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러브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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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아버지를 죽였다,로 시작합니다. 이방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의 첫 페이지처럼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아나운서를 지망할 정도로 언론에서 말하는 "극강의 미모"에 그 가려진 사건의 베일의 안쪽을 궁금해하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왜의 물음표가 아니라 실은 그저 호기심일지도요. 누군가가 사람을 그것도 아버지인 존속살인의 경우는 더더욱 시선이 쏠리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살인 용의자 혹은 살인자인 칸나는 시종일관 그 베일을 거둘 생각이 전혀 없는 것만 같습니다. 어째서인지 그저, 자신의 죄를 바로 인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가려져 있었습니다. 왜일까요? 무엇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사고를 가리고 있었을까요? 죄책감인지도, 혹은 다른 그 무엇인지도요.




가족이란,

가장 가깝기 때문에 누구보다 덜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이해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많이 받는 상처는 바로 그 가족이란 이름의 울타리에서입니다. 가족이니까, 날 더 이해해 줄 수 있을 테고 가족이니까,의 이름으로의 폭력을 가해자도 되고, 피해자되 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인 것이죠. 하지만, 칸나에게는 아니었습니다.



- 세상에 나는, 혼자야. 나는, 버려졌어.

딸에 의해서 아버지가 죽었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던가요? 아니면 변했던가요?

칸나를 내담자로서 상담하는 유키는, 또 하나의 자신을 봅니다. 그 거울 속에 자신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키는 제3자가 아니라 이입하면서 그녀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베일을 벗는 듯하는 순간에 또 막은 쳐져 버리긴 하지만요.


그녀가 베일을 거두면서 보여주는 신발은 신데렐라의 구두 같기도 하고 화려해 보였습니다. 다 갖춘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화려한 구두를 벗자, 칸나의 그 상처 입은 다리는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너무나 아파서, 그냥 인정하고 쉬고 싶은 그 마음이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갈구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 그런 것도 학대가 될까?

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상당히 강해, 어린 칸나는 움츠러들어야만 했고,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 "알 수 없는 느낌"이라고 하지만, 그건 그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하나의 장치인 것입니다. 그녀가 그랬던 것은 "그래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엄마의 옆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내 엄마니까요.

저는, 칸나를 그렇게 읽었습니다. 엄마에게 "처음의 사랑"을 느꼈지만, 그 엄마는 칸나를 한 번도 그렇게 사랑해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왜냐면, 어머니 역시 칸나와 같았으니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싫었던 것입니다. 깨진 거울을 들여다보는 그 느낌 때문에 말입니다. 사모님이란 우아한 걸음을 걸으면서도 실은, 언제 실체가 벗겨질까 두려운 아슬아슬한 유리조각을 밟으면서 살아온 저 발처럼 말입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냉정한 모정이, 칸나라는 거울로 보여지고 있었고 그 칸나라는 거울은 또한 상담자인 유키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야 해.

어른의 기대에 따라야 해.

나의 불쾌감과 공포는 없는 것으로 치고.

본문 275-276p




지금을 바꾸려면 단계와 정리가 필요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뚜껑을 덮은 채 앞으로 나아가는 척 처신해 봐야, 등에 들러붙은 것의 지배가 계속될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지금 속은 물론이고, 과거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본문 25~259p


하지만, 바뀌어야만 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저 아픈 다리를 치료할 수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그리고 상처 입은 이들이 언젠가 행복해질 수 있게.

본문 348p


다리는 완전히 낫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상처도 남겠지만, 그럼에도

이젠 덜 아프고 걷기만 했던 긴장했던 다리가 앉을 수 있게 될 겁니다. 아픈 다리가 베일로 꽁꽁 숨겨져 계속 상처를 숨기고 걷는 것보단 이젠 그 정교한 거짓이란 신발을 벗고 치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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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상대는 추첨으로
가키야 미우 지음, 이소담 옮김 / 지금이책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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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가결된 법안은 다름 아닌, "추천 결혼 맞선법" 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아니, 민주주의가 아니라도 이 사회에서 옆의 가장 친한 친구, 가족들조차 함부로 간섭치 못하는 것이 무엇이던가요? 바로 남녀상열지사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개입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잔인한 푸른 수염도 "열쇠"라는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권조차도 일단은 박탈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회는 있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서 가정을 꾸미라_고요

조건은, 고작 (!) 25살에서 35살까지의 미혼남녀로 애인이 없는 이들에게 해당은 되니, 솔로인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 도래한 것입니다. 게다가 3번을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하면 테러박멸대에 가서 2년간의 복무를 해야 한다는 법칙 또한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 바로, 저출산 때문인 것입니다. 그 가정을 꾸미면 자연스레 또 아이들은 태어날 테니까요.



그 여자들의 사정 : 요시미, 나나

결혼이 도피처인 여자들이 있습니다. 스즈카케 요시미가 그렇고 후유무라 나나가 그렇습니다. 각기 사정은 다르면서도 "어머니"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저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엄마에게 지친 요시미, 하나의 퍼즐이 틀어지면서 다 엉망이 된 나나가 그렇습니다.

* 그 남자들의 사정 : 란보, 다쓰히코

결혼이 안식처가 되길 바라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긴바야시 란보와 미야시카 다쓰히코가 그렇습니다. 한 명은 모든 것을 갖춘 남자이고, 쓰 그에 반해 여자에게 인기가 있어본 적이 없는 남자 다쓰히코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편해지고 싶은 안식처를 찾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해프닝 같은 "추천 결혼 맞선법"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은, 네 남녀의 각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납니다. 교차점에서 엇갈린 사람들은, 또 다른 길을 찾습니다. 왜냐면, 어쨌든 길은 걷다 보면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게 소설은 중반까지 템포를 잘 유지합니다. 하지만, 후반부의 뜬금없는 전개는 네, 적어도 제겐 그랬습니다. 이 기발한 발상까지 좋았는데 도대체 왜, 여기서 이런 전개가 펼쳐지는가? 싶었습니다. 소재의 아쉬움이 너무 컸습니다.


게다가 저출산은 그저 결혼을 안 해서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아주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는데 물론, 소설이 너무나 무겁지 않으면서도 살짝 가볍게 읽는 이들에게 이 문제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것은 알겠지만, 거기에서 소설은 독자들에게 조금의 상상력을 허했더라면, 싶었습니다. 복잡한 여러 문제가 얽혀 있는 저출산을 국가가 나서서 해결! 은 웃음 코드로서 충분합니다. 다만, 그 후반부의 전개는 실망스러웠단 말을 반복하게 돼 저조차 아쉽습니다.

이 책은 일본에서 동제목으로 작년에 이미 드라마화되기도 할 만큼 소재의 기발성이 좋았단 거죠. 누가 가장 사생활이어야 하는 "결혼"에 국가가 간섭한다? 이건 가키야 미우라는 작가가 생각해 낸 것이기도 하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아쉬웠습니다. 가벼이 읽으려고 들었고, 재미있었으나 그 소재를 전개가 중반까지 재미있다가 후반에서 따라가 주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성장"이란 키워드로 괜히 캐릭터들을 변화시키지 않고 지키면서 풀어나간 것은 참 좋았습니다. 일본소설에서 이런 케이스가 드물었거든요. 하긴 결혼은 또, 그리 가볍진 않으니까요. 하긴 결혼은 또, 그리 가볍진 않으니까요.




작가는 말합니다. 한번 자유를 맛본 인간들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요. 하지만 실상은, 아마도 조금 다를지 몰라도 살짝, 그녀의 말을 곱씹어 봅니다. "개인의 자유의 구속"의 결과물을 자 들여다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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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는 미술관 - 명화를 이해하는 60가지 주제
이에인 잭젝 지음, 유영석 옮김 / 미술문화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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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하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명화"가 되고 "예술"의 범주에 속하는 순간 거리가 느껴져 사람들은 그 "예술"의 범주 중 가장 대중적인 "영화"를 보러 가기 시작한 것일지도요.


표제작인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은 고요하고 단순하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어쩌면, 구도도 그렇지만 저 여인의 뒷모습에서 풍겨내는 그 무엇이 그리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뒷모습만으로도 많은 생각이 있는 그 느낌 때문에요. 그렇게 그림은 아주 많은 걸 화폭에 담아냅니다.


그중, 몇 가지의 그림을 소개하자면,그림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 모나리자가 유명한 것은 성경이나 신화 속의 인물 혹은 왕이나 성직자가 아닌, "일반인"의 감정을 그려냈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런 모나리자를 보면서 저 보이는 투명 베일은 전 그저 "미완성작"이라서 아닐까, 싶은 여운이었는데 여인이 상(喪) 중임을 암시한다고 합니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미소"가 저렇게,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라서 더더욱 완벽함을 이루는 것조차 살짝은 아이러니면서, 완벽한 그림 속 어쩌면 우리가 그녀의 미소가 아름답다 느끼는 것은 그녀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 아닐까 하면서도요. 그런 면에선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의 경우, 그 자신을 그림 속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 자신뿐 아니라, 라파엘로의 라이벌?!이었었던 미켈란젤로와,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그려 넣음으로써 그림 속에서 또 라파엘로는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책은, 이런 구성이었습니다. 앞 페이지는 사조라던가 간단한 배경을 설명하고선, 그 후에는 그림의 세세한 느낌과을 보여줍니다. 세부 하듯이요. 프라고나르의 작품인 <그네>는 그냥 보기엔 그저 한 폭, 이쁜 그림 같은데, 싶었는데 아니라고 하더군요 바로 "그네"란 것 자체가 "불륜"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어째서일까 생각해 보니, 그네란 것은 "금기"이죠 저 너머, 다른 세상을 엿본다는 것, 저렇게 표현할 수 있구나 그 시대의 불륜을 또 다른 호기심인 금기로, 싶으니 구석구석 다른 그림들도 들어왔습니다.

로코코 양식은, 사실 바로크완 다른 느낌이죠 조금은 소품적인 느낌?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 자체가 "비꼼의 사조"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로코코 양식의 대부분이 디자이너 출신이란 점, 그래서 어쩌면 그들의 영역 침범에 그들이 애써 외면하려 비꼰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런 그림들도 있었으나, 정치적인 그림들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사태라든가 정치가인 <미라의 죽음>(루이 다비드作)이라든가 시대상에 따른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나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의외의 적나라함도 있습니다. 물론, 뒤에서 그리고 옆에서 보이기도 하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고 말해줍니다. 쿠르베의 <목욕하는 여인들>의 경우는 들라쿠루아가 "인물의 저속, 의도의 불확실성"으로 깎아내린 듯 보이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던가요? 아니, 의미 없는 삶은 없다지만 조금의 혹은 적당한 저속과 의도가 그리 늘 분명하다면 글쎄요, 싶더군요.

그렇다면, 이 미술도 이건 이것이다,라는 재미없을 겁니다. 다만, 저기서 저 하녀의 다리가 상당히 기묘한데요 저건 혹시나 ..동성애?라는 생각도 가지게 하더군요. 그래서 저 인물의 저속함이 아니라, 아마도 그것이 암시하는 것에 저속하다고 한 것일까? 싶었습니다만. 그리고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의외성이죠. 그러나 이 작품을 보시면 의외의 "빛과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면서도 어쩌면 그럴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목욕하는 여인이 이 화폭에 너무 부각된다지만 글쎄요..?

의외인 작품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삭 줍는 사람들>(밀레)의 경우는, 늘 평온하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군요. 풍요 속의 빈곤을 고스란히 화폭에 담아낸 농부 출신의 밀레였더라고요. 그림은 수많은 이야길 해주고, 봐주길 바랬는데 못 보고 그저 아, 이것은 명화구나..라고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제가 참 좋아합니다. 재치 있고 유머러스 하죠. 그리고, 달리도 참 좋아합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꿈과 같은 이미지들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엄격한 사실적인 스타일을 사용했다는 점이다."(본문 334p)


그렇게 읽고 있으니 그들의 특징이 보였습니다. 누군가들에게 영감을 주고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로만 그치지 않았고요. 그리고, 그림에 그러한 사실을 고스란히 투영시키고 있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처럼 어쩌면 다음엔 명화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 멋진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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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지적 허영을 위한 퇴근길 철학툰
이즐라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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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무용해서 어렵다고 치부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 철학입니다. 그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궤변으로 들리기조차 합니다. 그럼에도 이 철학이란 학문은 신학과 더불어서 아주 오래되었고 사장되지 않은 학문인 것은 그만큼의 사람들의 지적 탐구를 자극하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알고 싶어합니다. 이브와, 판도라가 금기를 어긴 것은 호기심인 한편, 바로 그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갈망 때문일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런 철학을 웹툰 형식으로 썼습니다. 22명의 철학자들, 데카르트부터 데리다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에서 시작합니다.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그저 쉽게 나온 말이 아닙니다. 그 말 안에는 자기부정이,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을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읽으면서,

그 유명한 루소의 일화는 다시금 놀라게 합니다. <에밀>을 쓴 저자가 자신의 아이들은 고아원에 맡겼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그의 <인간 불평등>에 대한 이론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모순된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망을 배제한다면 맞는 말일 테지만 말이죠. 그것은, 뒤의 마크르스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의 이론은 참으로 좋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그의 <공산당 선언>이 읽히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욕망"은 어딘가 배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철학을 하는 이유가 바로 "지적 탐구" 이지, 인간의 탐구가 아닌 것이었던가? 싶었던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도 좀 단선적인 느낌이었지만, 그냥 나온 이론은 아니었습니다. 몇 번을 자신의 이론을 뒤집고, 다시 뒤집는 칼 포퍼가 그러했습니다. 나의 이론이 완전하다,라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렌트에 이르면서, "악"에 대해서, 푸코에 이르러선, "광기"에 대한 이야기들은 흥미 있었습니다. 특히나 그의 "순수한 지식이란 없다"라는 것에 응? 하며 들여다보니, 그 모든 지식들이란 바로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과 아주 흡사한 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지식" 이란 것도 순수학문만은 아니다,라는 것이죠. 결국 인간의 생각은 권력에 의해서 수직적인 관계일 수밖엔 없다,라는 것이니까요.

푸코의 편은 상당히 공감이 가면서 끄덕였습니다. 또한 그 유명한 밀이 의원 시절, 여성도 동등하게 참정권 청원서를 제출했단 사실, 그리고 독특한 연애사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툰 형식으로 보면 쉬울 줄 알고 덥석 읽은 책인데 아니었습니다.



재미있다가보다는 솔직히 저의 습자지 지식으로는 어려웠습니다. 물론, 22명의 철학가들을 쉽게, 간추리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만, 언어의 선택에서도 그랬습니다. "가시적, 미시적" 이런 것들을 그냥 "보이는. 보이지 않는" 이런 식으로 일상의 평범한 언어로 써놔도 좋을 텐데 굳이 저렇게 써야 했나? 싶은 느낌이었고 짧다 보니, 응? 뭐지?라면서 다시 한번 곱씹게 하시려고 쓰신 건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과 뭔가 슥 빠진 느낌에 어어..?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웹툰으로 철학을 읽으면 좀 재미있을 줄 알았는데, 끝까지 읽긴 했으나 어려웠습니다. 역시, 단숨에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철학에 대해 유행이란 말을 했을 땐, 조금은 맞는 듯하면서도 갸웃거렸습니다. 오늘날 지나간 유행이라면 왜 다시 거들떠보는가?라고 말입니다. 그 시대의 결핍상이라는 것에는 크게 공감하지만, 학문에 유행을 논하는 것은 웹툰이라지만 다시 거론하지 않을 것인데 유행..?이라는 말에 민감했나, 싶었으니까요. 물론, 제 해석이 잘못된 것일지도요.


불변의 완전한 해석이란 없다. 해석은 무한한 과제다.

본문 305p, 자크 데리다.






네, 해석이 그렇듯,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유행"이란 말에 수긍도 갔습니다. 학문의 사조란 것은 그 시대상을 표현하면서 계속 바뀌어 나가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권력에 예속되든 혹은 순수이성이든, 혹은 악의 규정이 명확하거나 요즘처럼 그 경계가 불분명해졌거나 모호해진 상태는 또 언젠가 바뀔까요? 아니면 그 선과 악조차 바뀔까 궁금해지는 것, 무용하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궤변 같으나 귀가 기울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잠시 들춰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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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노래
미야시타 나츠 지음, 최미혜 옮김 / 이덴슬리벨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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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해피엔딩, 그렇게 막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고교시절은 고작 1막도 되지 않음을 아직은 모르는 기쁨의 노래의 마돈나들입니다. 누군가는 대학에 진학해 자신의 꿈을 향해 가면서도 좌절하며 누군가는 또 그 나름대로의 그 무엇에 끌려서 이제 막 사회로 나와서 좀 더 다른 길을 가볼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처음부터 진학도 하지 않은 채 좋아하는 것에 매달리면서도 생각합니다.


- 나의 껍질은 단단하지도 않지만 잘 깨지지도 않고 깨트리고 싶어,라고 갈망하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기쁨의 노래>로 그들이 하나가 되고, 그렇진 않습니다. 그들의 간극이 조금씩 가까워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레이와 치나츠는 어느새 아주 상당히 친해졌습니다. 서로 너무나도 다름에도 그 무엇을 향한 갈망 때문에 말입니다.






여전히 불안한 레이, 좀 더 말하자면 자신이 없는 혹은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는 레이와 그에 반해, 그 자신의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는 치나츠는 묘하게도 닮아있습니다. 아주 다른 극과 극의 닮음은, 어디선가 느껴집니다. 다르지만, 닮아서_ 그녀들은 자신들의 노래를 아직 찾고 있던 것입니다.


레이가, 치나츠에게 받는 그 에너지는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열정"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열정이란 것이 없었더라면 레이는, 치나츠에게 콤플렉스만을 얻을 뿐, 받지 못했을 겁니다. 치나츠의 배려, 그리고 친구로서의 그 모든 매력을 차치하고서도 말입니다



눈앞에 있는 걸 똑바로 보지 않고 다른 일로 마음을 달래는 건 본인이 제일 괴로울 거라고 생각해. (...) 언제까지나 멈춰 있으면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해. - 54p, .치나츠가 레이에게


"그때"가 나를 압박한다. 상처 내고 좀먹고 있다. 이미 타협한 과거인데도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떠오른다. (....)"그때"의 반짝임은 과장되어 점점 더 빛나고 그때 이후의 인생은 그림자가 된다.

(......)

다만 생각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

혹독한 세계였다. 하지만 좋아했다. 그 세계에 있다는 걸 자각하고 갈고닦으며 노력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설령 나 자신은 이제 그 순위 매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도 뜨거워지지 않는다. 도저히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 65-66p, 사키


문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열정"이었습니다. 알면서도 해답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지만,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키는 트롬본이 주인공이 되는 드문 곡인 <슬러이더스믹스>를 듣고 알아차립니다. 내가 "늘" 주인공일 필요는 없단 것을요. 그것은, <기쁨의 마돈나>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요 레이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과 대면할 용기가 없다는 것, 그리고 잘 극복하고 있어 보이는 치나츠는 그 욕망을 이젠 끄집어낼 때가 된 것입니다.





달팽이는, 그렇게 빨리 바닷가를 가진 못합니다. 당연한 일이지만요. 가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바다로 끊임없이 가는 걸 보면 박수를 쳐 주고 싶습니다 이 청춘들이 그랬습니다. _ 네, 명 <기쁨의 노래>에선 그녀들의 이야기가 아주 간질간질하면서도 내 고민이 어딘가쯤에 있어선지, 공감이 너무나 됐다면, 이번의 <끝나지 않은 노래>는 너무 전편을 재미있게 읽어서 그렇게 또 가슴 두근거리는 달팽이가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하나하나의 이야기는 괜찮습니다. 꽤나 괜찮은 구절이 있었고, 꽤 끄덕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래, 맞아.. 그런데, 했습니다. 그건 제가 어떤 연극을 봤을 때의 이야깁니다. 간막에서 모든 이야기를 해 버리더군요. 막간에서 메세지를 다 풀어버렸던 그 연극이 생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말합니다. _ 이 아이들의 노래, 듣고 싶지 않냐고 말입니다. 제 2막이 기대되지 않냐고요.






숨기고 있는 욕망을, 이제서야 무대 위에서 발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이기도 합니다. 고작, 이요.

- 막간에 실망은 했습니다만,

막간은 이들에게 꼭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10대와 20대 그 사이의 일들을 숨기면서 보여주는 그 어느 시간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요.다만, 너무나 비슷한 "열정"에 대한 이야기, 청소년스러움은 그들이 아직 10대 때는 허용되었던 이야기가 20대로 넘어오면서 조금은 그 간질거림이 이제는,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그 나이가 어떨까 생각한다면 네, 10대와 20대 초반, 청소년과 성인의 그 어딘가의 층계참에서 서성거리는 것과 같은 느낌이 분명, 있습니다만 그것이 다른 형태의 모습을 띌 때는 왜 그리 안 어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너무나도 훌쩍 커버린 느낌과 "열정"이란 노래를 부르고 있거나 혹은 과감한 생략을 해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이제 그들은 또 노래를 부를 시간인 것을요.






지금은 아득히 안개에 가린 듯 희미해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그때쯤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 57p


로 시작한 그들의 노래는,


장승처럼 우뚝 서서 광고지를 움켜쥐고 여전히 나는 떨고 있다. 흥분과 설렘으로. 이제부터 갈 거니까. 세상의 한가운데로. 환희의 세상으로. - 본문 227p




조금은, 실망스러운 느낌의 막간은 분명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소설이 "치나츠"에게로 초점이 맞춰져서일지도 모릅니다.

조금의, 실망은 그럼에도 조금은 섣부른가, 싶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럼에도, 꼭 필요한 시간이니까요. 하지만, 다섯의 아이들의 성장을, 청춘을 그리고 각기의 음악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뚜렷해지는, 노래를 듣고 싶기도 했습니다.


<기쁨의 노래>와의 간극은 어쩌면, 이 차이일지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들이 또다시 노래를 부른다면 저는 실망을 한 것보다는 또 마돈나들의 처음이 너무 좋아서 아마도 다시 노래를 듣지 않을까 합니다.




읽기전, 꼭 <기쁨의 노래>의 그녀들의 노래를 듣고, 이 작품의 노래를 들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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