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성과 건축
데이비드 와트킨 / 태림문화사 / 1988년 9월
평점 :
품절


 

“예술사학이, 역사주의로 대변되는 전체주의적 시대정신의 논리를 강요하게

되면서 작가 개인의 상상력과 창조적 능력은 무시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예술은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묶을 수 없는 예측불가능한 개인들의 창발력이

여러 가지 색채로 덧칠해져 형성되는 것이다.”


이 책 결론부의 가장 마지막 문단을 대략 의역해보면 위와 같은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액면 그대로의 이해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이 책을

다 읽고 손에 쥐게 되는 유일한 한 가지 결론입니다.


사실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위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퓨진에서 시작해서 펩스너로 끝나는 그의 논증은 주로

이론가와 건축가의 텍스트 혹은 말을 가지고 요리하는 비평론에 일종인데,

매우 자세하게 각각의 텍스트를 헤집고 다니기 때문에 해당 서적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을 온전하게 읽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한 결론이 담고 있는 의미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았)습니다.

시대정신을 자기 작업의 기반으로 딛고 서있는 작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며(게다가 ‘주류’입니다), 근대문명과 근대건축이라는 당시의 절대적 가

치관과 흐름이 지금에도 살아있음에, 그것을 거스르는 흔치않은 ‘문제작’이었

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두고 당시 일어났던 건축(학)계의 갖은 논쟁과 비난,

그리고 격려 등이 이를 증명합니다.


와트킨은 건축을 해석하는 관점을 크게 보아 세 가지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종교, 사회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그 하나고(영국), 시대정신으로 보는 경향이

또 그 하나며(독일), 과학,기술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마지막 하나입니다(프랑

). 이 세 가지 관점은 그러나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와 배려-건축의 근본-

가 고려되지 않고, 건축을 만드는 건축가의 개인 의지 또한 고려되지 않았다

는 측면에서 와트킨에게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종교적 관점의 건축은 건축을 진실 혹은 거짓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인간에

게 적용되는 도덕적 기준-예컨대 사람을 죽이지 말라, 훔치지 말라..-이 건축

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조는 솔직해야

한다’, ‘재료는 정직하게’ 등.. 1930년대의 마스터 건축가와 현대의 건축가들

이 목소리 높이는 소위 근대건축의 교리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무생물

에 인간만의 특성, 감정을 부여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Pathetic Fallacy라 합

니다. 저는 이 ‘무생물의 인격화’야말로 근대건축의 -더 정확하게 말해 근대건

축 정신의- 가장 큰 오류라고 생각하고 와트킨 역시 이 점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 독일 건축가, 건축이론가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파되었던 ‘시대정신(Zeit-

geist)역시 근대건축의 큰 오류로 비판받는데, 와트킨은 어떤 일정한 시대의

매우 주도적인 사상이나 현상으로서 시대정신이란 용어를 쓸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일 개인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

라, 다만 하나의 유행으로서 가볍게 받아들여진다고 하여 이 무겁고 심각한

용어의 의미를 희석하고 있습니다.


시대정신과 도덕적 기준 등으로 건축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결국 전체주의적

사고로 빠지는 게 역사적 진실입니다. 한 개인의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접근

으로서 건축이 아니라, 어떤 이데아(Idea)나 집단무의식, 보편적 가치 등이

그 스스로 구현되기 위한 하나의 숙주로 인간을 취급하는 것-이 익명성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 비단 건축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 끼친

폐해는 매우 크다는 측면에서, 와트킨의 비판의 요점이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PS) 이 책의 국역본은 무척 읽기 어렵습니다. 와트킨이 쓰는 용어들이

그렇게 어려운 영어가 아님에도, 그가 거론하는 텍스트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애초에 읽기가 쉽지 않은데, 번역된 국문마저 매우 난해하게 번역되어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추후 보완된 개정판이 나오길 기대하면서.

 

My blog=http://blog.naver.com/wellb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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