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책읽기 -02

자신에게 맞는 취향과 독서법을 찾아서...
 
"책 읽기"를 즐기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일삼아 해야 하는 학생 입장에서 보면 이 말은 참 잔인한 말입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즐겨가던 학교 앞 서점에서 저는 일삼아 매일같이 만화책을 읽었습니다. 서점 형과 매우 친했던 탓인데, 서점 주인과 친해지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일 겁니다. 일을 잘 도와주거나 아니면 책을 많이 사주면 되겠죠. 제 경우엔 책을 많이 사주기도 했지만, 일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얼굴을 알고, 찾아가면 차 한 잔 내주는 주인이 있는 단골서점에는 아무리 인터넷 서점이 주는 편의성이 있다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미덕이 있겠지요. 동네 서점이 없어지는 건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찌되었든 그 서점 형에게 저는 종종 한 무더기씩의 책을 주문하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제가 주문하지 않았는데 누가 주문했는지 한 무더기의 책이 그것도 어, 우리 학교에서 누가 이런 책을 볼까 싶은 것들을 주문해두었더군요. 그 형에게 물어보니 제 같은 과 후배 중에 여자앤데, 너 만큼 책 보는 애가 새로 들어왔다는 거였어요. 그녀는 지금 꽤 잘 나가는 소설가가 되어 있더군요.

어디선가 그녀가 한 인터뷰를 보니 학교 다닐 때는 참 공부 못하는 학생이었다고 해요. 물론 대학에 들어오기 전 얘기죠.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서 강의를 들어보니 자기가 참 잘 아는 얘기들, 좋아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거였어요. 강아지도 제각각 품종에 따라 성질이 다르고, 흥미를 갖는 것이 다르듯 인간도 제각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있고, 그걸 마춤으로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재능이란 것도 드러나는 법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후배가 훌륭한 작가로 계속 살아남아주길 바랍니다. 이렇듯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을 때 힘이 배가된다는 건 참 생활의 진리인 듯 싶습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일도 해야 하는 게 인생이겠지요.

독서와 경험...

저도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습니다. (뭐 중,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장학금 간신히 받는 정도였다고나 할까요? 흐흐) 게다가 고등학교 2학년 뒤부터는 학과 공부하고는 완전히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성적이 곤두박질 치는 것도 이해못할 일은 아니죠.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4년간 전국을 떠돌며 노가다판 막일꾼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제 인생에서 가장 불행하면서도 가장 빛났던 시간들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기분이란 ... 평생을 살면서 1년도 느끼기 어려운 것인데, 저는 그걸 무려 4년이나, 그것도 가장 예민한 시기에 그리 살았으니까요. 삼국지에서 유비는 나이 삼십을 넘기고 거의 사십이 다 되어서야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늘 이 사실을 한탄했지만, 작자 나관중은 그렇게 사회 경험을 쌓은 뒤에 읽는 책이란 아무 것도 모르고 읽는 책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생충"에 관한 책을 썼다고 치자구요. 제 아무리 미문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다듬었다 하더라도 마태우스님 같은 독자들에게 걸리면 여지없이 빈틈들이 노출될 겁니다. 우리가 책을 구입할 때 작가의 약력을 유심히 살피는 것도 그와 같은 이치겠지요. 어떤 독자도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살지 못하면서 입만 살아서 주절거리는 독백을 읽고 싶어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이렇듯 책이란 작가와 독자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읽게 되는 겁니다.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지요. 남의 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 꺼내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아느냐고요. 책을 구입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세상의 무수히 많은 인간들과 생각들 속에 하나의 생각을 골라내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핍쇼룸에 여자들이 대기하고 있고, 남자가 그들 중 하나를 택일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과 행태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겁니다.

나의 독서법 첫번째 - 개관하라!!!

아차, 이런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좀 샜습니다.
독서란 게 꾸준해야 한다는 얘기는 앞서 이미 했지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열심히 하는 건 당연하고, 공부를 잘하는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방법을 무턱대고 따라하는 건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모두의 개인차가 있기 때문에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일반적인 공부법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방법인데요.
흔히 개괄적으로 살펴본다는 걸 한자로는 "개관"한다 말하고, 영어로는 서베이(Survey)라고 하지요. 저는 책을 구입하기 전에 몇 가지를 살펴봅니다. 우선 제가 원하는 책인가를 판단하는 방법인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가 나름의 노하우가 있을 듯 합니다. 저는 제목과 저자를 살피고, 출판사를 살핍니다. 그리고 외국 책이라면 역자도 살피게 되지요. 저는 번역작가란 말을 좋아하는데, 번역이 새로운 창조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가령, 김민기 선생은 독일의 뮤지컬을 국내로 들여와 "지하철1호선"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원작자가 와서 보고는 자기 작품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경탄하고 돌아갔다죠. 번역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심지어는 재창조할 만큼(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지만) 피츠제랄드의 공로를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어밖에 모르는 저같은 독자에게 번역되지 않은 책은 출판되지 않은 책과 마찬가지로 세상엔 없는 책이죠.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어떤 책을 읽든 개관해 보는 건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저는 독서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작가의 말 혹은 들어가기 전에 와 같은 프롤로그를 살핍니다. 아마 작자가 본문보다 더 공을 들이는 것이 이 부분일 겁니다. 대개의 프롤로그들은 책이 쓰여지기 전보다는 쓰여진 뒤에 쓰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기에 책 전체의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 쓴 프롤로그는 책의 구조와 의도를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죠. 이걸 공부에 비유하자면 "예습"에 해당하겠습니다.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이 책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읽어야 되겠구나. 어느 부분에 중점을 두고 읽어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가짐을 저는 책의 서두에서 혹은 번역자가 쓴 옮긴이의 말에서 느낍니다. 프롤로그가 충실한 책은 최소한 절반 이상은 성공하기 마련이죠.

개관은 이것으로 족한가? 그건 아닙니다.
프롤로그를 읽는 것이 마음가짐과 예습에 관한 것이라면 이제부터는 책의 목차를 살펴야 합니다. 종종 알라딘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목차가 없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책은 구입 우선 순위에 올려놓지 않습니다. 나중에 서점에 나가서 다시 살펴본 뒤에 구입하거나 구입을 보류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굳이 히말라야를 가지 않더라도 처음 가는 도시를 방문하기 위해 우리는 지도를 살핍니다. 자동차마다 책으로 묶인 도로지도책 한 권씩 비치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가는 길인데, 지도 없이 던져지고 싶지는 않거든요. 목차가 충실하게 꾸며진 책일수록 편집자가 공을 많이 들인 책이고, 책의 전체 구조, 로드맵이 잘 짜여진 책이지요. 지도가 길을 알려주듯 목차는 책의 길을 알려주는 좋은 지도입니다. 좋은 지도를 갖춘 책은 그만큼 좋은 지적 여행을 보장하는 법이지요.

이것이 개관입니다.

-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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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9-1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참 재밌어요.
그러니까 마태우스님이 유비다 이거죠.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구두님이 언급을 회피한 그 작가 누군지 알고 싶은데요. 저는 책을 살 때 출판사. 목차를. 그리고 편집 등을 보는데 여백이 많은 책, 유난히 예쁜 책은 개인적으로 싫어하죠. 이 글 읽으니 개관을 들여다 봐야겠군요.^^

바람구두 2004-09-1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흐흐.... 마태우스님이 꼭 유비인지 아닌지는 저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님은 무척 겸손한 사람이니까, 실제로 책을 뒤늦게 읽기 시작했다고 말은 해도, 그것이 꼭 마태님의 책읽기를 규정하는 건 아닐테죠. 다만 본인이 의식하면 글을 읽기 시작했던 시점이 30 이후란 뜻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흐흐. 제가 구태여 작가 이름의 언급을 회피하는 까닭은 알라딘 서재에 와서 들여다볼지도 모를 그들을 의식해서라기 보다는 그냥 이때의 사례에서 작가명은 중요치 않기 때문이겠죠.

가을산 2004-09-15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좋아.... ^^

하얀마녀 2004-09-15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당분간은 서재 주인장들 추천도서만으로도 충분할 듯합니다. ^^

물만두 2004-09-15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알라딘의 원흉(?)... 글을 못 쓰게 만들고 읽기 바쁘게 만드는 나쁜 사람(?) 그래서 키쮸를 또 하고 싶다는...

바람구두 2004-09-1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흑흑... 키쭈라니.... 울 마눌이 알면 전 죽심더.

물만두 2004-09-15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상의 누님의 귀여움을 받고 있다고 하시라니까요. 옆지기님께도 키쮸를 보냅니다. 나눠 가지세요...

마냐 2004-09-15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