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 양장본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 푸른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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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감히 몇 줄의 문장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나의 얕은 능력이 저주스럽다. 강렬했고 감동적이었다.

저자인 이브 엔슬러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알려진 극작가이자 사회운동가다. 다섯 살 때부터 친부에게 성폭력을 당한 뒤 그 트라우마로 각종 정신 장애, 알콜 중독 등으로 시달렸다.

평생의 상처로 고통받아온 저자는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었지만 이미 죽어버려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과 편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아버지 입장이 되어 자신에게 사과하는 내용인데 한 번 읽어볼까 싶어 책 소개를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내용만으로도 너무 마음 아파서 차마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책도 역시 읽는 동안 느낄 찝찝함과 두려움 때문에 망설였지만 <슬픔의 방문>을 쓴 장일호 작가의 추천사를 보고 용기를 냈다. 예상했던 감정을 느꼈지만 읽기를 잘했다. 두려움을 피하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의 원제를 찾아보니 'Reckoning', '계산, 계산서'라는 뜻으로 나온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자의 45년 간 겪은 여성과 폭력에 대한 사유를 기록한 책이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부터 코로나 19, 트럼프 정권 등 각종 이슈부터 개인적 삶에 대한 기록까지 담겨있다. 가장 충격적인 챕터는 '살아 있는 것이 유감이지 않은 몸'이었다. 보스니아 내전, 콩고 내전, ISIS 등에서 잔인한 성폭력으로 희생되거나 생존한 여성들의 기록을 담았다.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너무도 끔찍했다. 그럼에도 살아남아 피해를 증언하고 연대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의 사과 편지>와 관련된 내용도 있다. 또 가해자가 해야할 진정한 사과'의 네 단계도 기억에 남는다.

상처를 돌아보고 그것을 꺼내어 글로 써서 발표한다는 것. 이게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료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특히 그 상처가 친족 성폭력이나 집단 강간, 전쟁으로 인한 성폭력(우리나라의 위안부도 언급된다.)이라니.

연대하고 행동하자는 내용도 좋다. 2년 전 <가디언>에 썼다는 글이 주옥같다.

- 지금이 바로 우리가 기다려 온 그 순간인가요? 이것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여기, 당신께 제 손을 건넵니다.(380 페이지)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승리와 자유를 상징하는 'V'로 새롭게 명명하는 내용도 흥미로웠다.

- 나는 V라는 이름을 내 이름으로 택했다. 본래 내게 주어진 이름이 나를 망치고 존재를 지우려던 사람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V는 내 자유의 이름이다. (39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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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방차 마르틴 베크 시리즈 5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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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다섯번째 작품.

이번에는 방화 사건을 밝히는 내용이다. 헌데 화재가 발생한 장소를 두 명의 경찰이 잠복하며 감시 중이었다. 그 건물은 절도범이 살고 있었기 때문인데, 덕분에 화재 현장의 많은 사람들이 구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화재 현장을 감식 후 수상한 점이 발견된다. 사망자 중 한 명은 화재 발생 전 이미 사망했고 그가 누워있던 침대의 매트리스에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던 것. 누군가가 방화한 것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변곡점을 맞이한다.

다섯번째 책쯤 되니 이제는 몇몇 캐릭터들의 특징이 더 명확히 각인되어 읽는 재미가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군발드 라르손'이 꽤 비중있게 등장했다. 마르틴 베크의 동료 경찰이긴 하지만 독자로서 마냥 응원하게 되는 부류의 선한 인물은 아니다. 거칠고 편협한 면도 보이는, 한 마디로 진상같은 경찰인데 이번 책에서 그가 경찰이 되기 전까지의 삶이 나와있어서 흥미로웠다.

앞서 읽은 <웃는 경관>에서 희생된 경찰의 약혼녀인 '오사 토렐'도 등장한다. 상처를 딛고 경찰 지망생이 된 모습이 좋았다. 전체 시리즈를 읽는 독자들에게 주는 보너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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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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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페미니즘은 무엇을 지향하고 어떤 도전을 해야하는가.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렸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며 더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여성학자 정희진 작가님의 명저 <페미니즘의 도전>이 출간된지 18년 후 나온 책이다.

90년대 중반, 대학에 들어와 '여성학'을 수강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빨간약을 먹고 세상의 진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같았다.

그만큼 '페미니즘'은 새로운 시각, 새로운 언어였다. 또 뿌리 깊게 이어져 온 성차별과 일상의 소소한 불편함까지 다시 보게 하는 혁명적인 기준점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혐오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치인이나 연예인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분위기다. 남성 중심의 권력이나 여성 혐오를 공론화하면 '페미'로 낙인 찍힌다. 심지어 이로 인해 폭행이나 살해 당하기도 하는 비정상적 사회가 요즘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실제로 나도 지인으로부터(심지어 정치적으로 진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었는데도) '너 혹시 페미냐?'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척 기분이 나빴는데 한편으로는 이게 기분 나쁠 말인가 싶었다. 가부장적인 집안의 셋째딸로 태어나 십대 딸 두 명을 키우는 여성인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닐 수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훌륭한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 머리말에서처럼 '남성 사회의 질문에 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언어로 말하자'는표현이 와닿는다.

1부 '페미니즘 논쟁의 재구성'에서는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페미니즘적 논쟁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 서술했다. 김건희 비판을 미소지니(여성 혐오)로 보는 시각이나 제주에 입국한 예멘 난민들을 잠재적 성범죄자로 취급하는 잘못된 시각, 미투 운동에 대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낙태, 성교육, 데이트 폭력, 젠더 문제, 성매매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특히 '주필리아(동물성애)'와 '인터섹스(남녀 성기를 모두 갖고 태어난)'에 대한 내용은 새로웠다. 페미니즘이 단순히 남녀 차별을 논하는 것이 아님을 새삼 다시 느꼈다.

부록으로 수록된 '죽어야 사는 여성들의 인권'은 기지촌 여성 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게 했다. 90년대 초반의 윤금이 사건이나 김연자, 문혜림 등의 기지촌 운동가들에 대해 들어는 봤지만 사실 잘 몰랐다. 이번 독서를 계기로 유튜브 등에서 관련 사건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책의 머리말에 있는 구절을 인용하며 마친다.

- 이 책은 변화하는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당연하게도 이는 젠더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모색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공적 영역의 의제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많은 남성들, 특히 정책 결정자들이 읽었으면 한다. (12 페이지)

- 이 책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 논쟁의 불씨가 되는 텍스트이기를 바란다. 여성학, 여성 운동은 모든 담론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경합을 통한 생산적인 갈등없이는 진전도 없다. 한국의 여성주의가 나아감 없이 여성의 생존의 목소리가 왜곡되어 미소지니의 타깃이 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는 여성의 공부, 다른 언어, 남성 사회가 못 알아듣는 언어가 최고의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사회의질문에 답하지 말고, 그들이 못 알아듣는 새로운 언어로 말하자. (2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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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를 위한 픽사 스토리텔링
딘 모브쇼비츠 지음, 김경영 옮김 / 동녘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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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처럼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만들고 싶다면 읽어야 할 작법서.

<토이 스토리> <인사이드 아웃> <라따뚜이> <코코>. 픽사 스튜디오에서 만든 작품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어쩌면 이렇게 잘 짜여진 시나리오가 있는걸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 걸맞는 기발한 상상력과 더불어 캐릭터나 주제, 구조도 나무랄 데 없이 완성도가 높다. 마치 정교하게 쌓아 올린 탄탄한 구조물처럼 완벽한 스토리는 대체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이 책은 픽사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법칙과 특별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작법서다. 아이디어 단계부터 시작하여 캐릭터, 갈등, 빌런, 세계관, 구조, 주제 등으로 나누어 픽사의 대표작들을 예시로 들어 설명했다.

영화나 드라마, 웹툰, 웹소설 등 상업적인 스토리를 제작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도움될 내용이 많다. 읽으며 포스트잇으로 표시하고 연필로 밑줄까지 그을 정도로 중요한 내용들로 가득했다.

매 챕터별로 픽사 작품을 예시를 들어 설명해서 이해가 쉽다. 챕터 마지막에는 그 내용을 요약한 부분이 있고 <인사이드 아웃>을 통해 예시를 또 보여준다. 그리고 '실전연습'을 통해 내가 작업 중인 스토리에 책의 내용을 적용시킬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다.

이번 기회에 책에 나오는 픽사 작품들을 다시 보면서 분석해 봐야겠다. 이 책에 나오는 스토리텔링의 규칙들을 직접 확인하는 재미가 클 것 같다.

페이지 수나 글밥이 많이 않고 핵심적이면서도 장황하지 않아서 좋았다. 두꺼운 작법서를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픽사의 많은 영화가 생사가 걸린 상황을 보여주고 또 죽음이나 슬픔을 다루지만, 픽사의 대다수 영화에는 이보다 더 무서운 설정이 있다. 바로 천벌이다. (중략) 용감했던 주인공이 더 이상 자기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천벌을 받는 상황에 빠진다. - P82

픽사의 이야기가 큰 성공을 거두는 큰 이유는 그들이 만든 세계의 모든 캐릭터와 디테일을 독창적이고 재미있게 만드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픽사의 세계에 사는 모든 캐릭터는 기발한 상상력의 결과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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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경관 마르틴 베크 시리즈 4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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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베크 시리즈 4권. 가장 유명하다는 <웃는 경관>이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뒤로 갈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 지난 세 권과 비교했을 때 가장 서스펜스가 있었다.

배경은 스톡홀름. 어느 날 저녁, 도로에 멈춰진 시내 버스 안에서 총에 맞은 시체들이 발견된다. 그 중에는 마르틴 베크의 후배 경찰인 스텐스트룀도 포함되어 있다. 비번인 날 왜 그가 총을 소지한 채 버스에 타고 있었는지, 대체 누가 승객들을 쐈는지 해결해 가는 이야기다.

시리즈의 4권 쯤 되니 베크를 비롯한 동료 경찰들의 캐릭터를 알게 되어 훨씬 읽기 편해졌다. 처음에는 밋밋하고 답답하다고 생각되었던 마르틴 베크도 이제는 매우 현실적인 형사 캐릭터로 여겨졌다.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에서의 박해일 캐릭터를 만들 때 참고했다고 하는데 비로소 이해되는 것 같다.

이야기 전개상 긴장감이 느껴진 지점은 마르틴 베크가 버스 사고 소식을 듣고 동료인 콜베리가 희생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부분이다. 형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디테일이 이 시리즈를 특별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테레자 카마랑'이라는 인물도 특이했다. 섹스중독증의 여성 캐릭터라니 무척 도발적이라 생각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68년 당시, 실제 있었던 사건과 연관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화려한 재미는 없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시리즈다. <웃는 경관>이라는 제목도 절묘하다. 같은 제목의 스웨덴 노래가 있나 본데, 그 노래를 마르틴 베크의 가족들이 따라 부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마르틴 베크는 이십삼 년간 경찰 생활을 했다. 동료가 업무중에 죽는 일도 여러 번 겪었다. 경찰의 업무가 갈수록 위험해진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음 차례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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