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호를 마감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게는 새로운 겨울이 시작되었고, 이미 다가오는 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인민에 의한 '새로운 헌법 만들기'의 첫 시동을 걸자는 맥락에서 "헌법을 생각한다" 특집을 기획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서 작게는 동북아, 동아시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보자는 한중일 삼국 지식인들의 역사적 연대와 민중적 결합을 첫 시동을 걸어보자는 취지에서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를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허심탄회하게 나눠 본 대화가 될 겁니다.
다가오는 봄에는 더욱 문제적인 특집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황해문화 2004년 겨울호 (통권45호)
권두비평/ 지식부재시대의 지식 - 김동춘(황해문화 편집자문위원, 성공회대 교수)
특집/ 헌법을 생각한다
1. 헌법은 우리에게 무엇인가_ 헌법의 정의, 헌법의 정신/ 김종철(연세대 법대 교수)
2. 헌법의 어제와 오늘/ 이경주(인하대 법대 교수)
3. 헌법재판소, 한국의 “원로원”? / 이석태(변호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회장)
4. 미래지향적 헌법 전문 다시쓰기
서동진, 하종강, 이필렬, 정희진, 복거일, 정욱식, 김진호, 이란주, 변연식 / 기획의도(김명인)
창작/ 시/ 백무산, 최창균, 고두현, 이윤학, 이병률,
소설/ 마을버스를 타고 / 송영
황해네트워크/ 수도 이전의 전후이야기/ 김광현(동아일보 기자)
통일을 준비한다/ 북한이탈주민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이우영(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
인천, 이 사람/ 김윤식
기획/ 동아시아 평화와 역사읽기(황해문화 주최)/ 기획의도(백원담)
과거로서의 미래의 재구축-민족서사, 발전주의, 그리고 아시아 상상 / 왕후이(칭화대학(淸華大學) 중문과 교수)
어떻게 동북아의 ‘전후(戰後)’를 논할 것인가-고구려문제가 불러일으킨 생각 / 쑨꺼(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
미래지향적 민족주의와 신국제주의 / 췌이즈위안(중국 칭화대학 공공관리학원 교수)
동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역사 읽기: 몇 가지 제언 / 백영서(연세대 사학과 교수)
중국 동북공정의 논리와 대응방향 / 이남주(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동북아평화에 대한 문화적 상상과 역사문제 /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고구려사 문제’와 일본의 동북아시아 인식 /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지상중계 - 동북아 평화와 역사읽기 / 박자영
기고/ 문학과 종교/ 윤영천(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
문화비평
1.영화/ 영화의 정치성 - 폭력에 대한 카메라의 수사학/ 박명진
2.음악/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의 개작(리메이크)과 재발매에 대한 만감/ 신현준
3.건축/ 아키토피아의 그림자, ‘건축도시’는 가능한가?/ 전진삼
4.연극/ 관객이란 연극의 언어/ 안치운
5.미디어/ 국가보안법/ 김창남
6.사진/ 경성은 어떻게 재현되었나-경성시구개정사업과 도시계획사진아카이브/ 이경민
7.문학/ 이효석 문학관 운영에서 배워야 할 몇 가지/ 김경수
8.미술/ 박생광-한국미술의 잃어버린 영성을 그린 작가/ 박영택
9.출판/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과 인천/ 최성일
서평
1. 덩샤오핑 평전/ 성근제(연세대 강사)
2. 테러시대의 철학(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황훈성(동국대 영문과 교수)
3.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 이승환(민화협 정책위원장)
4. 인천이야기 100장면/ 김창수(인천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문학평론가)
‘황해문화’ 겨울호 특집
“… 모든 권력은 백성으로부터 나오며 헌법기관은 백성의 대표자로서 백성이 맡긴 권한의 범위 안에서 법률의 규정에 따라 국정을 수행하며 … 이러한 근본정신에 반하는 모든 행위를 백성의 힘으로 바로잡는 저항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백성의 마땅한 권리임을 밝힌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들머리)의 일부다. 다만 아직 헌법 개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초안’이다. 변연식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대표가 썼다. 현행 헌법의 ‘대한국민’ 대신 ‘백성’을 헌법 주체로 삼았다. 직접민주주의의 정신과 저항권을 강조했다.
이런 전문은 또 어떤가. “… 대한민국은 인류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 가난과 국가폭력에 신음하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위해 … 전 지구적 존재의 보전과 안전을 위한 국제적 행동에 동참해야 한다. …” 김진호 목사는 인권의 가치를 앞세웠다. 평화헌법의 초안이다. 그것은 일국적이 아니라 세계적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고통의 지구화’에 맞서는 한 주체다.
저항권에 생명사상·평화주의에 차별반대
새로운 삼권분립까지‥다채로운 내용 담아
이 밖에도 7편의 헌법 전문이 더 있다. 계간 〈황해문화〉 겨울호는 ‘헌법을 생각한다’는 주제 아래, 각계각층의 인사들로부터 헌법 전문을 받아냈다.
이 작은 기획 자체가 우리 헌법에 대한 유쾌한 비틀기다. 근대 입헌주의 헌법의 역사는 인민의 피로 쓰여졌다. 우리 헌법은 다르다. 인민의 피를 딛고선 소수의 권력자들이 썼다. 그래서 ‘헌법 주체’가 국민인지 인민인지 백성인지 시민인지조차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구성원 각자가 나라의 지향을 고민하고 토론을 통해 국가규범의 기초를 닦는 ‘사회계약적’ 과정이 비어 있는 헌법이다. 〈황해문화〉는 이 기획을 통해 헌법을 다시 세우는 첫걸음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정치학자·헌법학자 등의 헌정체제 논의와는 별개로, ‘헌법 다시 쓰기’를 둘러싼 국민적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헌법 전문은 나라의 꼴을 갖추는 일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인민의 한 사람’에 불과한 각 필자들의 헌법 전문을 읽어보면, 현행 헌법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대다수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권 개념의 공백 메우기를 시도했다. 평화와 노동의 가치도 등장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혈연적 민족 개념과 국민 국가주의에 기반한 우리 헌법의 ‘국민’ 범주”를 비판하며, 소수자를 헌법 주체로 당당히 격상시켰다. 새 헌법을 만드는 주체는 이제 “여성·장애인·동성애자·특정 지역민 배제의 역사와 근대국민국가의 욕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남한 사회의 ‘우리’ 시민”이다.
노동문제 전문가 하종강은 아예 ‘국가(행정부)-대표체계(의회)-시민사회’로 이뤄지는 새로운 삼권분립의 원칙을 제시한다. 제4부로 독립한 검찰·감사원·선거관리위원회 등 권력감시기구들은 의회와 시민의 통제 아래 놓인다. 사회법과 평등의 정신도 강화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안보지상주의를 넘어서는 평화주의를, 이란주 아시아인권문화연대 대표는 국민국가의 폐쇄성 극복과 인종·민족차별 반대를, 환경운동가 이필렬 교수는 모든 생명이 서로 의지하는 생명사상을 헌법 전문에 녹였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소설가 복거일은 “전문에 너무 중요한 뜻과 임무를 부여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으로 보기 어렵다”며 ‘우리 대한민국 인민들은 우리 삶을 인도할 원리와 규칙을 마련하기 위해 이 헌법을 제정한다’는 한 줄의 문장을 제시했다. 이들의 초안은 거칠고 도발적이지만, 분명한 점이 하나 있다. 필부가 쓴 어떤 헌법 전문도, 장황한 내용을 원고지 2장 분량의 한 문장에 우겨넣은 현행 헌법 전문보다 훨씬 읽기 쉽고 의미가 깊다는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헌법재판소, 정당성 위기에 처했다”
[한겨레] 헌법학자 등 ‘황해문화’서 헌재 비판적 재구성 주문
헌법을 생각하는 일은 그러나, ‘헌법 전문 다시 쓰기’ 같은 생산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행 헌법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독점되고 있기 때문이다.
뜻있는 헌법학자와 법률가들은 계간 <황해문화> 겨울호를 통해 헌재의 민주적 재구성을 주문한다. 김종철 교수(연세대 법대)는 헌재가 ‘정당성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한다. “헌법이 정치적·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견강부회의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헌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정치적 주장의 포장물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최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재 결정은 “우리 헌법의 기본인 성문헌법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일이었다.
헌재 스스로 입헌주의의 정당성을 갉아먹는 사태를 막기 위해 헌재의 ‘민주적 정당성’을 높이려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김 교수의 문제의식이다. “시민단체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법관 인사에 활용하는 것”도 민주적 정당성을 높이는 한 대안이다.
다만 김 교수는 헌재를 비롯한 사법권에 대한 ‘직접민주주의적 열정’이 성급한 개헌논의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한다. (직접)민주주의와 함께 근대 헌정질서의 또다른 축인 입헌주의의 중요성을 가볍게 본 결과라는 것이다. 섣부른 개헌은 오히려 일부 극우세력의 준동 등 민주화의 후퇴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
이석태 변호사는 헌재를 ‘한국의 원로원’이라 꼬집는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고대 로마의 귀족정을 빗댄 표현이다. 87년 6월 항쟁의 끝에서 마련된 현행 헌법은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를 자임하고 있는데, 정작 헌재 재판관들은 이 ‘민주주의와 기본권’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부족하거나 오히려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국가안보와 개인의 기본권 보장이 충돌할 때마다, 대체로 국가안보의 측면을 우선시하는 결정들이 내려졌다. ‘자잘한 것은 위헌, 굵직한 것은 합헌’이라는 비아냥도 여기서 나왔다. 사립학교 교원노조 금지, 제3자 개입금지, 양심적 병역거부 불허 등의 근거법률에 대한 합헌판결이 대표적 사례다. 국제인권규약 등을 위헌 여부 판단의 준거로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보수적’관행도 여기에 작용했다.
결국 법치가 민주주의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이를 거스른 셈이다. 그래서 이 변호사는 “헌재의 민주적 구성과 국민 대표성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진단한다. “헌법 적용·해석을 사명으로 하는 헌재 재판관 가운데 몇사람은 반드시 헌법전공 학자를 임명”하자는 제안도 덧붙였다.
이경주 교수(인하대 법대)는 “건국 이후 올바른 헌법 주체 형성에 실패했다”고 짚었다. 헌법재판소가 제 노릇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국민을 중심으로 한 ‘헌법 주체’의 형성이 필수적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