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코리안 델리 - 백인 사위와 한국인 장모의 좌충우돌 편의점 운영기
벤 라이더 하우 지음, 이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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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영화나 미국 드라마에서 한국인이 등장하면, 그 배경은 여지없이 작고 번잡스러운 편의점 또는 잡화점(델리)이다. 억척스러운 한국인 이민자 부부가 강도를 내쫓거나, 고단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계산대에 서서 경찰의 심문에 응하는 장면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을 찾는 이민자들 가운데 한국인은 특유의 부지런함과 억척스러움으로, 개미처럼 일만 한다거나 돈만 밝힌다거나 자식들 교육에는 앞뒤 가리지 않고 투자한다는 둥의 (부정적인)이미지를 갖게 됐다. 낯선 땅에서 삶을 일구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악착같이 돈을 벌고 먹고 살 길을 찾아나서지만, 아무래도 한국인 특유의 습성(?)은 문화 차이 때문인지 좀 지독하게 두드러지는 모양이다.

 

문예지 <파리 리뷰>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전형적인 지식인 코스프레를 담당하고 있는 벤 라이더 하우는 재미교포 2세인 개브와 결혼하면서 '충격적인' 한국 문화를 접하기 시작한다. 자금 사정 때문에 장모님 댁에 얹혀 사는 처지이긴 하지만 이 '일방적인'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장모님 케이는 아무때나 딸 부부의 방에 불쑥 쳐들어오고, 친척이나 지인이 미국을 방문하면 온 집안은 '성수기 여관'이 된다. 장모 케이는 운전할 때 한 번 시작한 차선은 절대 바꾸지 않는 것처럼, 한 번 결정한 것을 되돌리는 일이 없다. 벤은 장사를 하되, 좀 더 우아하게 하고 싶지만, 케이는 돈이 되는 거라면 곤죽이 된 음식을 스티로폼 그릇에 그램수로 담아 팔든, 복권 기계를 들여놓든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 백인 사위와 한국인 가족이, 아니 정확하게 말해 머릿속이 온통 추상적인 관념들로 가득한 벤과 머리보다는 행동으로 살아가는 케이가 뉴욕의 작은 델리를 운영하는 이야기는 예측한 대로 수많은 충돌과 혼란 속에 진행된다. 하지만 그 혼돈의 세계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이면을 본다. 벤은 먹고사니즘과 문학인 정체성 사이에서 자신의 자아를 정의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굴린다. 그러나 결국 도서전에 가서 책을 파는 일이나 델리에서 악착같이 물건을 파는 일이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자기 성찰에 빠지는 벤의 모습에서 우리는 웃(기고 슬)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벤에게 그저 낯설고 피곤하기만 했던 이 가족의 문화와 생존 정신은, 델리를 함께 운영했던 시간을 통해 조심스런 동지애로, 연민으로, 애정으로 발전한다. 격동의 대한민국을 온몸으로 살아내며 굴곡진 인생을 이어나갔던 장모를 이해하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한편으로는 다소 찌질한 듯한) 출판사에서 만난 사람들을 애정으로 품게 되고, 기이한 단골 손님들과의 만남에서 삶의 연민을 찾는다. 벤은 이 작은 공간에서 인정과 공존에 관한 작은 이야기를 남겼다. 미국에서 먼저 <마이 코리안 델리>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이 책은, 결국 벤을 머리만 복잡한 문예지 편집자가 아닌 진짜 옹골찬 작가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언론인 P.J.오루크의 말처럼 이 평범한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가 벤의 손을 통해세속적 재료(델리)를 톡 쏘는 양념(한국인 처가)으로 버무려 자연스럽게 발효(맨해튼의 문학)’시킨 김치’같은 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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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두 얼굴 -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
최광현 지음 / 부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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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가족'이 한세트 더 생긴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라는 대상을 중심으로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며 '모셔야' 하고 형님, 동서, 도련님, 아가씨 같은 입에 잘 붙지도 않는 호칭들을 마치 태어날 때부터 원래 있었던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부르며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은 내게 정말 '날벼락'이었다. 나는 그저 한 남자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리하여 함께 살자고 결심하는 것 뿐인데 바로 그 순간 어마어마한 '가족' 한 무더기가 내 앞에 투척되는 것이다. 그게 결혼이라는 제도의 속성이자 함정이다. 사실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어지간하면 혼자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되도록 결혼 같은 건 하지 말아야겠다고.

가족은 선택할 수 없다. 내가 태어난 가족도 선택할 수 없고, '시댁'이라는 새로운 가족도 선택할 수 없다. 남편은 선택할 수 있어도 남편의 가족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건 나에게 숙명이 된다. 일종의 공포였다.

 

나는 상당히 많은 가족들 속에서 관계지향적인 사람으로 자랐다,고 믿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고 부모님은 금슬이 좋고 언제나 화목하고 화기애애한 대가족 속에서 모나지 않게 자랐다,고 믿었다. 그런데도 <가족의 두 얼굴>이라는 책을 보자마자 이건 내가 반드시 읽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문제없이 평탄하게 살아왔다고 믿으면서도 언제나 가슴 한켠에 덜어내지 못한 그늘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그때는 상황이 그랬으니까, 엄마 아빠도 힘들었으니까, 그땐 다들 어렸으니까, 다들 뭘 잘 몰랐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나의 크고 작은 상처들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가족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았다.

 

<가족의 두 얼굴>은 저자가 진행한 가족치료 상담에서 만난 다양한 사례들을 들어 어째서 가족은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게 되는지에 대해 아주 말랑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풀어간다. 왜 우리는 자신의 불행을 반복하며 사는지, 왜 어린 시절의 작은 트라우마가 성인기까지 이어져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왜 사랑하면서도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지, 왜 '가족'에 대해서는 언제나 '애증'의 감정을 동반하게 되는지 그 원인을 꾹꾹 짚어낸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사실 대단한 것에 있지 않다. 모든 불행과 고통은 자신의 상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에 의해 '방어'하면서, 혹은 그것을 극복하려고 '집착'하다가 결국에는 '재현'과 '반복'을 일삼으면서 도돌이표처럼 자신의 인생을 덮치또 덮친다.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 문제 이전의 어떤 문제가 분명 선행되었다는 뜻이다. 미치도록 벗어나고 싶었던 고통과 자신도 모르게 입었던 정신적 내상들이 결국은 다시 자신을 덮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부분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통의 원인을 가장 멀게 느끼며 찾아 헤매는 것이다.

 

'가족'은 너무나 사회적이면서도 너무나 사적인 공동체다. 공동체이면서 조직이고, 혹은 기업이고 보금자리다. 가족의 '관계'는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고,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고, 극복하고 싶어도 극복할 수 없는 운명공동체다. 가족간의 문제를 가정 내의 문제로 국한시키고 그 안에서의 해결을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족치료'라는 개념은 아직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가족으로부터 주고받은 상처들은 잘 치유되지 않고 더 깊이 곪고 썩기도 한다. 또한 구성원 하나의 치유만으로 가족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이 따른다. 이 책의 미덕은 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서를 제공한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의 심리학 서적이나 치유성 에세이들이 그렇듯, 독서만으로 당장의 고통을 희석시킬 수는 없다. 다만,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찾아낼 수 있는 아주 작은 실마리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상처를 객관화시키고 유형을 찾아보려 애썼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다. 나는 가족을 두려워한다. 시댁이라는 새로운 가족뿐만 아니라 내가 태어난 가족조차 두려울 때가 많다. 자꾸만 가족에게 거리를 두려 하고 반발짝쯤 뒤로 물러나 있기를 원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의식이 일종의 방어기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가장 긴밀해야 했던 시기에,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바로 그 시간을 홀로 보냈다는 것에서 굉장한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열쇠가 달린 목걸이를 걸고 혼자 집에 돌아오는 길을 잊지 못한다. 비가 오면 학교 정문에 우산을 들고 아이들을 마중나온 엄마들이 가득했는데, 그 속에서 비를 맞으며 집으로 달려오던 때의 서러움을 잊지 못한다. 소풍갈 때마다 찬합에 김밥을 가득 담아와서 선생님들과 점심을 먹는 '학부형'들을 지켜보던, 그 마음을 잊지 못한다. 집열쇠를 깜빡하고 두고 온 날에는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언니들을 기다리면서 엄마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골목 끝으로 바라보았던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게 아무것도 아닌, 그저 어린시절의 단편적인 한 장면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순간의 서러움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스스로 소외된다고 느꼈던 그 감정 때문에,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내가 먼저 가족을 소외시키기로 했던 것 같다. 가족들은 언제나 '넌 왜 그렇게 가족들에게 무심하니' '넌 왜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니' '넌 왜 다른 남매들과 유난히 다를까' 같은 말들을 했다.

글쎄, 내 마음이 그렇게 시키는데 왜냐고 물으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기억을 떠올리자 다시 서러운 마음이 들어 울컥했다. '가족의 두 얼굴'은 기본적으로 애愛와 증憎이다.

이 당연한 진리를, 책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깨달으며 작은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누구도 미워하지 않을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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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토익 만점 수기 - 제3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심재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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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토익 점수가 없다. 그러니까, 토익 시험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토익은 물론 공인 영어 점수라는 게 없다. 흠흠. (요즘 세상에 이런 사람이 흔치 않을 터인데, 신기하게도 남편도 토익 점수가 없다.) 물론 시험을 보겠다고 교재를 들여다본 적은 있다. 토익, 토플, 텝스 모두! 실제 시험을 치뤄보진 않았지만 공인 영어 시험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시험'이라는 건 어떤 시험이든 패턴이 있다. 문제 유형이 있고, 기출 문제가 있고, 변형이 가능하지만 기본적인 규칙이 있고, 기준이 있다. 그래서 시험을 목적으로 공부를 하다보면 '공부'가 아니라 '훈련'을 하게 된다. 이런 유형이 나왔을 땐 이렇게, 이런 소재가 자주 나오니 요것도 풀어보고 저것도 풀어보고, 주로 이러저러한 함정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으니 이러저러한 점에 유의해야 하고, 뭐 그런 것들을 훈련한다. 언어 시험일 경우 특히 그렇다. 그러니까, 주객이 대단히 크게 전도된다는 것이다. 

 

공부가 아닌 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미드를 봤다. 미드의 재미에 빠지면서 토익, 토플 책들은 그냥 던져버렸다. 이까이꺼 점수 있다고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토익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다른 모든 스펙은 모두 완벽한데 토익 점수만 없는 사람들이지, 원래 아무런 스펙이 없는데 토익 점수만 달랑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 하나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언어를 시험이 아닌 언어 그 자체로 대하자 급격히 재미있어졌다. 시험을 봐야 한다는 강박도, 목적도 없으니 그저 신기한 언어를 즐기면 그만이었다. 하루 종일 미드를 드립다팠다. 법정드라마를 볼 때는 'with all due respect your honor' 'overruled' 'sustain' 'prosecution' 같은 말들을 자연스럽게 지껄이게 되고(자주 나오니까!), CSI 같은 걸 볼 때는 'gunshot residue' 'cause of death' 'autopsy' 'first-degree murder charges' 'prime suspect' 같은 말들이 저절로 들린다. 말랑한 가족 드라마를 볼 때는 들리는 대로 받아 쓰기를 해봤고, 자막 없이 봤다가, 영자막으로 봤다가, 한글 자막으로 보기를 반복해보기도 했다. 가끔 오디오 파일을 받아서 지하철에서 듣기도 했다. 큰 욕심 안 부리고 한두편 정도만 자주 반복해서 들었더니 드라마 장면과 이야기가 거의 외워지다시피 했다. 사실 이렇게 몇 가지 시도를 해본 건 드라마가 너무 재미있는데 자막이 안 올라와서 다음 편을 못보게 되면서부터다. 젠장, 자막없이 미드를 볼 수 있다면 디씨 미드갤에서 하루죙일 자막을 기다리며 똥줄이 탈 일은 없을 텐데...이런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학습욕이 솟았다는 거다. 물론 이것은 언어 학습의 치명적인 결함인 '지속성이 없다'는 것 때문에 영어 실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필요하다' 생각되면 시키지 않아도 다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처럼, 폐인처럼 하루죙일 미드를 보고 싶은데 자막이 나의 감상 속도를 못따라와! 그럼 별수없다. 자막 없이도 미드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야 하는 거다. 어릴 때부터 꿈이 외신기자야! 다뤄야 하는 언어 자체가 외국어라면 당연히 열심히 들여다보게 되겠지. 또는 외쿡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이 나으 커리어나 나으 꿈에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해! 역시나 당연하게도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근데 문제는, 그 언어 습득의 툴이 '시험'이라는 형태가 되버리면 우리는 주객이 대단히 전도되는 상황에서 시험을 위한 시험에 빠져버린다는 거다.

 

<나의 토익 만점 수기>는 언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가 아닌 취업을 위한 정량화된 수단으로 전락한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신랄하게 뒤집고 까고 풍자하는 소설이다. 제목만 보고 정말로 만점 수기인 줄 알고 비법을 찾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의외의 수확을 거둘 수도 있다. 내가 지금 드립다파고 있는 이 영어 시험이라는 게 얼마나 웃기는 짓인지를 절절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 정도? 소설의 주인공은 토익 만점을 위해 맨몸으로 호주에 입성한다. 어학원은 개뿔. 현지에 이렇게나 많은 원어민 선생(!)들이 있는데 그런 건 뭐하러. 우연히 대마초를 배달하게 된 주인공은 이참에 바나나농장으로 위장한 대마 농장에서 대마초를 재배하고 판매하는 스티브의 인질이 되기로 한다. 언어를 배우려면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을 해야지. 어찌보면 평화롭기만한 인질 생활 속에서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생활 자체를 '토익화'하는 데 안간힘을 쓴다. 그의 모든 생활은 part1, part2, part3...로 만들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토익 문제집을 구할 방도가 없다. 방법은 하나. 내가 출제자가 되는 것이다. 토익 출제자가 되는 건 수동적인 수험생 신분에서 과감히 이탈하는 길이다. (...) 나는 part1 문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는 스티브의 모습을 찍는다. 액정에 뜬 이미지를 앞에 두고 곰곰이 생각했다. 사진 중심엔 스티브와 바나나 나무가 클로즈업되어 있다. 토익 문제 출제자라면 이 사진으로 어떻게 문제를 만들까? 10분간 고민한 뒤, 보기를 만들어보았다.

 

(a) The man is picking banana flowers (남자는 바나나 꽃을 따고 있다).

(b) The man is drinking a cup of banana juice (남자는 바나나주스 한 잔을 마신다).

(c) There are roses under the banana tree (바나나 나무 밑에 장미가 있다).

(d) The man is wearing a hat (남자는 모자를 쓰고 있다).

 

보기를 만들면서, 나도 모르게 사악한 마음이 들어 깜짝 놀랐다. 나는 '웬만한 놈들은 여기서 틀려라'라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보기 (a),(b),(c)는 사악한 수작의 산물이다. 일부러 함정을 팠다. 즉 '바나나'란 단어를 넣었지만, 사진 속 상황과는 전혀 맞지 않는 문장이다. 특히 보기 (a)에는 '따다(pick)'란 동사가 있어 더욱 헷갈린다. 

- p75 '평양식 물냉면' 

 

나는 주인공이 생활의 모든 것을 꼼꼼하게 토익 문제화하는 장면에서 푸하하하 웃음을 터트렸지만 사실은 대단히 슬프고 씁쓸했다. 주인공은 사실 누구보다도 언어를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습득하고 있으며 스티브 역시 '너처럼 영어를 잘 하는 어학연수생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만, 주인공은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토익 만점을 얻기엔 '아직 멀었다'고. 스티브는 말한다.

"도대체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그 나라 국민이 되는 거야?"천명관의 <나의 삼촌 브루스 리>를 읽고난 직후 읽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장편으로서의 밀도도 좀 떨어지고, 아직은 신인이라 곳곳에 허술한 구석들이 조금 있지만 멋부리지 않고 힘차게 죽죽 써내려간 느낌이 좋았다. 다음 작품에도 블랙 유머가 촘촘하게 박힌 소설을 써줬으면 좋겠다. 책 날개에 쓰인 작가의 말처럼, 웃으면서 따귀 한 대 맞는 서비스도 함께. 

 

"이 소설은 코미디이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한국인이라면 독서 후 약간의 수치심이 느껴질 것이다.

이 소설은 그들이 따귀 한 대 맞은 느낌을 받도록 설계됐다.

이 또한 나의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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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 운명조차 빼앗아가지 못한 '영혼의 기록'
위지안 지음, 이현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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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얘기하자면, 나는 시한부 인생을 별로 좋아라 하지 않는다. (?) 아, 시한부 인생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살아남은 사람이나 결국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쓴 책, 혹은 기록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시한부'. 생각만 해도 무서운 말이다. 병을 얻게 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육체적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모든 기록들이 나는 너무나 무섭다. 그 기록들을 보면 자꾸만 '내가 만약'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만약'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어서, 이건 단순히 타자의 사건이 아니라 나의 고통으로 그대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특히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이제야 겨우 인생이 피려고 하는데 별안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연을 보면 사는 게 다 무어냐 싶어 쉽게 회의에 빠진다.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었다. 순식간에 후루룩 읽어버렸다. 육체적 고통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차마 볼 수가 없어 건너뛰면서, 눈을 질끈 감고 읽어버렸다. 그런데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무서운 마음이 사라지고 되려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인생 뭐있냐,류의 회의가 아니라 당장 내일 아침에 내게 죽음이 와도 의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기 최면 같은 것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책의 주인공이 어린 나이에 세계 100대 대학의 교수가 됐는데 병을 얻었다는 건 별로 중요한 지점이 아니다. 서울역 노숙자에게도, 위대한 교수에게도,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도, 갑작스레 닥친 병마와 죽음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더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것 말이다.

 

인생을 산다는 그 '기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기회'라는 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앞으로 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교수로서의 커리어? 자신의 아이를 끝까지 돌보는 절실한 모성?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 어쩌면 이 책을 써내려가는 순간의 그녀는 삶의 기회를 더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슬픔과 육체적 고통보다는 지금 당장 이 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를 찾는 것에 더 골몰했는지도 모른다.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풀어나가면서도 언제나 그 안에서 작은 메시지를 끌어내는 그녀가 삶을 대하는 자세는 정말로 의연했다. 물론 누구나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는 없다. 당장의 치료에 따른 고통을 태연하게 감내할 수도, 가족들의 눈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녀도 그런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다만 그토록 절망적인 조건에서도, 삶의 끝에 와서야 이렇게나 많은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후회 속에서도 그것을 그저 후회로 남기지 않고 세상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게, 참, 의젓했다.

 

물론 가슴 아픈 순간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녀는 잘 때는 항상 벽을 보고 자야 하는 습관 때문에 침대 구석에서 자야 했는데 남편이 자꾸만 그 자리를 탐내며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서 매번 남편을 밀어내고 자는 게 참 귀찮았다. 남편은 병원 침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간호사에게 '집사람이 유난히 추위를 타기 때문에 내 체온으로 미리 덥혀놓아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순간, 나도 그녀처럼 말을 잃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볼 일을 보고 엉덩이를 스스로 닦을 힘이 없어 남편이 그것을 대신 해줄 때, 남편은 그 순간에도 "하늘에 빌었어. 지안, 당신을 살려달라고. 당신이 살아서 내가 앞으로 50년 동안 매일매일 당신 엉덩이를 닦아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라고 말했다. 매순간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녀에게 슬픈 게 있다면, 이런 남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날이 너무 짧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이 평범하고도 헌신적인 남편은 어느날 두툼한 면양말을 사왔다. 끔찍한 고통 속에 누워 있는 그녀의 두 발에 양말을 신겨주었는데, 간신히 고개를 들어 발치를 보자 양쪽 양말에 각각 "불리불기不離不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헤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 짝이 다 있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양말에, 그토록 강력하게 의지를 새겨놓은 것을 보고 그녀는 결심한다.

 

"양말이라니, 마치 인생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지도, 삶을 포기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 서른과도 헤어질 수 없고, 나를 결코 포기할 수도 없다."

 

"불리불기" 이 말은 그녀의 기록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지다. 어쩌면 내일 당장 죽을 수도, 혹은 기적처럼 살 수도 있겠지만 어떤 시간 앞에서도 누구와도 헤어지지 않고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용기와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책과 함께 따라온 선물은 양말이었다. 책을 읽지 않고 양말을 봤을 때는 이 조합이 너무 낯설어서 혼자 킥킥 웃었는데, 지금은 열심히 신고 다닌다. 신발을 신으면 보이지도 않는 글귀지만, 누가 뭐래도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마음으로 양말을 신고 통통하고 포근한 어그부츠에 발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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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모메 식당의 여자들 -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나선 여자들의 속깊은 이야기 키친앤소울 시리즈 Kitchen & Soul series 2
황희연 지음 / 예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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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정신이 번쩍 들 때마다 고개를 흔들며 다른 길을 갔다. 사실 나는 너무 자주 다른 길을 갔다. 그래서 <카모메 식당의 여자들>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처음엔 크게 대단하다거나 동경한다거나 경이롭다거나 하진 않았다. 근데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새로운 에너지 앞에서 도움닫기를 하고 있는 여인들의 그 마음, 그 의지가 책 전체를 뒤흔들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여인들은 모두들 자신이 하는 일에 한창 만족을 하다가, 혹은 별 생각없이 계획없이 살다가 불현듯, 혹은 선택의 순간에서 갈피를 못잡다가, 그렇게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 앞에 서서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 이들이 시작하는 인생은 단순히 현재의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갈아타는 것만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었다. 어쩌면 인생을 다시 바로잡는 일이었다. '카모메 식당의 여자들'패션지 기자에서 한옥카페 주인으로, 전산실 프로그래머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특수학교 교사에서 인디 뮤지션으로, 패션 디자이너에서 동화작가로, 모두 인생을 트랜스폼 하는 여자들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별다른 계획은 없었지만 우연에 기대어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았던 나로서는, 직업을 바꾸거나 라이프 스타일을 새롭게 꾸려간다는 것이 그렇게 큰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왜?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되잖아. 그리고 "내 마음대로 스타일"은 직장생활에 익숙해지고, 나이가 더해지고, 결혼을 하면서 조금씩 어려운 일이 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부모님 밑에서 적어도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혼자 섰다는 자체만으로 스스로를 대견해하던 시절에는 물론 생활고도 있었고 고충도 많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는 고통 속에 있진 않았다. 하지만 직장에서 연차가 쌓이고 그에 준하는 포지션을 요구받고, 조직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새로운 가족들을 맞아 내 가정을 꾸리는 일까지 더해지다보니 나는 더이상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없겠다는 막연한 불안에 휩싸였다. 여기다 (만약에 만약에) 아이까지 생기면 이대로 영원히 내 인생 안녕. 불현듯, 숨이 꽉 막혔다.  

"내게도 아직 기회는 남아 있겠지?" 

익숙한 일상과 편안한 환경을 제발로 걷어차고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간 여자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내 심장을 쾅쾅 두드렸는지도 모르겠다.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을 멈추고 후진하거나 급커브를 돌아 신호등도 없는 곳을 내달린다는 것은 대단히 단단한 의지와 자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필요한 일이다. 그것을 "일단" 해낸 그녀들의 깊은 진심은 더 많은 "그녀"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부터 읽기 시작해 침대 위를 굴러다니며 새벽까지 붙잡고 읽어내려가다 마음이 선득선득해져서 혼자 맥주 한 캔을 땄다. "내게도 아직" 

전 회사를 그만둘 때 상사님의 상사님은 내게 "글을 쓸 생각은 없는가?" 하고 물었다.  

"아이고 저 따위가 무슨. 나중에요. 나중, 나중에."  

네, 나중, 나중, 나중에요. 저 아직 준비 중이거든요. 인생을 리셋하는 그 버튼 앞에 서서, 조금씩 조금씩 준비 중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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