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둠 속의 남자 - 개정판 ㅣ 폴 오스터 환상과 어둠 컬렉션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북다 / 2025년 9월
평점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어둠 속의 남자>는 폴 오스터가 '상실 이후'를 그려낸 소설입니다. <환상의 책>과 묶어서 디자인 및 번역이 새로 되어 나왔던데, 읽어보니 왜 그런지 알겠더라고요. 두 소설 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든요. 극복하기 위해 현실이 아닌 무언가, 나에게 가족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도 비슷하고, 비극 안에서 조그마한 희망이 남겨져 있는 듯한 결말도 비슷해요. 다른 점이 있다면 <어둠 속의 남자>는 확실한 판타지라서 더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거예요.
이야기는 2가지 축으로 진행되는데, 하나는 할아버지-딸-손녀가 함께 사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할아버지가 머릿 속으로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입니다. 할아버지-딸-손녀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각각 사별/이혼/전쟁으로 인한 죽음으로 잃었고, 각자 조용히 그 슬픔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할아버지는 작가로서, 자기가 늘 잘 하는대로, 방 안에 틀어박혀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아내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되, 그러나 누군가 내 자신을 죽이러 오는 이야기. 이건 어떻게 보면 아주 허무맹랑하고 천천히 진행되는 자살이에요.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겠지만 누군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죽여야 하는 세계를 자기 상상 속에서나마 만들어내는 거죠.
만약 혼자만 상실에 빠졌다면 그는 결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사랑하는 손녀 역시 상실의 구덩이에서 서서히 가라앉고 있기 때문에, 결코 자기 잘못이 아닌 일들을 끊임없이 곱씹으면서 자신을 탓하고 있기 때문에,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자기 자신을 구해야만 합니다. 나 자신을 죽이는 결말을 만든다는 건, 손녀가 스스로를 죽이는 결말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래서 2개의 축으로 나누어졌던 세계는 중후반부에 하나로 봉합됩니다. 사실 세계가 하나로 봉합되는 방식이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달라서 당황스러웠어요. 저는 환상이 현실과 훨씬 더 혼란스럽게 뒤섞일 거라고 예상했었거든요. 하지만 그 이후에 보여주는 다정함이 좋아서, 전반적으로는 꽤 마음에 들어요.
방에서 나갈 수가 없었던 혹은 나가기 싫었던 시기가 있었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입니다. 아직 그런 적이 없으시다면? 축하합니다! 괴상한 인생의 주사위 게임에서 이기고 계시네요. 하지만 혹시 언젠가 지는 순간이 오신다면, 한 번쯤 <어둠 속의 남자>를 떠올려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