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미니즘, 한계에서 시작하다
우에노 지즈코.스즈키 스즈미 지음, 조승미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3월
평점 :
한국과 일본은 닮은 듯 다르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일본과 한국의 여혐은 어떤 순간에는 구분하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이다가 조금만 자세히 들어가보면 또 다른 모습을 띄어요. 그런 점에서 동시대 일본 페미니스트 두 분 사이에 오가는, 페미니즘 이슈를 담은 편지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건 무척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 와, 이런 점은 한국이랑 똑같네!' 하다가도 '그런데 왜 이런 점은 완전히 다르지?' 싶은 지점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요즘 일본-한국의 페미니즘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이야기도 종종 나오는데, 그 부분도 재밌었어요!
이 책을 함께 완성한 우에노 지즈코와 스즈키 스즈미 두 저자의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이나 행보가 워낙 차이가 컸는데, 여러 책을 통해 만나봤던 우에노 지즈코보다는 AV배우였다 신문사 기자를 거쳐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스즈키 스즈미에 더 눈이 갔습니다. 저는 '아무런 강제력이 없는데도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하는/했던 페미니스트'라는 게 과연 성립이 될 수 있기는 한 건지, 도대체 어떤 동력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12번이나 발송되는 편지를 읽다 보니, 그전보다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결국은 반항심과 호승심, 승인 욕구,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약간의 가학심이 섞여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와 세상이 반대하는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요.
두 사람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논의를 발전시키는 지점이 좋았어요. 한국의 경우, 일본과 또 다르기 때문에 3가지의 시점을 동시에 맛보는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한국은 2018년 미투운동 이후로 2~30대 여성 사이에서 확연하게 페미니즘적인 가치관이 자리잡았다고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어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결혼이 디폴트가 아니라 옵션이 되었다고 보여요. 그러니까 이전에는 결혼을 하는 게 전제로 깔려 있었다면, 지금은 하지 않는 게 전제로 깔려 있고 뭔가 특수한 상황일 때 결혼이 성립되는 걸로 변화한한 거죠. 여기에 임신과 출산과 육아는 결혼과 별개의 옵션이고요. 그런데 일본은 아직까지는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임출육을 디폴트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듯 하더라고요.
스즈키 스즈미 같은 경우는 성매매를 하면서 남성의 바닥을 봤기 때문인지 정말로 남성에 대한 믿음이 0에 수렴하는 발언을 종종 하는데, 그런 태도가 '남성이 무책임하게 도망치기 쉬운 구조를 열어준다'고 지적받는 등 예상치 못했던 각도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예를 들어 (어차피 아이를 책임지지 않고 도망가는 남자는 아무리 말해도 없어지지 않으니) 여자 혼자서도 임출육을 할 수 있도록 미혼모 지원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가면, 배드 파더 입장에서는 더 먹튀하기 좋은 환경이 된다는 것도 함께 인식하고 그 해결책도 같이 도모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식으로 제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제도의 반동이 튀어나오는 지점을 미리 예상해보는 건 꽤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제도가 아마 비슷한 반동을 겪을 텐데, 그 반동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줄이느냐가 결국 법과 제도의 성패를 가른다고 싶거든요.
개인적인 이야기도 잔뜩 들어있지만, 모든 여성의 삶에는 페미니즘적으로 읽어낼 수밖에 없는 무수한 시간과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제가 겪어온 것과는 다르지만, 다른 여성이 살아온 개인적인 경험에서 이미 저도 수천번 봐 왔던 익숙한 상황을 뽑아내고,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재명명하는 건 언제나 의미있는 일입니다. 두 저자가 언급한 여러 책들이 많은데, 찬찬히 한 권 한 권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저도 내공이 더 쌓여서, 누군가와 이런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