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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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명의 수혜를 오랜 세월 동안 누린 서구의 한 젊은 학자가 히말라야 산맥

어딘가에 자리한 토착마을에서 16년 간을 그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1975년부터 시작한 그녀의 라다크 생활은 1991년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끝났지만

그 다음 해 [Ancient Futures]라는, 이름도 의미심장한 한 권의 책을 발간하면서

전 세계 '정신'들이 라다크에 주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국내에서 '오래된 미래'라는 제호로 번역출판된 이 책은 내용에 걸맞는 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하거려니와(재생용지를 사용합니다), 표지에 박혀있는 참으로

맑고 밝은 한 라다크 인의 웃는 얼굴이 또 많은 사람들의 정서를 건드렸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 중의 한 명이고, 본문 중 간간이 등장하는

이 '라다크의 미소'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게

해 줍니다. 이 한가지 효용 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이 책에서 여러가지 뜻을 찾아가셨으리라 생각되지만,

제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규모와 속도'에 대한 얘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많은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볼 수 있었습니다. 

- 규모와 속도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베이스는 '규모의 경제'입니다(이제는 자명한).

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시스템에는 브레이크가 없다는 애기를 누군가가

했던 것 같은데, 브레이크가 설령 있더라도 '후진'이 없다고 첨언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규모'라는 것은 작아지지 않는 것/계속 커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빅 사이즈 지향'의 단어입니다. 그것은 또 '속도'와 연결

되어있습니다. 더 커지기 위해 더 빨리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합니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시간은 시 단위에서 분 단위로 초 단위로 잘게 쪼개집니다.

현대(modern)에서 발명되고 이제 현대를 지탱하는 이 '시간'이란 재화는

곧 돈과 등가물이 된 지 오래인데, 역설적이게도 이 시간개념의 탄생은 시간을

절약하기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등장한 그 많은 현대의

시간절약기계들을 이용하여 남게 된 시간들로 인간의 삶을 구하지 않고, 시간을

아껴 또 다른 시간을 버는, 즉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빨라진 삶의 속도와 크고 무한히 성장하는 경제를 선()으로

생각하는 시스템-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선 '느림'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속도의 경쟁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합니다. 규모의 경쟁 속에서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거나 자신들을 위한 시간이

적어진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침대에 누이면서, 이 삶-이 자본주의 하의 삶-에 뭔가 빠진 게 있다고

중얼거려보는 것의 실체입니다. 100세대 남짓한 라다크의 사람들은 우리의 중얼

거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축지법과 다름없는 거리절약기계(차,비행기..)

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외치고 있으니 그것은 라다크인

들에게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선진국의 근로제도라 해도 주5일제 근무가 현재

까지 나온 고용조건 중 그나마 진보된 것이라 얘기되곤 합니다. 그러나 그래봐야

1년에 9개월은 일하고 3개월을 쉬는 것입니다. 라다크 사람들의 근로조건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의 속담에도 있듯이 땅이 녹색일 때 쉬지않고 일하는 라다크

사람들의 '업무'시간은 3~4개월입니다. 나머지 8~9개월은 축제와 잔치를 벌이는

휴식과 충전의 시간입니다. 일은 모두 협업입니다. 가축을 최대한 이용하고

자연의 속도에 삶의 속도를 맞춥니다. 이들의 삶의 속도는 느슨하고 평안합니다.  

규모가 100여 세대 밖에 안되는 것은 전통적인 라다크의 일처다부제와 티벳승원

제도에 기인한 것입니다. 남여 비율이 반반인 라다크에서 일처다부제는, 결혼

하지 않는 여자 혹은 남자가 비구니 혹은 비구로 가는 경우의 수가 적지않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티벳승원이 계속 유지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작은 세계-장소에서는 전체 상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전체 상의 이해란 것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지리적 특징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경제와 정치생활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 지, 그래서 그 시스템 속에서 나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

인지에 대해서 더 잘 알 수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거대한 기업이라해도

결국 잘게 잘게 쪼개어 최소화된 단위인 '팀'이라는 소수의 무리들로 분화되는

이유도, 그 작은 시스템 안에서라야만 자기 몫과 역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몫과 역할을 깨달을 때 자기 삶을 보다 능동적

으로 컨트롤하기 시작합니다. 능동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라다크

에서는 일곱살 난 아이도 자기 몫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기의 일을 결정

합니다.  

규모가 작다는 것은 또한 여성의 권한을 강화합니다. 작은 규모의 경제인 라다크

는 자급자족 경제이기 때문에 농업이 가장 중요합니다. 모든 일은 마치 우리의

두레나 품앗이처럼 협동작업이고 그래서 서로서로가 갈등없이 잘 지내는 것이

'먹고 살기위해서라도' 무엇보다 중차대한 일입니다. 가족, 마을 공동체와 잘

지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라다크의 남자들은 가부장적 가장이 없습

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도시처럼 분화된 직종과 정치/경제의 공식적 활동

무대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대소사는 비공식적 루트에 의해 이루어지며,

살림이나 아이를 키우는 지식, 땅과 가축들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여성들이

'main'입니다. 역사적 흐름에서 현대 도시 여성들의 지위가 낮아진 것은(그렇게

보이는 것은), 살림이 하나의 중요한 '사회적 직능'으로 인정받지 못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남성이 'main'이 되는 '공식적 부문'이 점차 확대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위축/축소되었습니다. '노인'이란 용어는 공식적 부문에서

밀려난 남자를 말합니다. 나이를 먹으면 할머니에게 홀대받는 할아버지가

많아지는 것은, 노인들이 비공식적 장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main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남성들 만의 독점적 사회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다크에서는 남녀가 서로 조화롭게, 오히려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여성이 사회적 약자가 아닌 사회-그 곳에서 남성은 불행할까요?

흰 이빨을 반짝이며 구김살이라곤 없이 소년처럼 웃는 라다크 한 할아버지의

얼굴이 이 우문(愚問)을 무색하게 합니다. 

- 국민총생산 = 국민총행복 ? 

GNP(국민총생산)를 흔히 국부와 사회복지의 척도로 보는 게 경제학의 기본적

관점이지만, 이 관점으로 국민의 진정한 행복을 달아보긴 역부족입니다.

GNP라는 것은 돈이 사람 손을 건너갈 때마다 커지는 것이고, 그 커진 만큼

더 부유해졌다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지구오존층을 파괴하는 무분별한 벌목행위도 국부를 키우는 행위

이고, TV나 귀중품을 훔치는 절도행위도 새로운 TV와 귀중품의 수요를 만든다

는 점에서 또 국부를 키우는 일이며, 물이 오염되어 생수를 사먹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도 역시 돈이 오가기 때문에 국부가 커지는 일이 되며, 심지어

경쟁만 있는 현대사회에서 얻는 정서불안과 스트레스도 그것을 치료하는 행위

자체가 돈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또 국부를 키운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GNP를 올립니다. 따라서 국민총생산은 곧 국민총행복과 등가물

이 될 수가 없습니다.

GNP가 미국 슬럼가 빈민층의 수준 이하임에도, 느끼는 삶의 충만감과 만족도는

-GNP로 따진다면-족히 3만불 이상일 라다크의 사람들에게, 삶의 행복이라는 근본적

인 감정이 메트로폴리탄의 사람들에게 결여되어있다는 것은 불가해한 일입니다. 

 

-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단 말입니까?" <체링 돌마> 

 

서구사회에서는 나이가 차면 독립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소위 진정한 어른이

되는- 필수적 과정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호지도 라다크

에 오기 전 이러한 서구적 가족관에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을 넘게

생활하고 관찰한 결과 그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대가족과 친밀한 작은 공동체야 말로 성숙하고 균형 잡힌 개인을 만들어내는
보다 나은 기초다. 건강한 사회란 각 개인에게 무조건적인 정서적 지지의 그물
을 제공하면서 긴밀한 사회적 유대와 상호의존을 권장하는 사회다" 

고립된 섬과 같은 도시인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주변사람들과 끊임없는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는 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체화되어있는

이 라다크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글을 우리말로 옮긴 역자

의 아래와 같은 해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미래는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 

오늘 우리의 웰빙 바람, 생태환경에 대한 관심, 여성주권의 회복, 지속가능한

개발 등.. 마치 과거에는 없었던 가치인마냥 새로 산 운동화처럼 반짝반짝한

많은 현대의 트랜드들은, 이미 라다크에서는 '오래된 것'들에 불과하며

자연질서와 우리/우리 서로 간/그리고 우리와 지구 사이에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이었음을 깨달아 주길-그것이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얘기하는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의 요청입니다.

그 요청에 기꺼이 그러나 거짓없이 응할 수 있게 되길.-라다크의 미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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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불온한가 - B급 좌파 김규항, 진보의 거처를 묻다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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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픕니다. 이 책은.

별 생각없이 편안하게 집어들었다가 흠칫 놀라 바로 앉게 되는 그런 책입니다.

이 아픔은, 시사와 역사에 대한 저의 무지함에서 비롯된다기 보다는, 이것이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이다라고 알고있던 사실과 지식이 한쪽 눈은 가린 편협한 시민계급의 이익에

기반한 것이다라는 자각에서 비롯됩니다('계급'이란 개념은 자본론의 기본용어인데 이것이

이렇게 낯설다는 것 자체가 계급구조에 함몰되어있다는 증거일까요). 그래서 그냥 아픈 게

아니라(한번 아프고 마는 '양심 주사'가 아니라), 이 책 이후에 앞으로 어디에 서 있을

것인지를 스스로 되물을 수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가치관의 재수립을 요구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일개 평범한 한 사람이 몇십년간 다져 온 자기 발 아래 땅이 사실은 비만 와도

푹 꺼지는 연약지반임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그 자리를 떠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지금 현재의 노무현 정부를 만든 것은 흔히 시민의 힘, 시민 혁명의 힘, 개혁의 힘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시민의 행동으로 나타나면 종종 촛불집회의 형식을 빌고, 2002년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여중생 사건 추모 집회에서부터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반대시위,

그리고 작년에 있었던 국가보안법 반대 시위까지 시민의식, 시민행동이 사회 변화에

추동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모르는 사람들과도

어깨을 섞으며 광장으로 몰려나왔던 시민들은-이 '계급'은, 동참하지 않는 자들의 자의식

박약을 비난하기도 했고 행동하지 않는 지성들의 무용성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들의(혹은 저의) 행동은 사회적 정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이슈/사건일

때만 요란했습니다. 예컨대 미선이와 효순이의 참혹한 주검이 인터넷에 '떴을' 때-핫이슈가

되었을 때 그러했고, 2004년 말 밀양에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이 이슈화되었을 때도

그러했습니다. 그 희생자들은 물론 위로받아 마땅한 우리의 혈육들이지만 언론의 초점과

사회적 이슈는 이렇듯 화제가 될 만한 사건/사고에만 포커스가 맞추어졌고 네티즌과 시민

들은 이렇듯 자극적이고 쉽게 분노할 수 있는 이슈에만 집중했습니다. 미선이와 효순이의

억울한 죽음을 규탄한 바로 그 광장, 그 자리에서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다 농업을 살려

내라 외치다 경찰의 방패에 찍혀 나간 노동자/하층계급의 상시적 투쟁(생계형)을 우리

(시민계급)는 우리의 문제로 '문제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시민계급)

몫이 아닌 것으로, 즉 울타리 밖의 일로 묻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김규항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장에 나가는 사람들의 분노를 존중한다. 그러나 광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가 분노가 적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사양한다. 분노가 적어서가 아니라 분노가

넘쳐서 광장에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를 목말 태우고 촛불행진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광장에서 1년 내내 방패에 목이 찍혀 넘어가고 군화에 배를

차여 피를 싸대고 몸이 얼어붙는 날 물대포에 맞아 주저앉는 사람들에게 분노가 적다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계급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만으로도 김규항의 이 책은 충분히 의미심장

하며,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아픔을 어디까지 체화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가시이자 열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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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물은 향기가 없다 - 이용재가보는 김원 건축이야기
이용재 지음 / 책으로만나는세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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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소장님의 광장건축에서 건축실무를 하시고 주요 건축 매거진의 편집장을 거쳐 출판사업에,

 심지어 택시기사직까지-그야말로 '다채로운' 경력의 저자가, 한 건축가의 건축행보와 작품에

 포커스를 맞추어 풀어낸 이야기입니다. '김원이즘'이란 용어까지 쓸 정도로, 한 때 모셨던 선생에

 대한 외경심을 표현하면서도 그것을 매우 간결하고 수수한 단어와 문장으로 '끊어치기'때문에 글이

 무겁지 않고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핵심 메세지는 잘 살리고 있습니다. 건축 경력이 20년 이상

 이면 자기 얘기를 할 법도 한데, 저자가 굳이 현 건축계의 원로이자 유명 건축가 중 한 분을 대상

 으로 글을 쓴 것은 거인 어깨 위에 올라탄 난장이 격의 이득을 취한 것이라기 보다는,

 건축보다는 디자인으로 / 공간감보다는 형태감으로 / 건축 자체보다는 건축에 대한 간섭하기로 /

 사람의 목소리보다는 건축가의 목소리를 더 내세우는 오늘 우리 건축계의 허허스러운 모습을 지적

 하기 위해 택한 보다 효과적인 수단으로 보입니다. 특히 건축평론가(비평가)에 대한 저자의 일갈은

 최근 들어 건축하는 능력보다는 말과 글의 재주가 더 뛰어난 고학력자들이 계속해서 늘어가고 있는

 현 세태를 정확하게 꼬집고 있어 '한 때' 그 무리에 속해있던(지금도 완전히 빠져나오진 못한) 제

 자신에게도 좋은 회초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질책은 과거 '겁도 없이' 건축비평을

 해대던 자기 자신의 젊은 날 치기어린 모습에 대한 자성이기도 합니다.

 "건축비평을 논하기 전에 건축은 아는가. 건축가들이 죽어라고 노력해서 하나 빚어놨더니 건축도

모르는 젊은 친구들이 몰려들어 난리다. 건축 똑바로 하라고..(중략)..건축을 모르는 글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아니 자기도 모르면서 남들을 가르치려 하다니, 이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제발 이

제 그만 하자. 건축가는 그래도 최소한의 면허는 갖춘 사람들이다. 그러나 건축계 글쟁이들은 최소

한의 통제장치도 없다. 자신의 흥에 겨워 불쌍한 건축가들을 공격한다.(하략)"

이 책을 쓰기 위해 김원소장님과 많은 인터뷰를 하셨고 그래서 책 내용 전반에 걸쳐 그 상황에 속해

있지 않으면 결코 알 수없는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실려있습니다. 한국종합전시장(코엑스)

설계 경기에 얽혀있는 얘기와 독립기념관의 설계 경기를 할 때 등, 현실 정치와(정확하게 말해 정치

권력과) 건축이 얽혀있는 과거 얘기들을 읽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비록 김원소장님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으나, 이용재씨가 말하고 싶은 건축 이야기-건축의 근본-는

아래와 같은 김원 소장님의 발췌된 어록이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젊었을 때 한국에서 건축가는 교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선종도 좋다고 생각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지금은 교종이고 선종이고 그게 모두 그것 아니냐 하는

생각입니다. 결국 차이는 밥을 먹되 숟갈로 먹느냐, 젓갈로 먹느냐 정도의 것이지 밥을 는 것은

한가지다..(하략)"

 즉, 저자는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김원에게 자재는 중요하지 않다. 색깔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드만 있으면 된다. 질서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어차피 무의미한 일들이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저자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합니다. 이런 건축관을 100%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건축이 무엇인지 몸으로 알게된 자의 말들은 항상 경청할 만한 합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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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장강의
고야마 히사오 지음, 김광현 옮김 / 국제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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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마히사오라는 분이 저술한 건축책입니다.

history, theory쪽과는 거리가 먼, 건축을 건축 그 자체로 있게하는 근본적인
요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건축에 대한 관심과 독서를 얘기할 때, 보통 학생 때는 시각적으로 어필하거나

 혹은 어려운 이론/역사 쪽을 다루는 텍스트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적욕구가 강한 때고 논리적인 무장을 자의/타의로 요청받기 때문겁니다.

그런데 졸업하고 건축실무를 오래 접하다 보면 사실 그런 건축의 이론적인 부
분이나 시각적인

부분들은 거의 관심사에서 사라집니다. 그럴만한 여유가 있기에는 삶에 너무 옥죄어있고 또

건축실무라는 것이 그런 지식 자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건축행위(그것이 건축에 대한 논쟁이든, 설계행위든 건설행위든)에서도 그런 류의

이라는 것은 무용하거나 심지어 해악을 끼치는 경우도종종 생깁니다. 현실에 등돌린 이론의

껍데기에 자신이 포장되어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채 상아탑에서만 간신히 유효한 소위 담론

이라는 것으로 건축 인생을 살아가시는 분도 적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론과 역사가 건축현실에 등돌리지 않고 의미있으려면, 실제 건축행위를 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연관을 맺고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고야마히사오의 이 책은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건축하는 행위를 위대하게 볼 수 있다고 쉽게

그러나 힘있게 얘기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건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실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히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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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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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그린이 끈이론 자체를 완성한 사람은 아닙니다. 시공간을 찢는 플럽변환이란 아이템

 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이고(그렇다고 하고), 끈이론 내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

 한 사람 중의 한명입니다.

아마 현대 물리학의 빅스타들-에드워드 위튼, 리차드 파인만, 스티븐 호킹..-그룹에 포함시키

 기에는 네임밸류가 약간 떨어지는 듯 하지만, 그러나 난해하기 그지없는 현대 물리학의 가장

 첨단 이론인 초끈 이론과 M이론을 그 누구보다도 가장 탁월하게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여 대중

 화시킨 사람입니다. 제가 볼 때 바로 그 이유가-그의 책이 가장 알기 쉽다는 것이-, 이 책이

 근간 자주 거론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굉장한 책이라고 밖에, 그 어떤 수식어로도 이 책의 가치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내가 가진 지식 베이스에 물리학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 책을 만난

 이후로 물리학 특히, 현대물리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잡았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지구,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들의 경이로움, 그리고 사물의 존재 이유를 파헤치는 인간

 지능의 경이로움.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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