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벤허 (1900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그리스도 이야기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 월리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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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허> 저 이 작품을 뮤지컬로 처음 접했는데, 알고 보니까 5번이나 영화화되었더라고요. 1959년의 영화 전차씬이 워낙 유명해서 <벤허> 하면 대부분 그 영화를 떠올리신다고 해요. 나중에 한꺼번에 영화를 몰아봤는데, 확실히 영화에서는 소설에서 그저 상상해볼 수밖에 없는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 훨씬 더 박진감 넘치는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소설과 중점을 둔 부분도 달라서 훨씬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영화에서 '복수'의 카타르시스 덕분에 슬며시 가려져 있던 카톨릭적 메시지가 훨씬 도드라지거든요. 

 

 저는 불교-카톨릭-무교 라인을 탄 케이스라서, 신앙심은 쥐똥만큼도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당대의 시대상 묘사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이리저리 얽혀있어서 종교와 상관없이 꽤 재밌게 읽었어요. 다만 워낙에 카톨릭적 색채가 진하기 때문에 성당/교회에 반감을 가지신 분들이 보시면 불쾌하실 수도 있습니다. 대놓고 '야 하느님은 있고 예수는 그리스도고 믿는 우리는 구원받을 거고 그러니까 안 믿는 너네는 멍청해!' 하고 외치는 소설이거든요ㅋㅋㅋ 뭐, 처음부터 작가가 자기 종교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답하고자  만들었다고 하니까요.


 제가 소설을 읽다가 가장 놀란 부분은 메살라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영화나 뮤지컬에서 보면, 메살라는 그래도 벤허와 우정을 나누고 함께하는 시기가 꽤 있잖아요. 벤허를 배신하는 것도 (아무리 터무니없어 보인다고 해도) 차별을 받았다는 둥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고요. 그런데 소설에서의 메살라는 진짜 완전 양심도 없고 우정도 없고 그냥 나쁜 놈이에요;;; 로마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기나 하면서 유대인 완전 깔아뭉개는 언변 심해서 유다가 의절할 정도예요. 그리고.. 벤허 가문이 몰락하는 게 로마 총독 머리 위로 기왓장 떨어뜨려서 그런 거잖아요? 근데 처음에 사람들이 누가 떨어뜨렸는지 모른단 말이에요? 그걸 메셀라가 벤허가 그랬다면서 손가락으로 콕 집어 가리킵니다;;; 이후에 벤허 가문 재산 뺏어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양심의 가책 따위 하나도 없어요. 벤허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 아예 글러먹었다는 게 곳곳에 드러납니다. 특히 제가 정 떨어진 건 자기 앞에 사람들이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그 사람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이 그냥 말로 밟아서 지나가려고 한 장면이었어요. 벤허가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여인과 노인은 죽었을텐데, 벤허 덕분에 상황이 수습되자 뻔뻔하게도 사람을 못 봤다면서 눙치고 지나가려고 합니다. 어찌나 건들거리는지! 으으 너무 싫어요!


 "멈춰! 앞을 보라고! 뒤로, 뒤로!"

 로마 귀족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댔다. 벤허는 낙타 일행을 구할 길은 한 가지뿐임을 알았다. 그가 전차 앞으로 왼쪽 멍에마와 견인마를 붙잡았다. 

 "개 같은 로마 놈! 사람 목숨이 그렇게 우스워?" 

 (...)

 로마인 메셀라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였다. 몸에서 고삐줄을 풀어 한쪽으로 던지고, 전차에서 내리더니 낙타 앞으로 걸어왔다. 그는 벤허를 쳐다본 후, 노인과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를 구합니다. 두 분 모두에게. 난 메살라라고 합니다. 대지의 어머니에게 맹세컨대 두 분이나 낙타를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솜씨를 과신했나 봅니다. 여기 이 선량한 구경꾼들을 좀 놀려줄까 했는데 도리어 놀림을 당했네요. 어쨌든 저들에게도 다행이지요!" - p.310

 그런데 주인공인 벤허를 좋아하기에도.. 개인적으로 좀 불편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이게 1880년 작이라 그런지 곳곳에 좀 고루한 표현들이나 여혐적인 내용이 있거든요. 본인이 하면 OK인데 상대가 하면 욕하는 그런 부분도 있구요. 예를 들면 벤허 본인은 아름답고 화려한 이집트 아가씨 이라스에게 푹 빠져서 조용하고 다정한 유대인 소녀 에스더를 완전 등한시하는데, 읽다 보면 양다리 느낌이 팍팍 온단 말이에요? 물론 두 여자 다에게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썸 비스무리한 걸 양쪽으로 자기 혼자 막 타고 난리부르스인데, 후반부에 이라스가 사실은 메셀라를 사랑하고 자기는 그냥 야망을 위한 떡밥 정도 취급하는 걸 알자마자 '아..!! 사실 나는 이라스를 사랑한 게 아니야 나는 에스더를 사랑해..!!' 이렇게 태세전환하는데, 완전 꼴사나워요. 방금 전까지 에스더에 대해서 완전히 싹 잊고 있었으면서.. 이라스가 그렇게 냉담하게 안 쳐냈으면 에스더가 상처받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거면서.. 그리고 벤허 본인이 그러는 건 괜찮고 이라스가 야망에 불타오르고, 두 상대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건 천하의 몹쓸 년으로 만들어버리는 묘사도 엄청 거슬렸어요. 작가 남자 아니랄까봐ㅋㅋㅋ 시대상 여자는 남자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설정이라 모든 여자의 소망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남자를 향해 있는데, 아마 지금 시대에 썼으면 이라스는 훨씬 더 자기 목소리와 입장을 가진 여성으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금은 유대인만이 선하고 옳은 세계관에 맞춰지느라 좀 희생된 감이 있습니다.


 영화로 유명한 전차씬이나 후반부의 예수와의 만남보다도 오히려 초중반부에서 보여지는 유다 벤허의 다사다난한 인생 고난과 복수에의 여정이 더 재밌습니다. 아마 제가 그다지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어서 그렇겠지요. 그리고 사실 저는 벤허만큼 고생 끝에 모든 부와, 명예와, 사랑과, 가족과, 건강을 부여받은 사람이 신에게 자신을 헌사하는 건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 아닌가 하거든요. 만약 예수가 벤허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나병을 고쳐주지 않았다면? 벤허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면? 그랬어도 믿음을 잃지 않았을까요? 종교인이라면 신이 그러지 않도록 예비하신 거라고 하겠지만, 저는 그들만큼 신앙이 깊지 않아서 그런 의심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ㅎㅎ


 전체적으로 유대인 중심주의가 좀 있긴 한데, 그래도 여러 가지 문화와 민족을 다채롭게 등장시켜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더스토리 초판본 디자인이 끝내주게 예뻐요! 실제로 보면 벽돌책 색감도 고급스러워 소장용으로 딱입니다. 카톨릭에서 가끔 교육 서적으로 쓰일 정도로 종교적인 색채가 짙으니, 그 부분만 주의하시면 괜찮은 시대물로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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