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로 얼음 위를 건너는 법 - 인생을 달리는 법을 배우다
롭 릴월 지음, 김승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여권이 없다. 이 나라 밖을 한발짝도 나가본 적이 없다는 말씀이다. 어딘가를 떠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고 불안이기도 했지만 나는 비행기가 너무너무 무섭다. 사실 비행기뿐만 아니라 모든 탈 것들에 대한 공포가 굉장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남들은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일들을 나는 정말 자주! 경험한 데서 비롯된 공포들이다.  

가령 지하철 승강장에 나란히 서 있던 사람이 선로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을 목격한다거나, 또한 그 시체를 보게 되었다거나, 버스에서 내리던 사람의 팔목이 뒷문에 끼어 몇 미터쯤 버스에 끌려가는 것을 봤다거나,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가다가 거대한 버스 앞유리를 통해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충돌해 두 사람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부웅- 하고 날아가는 것을 봤다거나, 그러니까 그 중 한 사람은 바로 내가 탄 버스의 앞 유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거나, 커다란 트럭이 내가 탄 택시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긁으며 돌진하다가 겨우 멈췄다거나 하는 것들. 그러니까 스무살 이후에 이런 장면들을 목격하고 경험하며 살아왔다는 말씀이다. 지하철 자살 장면 목격의 충격은 너무나 커서 2년이나 지난 일인데 지금도 그 장면만 떠올리면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아침 출근길에 지랄이야' 하고 불평을 늘어놓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사람이 뜻밖의 상황에서 당황하게 되는 것은 '그것만은 절대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해서 방심하기 때문이다. 뉴스나 신문에서 수많은 사건 사고를 접하지만 그것이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늘 방심하며 산다. 나도 그랬다. 그리하여 겁도 없이 아직은 어두운 겨울의 새벽 6시에 혼자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난다거나, 혹은 대낮에 종로 한복판을 걷다가 변태에게 더러운 허그(!)를 당하게 된다거나, 평소와 다름 없는 퇴근 길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를 당한다거나 하는 일들. 그런 일들을 겪어왔다. 그러니 내가 일상에서도 언제나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그런 내가 여행이라니. 그것도 해외여행이라니. 그건 정말로 엄청난 공포였다. 그런 더러운 경험들은 나를 점점 더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위험한 도전이나 모험은 꿈도 못꿨고 운전 면허는 애초에 포기한지 오래다.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차가 인도로 뛰어드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운전을 한단 말인가. 이렇게 소심한 내가 유일하게 한 가지 탈 줄 아는 게 바로 자전거다.  

대학교 때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 너무 멀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자전거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내가 힘을 준 만큼, 내가 밀어낸 만큼, 간다. 모든 힘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고, 어떤 기계적인 모터나 조작의 힘도 필요없이 그냥 자전거 자체가 나였다. 가끔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는 가속도 때문에 폐달을 밟지 않아도 힘차게 달려나갔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욕심을 내지 않고 브레이크를 살짝살짝 잡으며 일정한 속도를 유지했다. 언제나 과한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계동으로 이사를 오고 회사가 조금 가까워지자 나는 다시 자전거를 샀다. 대학 때처럼 작은 미니벨로를 사서 창덕궁 돌담길을 향해 폐달을 밟았다. 엄청난 교통체증에 꼼짝없이 갇힌 차들을 뒤로 하고, 유유히 폐달을 밟으면 자전거 바퀴가 씨잉씨잉 소리를 내며 달렸다. 인도가 자전거 도로 겸용이라서 차도로 갈 필요도 없었다. 자전거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정직한 '탈 것'이다. 불행이 닥쳐도 누굴 탓할 필요가 없고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나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자전거 만큼 정직한 인생은 없는 것 같았다.  

<자전거로 얼음 위를 건너는 법>의 주인공 롭 릴월은 그런 자전거를 타고 지구 반 바퀴를 돌았다. 나의 라이딩과 그의 라이딩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지만 나는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나는 창덕궁을 달리고, 너는 시베리아를 달렸지. 자전거는 정직하니까. 너는 시베리아를 자전거로 횡단하는 삶의 힘을 가졌고, 나는 창덕궁 돌담길을 천천히 달리는 삶의 힘을 가졌지. 더 많은 위험과 고난과 모험을 택한 롭은 그 만큼의 생을 얻었을 것이다. 그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강연장에 섰을 때 사람들은 "나도 그런 일을 해보고 싶은 데, 아무래도 난 당신만큼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은 것 같아요."라고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강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솔직히 제가 겁이 얼마나 많은데요. 꼭 슈퍼맨만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작은 모험부터 시작하세요. 친구와 함께 시작할 수도 있겠죠. 그러다가 점점 큰 모험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해내는 법을 점차 배우게 될 겁니다."

롭은 인생 전체를 모험처럼 살아보라고 했다. 겁 많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지루하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마음 먹은 만큼 인생은 달려나가게 되어 있다. 내가 겁이 많고 평범해서가 아니라 아직은 내 폐달의 힘이 그만큼 닿아있지 않기 때문일 뿐이다. 지금의 내 삶이 지루한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가 삶의 폐달을 좀 더 힘껏, 좀 더 버라이어티하게 밟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나는 언제든지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라도 돌 수 있을 것이다. 롭의 길고 험난하고 입체적인 여정을 보며 그런 희망을 더욱 단단하게 굳혔다. 시베리아에서 영국까지 28개국 5만여 킬로미터를 3년 동안 달리면서 그가 겪은 수많은 고비와 찬란하게 빛나는 삶의 순간순간이 나처럼 소심하고 겁 많은 인간에게 담대한 희망을 꿀렁꿀렁 꽃피게 만든 것이다.  

어서 따갑고 아픈 추위가 물러가서 작은 폐달을 총총총 휭휭휭 밟으며 힘껏 달렸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