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배케이션
김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마법이 필요했다."

표지의 이 문구를 보고 주저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내게 이 말 자체가 마법같은 주술이었다. 늘 현실을 벗어나고싶다는 생각만 가득찼을 뿐, 왜 떠나려고 하는지, 벗어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유를 붙일 수가 없었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 하나의 문장이 나의 오묘한 내면을 쓰다듬어주었다.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이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공직자들에게 3년에 한번 꼴로 한 달 남짓의 유급 독서휴가를 주었던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조선의 세종 임금이 젊은 선비들에게 긴 휴가를 주어 집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게 했다는 사가독서와도 의미가 통한다.


아 이게 무슨 꿈같은 소리란 말인가. 3년에 한번 한 달 동안 '유급 독서휴가'라니! 요즘 마음이 횡횡하고 숭숭해서 그런지 남의 경험에 핥핥거리며 대리만족하는 데 집착하고 있다. 여성들의 판타지를 한껏 충족시키는 직업인 패션지 에디터로서 수년간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핥핥하기에 충분한데, 거기다가 1년 동안의 믿을 수 없는 장기휴가라니. 또한 그 휴가를 책 읽는 독서휴가로 알차게 쓰고 돌아왔다니. 털.썩.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은 빅토리아 시대의 공직자들마냥 꿈같은 독서휴가를 보내고 온 <하퍼스 바자>의 에디터 김경의 은밀하고 희열에 찬 도주의 기록이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로부터 출발한 여행은 몰타를 시작으로 파리, 바르셀로나, 리스본, 로마, 취리히, 부다페스트로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를 마르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같은 책들로 채워나갔다.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여름휴가를 독서휴가로 용도 변경하는 거다. 생각해보면 아쉬울 것도 없다. 피서, 그러니까 더위를 피해 자리를 옮긴답시고 산과 강을 찾아가는 길은 얼마나 지루하고 고생스러운가?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해봤자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인파 속에서 달리 할 일도 없다. 그 와중에 끔찍한 도로 정체에 시달려야 하고, 성수기 바가지 요금에 분개해야 하고, 소변을 보기 위해 수영복을 입은 불편한 차림으로 30분씩 줄을 서야 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또 어떤가? 내야 할 돈이 전 달보다 두 배쯤 많아진 신용카드 고지서와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업무가 나에게 결재와 야근을 종용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여름휴가 때 내 집에 앉아 기꺼이 토플리스 차림이 된다.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해 겨드랑이 털을 밀 필요가 없고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렇게 내 몸을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해방시킨 후 내 몸에 이미 익숙해진 독서용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이름하여 셰익스피어 배케이션(독서휴가).

- 두드리면 열리나니, 당신도 책과 함께 떠나시라! 中


 

생각 같아서는 샌프란시스코 신혼여행도 마음껏 거리를 누비며 커피도 마시고 맥주도 들이키며 한가로이 노천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카스트로 언덕의 끄트머리에 앉아 석양이나 바라보다가 피어39에서 징그럽게 모여있는 바다표범을 구경하며 게 다리나 쭉쭉 뜯고 또 맥쥬 한사발 들이키며 보냈으면 좋겠지만, 아... 동반자가 있는 무려 신혼여행이니 참자. 그래도 샌프란시스코 어딘가에서 에릭 메이슬의 <보헤미안의 샌프란시스코>를 꼭 읽어봐야지.

독서와 몽상, 게으른 여행에 대한 로망.  

여기 로망 하나 추가요.  



김경 기자의 쫀쫀한 필력에 반해 칼럼집 <뷰티풀 몬스터>도 샀다.
주로 화장실에 놓여 있는데 변기 접선 1회당 1편씩 야금야금 읽고 있다.
최고의 독서 장소는 뭐니뭐니해도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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