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한 대작가의 신작은 사랑이야기다.대학생 때의 짧은 인연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온 남녀는 5년 만의 재회에서 다시 가까워지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수천억대 자산가의 둘째 아들인 남자는 아버지를 억울하게 잃고 집안의 가장이 된 여자를 위해 자신의 상속분으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일상을 선물한다.하지만 여자는 큰 병을 앓게 되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아주 오래된 영화를 한 편 보는 듯한 기분으로 소설을 읽었다.누군가 나타나 나를 구원해 주길 꿈꿨던 젊은 시절의 소망을 담은 이야기는 노작가의 손끝에서 철학과 미술을 더해 새롭게 태어난다.철학도인 남자와 생계 때문에 순수미술을 이어갈 수 없었던 여자는 장흥 보림사와 반 고흐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삶과 반 고흐의 이야기를 나눈다.소설은 사랑 이야기를 넘어 인생과 예술에 대한 커다란 담론을 던지며 끝맺는다.작가의 말에서 오랫동안 숙명처럼 함께해온 질병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아직도 이런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음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30년도 전에 《태백산맥》으로 처음 만난 작가의 소설을 꽤 오랜 시간 따라 읽었는데 이 소설이 작가의 마지막 장편이라는 말에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고루한 옛사랑 이야기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사랑이 아닌 긴 시간 마음에 품어온 사랑 이야기는 지나버린 젊은 날의 아련함을 선사한다.부디 작가님이 오랫동안 건강하셔서 장편은 아니더라도 짧은 소설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가 등장하는 갈릴레오 시리즈는 신간이 출간되면 꼭 찾아 읽을 정도로 좋아하는 이야기인데 시리즈의 열 번째 소설이 번역됐다.도쿄 인근 바다에서 총상을 입은 남자의 사체가 발견되고, 그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남성을 실종 신고한 동거 여성이 사라진 사실이 밝혀진다.수사 과정에서 동거 여성과 함께 사라진 여성이 있다는 게 밝혀지고 그 여성을 조사하던 중 ‘유카와 마나부’의 이름을 발견하게 된다.구사나기와 우쓰미는 유카와를 찾아가 수사 협조를 구하지만 거절당하고 다른 방법으로 수사를 돕겠다고 한다.갈릴레오 시리즈는 올해 30주년을 맞았다.나는 시리즈의 시작을 어떤 이야기로 만났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랜 시간 함께해 왔다.작품 속 등장인물들도 나이가 들었고 각자의 위치도 달라졌지만, 한 번도 유카와 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투명한 나선> 속 유카와는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지만 여전히 수사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는다.다만 이번에는 이제껏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건의 중심에 다가가 마침내 진짜 범인을 찾아낸다.진범이 밝혀진 후에도 숨겨진 진실을 끝내 알지 못하는 범인을 위해 과연 어디까지 진실을 밝혀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어떤 진실은 끝까지 모르는 게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과 진실을 모른 채 죄까지 저지른다는 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뒤엉켜 책장을 덮고도 입맛이 씁쓸해진다.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포털 검색으로 다시 확인했을 정도로 올해 가장 놀라고 황망한 소식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망 소식이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은 소설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진짜 새로운 그의 이야기를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지만 그곳에서는 부디 편안하시길 기도한다.
<도서는 위즈덤하우스와 위픽에서 진행한 위뷰 서평단에 당첨되어 제공받았습니다.‘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위픽 시리즈 백 세 번째 이야기는 작가의 현실을 소설 속 화자 ’정원‘의 일상에 투영시킨 ‘메타픽션’입니다.서장원 작가의 소설은 문학상 수상작품집과 출판사 계간지에서 몇 편을 읽은 게 다라 작가의 이름이 오롯이 박힌 단독 소설을 만나는 것이 반갑고도 벅찼습니다.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너무 심약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글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정원‘은 같은 건물에 있는 격투기 체육관의 코치인 ‘조성’에게서 그 강인함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우연한 기회에 조성이 가진 비밀을 알게 되면서, 정원은 지금까지 자신이 혐오했던 이들에 대해 돌아보고 그들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있잖아, 개소리하는 사람들만 걸리는 역병이 돌았으면 좋겠어.” (p40)퀴어도 혐오하고, 여성도 혐오하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사람들은 과연 나쁘기만 한 걸까요, 아니면 그런 사람들을 혐오하는 우리 역시 떳떳할 수 있을까요?책과 영화를 볼 때면 늘 선과 악을 구분하며 보던 저에게는 누군가를 향한 혐오는 언제나 명백한 ’악’이었습니다.하지만 그 혐오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가해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소설을 덮은 뒤에도 한참을 골몰하게 됩니다.나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기를 바라고, 또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 믿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하지만 조성과 정원이 없애고 싶은 인간들의 목록을 적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으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누군가를 쉽게 선과 악으로 나누고 내가 옳다고 믿는 순간 나 역시 다른 누군가를 판단하고 배척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세상에 나쁘기만 한 사람도, 좋기만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 앞에 나의 이분법적인 잣대를 조용히 되돌아보게 됩니다.
<도서는 길벗어린이 출판사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제공받았습니다.>아이는 엄마에게 백만 번쯤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조르지만 엄마는 매번 “안 돼.”라는 말로 대답합니다.그날도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장을 보러 가고, 아이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작은 목소리로 “고양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그때 대답이라도 하듯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옵니다.<고양이 있으면 좋겠다>는 고양이를 간절히 원하는 아이의 소망이 이루어지지만, 걷잡을 수 없이 나타나는 고양이들로 인해 벌어지는 유쾌한 소동극을 담은 그림책입니다.사노 요코 작가 특유의 무심한 듯 유머러스한 시선 속에서, 꿈인지 상상인지 모를 엉뚱한 경험을 치른 아이는 그럼에도 여전히 고양이 한 마리쯤은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혼잣말처럼 “고양이 있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작가 특유의 따뜻한 그림과 끝끝내 미워할 수 없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행복한 기억을 소환시킵니다.비록 고양이를 한 번도 키워본 적은 없지만, 내게 고양이는 볕이 잘 들어 따뜻해진 툇마루에 몸을 웅크리고 갸르릉거리는 이미지로 기억됩니다.어린 시절 방학 때면 가곤 했던 고모 집의 고양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까칠함을 가졌다가도, 어느새 보드랍고 따뜻한 몸을 비비며 까칠한 혀로 손등을 핥아주던 행복한 기억을 선물해 주었습니다.그래서인지 사노 요코 작가의 <고양이 있으면 좋겠다>를 읽으며 어린 시절 보냈던 고양이와의 행복한 시간들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도서는 리드비 출판사에서 진행한 서평 이벤트에 당첨되어 제공받았습니다.>우케쓰 작가의 ‘이상한 시리즈’는 <이상한 집>, <이상한 그림>, <이상한 지도>로 이어진다.아쉽게도 나는 <이상한 집> 한 권과만 인연이 닿았다.4년 만에 다시 만난 <이상한 지도>는 전작에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던 구리하라의 대학생 시절 이야기다.“나는 젊은 시절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한 여자의 충격적인 수기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취업 준비생인 구리하라가 한 번도 뵌 적 없는 외할머니의 죽음에 의문을 품으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유품으로 남겨진 요괴로 가득한 오래된 지도를 매개로 구리하라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그 지도 속 장소를 찾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그리고 엄마의 메모를 따라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는 ‘가소코 마을’로 향하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열차 사고를 목격하게 된다.<이상한 지도>는 ‘이상한 시리즈’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가장 나중에 출간되었지만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로 읽어도 무리가 없다.무엇보다 이 작품의 독특한 재미는 지도에 있다.굳이 이렇게까지 그림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지도와 표식, 일러스트가 등장하지만 페이지 곳곳에 숨어 있는 단서들을 따라 고지도의 숨겨진 진실을 하나씩 밝혀가다 보면 추리의 재미가 한층 더 풍성해진다.마침내 밝혀진 고지도의 비밀은 단순히 한 개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던 시대,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여성들의 삶이 지도 속에 켜켜이 숨겨져 있다.기묘하고 섬뜩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오래된 지도 한 장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누군가에게는 그저 낡은 종이에 불과했을 지도가 그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애쓴 이들의 처절한 흔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이상한 시리즈’라는 이름처럼 기묘한 이야기 속에 숨겨진 사람들의 사연을 좇다 보면,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오래된 지도에 남겨진 것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삶이었다는 묵직한 여운이 남는다.뛰어난 재미는 물론 미친 가독성을 자랑하는 작품이니, 다음 일정이 있다면 아예 읽기를 미루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