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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웨잇...
제이슨 지음 / 새만화책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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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의 외침, “Hey, Wait..” 그러나 이미 비욘은 몸을 날렸고 그 다음 페이지 6개의 칠흑

같은 프레임이 욘의 경악, 고통, 절망, 그리고 어른으로 훌쩍 커버리는 한 어린 소년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이 책을 다 본 지금에서 그런 느낌의 의미심장함

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제이슨이란 가명을 쓰는 노르웨이 만화가 욘 아네 새테뢰이(John Arne SæterØy)가 그린

[헤이 웨잇(Hey, Wait)]은 이처럼 한 페이지 당 6칸의 프레임 형식을 고수하면서 그 6칸

으로 때로는 6분을, 때로는 6시간을, 또 때로는 6년 이상의 시간과 공간과 장면을 매우

간결한 모노톤과 라인을 통하여 압축해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거의 대사가 없이 장면들

을 밀도 있게 눌러 담은 각 프레임들은 통상적인 경우, 그 함축성과 은유적 특성 때문에

독자의 자유 해석, 임의적인 상상을 유도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제이슨의 6칸 프레임은

오히려 그런 서투른 상상의 고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상징도 없으며 직설적

고 적나라한 현실의 삶과 일상의 소소함들을 소재로 하여 잘 짜여진 스토리텔링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어 마치 연극의 미장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고만고만한 가정에서 태어난 욘과 비욘은, 꿈 많고 행복

던 평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충동적인 내기에서 비롯된 한 아이의 죽음과 그 죽음을

결국 자신이 죽을 때까지 끝까지 벗어버리지 못했던 남겨진 아이의 삶의 흐름이 담담히

그려지고 있는데, 여러 가지 즐겁고 활기 찬 사건들이 묘사되는 책 전반부를 지나, 친구

의 죽음이 곧 자기 유년 시절의 끝장이자 꿈이 없는 무미건조한 어른으로 변화되는

포인트가 되는 책의 후반부는 나사를 깎는 일이 자기 업이 되어버린(어린 시절 그토록

되기 싫어했던), 사는 일에 지친 한 어른의 남은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책을 본 한 유명작가는 “조심하세요.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당신의 마음에 상처를

줄지도 모릅니다” 라고 했다는데, 아마도 어떤 상처와 추억과 상념들을 가진 ‘나’인가에

따라 이 단순하면서도 직설적인 그림들을 보는 각각의 놀라움과 전율과 그리고 슬픔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이 만화책을 품평하는 것 자체가 별로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지 권해줄 수 있을 뿐, 더 이상의 제 감상을 적는 것은 좀 부질없을 것 같습니다.

그처럼 이 책은 이 책을 읽는 각 개인들에게 지극히 자신 만의 상념에 빠져들 수 있는

기회 그 자체라고도 생각이 되는군요. 만화라는 표현 매체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분일

지라도 가능하면 한번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나름대로 적지 않은 책과 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지식만화들을 두루 섭렵해왔다고 생각하는 데, 이 책은.. 글쎄요 좀 다르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군요. 일테면 지식만화를 먹기 좋게 잘 비벼낸 비빔밥이라 한다면,

이 만화책은 적절한 처방을 가진 한약과 같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약은

에 쓰지만 우리 몸의 안좋은 구석을 치료해주듯 이 책을 그렇게 소화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으로 만화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2002년 하비상(Harvey Award)을 수상했고

그 외에도 이그나츠상(Ignatz Award) 노미네이트, 2000년 노르웨이 만화상 수상 등,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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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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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FLP)에 의해 지난 3월 14일 납치되었던 KBS 용태영 기자

님이 납치 하루 만인 3월 15일 풀려났다는 다행스러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행여 자식

을 잃을까봐 노심초사하셨을 용기자님의 부모님들이 이제 제대로 숨을 쉬시겠군요.

(용기자님은 그 와중에도 자신의 납치사실을 알린 외신보도에 대해, 취재해야 할

사람이 되려 취재를 당했다고 송구스럽다고 하며, 풀려나자마자 바로 두바이로 향했

다는 군요.. 일생의 큰 사건이었을 텐데, 조금 쉬셔도 될 것을..).


이번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외국인 납치 사건은 이미 잘 보도되었듯, 팔레스타인

관할 교도소에 수감되어있던 PFLP 지도자 아메드 사다트를 팔레스타인 하마스 정부

가 석방하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스라엘 정부군이 헬기와 탱크, 불도저를 동원해

기습한 사건에 의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무력시위에 대항할 수 없었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외국인을 미끼로 전 세계에 이스라엘 공격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던 것

인데,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경비원 2명이 죽고 20여명의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지난 반세기 이상을 도저히 화해될 수 없는 극단의 대립과 긴장 속에서 대치하고 있

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 분쟁의 씨앗이 기원전 13세기 모세의 출애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시대의 지난한 문제 앞에, 해당 당사자도 아닌 동양의 한 인간으

로서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과, 그 분쟁 속에서 고통 받고 있을 아랍인들

에게 품는 연대감이 ‘남의 나라 일’을 남의 일로 가벼이 넘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


‘조 사코Joe sacco’라는 미국인 만화가가 그린 [팔레스타인]은 바로 그런 팔레스타인

과 이스라엘의 종교/정치적 갈등 속에서, 여전히 빈곤하고 위태한 삶을 이어나갈 수

밖에 없는 현재 진행형의 팔레스타인 주민-그 평범한 사람 하나하나의 일상을 매우

적나라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만화책입니다.


처음에 이 만화책을 알게 되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조 사코가 실제 이 만화책을

그리게 된 것이 걸프전이 발발했던 즈음의 1991년 말, 두 달 간의 팔레스타인 경험

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사실 책 내용의 신뢰도에 반신반의했었습니다. ‘고작 두 달을

살아보고’.. 라는 경험치에 대한 선입견 이었을 것인데, 책을 다 읽고는 그 두 달로도

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 두 달은 아마 최초의 팔레스타인 민중의 인티파

다(Intifada:민중봉기)가 일어났던 1987년 이후 현재까지 20여년간 이스라엘 정착촌

유대인과 군대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했던 그 모든 억압이 그대로 농축되어있는

시간이었으니까요.


추측컨대, 일제 치하 식민속국이었던 우리나라의 과거 어두웠던 암흑기도, 이들 팔레

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상황보다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초의

인티파다 이후 오슬로 자치안이라는 평화조약이 체결되는 1994년까지, 8여년에 걸쳐

약 1400여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살해되었고, 그 중 어린아이가 400여명에 달합

니다. 1년에 170여명. 이틀에 한 명 꼴로 이스라엘 정착촌 유대인 혹은 군인들에게

속절없이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강제 철거명령서를 앞세워 탱크로 집을 밀어버리는

군인들에게 욕을 했다든지, 하는 정도의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총탄 세례를 받은 12

살짜리 어린애가 있는 바에야, 그 어디에서 그 무자비한 살육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

을까요. 가나안의 땅을 되찾으려는 그들의 명분은 ‘신의 약속’이라 하는 데, 그 지독

한 성스러움 앞에서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역사적인 이/팔 분쟁의 원인과 동기 등을 굳이 분석하지 않더라도, 설령 그 어떤 성

스러운 동기가 있었다 할지라도(그런 것은 단연코 없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극렬 시오니즘의 주창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

인 사람들에게 가했던, 그리고 지금도 가하고 있는 그 모든 억압과 통제, 폭력은 결

코 정당화될 수 없다. - 이것이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당연하나 아주 손쉽게 잊혀

지는, 교훈입니다. 사회계급의 문제에서도 그렇듯, 국가간 힘의 계급 문제에서도 역시

아래에 처한 자의 자리에서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 보다 진실을 잘 볼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고, 이 책은 그런 세상 보기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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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성과 건축
데이비드 와트킨 / 태림문화사 / 198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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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학이, 역사주의로 대변되는 전체주의적 시대정신의 논리를 강요하게

되면서 작가 개인의 상상력과 창조적 능력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예술은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묶을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개인들의 창발력이

여러 가지 색채로 덧칠해져 형성되는 것이다.”


이 책 결론부의 가장 마지막 문단을 대략 의역해보면 위와 같은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액면 그대로의 이해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이 책을

다 읽고 손에 쥐게 되는 유일한 한 가지 결론입니다.


사실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위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퓨진에서 시작해서 펩스너로 끝나는 그의 논증은 주로

이론가와 건축가의 텍스트 혹은 말을 가지고 요리하는 비평론에 일종인데,

매우 자세하게 각각의 텍스트를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해당 서적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을 온전하게 읽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결론이 담고 있는 의미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았)습니다.

시대정신을 자기 작업의 기반으로 딛고 서있는 작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게다가 ‘주류’입니다), 근대문명과 근대건축이라는 당시의 절대적 가

치관과 흐름이 지금에도 살아있음에, 그것을 거스르는 흔치않은 ‘문제작’이었

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두고 당시 일어났던 건축(학)계의 갖은 논쟁과 비난,

그리고 격려 등이 이를 증명합니다.


와트킨은 건축을 해석하는 관점을 크게 보아 세 가지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종교, 사회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 하나고(영국), 시대정신으로 보는 경향이

또 그 하나며(독일),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마지막 하나입니다(프랑

). 이 세 가지 관점은 그러나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와 배려-건축의 근본-

가 고려되지 않고, 건축을 만드는 건축가의 개인 의지 또한 고려되지 않았다

는 측면에서 와트킨에게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종교적 관점의 건축은 건축을 진실 혹은 거짓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인간에

게 적용되는 도덕적 기준-예컨대 사람을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이 건축

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는 솔직해야

한다’, ‘재료는 정직하게’ 등.. 1930년대의 마스터 건축가와 현대의 건축가들

이 목소리 높이는 소위 근대건축의 교리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무생물

에 인간만의 특성, 감정을 부여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Pathetic Fallacy라 합

니다. 저는 이 ‘무생물의 인격화’야말로 근대건축의 -더 정확하게 말해 근대건

축 정신의- 가장 큰 오류라고 생각하고 와트킨 역시 이 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독일 건축가, 건축이론가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파되었던 ‘시대정신(Zeit-

geist)역시 근대건축의 큰 오류로 비판받는데, 와트킨은 어떤 일정한 시대의

매우 주도적인 사상이나 현상으로서 시대정신이란 용어를 쓸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일 개인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

라, 다만 하나의 유행으로서 가볍게 받아들여진다고 하여 이 무겁고 심각한

용어의 의미를 희석하고 있습니다.


시대정신과 도덕적 기준 등으로 건축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결국 전체주의적

사고로 빠지는 게 역사적 진실입니다. 한 개인의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접근

으로서 건축이 아니라, 어떤 이데아(Idea)나 집단무의식, 보편적 가치 등이

그 스스로 구현되기 위한 하나의 숙주로 인간을 취급하는 것-이 익명성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비단 건축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 끼친

폐해는 매우 크다는 측면에서, 와트킨의 비판의 요점이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PS) 이 책의 국역본은 무척 읽기 어렵습니다. 와트킨이 쓰는 용어들이

그렇게 어려운 영어가 아님에도, 그가 거론하는 텍스트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애초에 읽기가 쉽지 않은데, 번역된 국문마저 매우 난해하게 번역되어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추후 보완된 개정판이 나오길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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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건축의 실패
BRENT C.BROLIN / 기문당 / 198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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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건축은 왜 실패하였는가 ]란 제호로 번역 출판된 Peter Blake의

[ Form Follows Fiasco: Why Modern Architecture Hasn't Worked ](1974)와 종종 혼동되기도

하는 Brent C.Brolin의 [ 근대건축의 실패<원제: The Failure of Modern Architecture>](1976)는,

서구 건축사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건축의 흐름 중 에서, 그 전체성이나 영향력, 그리고 양식

적 측면에서 전무후무했던 ‘근대건축(Modern Architeture)’에 대한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인

비평서 중 하나입니다(의외로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서구 근대건축을 다루었던 그간의 많은 건축 잡지들의 특집 시리즈들은 거의 언제나

이 서양의 건축 운동이 현재 이 땅에 여전히 유효하므로, 그 가능성을 캐내어 부흥

시켜야 한다는 류의 결론으로 끝맺곤 합니다. 시기적으로 1920년대~50년대 즈음의

근대건축운동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문명에 대한 비젼, 공리적인 사회적 메니페스토

(manifesto), 마스터라 불리며 존경받았던 위대한 건축가 상 등이 그 캐내어야 할

보고로 설명됩니다.


그리고 흔히 ‘1% 건축가집단’으로 명명되는 이 땅의 주류(이른바) 건축가들 역시 멘토

mentor로 손꼽는 건축물, 건축가는 지난 세대의 거장과 그 거장들이 만들어 낸 근대

건축물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르 꼬르뷔제가 그렇고 로스 등이 그러

하며, 또 라빌레뜨와 로스 하우스 등이 그렇습니다.


그 어떤 시대의 건축이라도 그것의 평가는, 그 당대에서 완전하게 소진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진행형 평가를 받으며, 나름의

‘교훈’과 ‘가치’로 값이 매겨지는 데, 그것이 인간 사회에 의미심장한 이익을 주었을 때

가치가 있다 하고, 시행착오와 같은 것이 되었을 때 교훈적이라 합니다.


지금부터 반세기도 훨씬 전의, 게다가 우리의 경우는 수입된 케이스인 이 서구의

열병 같은 건축의 경향을, 단지 지금 이 시대 건축의 근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소위 엘리트 건축가의 선호도 때문에, 그 가치만을 들여 다 보겠다 하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감동을 주는 근대적 공간들이 주는 가치만큼이나 거주인들의 크나큰

불편과 재산적 손실을 초래했던 근대건축의 양상 또한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근대건축 운동이 하나의 세계적 흐름이 되어 어떤 거스를 수

없는 강령, 교리같은 것이 되어 온(지금도 여전히 건축은 시대정신의 구현이고

도덕적 요청이다라고 정의되지 않습니까) 역사를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건축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사용인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건축 형태와 공간, 재료,

구조와 같은 무생물/물리적 측면에 어떤 ‘도덕적 척도’를 주기 시작했다는 것, 이 사실

자체로도 뭔가 건축의 길을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브롤린의 이 책은 바로

그런 근대건축 첫 단추의 잘못된 시작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 지에 대해

그야말로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테면, 근대건축에서 장식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근거를 진화론에서 따오는

논법이 그 중 하나입니다. 진화론의 명제인 ‘물리적 환경이 생물의 삶을 결정한다’는

것을 ‘환경을 바꾸면 사람들도 그 환경에 맞추어 변화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변형했

고, ‘쓰는 기관만 남게 된다’는 용불용설을 ‘쓸모없는 장식은 제거 된다’라는 식으로

치환하여 건축에 장식이 배제되는 것이 곧 건축의 진보라 얘기했습니다. 이런 류의

비건축적 논리를 건축의 논법에 구겨 넣어 당시 신흥중산층 클라이언트들을 교묘히

설득했습니다. 즉, 건축을 진리냐 그렇지 않은 것이냐에 대한 흑백의 가치 판단으로

몰아쳤던 것입니다. 건축을 하나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선악의 문제로 만들었던

것 -바로 이것이 근대건축과 근대건축가가 사회적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근본 이유

중 하나라고 브롤린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래와 같은 근대건축 주창자의 목소리가 복음으로 들리지 않고 그 진의가

심히 수상한 분들께 - 이 책을 권합니다.


“명쾌함이란 건물의 목적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그 구조를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직성을 도덕적 의무라고 간주할 수 있다.”

                                                      - Marcel Bre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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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김대중 옮김 / 새만화책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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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Persepolis란 고대 이란(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를 말합니다.

 이란 왕조의 후손인 저자가 책의 제목을 이렇게 지은 것은, 자신의 조국이 고대에 누렸던

 번성을 오늘에 되살린다는.. 국민헌장식 사명감이라기 보다는, 서구의 안전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록 너무나 위험하고 살기 어렵게 보이는 조국이지만,

 자기 나라에 대한 진한 애정은 여전히 공고함을 웅변하는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을 이 책을 덮으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르잔 샤트라피는 저와 동 세대이기도 합니다. 저자가 이란, 자기 조국에서 이슬람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을 10살 언저리에서 겪고 있을 때, 저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광주민주항쟁을 겪었습니다. 다른 게 있다면 그녀에게 그 '사건'들은, 맞은 편 집에 살던

 자기 친구와 그 가족들이 미사일 폭격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말그대로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체감현실이었던 반면, 제게 80년대는 초등학교 옆에 앉은 짝꿍의 연필이나 탐내는,

 중세 시대'였다는 점입니다. 그 동 시간대에 광주에선 미사일 폭격과 다름없는 짓들이

 저질러지고 있었는 데 말입니다. 

 마르잔은 아트슈피겔만의 [쥐]를 보고 영감을 얻어 이 책-만화-을 썼다고 합니다.

 만화라는 것은 워낙 시각적 메세지 전달 효과가 뛰어나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을 활자로

 읽으면 50% 이해할 것을 그림으로 보면 120% 확대해석할 위험이 있기도 하지만, 흑백의

 시종 담담한 그녀의 그림들은 어떤 곡해나 오판의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흔히 '미국VS중동'에 대한 거대 담론-국가 간의 문제, 정치 혹은 경제적 패권, 테러리즘,

 종교 갈등-의 차원에서만, 그것도 잘 포장된 수구언론과 서구제국주의에 복무하는

 가공된 방송정보로만 접하게 되는 중동의 현실에 대해, 그 전쟁의 포화와 계급 갈등의

 혼란 속에서 살아가야되는 한 인간의 일상과 목소리를 들여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가치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그간 이란,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에 대한 정치적 이슈들은

 지나치게 서구 열강들의 주목을 받아왔지만(그 관심이 석유자원 때문이었다는 것은 이제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정작 그 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서는 또 지나치게

 경시되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광주항쟁에서 보아왔던 그 폭력과 공포,

 갈등의 2배 이상은 될 법한 사회적 혼란이 일상이 되어버린 그 곳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즐거움과 노여움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지금도 현재형인-이,  중동을

 바라보는 이 책 이전의 제 편향된 시선을 바로잡아 줍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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