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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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페미니즘은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도전을 해야하는가.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며 더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여성학자 정희진 작가님의 명저 <페미니즘의 도전>이 출간된지 18년 후 나온 책이다.

9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와 '여성학'을 수강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세상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같았다.

그만큼 '페미니즘'은 새로운 시각, 새로운 언어였다. 또 뿌리 깊게 이어져 온 성차별과 일상의 소소한 불편함까지 다시 보게 하는 혁명적인 기준점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혐오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분위기다. 남성 중심의 권력이나 여성 혐오를 공론화하면 '페미'로 낙인 찍힌다. 심지어 이로 인해 폭행이나 살해 당하기도 하는 비정상적 사회가 요즘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실제로 나도 지인으로부터(심지어 정치적으로 진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는데도) '너 혹시 페미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척 기분이 나빴는데 한편으로는 이게 기분 나쁠 말인가 싶었다. 가부장적인 집안의 셋째딸로 태어나 십대 딸 두 명을 키우는 여성인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훌륭한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 머리말에서처럼 '남성 사회의 질문에 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언어로 말하자'는표현이 와닿는다.

1부 '페미니즘 논쟁의 재구성'에서는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페미니즘적 논쟁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서술했다. 김건희 비판을 미소지니(여성 혐오)로 보는 시각이나 제주에 입국한 예멘 난민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취급하는 잘못된 시각, 미투 운동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낙태, 성교육, 데이트 폭력, 젠더 문제, 성매매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특히 '주필리아(동물성애)'와 '인터섹스(남녀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에 대한 내용은 새로웠다. 페미니즘이 단순히 남녀 차별을 논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다시 느꼈다.

부록으로 수록된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은 기지촌 여성 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게 했다. 90년대 초반의 윤금이 사건이나 김연자, 문혜림 등의 기지촌 운동가들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사실 잘 몰랐다. 이번 독서를 계기로 유튜브 등에서 관련 사건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책의 머리말에 있는 구절을 인용하며 마친다.

- 이 책은 변화하는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젠더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모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공적 영역의 의제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많은 남성들, 특히 정책 결정자들이 읽었으면 한다. (12 페이지)

- 이 책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 논쟁의 불씨가 되는 텍스트이기를 바란다. 여성학, 여성 운동은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경합을 통한 생산적인 갈등없이는 진전도 없다. 한국의 여성주의가 나아감 없이 여성의 생존의 목소리가 왜곡되어 미소지니의 타깃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여성의 공부, 다른 언어, 남성 사회가 못 알아듣는 언어가 최고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사회의질문에 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자. (2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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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를 위한 픽사 스토리텔링
딘 모브쇼비츠 지음, 김경영 옮김 / 동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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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처럼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만들고 싶다면 읽어야 할 작법서.

<토이 스토리> <인사이드 아웃> <라따뚜이> <코코>. 픽사 스튜디오에서 만든 작품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어쩌면 이렇게 잘 짜여진 시나리오가 있는걸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걸맞는 기발한 상상력과 더불어 캐릭터나 주제, 구조도 나무랄 데 없이 완성도가 높다. 마치 정교하게 쌓아 올린 탄탄한 구조물처럼 완벽한 스토리는 대체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이 책은 픽사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법칙과 특별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작법서다. 아이디어 단계부터 시작하여 캐릭터, 갈등, 빌런, 세계관, 구조, 주제 등으로 나누어 픽사의 대표작들을 예시로 들어 설명했다.

영화나 드라마, 웹툰, 웹소설 등 상업적인 스토리를 제작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도움될 내용이 많다. 읽으며 포스트잇으로 표시하고 연필로 밑줄까지 그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매 챕터별로 픽사 작품을 예시를 들어 설명해서 이해가 쉽다. 챕터 마지막에는 그 내용을 요약한 부분이 있고 <인사이드 아웃>을 통해 예시를 또 보여준다. 그리고 '실전연습'을 통해 내가 작업 중인 스토리에 책의 내용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

이번 기회에 책에 나오는 픽사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분석해 봐야겠다. 이 책에 나오는 스토리텔링의 규칙들을 직접 확인하는 재미가 클 것 같다.

페이지 수나 글밥이 많이 않고 핵심적이면서도 장황하지 않아서 좋았다. 두꺼운 작법서를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픽사의 많은 영화가 생사가 걸린 상황을 보여주고 또 죽음이나 슬픔을 다루지만, 픽사의 대다수 영화에는 이보다 더 무서운 설정이 있다. 바로 천벌이다. (중략) 용감했던 주인공이 더 이상 자기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천벌을 받는 상황에 빠진다. - P82

픽사의 이야기가 큰 성공을 거두는 큰 이유는 그들이 만든 세계의 모든 캐릭터와 디테일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픽사의 세계에 사는 모든 캐릭터는 기발한 상상력의 결과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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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경관 마르틴 베크 시리즈 4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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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크 시리즈 4권. 가장 유명하다는 <웃는 경관>이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뒤로 갈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 지난 세 권과 비교했을 때 가장 서스펜스가 있었다.

배경은 스톡홀름. 어느 날 저녁, 도로에 멈춰진 시내 버스 안에서 총에 맞은 시체들이 발견된다. 그 중에는 마르틴 베크의 후배 경찰인 스텐스트룀도 포함되어 있다. 비번인 날 왜 그가 총을 소지한 채 버스에 타고 있었는지, 대체 누가 승객들을 쐈는지 해결해 가는 이야기다.

시리즈의 4권 쯤 되니 베크를 비롯한 동료 경찰들의 캐릭터를 알게 되어 훨씬 읽기 편해졌다. 처음에는 밋밋하고 답답하다고 생각되었던 마르틴 베크도 이제는 매우 현실적인 형사 캐릭터로 여겨졌다.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에서의 박해일 캐릭터를 만들 때 참고했다고 하는데 비로소 이해되는 것 같다.

이야기 전개상 긴장감이 느껴진 지점은 마르틴 베크가 버스 사고 소식을 듣고 동료인 콜베리가 희생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부분이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디테일이 이 시리즈를 특별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테레자 카마랑'이라는 인물도 특이했다. 섹스중독증의 여성 캐릭터라니 무척 도발적이라 생각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68년 당시, 실제 있었던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화려한 재미는 없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시리즈다. <웃는 경관>이라는 제목도 절묘하다. 같은 제목의 스웨덴 노래가 있나 본데, 그 노래를 마르틴 베크의 가족들이 따라 부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마르틴 베크는 이십삼 년간 경찰 생활을 했다. 동료가 업무중에 죽는 일도 여러 번 겪었다. 경찰의 업무가 갈수록 위험해진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음 차례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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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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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으로 600만 부나 팔렸다는 베스트셀러 소설.

표지의 수국 일러스트가 눈을 사로잡았다. 조엘 디케르라는 작가의 이름이나 이 소설의 제목은 낯설었지만 표지를 보고 호기심이 들었다. 저자는 스위스 태생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발표하는 소설들은 항상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른다고 한다. 프랑스어권에서는 유명한 작가인 듯하다.

소설의 배경은 의외로 미국이다. 뉴욕에 살고 있는 주인공 마커스는 데뷔작으로 큰 성공을 거둔 소설가다. 하지만 차기작을 쓰지 못해 슬럼프에 빠져서 거액의 계약금을 물어줄 위기에 처한다. 결국 그는 대학시절 스승인 해리 쿼버트에게 도움을 얻으러 뉴햄프셔 오로라로 떠난다.

오랜만에 스승과 만난 마커스는 다시 소설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찾는다. 또 독신인 해리 쿼버트의 집에서 그의 오래전 실종된 연인 놀라의 존재를 알게된다. 해리가 놀라에게 영감을 받아 그의 대표작을 쓴 것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마커스는 새 작품을 쓰려고 하는데. 해리가 실종된 놀라의 살해 용의자로 체포됐다는 뉴스를 보게되고 마커스는 스승을 구하기 위해 직접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한다. 또 이 모든 과정을 자신의 차기작으로 쓰기로 한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33년 전의 사건이 양파 까지듯이 하나씩 밝혀진다. 의외에 의외를 거듭하여 역시나 전혀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드러난다. 미스터리 공식에 충실하다.

30대 남성인 해리가 열 다섯 살 소녀 놀라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편안하지는 않았다. 추리의 과정이 어느 순간부터는 장황하다고 생각되긴 했다. 1,2권을 합쳐 천 페이지가 넘지만 빠르게 읽히는 점은 장점이다.

각 챕터가 시작될 때 해리가 마커스에게 전해주는 작가의 자세라든가 덕목에 대한 부분이 있다. 이 부분들이 의외로 기억에 남았고 후반에 이에 대한 반전도 놀라웠다. 반전을 터뜨리기까지의 설계는 꽤 괜찮았다.

프랑스에서는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다는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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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
윤흥길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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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을 통해 말하는 한국 사회의 권력.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오래전에 읽었지만 이번 40주년 기념 특별판으로 다시 읽게 되었다. 윤흥길 작가님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학 시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무척 인상깊게 읽어서 당시 친한 남학우에게 선물했던 기억도 있다. (문제는 그 친구가 절대 책을 읽지 않을 부류라는 데 있다. 당시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애한테 책을 선물했을까?)

소설의 배경은1980년대 '이곡리'라는 시골 마을이다. 마을에는 큰 저수지가 있는데 주인공 임종술은 한 마디로 그 일대를 어슬렁거리며 낚시나 하는 한량이다. 저수지의 주인인 최사장과 그의 조카인 이곡리 이장 최익삼은 불법으로 사유 저수지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종술을 감시원으로 고용한다.

푼돈으로 일을 시켜먹으려는 것을 간파한 종술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완장'을 주겠다는 말에 종술은 바로 승락하는데. 그에게 완장이란 평생 가져보지 못한 권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동네 한량이던 종술이 완장을 차면서 권력의 주체가 된 것처럼 행동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소설 속에도 나오지만 원래 '완장'은 일제 시대 때 생겨난 것으로 순사들이 주로 착용한 권력의 상징이었다. 종술의 아버지도 결국 그 완장 때문에 죽음을 맞았기 때문에 종술의 어머니인 운암댁은 불길함을 느낀다.

겨우 완장 하나로 기고만장해진 종술은 오랫동안 연모하던 동네 주점의 부월이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종술과 부월의 스토리 라인은 블랙 코미디 같았다. 또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연민이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희망이 없는 바닥 인생들인데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80년대에 두 차례나 TV 드라마화된 작품이기도 했다. 한 번은 단막극으로 또 한 번은 8부작으로 제작되었다고. 8부작에서는 종술 역할에 조형기 배우, 운암댁은 김영옥 배우가 캐스팅되었다니 찰떡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찰진 전북 사투리의 대사도 인상적이었다. 또 '그녀'라는 말 대신 '그니'라는 말이 사용된 것도 흥미로웠다. 출간된지 40년이나 지났지만 이야기 구조나 캐릭터가 주는 재미는 전혀 낡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풍자적인 내용과 묵직한 주제는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했다.


작가인 나를 일개 미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 거대 권력에 효과적으로 보복하는 길은 역시 작가의 펜을 무기 삼아 권력 그 자체를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으로 희화화함으로써 실컷 야유하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 P6

고단했던 생애를 통하여 직접으로 간접으로 인연을 맺어온 숱한 완장들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종술의 뇌리를 스쳤다. 완장의 나라, 완장에 얽힌 무수한 사연들로 점철된 완장의 역사가 너훌거리는 치맛자락의 한끝을 슬쩍 벌려 바야흐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종술의 가슴을 유혹하고 있었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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