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폴란드의 한 가족을 다루고 있다. 60대의 알리치아, 30대의 한나, 그리고 10대의 마리안나. 한나는 알리치아의 며느리이고 마리안나는 한나의 딸이다. 사업이 망해서 많은 빚을 떠안고 파산한 가장 그제고시 때문에 이 세 명의 여성의 일상과 마음은 붕괴된다. 어떻게든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려 한나와 그제고시는 마리안나와 야쿱을 할머니인 알리치아에게 맡기고 영국으로 돈을 벌러간다. 영국이 폴란드보다 인건비가 높고 물가가 싸기 때문이다.한창 삶을 채워나갈 시기의 마리안나는 할머니가 어색하고 싫다. 게다가 사랑하는 강아지 프라이다와도 떨어져 지내야 한다. 젊었을 때부터 제대로 엄마 노릇을 해본적이 없는 알리치아도 괴롭기는 마친가지다. 아이들을 떼어놓고 타국에서 고생하는 한나는 말할 것도 없다.세 여성의 혼란스럽고 괴로운 마음이 잘 나타난 소설이다. 생생한 묘사 덕분에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생활인이자 엄마인 독자의 입장에서 알리치아와 한나에게 공감했고 비슷한 또래의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마리안나가 이해되었다. 동시대의 여성들이 지닌 고민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구성이 치밀하다거나 심오한 문장이 아니라 꽤 잘 읽혔다. 정보라 작가가 이 소설을 번역하게 된 계기도 흥미로웠다. 폴란드의 사회와 문화를 알 수 있는 내용도 많아서 기억에 남는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결국에는 가족으로부터 위로 받는다는 메시지도 좋다.그런데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인 그제고시는 참 별로다.#상실 #나탈리아쇼스타크 #정보라 #스프링
우선 기획이 정말 좋다. 31명의 한국 대표 소설가들이 추천한 박완서 작가의 단편들을 모았다. 한국소설은 비교적 최근작을 읽는 편이라 이런 기획이 없었다면 1970,80년대에 쓰여진 수록작들을 솔직히 안 읽었을지도 모른다.표제작이자 첫 수록 작품인 '쥬디 할머니'부터 사로잡는다. 아이러니와 풍자가 넘치면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박완서 작가님이 드라마 대본을 썼어도 크게 성공했을 것 같다. 캐릭터의 개성, 이야기의 구조와 흡인력이 좋다.'공항에서 만난 사람',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재이산'에서는 6.25전쟁의 고통과 그 이후의 상처를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의 가장 찬란했을 20대 초반에 전쟁을 몸소 겪은 작가님의 체험을 녹인 작품들이다.읽으면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탄한 작품은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다. 그동안 제목을 숱하게 들어왔는데 이제서야 읽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고통과 각성, 치유와 성찰을 한 호흡에 담은 것이 놀랍다. 이 역시 작가님이 직접 겪은 상처를 녹인 작품인 것을 알기에 더 크게 와닿았다.청년 정치인이라는 자가 서민 코스프레를 하며 헛소리를 할 때면 SNS에서 어김없이 언급되는 '도둑맞은 가난'도 인상적이다. - 아흔아홉 냥 가진 놈이 한 냥을 탐내는 성미를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무엇보다 나보다 윗세대인 여성의 세계를 문학으로 접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편안했다. 여성, 주부, 며느리, 어머니로서의 존재가 치열하게 써낸 소설을 읽는 재미가 무척 좋았다.목록의 소설가들을 보며 누가 어떤 작품을 추천했는지가 궁금해졌다.#쥬디할머니 #박완서 #문학동네 #단편소설 #서평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보면 작가는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시내의 총독부 부설 어린이 도서관에 가서 함께 일본어로 된 그림책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도 어린이는 존재했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러웠다.책의 제목을 보니 그 기억이 떠올라서 큰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은 책이다. 1940년대의 일제는 '내선일체'의 명목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다. 총독부 주최로 매해 열린 어린이 글짓기 행사도 그 일환이었다.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부터 흥미롭다. 일본에서 영화와 예술학을 공부한 저자는 우연히 1940년대 제작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아동 영화 <수업료>를 보게된다. 영화의 원작은 총독부 주최의 글짓기에서 입상한 작문이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에 남아있는 자료들을 분석하게 된 것이다.책의 내용도 흥미롭지만 구성이며 분석이 탁월하다. 수록된 글들이 쓰여진 1940년 이전까지의 역사와 사회 변화가 쉽지만 핵심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모두 일본어로 쓰여졌을 글들. 글쓴 어린이의 이름으로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데 소속이나 내용으로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점들이 많았다. 1940년대에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70만 명이나 되었다는데 경성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 어린이들도 많았고 글에 등장하는 지명 등에서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특히 일본인 가족이 고용한 가정부를 '오모니'로, 젊은 하녀를 '키치베(계집애)'로 부르는 내용이 묘했다. 당연히 그랬을 테지만 해방 이후 이런 흔적들은 애써 외면했고 제거했으니 직접 텍스트로 읽는 감정이 남달랐다. 서양 문학에 등장하는 제국주의 묘사에서는 느끼지 못한 감정이다.일본 아이들과 조선 아이들의 글을 비교 분석한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결국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일 수밖에 없는 관계가 아이들의 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마지막 전쟁 챕터에서는 일본, 조선 구분없이 가슴 아팠다. '황국신민맹세' 부분에서는 자연스럽게 '국민교육헌장'이 떠올랐는데 일제 시스템에서 따온 것임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징병과 죽음, 천황에 대한 충성 등을 글로 써야했던 시대. 이 때를 살아낸 이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책의 맺음말도 좋았다. 저자의 통찰과 진심을 읽었다.- 식민지 교육 제도 바깥에 있던 아이들은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이 아이들이 남기지 못한 기억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일본어도 조선어도 쓸 줄 모르던 아이들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중략) 아이들 본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기록하지 못했던 이 아이들의 삶은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가 다루지 못했던, 혹은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현실이었다. (314 페이지)#제국의어린이들 #이영은 #을유문화사
<이야기를 들려줘요>에는 그동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이 총집합했다. 전작들을 읽어보지 못해서 조금은 걱정했지만 별문제 없이 읽었다.사랑스러운 소설이다. 미국 메인주의 크로스비 타운이라는 곳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편안한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공감되는 상황이 많다.작품 속에는 여러 대화가 등장한다. 올리브와 루시의 대화는 기록되지 않은 삶의 의미에 생각하게 하고 밥은 대화를 통해 매트를 구하고 변화시킨다. 매주 산책하며 진심을 나누는 밥과 루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밥은 아내보다도 말이 잘 통하는 루시를 어느덧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두 사람의 결말을 읽으면서 이들의 사랑이야 말로 성숙된 어른들의 사랑이 아닌가도 싶었다.주된 캐릭터들이 60대라서 - 올리브의 경우는 90대, 이제는 더이상 젊지 않은 인생의 고민과 감성이 있어서 좋았다. 행복은 돈이나 명예보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가 곁에 있는 것이다.올리브, 루시, 밥의 인생을 더 알고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데, 다행이다. 아직 안 읽은 스트라우트의 책이 많으니까.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책. 수많은 이들이 인용하고 있는 현대인의 대표적인 아포리즘 출처 책. 하지만 역시 만만치 않았다.초반에는 설화나 우화같은 문장이라 쉽게 읽힐 줄 알았는데 내용이 갈수록 심오해졌다. 그 유명한 '신은 죽었다'와 '위버멘쉬(초인)'가 비교적 초반부터 나온 것은 다행이었다.서구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기독교적 가치와 사상을 뒤집고 인간 중심의 가치를 말하는 책이다. 인간이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창조하게 하는 동기부여가 가득하다. 그래서 자기계발서 파트에서 빠지지 않는 듯하다.동시에 묘한 책이다. 단순한 아포리즘으로 치부하기에는 이면에 담긴 내용의 깊이가 끝도 없이 내려간다. 한 번의 독서만으로는 다가갈 수 없다. 조만간 다시 읽을 생각이다.을유사상고전 시리즈인 이 책은 판형이 가장 마음에 든다. 한 손에 편안하게 잡히고 비닐 코팅하지 않은 표지의 느낌이 좋다. 원전의 문체와 운율감을 살린 완역본이라는데 다른 번역본과 차이가 나는지 궁금하다.읽는 동안 같은 제목의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교향곡도 떠올랐다. 날 것의 느낌을 지녔으면서 전복적이고 웅장한 오프닝이 이 책을 나타내기에 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재미있는 발견이다.#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 #니체 #홍사현옮김 #을유문화사 #을유사상고전 #위버멘쉬 #고전 #철학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