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 운명조차 빼앗아가지 못한 '영혼의 기록'
위지안 지음, 이현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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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얘기하자면, 나는 시한부 인생을 별로 좋아라 하지 않는다. (?) 아, 시한부 인생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살아남은 사람이나 결국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 쓴 책, 혹은 기록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시한부'. 생각만 해도 무서운 말이다. 병을 얻게 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육체적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모든 기록들이 나는 너무나 무섭다. 그 기록들을 보면 자꾸만 '내가 만약'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만약'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어서, 이건 단순히 타자의 사건이 아니라 나의 고통으로 그대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특히 갖은 고생을 다 하고 이제야 겨우 인생이 피려고 하는데 별안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연을 보면 사는 게 다 무어냐 싶어 쉽게 회의에 빠진다.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읽었다. 순식간에 후루룩 읽어버렸다. 육체적 고통을 묘사하는 장면들은 차마 볼 수가 없어 건너뛰면서, 눈을 질끈 감고 읽어버렸다. 그런데 이야기에 빠져들수록 무서운 마음이 사라지고 되려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인생 뭐있냐,류의 회의가 아니라 당장 내일 아침에 내게 죽음이 와도 의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기 최면 같은 것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사실 책의 주인공이 어린 나이에 세계 100대 대학의 교수가 됐는데 병을 얻었다는 건 별로 중요한 지점이 아니다. 서울역 노숙자에게도, 위대한 교수에게도,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도, 갑작스레 닥친 병마와 죽음은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더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것 말이다.

 

인생을 산다는 그 '기회'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기회'라는 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앞으로 더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교수로서의 커리어? 자신의 아이를 끝까지 돌보는 절실한 모성?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욕망? 어쩌면 이 책을 써내려가는 순간의 그녀는 삶의 기회를 더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슬픔과 육체적 고통보다는 지금 당장 이 순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를 찾는 것에 더 골몰했는지도 모른다.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풀어나가면서도 언제나 그 안에서 작은 메시지를 끌어내는 그녀가 삶을 대하는 자세는 정말로 의연했다. 물론 누구나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는 없다. 당장의 치료에 따른 고통을 태연하게 감내할 수도, 가족들의 눈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녀도 그런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다만 그토록 절망적인 조건에서도, 삶의 끝에 와서야 이렇게나 많은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후회 속에서도 그것을 그저 후회로 남기지 않고 세상을 향해 말을 걸었다. 그게, 참, 의젓했다.

 

물론 가슴 아픈 순간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녀는 잘 때는 항상 벽을 보고 자야 하는 습관 때문에 침대 구석에서 자야 했는데 남편이 자꾸만 그 자리를 탐내며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서 매번 남편을 밀어내고 자는 게 참 귀찮았다. 남편은 병원 침대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했다. 간호사에게 '집사람이 유난히 추위를 타기 때문에 내 체온으로 미리 덥혀놓아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순간, 나도 그녀처럼 말을 잃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볼 일을 보고 엉덩이를 스스로 닦을 힘이 없어 남편이 그것을 대신 해줄 때, 남편은 그 순간에도 "하늘에 빌었어. 지안, 당신을 살려달라고. 당신이 살아서 내가 앞으로 50년 동안 매일매일 당신 엉덩이를 닦아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어."라고 말했다. 매순간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녀에게 슬픈 게 있다면, 이런 남편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날이 너무 짧다는 사실이 아니었을까.

 

이 평범하고도 헌신적인 남편은 어느날 두툼한 면양말을 사왔다. 끔찍한 고통 속에 누워 있는 그녀의 두 발에 양말을 신겨주었는데, 간신히 고개를 들어 발치를 보자 양쪽 양말에 각각 "불리불기不離不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헤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두 짝이 다 있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는 양말에, 그토록 강력하게 의지를 새겨놓은 것을 보고 그녀는 결심한다.

 

"양말이라니, 마치 인생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지도, 삶을 포기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 서른과도 헤어질 수 없고, 나를 결코 포기할 수도 없다."

 

"불리불기" 이 말은 그녀의 기록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지다. 어쩌면 내일 당장 죽을 수도, 혹은 기적처럼 살 수도 있겠지만 어떤 시간 앞에서도 누구와도 헤어지지 않고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용기와 의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책과 함께 따라온 선물은 양말이었다. 책을 읽지 않고 양말을 봤을 때는 이 조합이 너무 낯설어서 혼자 킥킥 웃었는데, 지금은 열심히 신고 다닌다. 신발을 신으면 보이지도 않는 글귀지만, 누가 뭐래도 스스로 의지를 다지는 마음으로 양말을 신고 통통하고 포근한 어그부츠에 발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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