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 - 살아가는 동안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
루프레히트 슈미트.되르테 쉬퍼 지음, 유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요리사와 그가 만난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먹는다는 게 삶의 증거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열심히 땀 흘리고 난 후에 배고픔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침이 고이고,
눈앞에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맛을 보는 것.
이렇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식욕을 채울 만큼 양껏 먹을 수 있는 것.
이 모든 게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 프롤로그 中

 

 

 어릴 때 우리집에는 카스테라 굽는 기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오븐이 아니란 말씀이다. 오븐도 아닌 것이 밥통도 아닌 것이 전기 후라이팬도 아닌 것이.... 그러니까 진짜 카스테라만 굽는 기구가 있었다. 생김새는 명절날 흔히 보는 전기 후라이팬처럼 생겼는데 형태가 동그랗지 않고 네모 반듯하게 생겼다. 한쪽에 온도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고 전원을 켜면 팬처럼 생긴 틀이 은근하게 데워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얇은 전용 종이를 깐 다음 걸쭉한 반죽을 흘려넣고 뚜껑을 덮으면 쨘, 하고 카스테라가 만들어졌다. 아마도 배를 타고 해외를 다녔던 외삼촌이 일본인지 미국인지에서 사왔던 것 같은데 엄마는 항상 그 틀에 카스테라를 만들어 우리 5형제의 간식으로 내놓곤 했다. 

빵이 다 되면 뚜껑을 열어 쟁반에 내려놓고 종이를 뜯었다. 그러면 달큰한 카스테라 향기와 살짝 탄듯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정말 믿을 수 없이 고소한 향이 났는데 그 냄새가 방안 가득 퍼지면 5형제가 모두 큰방으로 모여 보들보들한 카스테라를 나눠먹었다. 그 냄새. 그 카스테라 냄새는 내게 엄마 냄새와도 같았다. 카스테라 반죽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릇을 뒤집어도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 풍성한 계란 거품이 필요했다. 그래서 언제나 엄마의 제빵 단계에는 우리들의 고사리손 다섯쌍이 필요했다. 서로 계란 거품을 내겠다고 거품기를 집어들었다가, 단단하고 풍성한 거품을 내려면 엄청나게 오래 저어야 했기 때문에 팔이 저려 하나둘 떨어져나가면 마지막에 엄마가 짠, 하고 멋진 거품을 만들어 우리 눈앞에 내려놓았는데, 그러면 우리들은 부끄러운 고사리손을 뒤로 감추고 우와-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주로 밀가루로 만든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엄마 특제 도넛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밀가루와 설탕, 우유, 계란만 있으면 반죽이 완성됐고, 반죽을 살살 밀어 동그란 도넛 모양 틀로 찍어낸 다음 달군 기름에 넣어 튀기면 크리스피크림도넛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마표 특제 도넛이 완성됐다. 한창 달달한 것을 좋아할 때라서 가끔 설탕에 비벼주기도 했다. 엄마는 같은 반죽으로 꽈배기 같은 것을 내놓기도 했는데, 같은 반죽이라도 모양만 다르면 모두 다른 빵처럼 느껴져서 여러 종류를 먹으면 더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나중에 초등학생이 되서는 오빠랑 그 도넛을 직접 만들겠다고 기름을 달구다가 집을 홀랑 태워먹을 뻔 하기도 했다.

누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그때 우리 5형제의 고사리손으로 거품을 낸 카스테라와 동그란 도넛 틀로 찍어 튀겨낸 엄마표 도넛을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다. 아니, 더 정확히 그 시절의 엄마와 개미처럼 작았던 5형제의 우애와 방안에 가득찬 따뜻한 빵 냄새를 다시 되새기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절대 그 시절과 같은 추억을 맛보지는 못하겠지만, 고급 호텔 제과점에서 내놓은 카스테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난하지만 화목했던 가족애가 충만했던 그때 그 빵을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을 것 같다.

최고급 레스토랑의 인정받는 수석 요리사에서 호스피스의 요리사로 거듭난 루프레히트 슈미트는 바로 그런 추억과 인생을 죽기 전에 맛본다는 것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의 주인공이면서 삶의 마지막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 줄 아는 이 요리사는 환자들이 공들여 만든 음식을 한 숟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해내도 그들이 그 음식을 대하는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곳 손님들은 점심 식사를 하며 사업을 논하거나, 저녁 식사를 하며 훗날 결혼식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의 손님들은 미래를 계획할 시간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었고, 삶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이들에게 미식가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 루프레히트의 임무다.

- 누구에게나 가슴 먹먹한 음식이 있다 中
 

지난 삶에서 음식을 나누며 만들어왔던 작은 시절들. 그 시절의 기억을 작고 소박한 음식을 통해 추억하고 싶어하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음식과 가장 가까운 요리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요리사의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준다.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음식에서 느끼는 포근함, 우리 엄마만 할 수 있었던 요리로 대변되는 모성, 가난한 시절의 작은 빵 한조각의 주었던 커다란 행복감... 이 모든 것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되새기고 싶은 소중한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주체는 요리사지만 수많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환자들의 생의 조각을 조금씩 모아보면,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애틋한 시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따뜻한 시절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자신을 세차게 몰아치는 사람들에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아가는 동안 진짜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떠올리라고 조근조근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믿어지는가. (-) 그들에게 내일을 꿈꾸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만, 못다 한 일에 대한 후회,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에 허우적대는 것도 하지 않는다. 이 시간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지난날을 다시 맛보는 일이다.

- 그렇게 마지막 식사는 차려졌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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