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4 - 개항에서 강제 병합까지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4
정숭교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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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맨날 격동기여서 그런지, 역사도 혼란스럽고 드라마틱한 순간에 더 끌린다. 물론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우리네 역사가 드라마틱하지 않은 시절은 또 언제인가 싶지만 유난히 근대가 시작되는 개항기에 더 끌려서 굳이 4권을 집어들었다.  

개화와 쇄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내 그럴 줄 알았지" 하는 것마냥 몽땅 말아먹은 흥선대원군과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던 고종의 안타까운 삽질로 시작되는 4권은 변혁기를 거치는 여러 희생양과 논객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더 뜨거워졌는데, 조선의 마지막 왕조이자, 최초의 황실에 대한 궁금증이 두드러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난해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던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展을 보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고종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데, 4권에서 그 이면의 속사정과 사회상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고종 편애 모드가 더 단단해진 것은 고종이 커피를 즐겨마셨다는 점 때문이었는데, 고종이 사용한 커피 스푼과 커피 도구들이 실려있는 것을 보고 완전 반가웠다. 이제는 너무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고종이 커피를 너무나 사랑해서 커피를 통한 암살 시도까지 있었다는 사실도 재미(?)있었다. 

중간에 '역사의 길을 걷다 '라는 펼침 페이지는 엄청 세밀한 북촌 지도와 실제로 남아 있는 집이나 집터들이 나와 있는데 북촌 산책할 때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그냥 삼청동 카페만 돌아다닐 게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도 하나씩 짚어가면서 산책을 해봐야지.  

사진 자료들이 워낙 많고 서술도 소설 읽듯이 쉽게 풀어져 있어서 나 같은 역맹에게는 안성맞춤형 역사책인듯 싶다. 4권 마지막 부분까지 다 읽으면 다시 1권부터 차근차근 둘러보면서 올해의 목표는 "역맹 탈출"로 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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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얼음 위를 건너는 법 - 인생을 달리는 법을 배우다
롭 릴월 지음, 김승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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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여권이 없다. 이 나라 밖을 한발짝도 나가본 적이 없다는 말씀이다. 어딘가를 떠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고 불안이기도 했지만 나는 비행기가 너무너무 무섭다. 사실 비행기뿐만 아니라 모든 탈 것들에 대한 공포가 굉장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남들은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일들을 나는 정말 자주! 경험한 데서 비롯된 공포들이다.  

가령 지하철 승강장에 나란히 서 있던 사람이 선로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거나, 또한 그 시체를 보게 되었다거나, 버스에서 내리던 사람의 팔목이 뒷문에 끼어 몇 미터쯤 버스에 끌려가는 것을 봤다거나,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가다가 거대한 버스 앞유리를 통해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충돌해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부웅- 하고 날아가는 것을 봤다거나, 그러니까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내가 탄 버스의 앞 유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거나, 커다란 트럭이 내가 탄 택시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긁으며 돌진하다가 겨우 멈췄다거나 하는 것들. 그러니까 스무살 이후에 이런 장면들을 목격하고 경험하며 살아왔다는 말씀이다. 지하철 자살 장면 목격의 충격은 너무나 커서 2년이나 지난 일인데 지금도 그 장면만 떠올리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아침 출근길에 지랄이야' 하고 불평을 늘어놓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사람이 뜻밖의 상황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은 '그것만은 절대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해서 방심하기 때문이다. 뉴스나 신문에서 수많은 사건 사고를 접하지만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늘 방심하며 산다. 나도 그랬다. 그리하여 겁도 없이 아직은 어두운 겨울의 새벽 6시에 혼자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난다거나, 혹은 대낮에 종로 한복판을 걷다가 변태에게 더러운 허그(!)를 당하게 된다거나, 평소와 다름 없는 퇴근 길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한다거나 하는 일들. 그런 일들을 겪어왔다. 그러니 내가 일상에서도 언제나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런 내가 여행이라니. 그것도 해외여행이라니. 그건 정말로 엄청난 공포였다. 그런 더러운 경험들은 나를 점점 더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위험한 도전이나 모험은 꿈도 못꿨고 운전 면허는 애초에 포기한지 오래다.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차가 인도로 뛰어드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운전을 한단 말인가. 이렇게 소심한 내가 유일하게 한 가지 탈 줄 아는 게 바로 자전거다.  

대학교 때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 너무 멀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자전거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내가 힘을 준 만큼, 내가 밀어낸 만큼, 간다. 모든 힘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고, 어떤 기계적인 모터나 조작의 힘도 필요없이 그냥 자전거 자체가 나였다. 가끔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가속도 때문에 폐달을 밟지 않아도 힘차게 달려나갔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욕심을 내지 않고 브레이크를 살짝살짝 잡으며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언제나 과한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계동으로 이사를 오고 회사가 조금 가까워지자 나는 다시 자전거를 샀다. 대학 때처럼 작은 미니벨로를 사서 창덕궁 돌담길을 향해 폐달을 밟았다. 엄청난 교통체증에 꼼짝없이 갇힌 차들을 뒤로 하고, 유유히 폐달을 밟으면 자전거 바퀴가 씨잉씨잉 소리를 내며 달렸다. 인도가 자전거 도로 겸용이라서 차도로 갈 필요도 없었다. 자전거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정직한 '탈 것'이다. 불행이 닥쳐도 누굴 탓할 필요가 없고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나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자전거 만큼 정직한 인생은 없는 것 같았다.  

<자전거로 얼음 위를 건너는 법>의 주인공 롭 릴월은 그런 자전거를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았다. 나의 라이딩과 그의 라이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지만 나는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나는 창덕궁을 달리고, 너는 시베리아를 달렸지. 자전거는 정직하니까. 너는 시베리아를 자전거로 횡단하는 삶의 힘을 가졌고, 나는 창덕궁 돌담길을 천천히 달리는 삶의 힘을 가졌지. 더 많은 위험과 고난과 모험을 택한 롭은 그 만큼의 생을 얻었을 것이다. 그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강연장에 섰을 때 사람들은 "나도 그런 일을 해보고 싶은 데, 아무래도 난 당신만큼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라고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솔직히 제가 겁이 얼마나 많은데요. 꼭 슈퍼맨만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작은 모험부터 시작하세요. 친구와 함께 시작할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점점 큰 모험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내는 법을 점차 배우게 될 겁니다."

롭은 인생 전체를 모험처럼 살아보라고 했다. 겁 많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지루하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마음 먹은 만큼 인생은 달려나가게 되어 있다. 내가 겁이 많고 평범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내 폐달의 힘이 그만큼 닿아있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지금의 내 삶이 지루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가 삶의 폐달을 좀 더 힘껏, 좀 더 버라이어티하게 밟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나는 언제든지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라도 돌 수 있을 것이다. 롭의 길고 험난하고 입체적인 여정을 보며 그런 희망을 더욱 단단하게 굳혔다. 시베리아에서 영국까지 28개국 5만여 킬로미터를 3년 동안 달리면서 그가 겪은 수많은 고비와 찬란하게 빛나는 삶의 순간순간이 나처럼 소심하고 겁 많은 인간에게 담대한 희망을 꿀렁꿀렁 꽃피게 만든 것이다.  

어서 따갑고 아픈 추위가 물러가서 작은 폐달을 총총총 휭휭휭 밟으며 힘껏 달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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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 - 살아가는 동안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
루프레히트 슈미트.되르테 쉬퍼 지음, 유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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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요리사와 그가 만난 이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먹는다는 게 삶의 증거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열심히 땀 흘리고 난 후에 배고픔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침이 고이고,
눈앞에 가득 차려진 진수성찬을 그냥 넘기지 못하고 맛을 보는 것.
이렇게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식욕을 채울 만큼 양껏 먹을 수 있는 것.
이 모든 게 당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 프롤로그 中

 

 

 어릴 때 우리집에는 카스테라 굽는 기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오븐이 아니란 말씀이다. 오븐도 아닌 것이 밥통도 아닌 것이 전기 후라이팬도 아닌 것이.... 그러니까 진짜 카스테라만 굽는 기구가 있었다. 생김새는 명절날 흔히 보는 전기 후라이팬처럼 생겼는데 형태가 동그랗지 않고 네모 반듯하게 생겼다. 한쪽에 온도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고 전원을 켜면 팬처럼 생긴 틀이 은근하게 데워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얇은 전용 종이를 깐 다음 걸쭉한 반죽을 흘려넣고 뚜껑을 덮으면 쨘, 하고 카스테라가 만들어졌다. 아마도 배를 타고 해외를 다녔던 외삼촌이 일본인지 미국인지에서 사왔던 것 같은데 엄마는 항상 그 틀에 카스테라를 만들어 우리 5형제의 간식으로 내놓곤 했다. 

빵이 다 되면 뚜껑을 열어 쟁반에 내려놓고 종이를 뜯었다. 그러면 달큰한 카스테라 향기와 살짝 탄듯한 종이 냄새가 뒤섞여 정말 믿을 수 없이 고소한 향이 났는데 그 냄새가 방안 가득 퍼지면 5형제가 모두 큰방으로 모여 보들보들한 카스테라를 나눠먹었다. 그 냄새. 그 카스테라 냄새는 내게 엄마 냄새와도 같았다. 카스테라 반죽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릇을 뒤집어도 흘러내리지 않을 정도로 풍성한 계란 거품이 필요했다. 그래서 언제나 엄마의 제빵 단계에는 우리들의 고사리손 다섯쌍이 필요했다. 서로 계란 거품을 내겠다고 거품기를 집어들었다가, 단단하고 풍성한 거품을 내려면 엄청나게 오래 저어야 했기 때문에 팔이 저려 하나둘 떨어져나가면 마지막에 엄마가 짠, 하고 멋진 거품을 만들어 우리 눈앞에 내려놓았는데, 그러면 우리들은 부끄러운 고사리손을 뒤로 감추고 우와-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주로 밀가루로 만든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엄마 특제 도넛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밀가루와 설탕, 우유, 계란만 있으면 반죽이 완성됐고, 반죽을 살살 밀어 동그란 도넛 모양 틀로 찍어낸 다음 달군 기름에 넣어 튀기면 크리스피크림도넛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엄마표 특제 도넛이 완성됐다. 한창 달달한 것을 좋아할 때라서 가끔 설탕에 비벼주기도 했다. 엄마는 같은 반죽으로 꽈배기 같은 것을 내놓기도 했는데, 같은 반죽이라도 모양만 다르면 모두 다른 빵처럼 느껴져서 여러 종류를 먹으면 더 배가 부르는 것 같았다. 나중에 초등학생이 되서는 오빠랑 그 도넛을 직접 만들겠다고 기름을 달구다가 집을 홀랑 태워먹을 뻔 하기도 했다.

누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것을 만들어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그때 우리 5형제의 고사리손으로 거품을 낸 카스테라와 동그란 도넛 틀로 찍어 튀겨낸 엄마표 도넛을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다. 아니, 더 정확히 그 시절의 엄마와 개미처럼 작았던 5형제의 우애와 방안에 가득찬 따뜻한 빵 냄새를 다시 되새기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도 절대 그 시절과 같은 추억을 맛보지는 못하겠지만, 고급 호텔 제과점에서 내놓은 카스테라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난하지만 화목했던 가족애가 충만했던 그때 그 빵을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을 것 같다.

최고급 레스토랑의 인정받는 수석 요리사에서 호스피스의 요리사로 거듭난 루프레히트 슈미트는 바로 그런 추억과 인생을 죽기 전에 맛본다는 것의 소중함을 잘 알았다.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의 주인공이면서 삶의 마지막 시간을 특별하게 만들 줄 아는 이 요리사는 환자들이 공들여 만든 음식을 한 숟갈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해내도 그들이 그 음식을 대하는 순간이 얼마나 귀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곳 손님들은 점심 식사를 하며 사업을 논하거나, 저녁 식사를 하며 훗날 결혼식을 꿈꾸지도 않는다. 그의 손님들은 미래를 계획할 시간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앞두었고, 삶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이들에게 미식가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 루프레히트의 임무다.

- 누구에게나 가슴 먹먹한 음식이 있다 中
 

지난 삶에서 음식을 나누며 만들어왔던 작은 시절들. 그 시절의 기억을 작고 소박한 음식을 통해 추억하고 싶어하는 환자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음식과 가장 가까운 요리를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요리사의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준다.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음식에서 느끼는 포근함, 우리 엄마만 할 수 있었던 요리로 대변되는 모성, 가난한 시절의 작은 빵 한조각의 주었던 커다란 행복감... 이 모든 것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되새기고 싶은 소중한 흔적이었던 것이다. 이야기의 주체는 요리사지만 수많은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환자들의 생의 조각을 조금씩 모아보면,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애틋한 시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따뜻한 시절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자신을 세차게 몰아치는 사람들에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아가는 동안 진짜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을 떠올리라고 조근조근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믿어지는가. (-) 그들에게 내일을 꿈꾸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만, 못다 한 일에 대한 후회, 사랑하는 이와 함께할 수 없다는 슬픔에 허우적대는 것도 하지 않는다. 이 시간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열심히 지난날을 다시 맛보는 일이다.

- 그렇게 마지막 식사는 차려졌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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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배케이션
김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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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마법이 필요했다."

표지의 이 문구를 보고 주저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내게 이 말 자체가 마법같은 주술이었다. 늘 현실을 벗어나고싶다는 생각만 가득찼을 뿐, 왜 떠나려고 하는지, 벗어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유를 붙일 수가 없었다. '현실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 하나의 문장이 나의 오묘한 내면을 쓰다듬어주었다.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이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공직자들에게 3년에 한번 꼴로 한 달 남짓의 유급 독서휴가를 주었던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조선의 세종 임금이 젊은 선비들에게 긴 휴가를 주어 집에서 편안하게 책을 읽게 했다는 사가독서와도 의미가 통한다.


아 이게 무슨 꿈같은 소리란 말인가. 3년에 한번 한 달 동안 '유급 독서휴가'라니! 요즘 마음이 횡횡하고 숭숭해서 그런지 남의 경험에 핥핥거리며 대리만족하는 데 집착하고 있다. 여성들의 판타지를 한껏 충족시키는 직업인 패션지 에디터로서 수년간 살아왔다는 것만으로도 핥핥하기에 충분한데, 거기다가 1년 동안의 믿을 수 없는 장기휴가라니. 또한 그 휴가를 책 읽는 독서휴가로 알차게 쓰고 돌아왔다니. 털.썩.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은 빅토리아 시대의 공직자들마냥 꿈같은 독서휴가를 보내고 온 <하퍼스 바자>의 에디터 김경의 은밀하고 희열에 찬 도주의 기록이다.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로부터 출발한 여행은 몰타를 시작으로 파리, 바르셀로나, 리스본, 로마, 취리히, 부다페스트로 이어졌고, 그 사이사이를 마르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버트런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산도르 마라이의 <열정> 같은 책들로 채워나갔다.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여름휴가를 독서휴가로 용도 변경하는 거다. 생각해보면 아쉬울 것도 없다. 피서, 그러니까 더위를 피해 자리를 옮긴답시고 산과 강을 찾아가는 길은 얼마나 지루하고 고생스러운가?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에 도착해봤자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인파 속에서 달리 할 일도 없다. 그 와중에 끔찍한 도로 정체에 시달려야 하고, 성수기 바가지 요금에 분개해야 하고, 소변을 보기 위해 수영복을 입은 불편한 차림으로 30분씩 줄을 서야 한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또 어떤가? 내야 할 돈이 전 달보다 두 배쯤 많아진 신용카드 고지서와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업무가 나에게 결재와 야근을 종용할 뿐이다.

따라서 나는 여름휴가 때 내 집에 앉아 기꺼이 토플리스 차림이 된다. 다른 사람 눈을 의식해 겨드랑이 털을 밀 필요가 없고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렇게 내 몸을 가장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해방시킨 후 내 몸에 이미 익숙해진 독서용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이름하여 셰익스피어 배케이션(독서휴가).

- 두드리면 열리나니, 당신도 책과 함께 떠나시라! 中


 

생각 같아서는 샌프란시스코 신혼여행도 마음껏 거리를 누비며 커피도 마시고 맥주도 들이키며 한가로이 노천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카스트로 언덕의 끄트머리에 앉아 석양이나 바라보다가 피어39에서 징그럽게 모여있는 바다표범을 구경하며 게 다리나 쭉쭉 뜯고 또 맥쥬 한사발 들이키며 보냈으면 좋겠지만, 아... 동반자가 있는 무려 신혼여행이니 참자. 그래도 샌프란시스코 어딘가에서 에릭 메이슬의 <보헤미안의 샌프란시스코>를 꼭 읽어봐야지.

독서와 몽상, 게으른 여행에 대한 로망.  

여기 로망 하나 추가요.  



김경 기자의 쫀쫀한 필력에 반해 칼럼집 <뷰티풀 몬스터>도 샀다.
주로 화장실에 놓여 있는데 변기 접선 1회당 1편씩 야금야금 읽고 있다.
최고의 독서 장소는 뭐니뭐니해도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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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카프카의 고백 - KAFKA's Dialogue
카프카 글, 이우일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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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짜르가 다쳐 새벽에 급히 응급진료를 하는 동물병원에 다녀왔다. 인형 물어오기를 좋아하는 짜르에게 평소처럼 인형을 던져줬는데, 그걸 물어오겠다고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발톱이 빠져버린 거다. 아프지도 않았는지 태연하게 이불 위를 걸어다니는데 이불에 찍힌 핏방울을 보고 까무러칠 뻔 했다. 10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도, 다친 적도, 설사를 한 적도 없었던 녀석이라서 피를 보자마자 나는 응급환자라도 보는 것마냥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택시를 잡아 탔다. 
 

워낙 겁이 많은 놈이라서 병원 문만 들어서면 기겁을 하는데 그날따라 너무나 의젓하다. 낑낑거리지도 않고 드레싱도 잘 받고, 약도 잘 먹고, 주사도 잘 맞고, 심지어 핥지 못하게 씌워주는 고깔도 아랑곳 않고 씩씩하게 잘도 걸어다니네.

카메라를 노려보는 짜르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게 사람이야 개야 싶다. 저 늠름한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지 않나. 동물과 오래 살다보면 진심으로 녀석이 가족으로 느껴진다. 진짜 사람 가족 말이다. 어떤 날은 짜르를 앉혀놓고 그날 있었던 일을 주저리주저리 말하기도 하고, 우울한 날에는 금새 알아채고 내게 달려와 유난히 애교를 부린다. 진짜 내 속을 다 꿰뚫고 있는 느낌이랄까. 

일러스트레이터 이우일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나는 ~한 고양이입니다"라는 문장으로 고양이 입장에서 바라본 자기 가족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까칠한 고양이 카프카는 철이 덜 든 가장 이우일을 보며 씨니컬 멘트를 날리기도 하고, 아내 선현경을 보고 저것은 필시 "말단!"을 외치기도 하고, 담배 피우는(피웠던) 두 부부에게 감시의 눈길을 날리곤 한다. 

언제나 무심한 듯 시크한, 시큰둥하면서도 뒷주머니에 애교를 숨겨놓는, 인디펜던트하고 무심한 고양이 특유의 모습은 "까칠하다"는 말로 단번에 정의된다. <고양이 카프카의 고백>은 동물에게 영혼을 간파당한 작가가 이 녀석들에게 이 한심한(?) 인간들의 삶이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신의 일상을 고양이 눈으로 객관화해놓은 책이다. 동물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유쾌하고 적나라한 일상들. 이우일 특유의 허접성 유머가 가득한 카툰 컷과 "쯧쯧, 내가 저런 걸 주인이랍시고. 흐휴." 하고 한숨 잔뜩 쉬고 있을 것만 같은 카프카의 화법이 누구나 호탕하게 웃어제낄 수 있는 낯설고도 익숙한 일상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저는 그들이 진심으로 저를 사랑해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디선가 행복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건 틀리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있었어요.

그 모녀의 또 다른 가족인 이우일 씨에게요. (…)

뭐랄까, 좋게 말하면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아주 부조리한 짐승 같다고나 할까요. (…)

아주 고양이를 피곤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인간이지요.

뭐가 그렇게 피곤하냐고요? 흠, 아시게 될 겁니다.

앞으로 아주 '야옹'한 인간의 '야옹'한 실체를 보시게 될 테니까요.

201년 5월 25일 카프카 씀. 야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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