작정이니. 얼른 떠나줘야 하지 않겠니. 내말 알겠지? 나도 얼른 가고 싶단다.”
“할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오래오래 사셔야줘”
“나도 남들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아. 이 녀석도 그럴걸. 그런 생각이 들어. 하지만 죽을 수가 있어야지. 좀처럼 죽어지지가 않아. 생각처럼 안 돼. 좀처럼 갈수가 없어.”
사람이나 동물이나 삶을 유지하고 푼 욕망과 그 정반대의 욕망은 비례한가보다.
삶을 놔버리고 싶다는 욕망은 살아야겠다는 의지와 맞물려 결코 죽음의 문턱에 이를 수 없다.

떠나는 자의 고통, 남은자의 상실감.
<개를 기르다>는 애완동물을 통해 삶과 가족, 죽음과 상실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들을 깊이 있게 풀어낸다. 죽음이 고통이라면 그 죽음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이들 또한 같은 무게의 고통을 지고 있을 것이다. 한 쪽이 그 고통을 끝낼 때, 남은 이들은 떠난 자가 남기고 간 상실감이라는 유산을 덤으로 더욱 무거운 삶을 살아내야 한다.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한 자의 송장은 언제나 땅을 향해 무겁게 처져있다.
하지만 죽음을 축복이라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떠나는 자가 남기게 될 유산은 홀가분함과 화합이며 죽음위에 번지는 미소는 남은 자에게 던져지는 축복과 용서의 의미이다.
그럼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죽을 것이냐는 동질의 질문이다.

다니구치 지로
<열네 살>과 <아버지>로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았던 다니구치 지로는 표제작 <개를 기르다>이외에도 <그리고 고양이를 기르다>, <약속의 땅>등 총 다섯 편의 이야기 속에 고양이와 눈표범 등장시켜 가족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게 다뤘다. 신비하면서도 천진난만한 동물들을 통해 그가 그리고자한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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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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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B급 좌파"라고 규정하고 있는 김규항은 일선에서 활동하는 운동가도 아니요, 그렇다고 못난 현실을 뒷짐만 지고 바라보는 풍객도 못된다.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를 "B급 좌파"라 정의 한다.
그는 사회진보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를 선전하는 신자이기도 하다. ‘진보’와 ‘예수’가 얼핏 반대 개념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가 논하고 있는 예수는 ‘허울뿐인 관념에서 벗어나 실천적 행동’을 행하는 진보주의자로써의 관점이다.
‘진보’와 ‘예수의 행동’이 지닌 공통점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행보이다. 그러기 때문에 ‘B급 좌파’ 혹은 ‘예수쟁이’가 그리고 있는 세상 읽기의 기본 틀은 인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가장 인간적인 품성으로 추앙되고, 남을 누르고 빼앗는 능력이 사회적 능력으로 설명되는 세상에서 사람다운 사람의 유일한 조건은 공정함을 쫓는 것이라 나는 믿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공정함을 쫓는 습성을 길러주려 애쓴다.”
그래서인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삐딱할지 몰라도 그 속에 배어진 사람의 냄새는 지워지지 않는다.

“인텔리들은 늘 뒤늦게 흥분하고 먼저 절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늘 ‘대중의’ 저력에 뒤늦게 흥분하고 ‘대중의 반동’에 먼저 절망하는 발작과 패닉의 끝없는 반복상태를 보인다.”
그를 B급 좌파로 남게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한 지식층의 안일한 태도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의 음험한 욕망과 결합하여 강고한 지적권위주의’를 형성하고 있는 지식층에 그는 진보란 이름으로 딴죽을 걸고 있는 것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의 출발은 ‘다른 가치관’을 갖는 것이다. … 혁명은 한줌의 지배 계급이 차지하던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일 자체를 부끄러워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혁명의 최종 목표는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공정한 가치관’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살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불합리한 공론’들이 머리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좌파 인텔리들마저 자식과 연결되는 문제에대해서는 ‘공정한 가치관’과는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
“제 자식이 ‘진보적 엘리트’가 되길 바랄지언정 고등학교나 마친 노동자가 되길 바라는 좌파 인텔리를 본적이 있는가?”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수십 년 간 쌓아 온 가치관을 바꾸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머리를 바꾸는 일은 자칫 사회의 몸뚱이마저 망가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는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결코 한 발짝도 밀려서는 안 된다.

고정된 가치관을 바꾸기 가장 쉬운 방법은 내 자녀를 스승으로 두는 길이다. 자녀의 시선만큼 자신을 따끔하게 만드는 채찍도 없다. 김규항은 열한 살 난 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진화해 나가는 것 같다.
“딸은 단지 딸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 ‘삶의 시험지’다. 한 남자가 ‘딸에게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 더 근사해질 것이다.”
가치관은 바꾼다는 건, 세상을 바꾼다는 건, 존경받는 아버지가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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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 라틴아메리카 문화기행
우석균 지음 / 해나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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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를 출발하여 탱고의 혼이 깃든 카미노토, '유팡키'의 조국애가 서린 팜파와 안데스를 따라 ‘네루다’의 나라 칠레에 이르는 여행길까지, 작가는 ‘세르메더스 소사’와 ‘비올레타 파라’와 같은 뛰어난 음악가를 만나 그들의 음악과 사연들을 들려주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음악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거론되어야 할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음악가들의 삶이다. 세계에 라틴음악을 알리는데 크게 공헌한 ‘메르세데스 소사’와, ‘비올레타 파라’, 그리고 ‘유팡키’와 ‘빅토르 하라’의 치열했던 삶을 모른다면 라틴음악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활동했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칠레, 아르헨티나,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의 정국은 쿠데타와 혁명으로 혼란했다. 그런 상황에서 민중의 불안을 덜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주던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음악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폭력에 항거했으며, 단결할 수 있었다.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터뜨려 노래하던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와 음색으로는 부족하지만 음악에 대한 꿈과 열정만으로 칠레 음악을 세계에 알린 ‘비올레타 파라’. 그리고 구타와 고문으로 죽어가면서도 그 상황을 노랫말로 적어 냈던 ‘빅토르 하라’.
‘빅토르 하라’의 음악이 안일한 삶에서 투쟁을 위한 길로 들어선 노래였다면, ‘메르세데스 소사’의 음악은 노래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 이었으며, ‘비올에타 파라’의 음악은 체코의 전통 음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을 불태운 경우였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두 번의 이혼을 당하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끝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올레타 파라’. 산티아고로 올라와 싸구려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유지하던 ‘비올레타 파라’의 고달팠던 삶이나, 연극무대감독이라는 안정적인 삶에서 벗어나 민중을 위한 노래를 부르다 1973년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속에서 죽어간 ‘빅토르 하라’의 안타까운 사연을 모른다면 라틴 음악의 달콤함 속에 녹아있는 슬픈 음색을 찾기란 힘들 것이다.
비극으로 생을 마감했던 ‘비올레타 파라’와 ‘빅토르 하라’와는 달리 노년 때까지 음악적 위용을 과시했던 ‘메르세데스 소사’는 자신의 노래보다도 동료들의 노래를 불러 더욱 유명해진 경우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매혹적인 목소리는 ‘비올레타 파라’의 <생애 감사해>나 광대한 팜파와 신비한 안데스 천년의 한을 연주했던 ‘유팡키’의 노래에 새 생명을 불어 넣을 만큼 매혹적인 감성을 지녔다. 그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그녀는 시대의 아픔을 민중과 함께 호흡했다.

이들의 음악을 통해 라티음악이 세계적인 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부른 노래가 민중을 향한 목소리였기에 이들은 라틴음악을 대변하는 음악가로 남을 수 있었다. 대중과 호흡하지 않는 음악가는 쉽게 잊어지기 마련이다.
라틴음악을 알아간다는 것은 열정적인 리듬 속에 숨어있는 슬픈 단조 하나를 찾아낼 줄 아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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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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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철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의미를 여러 각도로 바라보고 재해석하는 것이 철학적 사고가 지닌 장점이라면 삶은 그 해석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이 삶에 투영되기 위해서는 ‘실행’이라는 과제를 풀어야만 한다.

행동이 수반되진 않은 철학은 동화 속 계모들의 자식 사랑과 다를 바 없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말로만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소피스트’를 향한 일갈이었다. 

소피스트들은 대중의 지지에 얻기 위해 진실과 거짓에 상관없이 대중을 현혹하기에 바빴다.  머리는 뜨거웠지만 몸이 식어버린 그들에게 철학적 사고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그들은 대중을 휘어잡기 위해 ‘변론술’로 치장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궤변론’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러기에 소크라테스의 ‘알라’라는 의미는 단순히 자신을 안다는 ‘인지’의 문제를 넘어서서  ‘할 줄 알라’라는 ‘행동’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가야 어느 정도 앎의 완성에 접근해간 것이다. 이걸 흔히 ‘지행합일’ 또는 ‘지행일치’라고 한다.”

사고와 행동이 분리된 철학은 궤변을 낳고 궤변은 변질을 잉태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철학이 다른 사람의 삶에 기여하는 부분이 극히 드물며 스스로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에도 아주 인색한 것은 사실이다.”

앎의 문제를 실행의 문제로 바꾸는 것은 철학자들에게 주어진 숙제이며 동시에 철학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조금 더 적극적이어야만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이 철학적 사고를 탁상공론으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철학은 결코 일상에 파고들 수 없으며, 철학이 일상에 개입되지 못하면 대중은 ‘무뇌아’의 무리로 전락하게 된다.


결과를 말하자면 현대 사회에 철학이 삶에 깊이 개입되어야 하는 부분은 바로 ‘비판적 사고’를 늘리는데 있어야한다. 전문적인 철학연구는 그것대로 작업을 해나가야 하지만 “대중과 만나는 지점에서는 비판적 사고 기르기가 주된 과제로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책의 저자인 강유원은 강용욱의 철학 강의를 예로 들고 있다. 그이 철학은 좋으나  “그의 강의에는 한국 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해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철학이 현실비판과 대안제시가 없는 상태에서 현실의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거기서 조금 조금씩 무언가를 얻어먹으려는 태도를 소수하고 있는 한, 결국 모든 것일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비난 한다.


이 외에도 강유원은 ‘철학적 사고란 무엇이며 철학적 사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철학이 지닌 힘은 무엇이며 그 힘을 통해 얻어지는 효과는 무엇인가’ 라는 철학 본질에 대한 얘기와 함께 ‘책“과 ‘문화’ 속에 존재하는 ‘철학의 현실적 쓸모’에 대해 가벼운 사색을 유도한다.

그러므로 강유원의 철학으로 바라 본 세상과 문화는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으며, 어떤 시류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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