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쯤 전 사용하던 노트북 하드디스크가 날아가버리는 사태가 있었다. 그간 써왔던 글들, 글쓰기를 위해 정리해둔 자료들이 일순간 사라져버렸다. 한동안 나는 글을 쓸 수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알아보니 다행히 하드디스크 자료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다.
그러나 수 기가(G)에 달하는 문서 파일은 물론 이미지 파일들, 음원 파일 등은 원래 파일명이 아니라 그저 넘버로만 되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결국 데이타 복구를 포기해 버렸다.
요즘 나는 그런 기분이다.
벽 앞에 옹크리고 앉아있는 아이가 된 기분이다. 문 앞에 옹크리고 있는 기분이라면 그나마 문이라도 열어줄 가망이 있겠지만 내 앞에 세상은 온통 벽 같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작년부터 동양 고전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은 그럭저럭 넘길 수가 있었는데 논어 공부는 쉽지 않았다. 내 멘토격인 우리 재단의 이사장님은 그렇게 보지 말고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훌렁훌렁 넘겨서 몇 번이고 다시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충고했지만 성격상의 문제도 있고, 논어를 마치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싶은 욕심이 앞선 나머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내 책상머리엔 '관자'부터 시작해 '묵자' 등을 비롯해 논어 관련해 함께 읽고 있는 책들이 너댓권씩 펼쳐져 있다.
언젠가 아는 분이 당신은 학자가 되기엔 마음이 너무 여리고, 예술가가 되기엔 너무 논리적이란 지적을 해서 웃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87년 이후 오랫동안 냉소하던 내가 바깥으로 나온 건 10년이 지난 97년 무렵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경과하면서 내 마음은 더이상 쓸어담을 수 없으리만치 상처투성이다. 세상에 절망하면서도 세상에 대해 희망을 거는 일이 글쓰기라고 말해왔고, 희망도, 절망도 없이 의지로 전진하라고 이야기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점점더 가망이 없어진다.
가망 없다는, 부질 없다는 것조차 넘어서보자며 '유리병편지'를 써 왔는데 이제 그마저도 힘에 부쳐 그만둔지 오래다. 대화나 소통이 아니라 점점 더 혼잣말을 하고 있다거나 허공에 대고 부질없는 주먹질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점점 더 높은 산을 찾아 오르게 된다. 남들은 이웃과 함께 산에 가고,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 함께 즐기지만 나는 사람에 부대끼고, 사람에 지쳐 달아나고 있다.
그만하면 많이 쉬었다고 생각하는데 내 마음은 아직도 내려올 줄을 모른다. 그렇게 많이 다치고, 그렇게 많이 상했던 것일까? 가능만 하다면 내 머리도 하얗게 포맷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