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 - 살아가는 동안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
루프레히트 슈미트.되르테 쉬퍼 지음, 유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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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요리사와 그가 만난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먹는다는 게 삶의 증거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열심히 땀 흘리고 난 후에 배고픔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침이 고이고,
눈앞에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맛을 보는 것.
이렇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식욕을 채울 만큼 양껏 먹을 수 있는 것.
이 모든 게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 프롤로그 中

 

 

 어릴 때 우리집에는 카스테라 굽는 기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오븐이 아니란 말씀이다. 오븐도 아닌 것이 밥통도 아닌 것이 전기 후라이팬도 아닌 것이.... 그러니까 진짜 카스테라만 굽는 기구가 있었다. 생김새는 명절날 흔히 보는 전기 후라이팬처럼 생겼는데 형태가 동그랗지 않고 네모 반듯하게 생겼다. 한쪽에 온도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고 전원을 켜면 팬처럼 생긴 틀이 은근하게 데워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얇은 전용 종이를 깐 다음 걸쭉한 반죽을 흘려넣고 뚜껑을 덮으면 쨘, 하고 카스테라가 만들어졌다. 아마도 배를 타고 해외를 다녔던 외삼촌이 일본인지 미국인지에서 사왔던 것 같은데 엄마는 항상 그 틀에 카스테라를 만들어 우리 5형제의 간식으로 내놓곤 했다. 

빵이 다 되면 뚜껑을 열어 쟁반에 내려놓고 종이를 뜯었다. 그러면 달큰한 카스테라 향기와 살짝 탄듯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정말 믿을 수 없이 고소한 향이 났는데 그 냄새가 방안 가득 퍼지면 5형제가 모두 큰방으로 모여 보들보들한 카스테라를 나눠먹었다. 그 냄새. 그 카스테라 냄새는 내게 엄마 냄새와도 같았다. 카스테라 반죽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릇을 뒤집어도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 풍성한 계란 거품이 필요했다. 그래서 언제나 엄마의 제빵 단계에는 우리들의 고사리손 다섯쌍이 필요했다. 서로 계란 거품을 내겠다고 거품기를 집어들었다가, 단단하고 풍성한 거품을 내려면 엄청나게 오래 저어야 했기 때문에 팔이 저려 하나둘 떨어져나가면 마지막에 엄마가 짠, 하고 멋진 거품을 만들어 우리 눈앞에 내려놓았는데, 그러면 우리들은 부끄러운 고사리손을 뒤로 감추고 우와-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주로 밀가루로 만든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엄마 특제 도넛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밀가루와 설탕, 우유, 계란만 있으면 반죽이 완성됐고, 반죽을 살살 밀어 동그란 도넛 모양 틀로 찍어낸 다음 달군 기름에 넣어 튀기면 크리스피크림도넛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마표 특제 도넛이 완성됐다. 한창 달달한 것을 좋아할 때라서 가끔 설탕에 비벼주기도 했다. 엄마는 같은 반죽으로 꽈배기 같은 것을 내놓기도 했는데, 같은 반죽이라도 모양만 다르면 모두 다른 빵처럼 느껴져서 여러 종류를 먹으면 더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나중에 초등학생이 되서는 오빠랑 그 도넛을 직접 만들겠다고 기름을 달구다가 집을 홀랑 태워먹을 뻔 하기도 했다.

누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그때 우리 5형제의 고사리손으로 거품을 낸 카스테라와 동그란 도넛 틀로 찍어 튀겨낸 엄마표 도넛을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다. 아니, 더 정확히 그 시절의 엄마와 개미처럼 작았던 5형제의 우애와 방안에 가득찬 따뜻한 빵 냄새를 다시 되새기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절대 그 시절과 같은 추억을 맛보지는 못하겠지만, 고급 호텔 제과점에서 내놓은 카스테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난하지만 화목했던 가족애가 충만했던 그때 그 빵을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을 것 같다.

최고급 레스토랑의 인정받는 수석 요리사에서 호스피스의 요리사로 거듭난 루프레히트 슈미트는 바로 그런 추억과 인생을 죽기 전에 맛본다는 것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의 주인공이면서 삶의 마지막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 줄 아는 이 요리사는 환자들이 공들여 만든 음식을 한 숟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해내도 그들이 그 음식을 대하는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곳 손님들은 점심 식사를 하며 사업을 논하거나, 저녁 식사를 하며 훗날 결혼식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의 손님들은 미래를 계획할 시간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었고, 삶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이들에게 미식가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 루프레히트의 임무다.

- 누구에게나 가슴 먹먹한 음식이 있다 中
 

지난 삶에서 음식을 나누며 만들어왔던 작은 시절들. 그 시절의 기억을 작고 소박한 음식을 통해 추억하고 싶어하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음식과 가장 가까운 요리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요리사의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준다.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음식에서 느끼는 포근함, 우리 엄마만 할 수 있었던 요리로 대변되는 모성, 가난한 시절의 작은 빵 한조각의 주었던 커다란 행복감... 이 모든 것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되새기고 싶은 소중한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주체는 요리사지만 수많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환자들의 생의 조각을 조금씩 모아보면,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애틋한 시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따뜻한 시절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자신을 세차게 몰아치는 사람들에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아가는 동안 진짜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떠올리라고 조근조근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믿어지는가. (-) 그들에게 내일을 꿈꾸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만, 못다 한 일에 대한 후회,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에 허우적대는 것도 하지 않는다. 이 시간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지난날을 다시 맛보는 일이다.

- 그렇게 마지막 식사는 차려졌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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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배케이션
김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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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마법이 필요했다."

표지의 이 문구를 보고 주저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내게 이 말 자체가 마법같은 주술이었다. 늘 현실을 벗어나고싶다는 생각만 가득찼을 뿐, 왜 떠나려고 하는지, 벗어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유를 붙일 수가 없었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 하나의 문장이 나의 오묘한 내면을 쓰다듬어주었다.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이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공직자들에게 3년에 한번 꼴로 한 달 남짓의 유급 독서휴가를 주었던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조선의 세종 임금이 젊은 선비들에게 긴 휴가를 주어 집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게 했다는 사가독서와도 의미가 통한다.


아 이게 무슨 꿈같은 소리란 말인가. 3년에 한번 한 달 동안 '유급 독서휴가'라니! 요즘 마음이 횡횡하고 숭숭해서 그런지 남의 경험에 핥핥거리며 대리만족하는 데 집착하고 있다. 여성들의 판타지를 한껏 충족시키는 직업인 패션지 에디터로서 수년간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핥핥하기에 충분한데, 거기다가 1년 동안의 믿을 수 없는 장기휴가라니. 또한 그 휴가를 책 읽는 독서휴가로 알차게 쓰고 돌아왔다니. 털.썩.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은 빅토리아 시대의 공직자들마냥 꿈같은 독서휴가를 보내고 온 <하퍼스 바자>의 에디터 김경의 은밀하고 희열에 찬 도주의 기록이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로부터 출발한 여행은 몰타를 시작으로 파리, 바르셀로나, 리스본, 로마, 취리히, 부다페스트로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를 마르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같은 책들로 채워나갔다.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여름휴가를 독서휴가로 용도 변경하는 거다. 생각해보면 아쉬울 것도 없다. 피서, 그러니까 더위를 피해 자리를 옮긴답시고 산과 강을 찾아가는 길은 얼마나 지루하고 고생스러운가?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해봤자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인파 속에서 달리 할 일도 없다. 그 와중에 끔찍한 도로 정체에 시달려야 하고, 성수기 바가지 요금에 분개해야 하고, 소변을 보기 위해 수영복을 입은 불편한 차림으로 30분씩 줄을 서야 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또 어떤가? 내야 할 돈이 전 달보다 두 배쯤 많아진 신용카드 고지서와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업무가 나에게 결재와 야근을 종용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여름휴가 때 내 집에 앉아 기꺼이 토플리스 차림이 된다.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해 겨드랑이 털을 밀 필요가 없고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렇게 내 몸을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해방시킨 후 내 몸에 이미 익숙해진 독서용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이름하여 셰익스피어 배케이션(독서휴가).

- 두드리면 열리나니, 당신도 책과 함께 떠나시라! 中


 

생각 같아서는 샌프란시스코 신혼여행도 마음껏 거리를 누비며 커피도 마시고 맥주도 들이키며 한가로이 노천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카스트로 언덕의 끄트머리에 앉아 석양이나 바라보다가 피어39에서 징그럽게 모여있는 바다표범을 구경하며 게 다리나 쭉쭉 뜯고 또 맥쥬 한사발 들이키며 보냈으면 좋겠지만, 아... 동반자가 있는 무려 신혼여행이니 참자. 그래도 샌프란시스코 어딘가에서 에릭 메이슬의 <보헤미안의 샌프란시스코>를 꼭 읽어봐야지.

독서와 몽상, 게으른 여행에 대한 로망.  

여기 로망 하나 추가요.  



김경 기자의 쫀쫀한 필력에 반해 칼럼집 <뷰티풀 몬스터>도 샀다.
주로 화장실에 놓여 있는데 변기 접선 1회당 1편씩 야금야금 읽고 있다.
최고의 독서 장소는 뭐니뭐니해도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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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카프카의 고백 - KAFKA's Dialogue
카프카 글, 이우일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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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짜르가 다쳐 새벽에 급히 응급진료를 하는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인형 물어오기를 좋아하는 짜르에게 평소처럼 인형을 던져줬는데, 그걸 물어오겠다고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발톱이 빠져버린 거다. 아프지도 않았는지 태연하게 이불 위를 걸어다니는데 이불에 찍힌 핏방울을 보고 까무러칠 뻔 했다. 10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도, 다친 적도, 설사를 한 적도 없었던 녀석이라서 피를 보자마자 나는 응급환자라도 보는 것마냥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택시를 잡아 탔다. 
 

워낙 겁이 많은 놈이라서 병원 문만 들어서면 기겁을 하는데 그날따라 너무나 의젓하다. 낑낑거리지도 않고 드레싱도 잘 받고, 약도 잘 먹고, 주사도 잘 맞고, 심지어 핥지 못하게 씌워주는 고깔도 아랑곳 않고 씩씩하게 잘도 걸어다니네.

카메라를 노려보는 짜르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게 사람이야 개야 싶다. 저 늠름한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지 않나. 동물과 오래 살다보면 진심으로 녀석이 가족으로 느껴진다. 진짜 사람 가족 말이다. 어떤 날은 짜르를 앉혀놓고 그날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말하기도 하고, 우울한 날에는 금새 알아채고 내게 달려와 유난히 애교를 부린다. 진짜 내 속을 다 꿰뚫고 있는 느낌이랄까. 

일러스트레이터 이우일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나는 ~한 고양이입니다"라는 문장으로 고양이 입장에서 바라본 자기 가족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까칠한 고양이 카프카는 철이 덜 든 가장 이우일을 보며 씨니컬 멘트를 날리기도 하고, 아내 선현경을 보고 저것은 필시 "말단!"을 외치기도 하고, 담배 피우는(피웠던) 두 부부에게 감시의 눈길을 날리곤 한다. 

언제나 무심한 듯 시크한, 시큰둥하면서도 뒷주머니에 애교를 숨겨놓는, 인디펜던트하고 무심한 고양이 특유의 모습은 "까칠하다"는 말로 단번에 정의된다. <고양이 카프카의 고백>은 동물에게 영혼을 간파당한 작가가 이 녀석들에게 이 한심한(?)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신의 일상을 고양이 눈으로 객관화해놓은 책이다. 동물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유쾌하고 적나라한 일상들. 이우일 특유의 허접성 유머가 가득한 카툰 컷과 "쯧쯧, 내가 저런 걸 주인이랍시고. 흐휴." 하고 한숨 잔뜩 쉬고 있을 것만 같은 카프카의 화법이 누구나 호탕하게 웃어제낄 수 있는 낯설고도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저는 그들이 진심으로 저를 사랑해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디선가 행복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건 틀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었어요.

그 모녀의 또 다른 가족인 이우일 씨에게요. (…)

뭐랄까, 좋게 말하면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아주 부조리한 짐승 같다고나 할까요. (…)

아주 고양이를 피곤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인간이지요.

뭐가 그렇게 피곤하냐고요? 흠, 아시게 될 겁니다.

앞으로 아주 '야옹'한 인간의 '야옹'한 실체를 보시게 될 테니까요.

201년 5월 25일 카프카 씀.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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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푸어 -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
김재영 지음 / 더팩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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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 우리는 비싼 집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되지 말자."
"응!"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면서 우리가 서로 합의한 인생관 중 하나는 '하우스 푸어'가 되지 말자는 것이었다. 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면 인생의 목표가 '조금 더 큰집으로 넓혀가는 것' 또는 '내 집을 갖는 것'이 되고 마는 걸까. 그것이 한 가정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와 애인은 '집을 소유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행복을 보장하는 전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2년에 한번씩 그 징글징글한 이사를 수없이 다녀봐야 집 없는 설움을 알 거라는 둥, 자식들한테 물려줄 것은 부동산밖에 없다는 둥, 월급만 모아서는 집값이 올라서 생기는 차익만큼의 돈은 꿈도 못 꾼다는 둥 '겁'을 주곤 했지만 애초에 나는 인생의 목표가 '부'나 '자식새끼에게 물려줄 재산 증식' 따위가 아니었으니 상관 없다.

2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닌다면 물론 불편하겠지만 그건 그저 '불편할 뿐'이다. 죽기 전에 자식에게 뭐 대단한 유산을 물려줄 생각은 없으므로 그것도 해당 사항 없다. 월급 착실히 모아서 집 살 돈이 생긴다면 살 수도 있겠지만, 무리해서 융자를 끼고 집을 사놓고 집값이 오르기를 고대하며 전전긍긍하다가 집값이 떨어져서 절망하거나 대출 이자에 짓눌리며 마이너스 인생을 살 생각도 없다. 인생의 목표가 '돈'이나 '부'가 되는 불행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리하여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인생의 절반을 허비하고, 너무 많이 가져서 그것을 잃을까봐 조마조마하며 나머지 인생의 절반을 허비하는 생을 살고 싶지는 앖다.

딱, 그 생각만 버리면 될 텐데. 딱 그 생각만 버리면 수억의 빚을 지고 무리해서 집을 사고, 재개발에 따른 시세차익을 노리며 한 달에 수백 만원의 이자를 내면서 허송세월을 하다가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거래가 줄어들면서 집값이 떨어지고 손해를 보면서 그제서야 집을 팔고 싶어도 사겠다는 사람도 없고, 가격은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고, 한달에 수백씩 이자는 줄줄이 빠져나가서 당장 먹고 살 돈도 없어지는, 그런 피폐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을 텐데.내가 어디에 사는 게 나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면, 허리가 휘어가면서 굳이 강남의 부촌에 집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좌절하지는 않을 텐데.

<하우스 푸어>를 읽으면서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생의 명제를 바꾸면 미친듯이 증식하는 대한민국 하우스 푸어의 양산을 막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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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논증법 -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4가지 실전 논리
최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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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좀 해볼까? 하고 시계를 보면 5시다. 이쯤되면 야근은 당연지사. 야식은 뭘 시켜먹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중국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짜장면과 기타등등이 사무실로 도착하면 법인카드를 긁고 음식을 풀어놓고 짭짭 먹으면 된다. 문제는 내가 깜빡하고 카드로 계산한다는 얘길 빠트렸다는 거다. 배달원은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며 그야말로 "개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현금으로 결제했을 시 비용 처리 문제를 고민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배달원은 니네가 말 안 해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냐며 또 "개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너한테 지랄하는 게 아니라 우리끼리 고민 중이니 릴렉스, 하고 진정을 시켜놓고 그릇을 찾으러 올 때 단말기를 가져와 결제를 하면 안 되냐고 했더니 배달원은 "왜 사람을 두 번 걸음 시키냐"며 또 "개짜증"을 냈다. 결국 암쏘쏘리x100을 외치며 이따 퇴근길에 들러 결제하고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배달원을 돌려보냈다. 

근데! 어째서 그릇 찾으러 올 때 결제하는 것이 두 번 걸음이지? 그릇은 어차피 찾으러 와야하잖아! 아니, 이 쟈식이!!! 하고 돌아봤으나 배달원은 이미 안녕안녕. 그때부터 급울분이 솟기 시작했다. 젠장! 아까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릇 찾으러 올 때 결제하는 게 왜 두 번 걸음이냐고!!  

왜 돌아서고 나면 할 말이 생각나는 걸까. 이 사건은 물론 갑론을박의 논쟁은 아니었지만 왠지 멍청하게 당한 것만 같아서 급억울해졌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난다. 누군가와 싸우고 돌아서면 에잇 그 얘길 했으면 그놈 말문이 막혔을 텐데! 찍소리 못하고 누군가의 개짜증을 감수해내고 나면 에잇 이게 이렇게 된 거라고 얘기했어야 했는데!

<변호사 논증법>은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논쟁에서 이기라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실전 논리를 변호사들의 논리적 전략에서 찾아내는 책이다. 미쿡 법정 드라마를 보면 피터지는 말발로 서로의 논리를 반박하고 반박하고 반박하는 멋있는 변호사들이 잔뜩 등장하는데, 그걸 볼 때마다 입을 아- 아- 벌리고 어떻게 저런 틈새를 파고들지? 하고 감탄하곤 한다. (특히 <보스턴 리갈> 강추합니다 여러분 핫핫) 누군가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변호사들은 배심원 또는 재판관을 설득하기 위해 다양한 논리적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변호사들의 기술을 나의 일상으로 가져온다면 어떨까?

'논리적인 언변' 또는 '논리적인 필력'은 여기저기 써먹을 데가 많다. 기업의 입사시험이나 그룹면접에도, 대학의 면접장에서도, 논술 시험을 치뤄야 할 때도, 마누라에게 용돈을 올려달라고 할 때도, 상사에게 자신의 기획을 결재받을 때도 탄탄하고 단단한 자기만의 논리를 갖추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변호사 논증법>은 현실 세계에서 활용 가능한 비법을 딱 4가지로 정리해서 알려준다는 게 매력적이다.

 
논리학이라는 게 수학 공식처럼 딱딱 떨어지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맥락 속에서 발휘되기 때문에 사실 어떤 비법을 전수받는다고 해도 그게 실전에서 제대로 작용된다는 것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논증의 원칙을 모른다면 결국 또다시 돌아서고 나서야 이기는 방법이 생각나서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다. 저자는 "법을 모르는 어수룩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속거나 그 사람을 따라서 불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논증의 원칙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올바르지 않은 논증에도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논증의 원칙을 익히는 것은 본인이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의 논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논증의 기본은 상대의 주장과 논리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그 논리의 헛점을 꿰뚫는 데 있는 것이니 상대의 전술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기본 오브 기본.   


논증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상대를 이기고자 하는 '대화의 스포츠'다. 분명한 룰이 있고, 페어플레이를 해야 하고,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그래서 논증은 아주 세련된 대화의 기술인 동시에 누구라도 참여하면 거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절대 게임이다. 이것이 바로 논증의 힘이다. 


 대화의 스포츠라니, 뭐 이렇게 멋있는 말이 다 있나. 어려울 거 없다. 스포츠의 룰을 생각하고 페어플레이 하면 되는 거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우리가 진짜 변호사에게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자비심'이라고 주장하는 점이다. 싸움에서 헛발질을 하지 않으려면 상대를 합리적인 사람으로 인정하고 그 사람의 주장을 가능한 한 가장 좋은 논증이 되도록 해석해야 한다는 것. 상대의 주장을 왜곡해 해석하면 엉뚱한 주장에 대한 반박을 하게 되므로 낸둥 헛발질만 할 수밖에. 

성경의 내용을 패러디해서 이 자비심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폭소가 터진다.  


너희가 만일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의 주장만 받아들인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비논리적인 사람들도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의 주장은 받아들인다. 그러나 너희는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 근거를 생각해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논리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논리복음 1장 1절| 


 상대방의 주장에 자비를 베풀어 최대한 합리적인 주장으로 해석하라. 이것이 변호사 논증법의 첫번째 원칙인 자비로운 해석의 원칙. 개인적으로 이게 제일 마음에 든다. 무엇이든 기본 자세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나머지 3가지 원칙은 근거 제시, 입증의 책임, 논점 이탈 금지의 원칙인데 언뜻 보면 다 아는 내용이잖아! 할 수도 있지만 이걸 실전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를 조목조목 짚어주기 때문에 읽어갈수록 눈이 휘둥휘둥해진다. 

목차를 보면 이 책의 각이 대충 나온다. 솔직히 목차 보고 빵 터졌다. 아, 재치까지 있는 분이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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