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아레나
후카미 레이이치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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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 년에 단 한 번, 그래서 더 희귀성을 띠지만 무엇보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이 "미스터리 아레나"는 그냥 미스터리를 푸는 것만은 아닙니다. 거기엔 자본주의의 결정체인 "돈"이 있습니다. 이 쇼의 방식은 미스터리의 범인을 가장 먼저 맞추는 사람이 승자이고, 여기까진 여느 쇼와 달라 보이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 쇼가 분면 무엇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 있겠죠?자, 어쨌는 쇼는, 미스터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그 하나라도 놓치는 순간 단서가 뒤엉키는 것을 퍼즐로 인해 많이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또한 "별 것 아닌" 그 무엇을 그냥 넘기지 않는 그 찰나의 순간, 무려 20억엔을 손에 쥘 수 있다면 "미스터리 오타쿠"라는 별명 따위, 인 것이죠.




본에서 연말, 서바이벌 쇼인 <미스터리 아레나> 가 열립니다. 어째서 매력적일까요?

미스터리만으로도 좋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서바이벌" 그리고 "클로즈드 서클" "연쇄살인" 그리고, 바로 일확천금. 이렇게, 본격이면서도 본격이 아닌 듯한 이 소설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초반, 소설이 나옵니다. 그것은 지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왜 이런 쇼에서 "드라마" 형식이 아닌 "지문"이지? 의 의심을 먼저 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엔 "서술트릭"이 존재할까? 라면서 저도 이 출연자들과 함께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초반은 그들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진행자인 가바야마처럼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문제풀기보단 가바야마처럼 그들의 오류를 찾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야 다음에 좀 풀이에 가까이 가지 않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엇?!" 하는 지점은 분명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여기서 이게 나와? 와 동시에 이 게임은 나중에 풀수록 유리한데 사람들의 과욕이라기엔 너무나 답을 툭툭 던지고 나간 것이 조금씩 걸리면서 딱 그 지점을 놓쳤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재미있었습니다. 왜냐면 그 사람들이 지목한 범인들에 대해서 끄떡이게 됩니다. 그러자, 어느새 문제풀이보다 그들과 함께 즐기기(?)를 하는 관객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아주 쉬울 수 있습니다.(?!?!)

고립된 저택, 하필이면 비, 하필이면 끊어진 다리, 하필이면 연쇄살인, 그리고 모두에게 동기가 있고 모두에게 동기가 없을 수 있는 관계. 그리고, 한 명씩 한명 씩 소거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범인이 누군지는 모릅니다만..일까요..?



이야 오늘 해답자 여러분은 전부 앞으로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 지 읽고 계시는군요. 과연 미스터리 오타쿠 대회답습니다. 본문 152p


과연 그랬습니다. 오호, 그럴 수도 있구나, 싶었던 그들의 해답이었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답지는 그대로 진행해도 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문제풀기보다 그들이 내놓은 답의 오류를 체크하거나 그들과 함께 풀기도 하면서 관객이자 진행자이자 또 참가자가 돼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냐고요? 누가 과연 우승을 했느냐고요?그것은, 말이죠..(......)

이 소설은 아주 재미있게 이끌어갑니다. 제게는 가독성도 좋았고, 솔직히 추리하다가 뭐지? 하면서 키득거리면서 웃기도 했습니다. 다만, 추천드리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그 "결말"의 부분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의 1위를 차지했을 지도 모르지만, 또, 이 마지막의 결말이 마음에 드시지 않을 수도 있을테니까요





제 경우는, 조금은 황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사실 조금 눈치 채긴 했습니다. 딱 제가 저 이상한데? 한 지점에서요 하지만, 말이죠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수도 있지만 상당히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단 것입니다. 그렇게 치자면 이 미스터리는 모조리 다 그렇습니다. 여기까지요. 마지막 결말은 늘 그렇듯, 호, 불호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으로 가는 길에서 분명 재미를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저는 <미스터리 아레나>의 관객이자, 참가자로서의 티켓을 손에 넣고, 또다시 손에 넣기 위해서 연말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굳이 어느쪽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관객>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결말 그것을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그렇다면, 읽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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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2 - 명화에 담긴 과학과 예술의 화학작용 미술관에 간 지식인
전창림 지음 / 어바웃어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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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과학적이다,라는 말에 누군가는 동의할 수도 있고, 누군가들은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롯이 예술은 예술이라고요. 그러나 많은 예술들이 과학과 밀접합니다. 그중 미술은 조금 더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그려내기 위한 도구와 기법은 과학과 가깝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또한 과학자였습니다. 그렇게 모든 분야들은 서로 아주 등을 맞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요. 그러나, 가끔씩 같은 상황임에도 내가 전공을 했던 것에 혹은 관심이 있던 것을 알면 또 다르게 보이기도요.

그렇게, 제목처럼 화학자가 간 미술관은 어땠을까요? 아주, 특별했을까요? 아니면,일까요?


마사초의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이란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이브입니다. 어째서일까요? 바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도 바로 저런 모습이었고, 여러 비너스들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비너스 푸티가>라고 한다고 합니다. 명암 즉, 빛으로 화와의 육체가 훨씬 입체적이며 해부학적으로도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후대에 참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이야기가 나와서, 그의 작품 중 <봄>을 한번 보실까요?


이 그림은 유화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템페라>라는 안료 가루에 계란, 꿀 등을 혼합해 만든 작품이라고 하는데, 사실 저도 좀 놀란 것은 저 정교함이 유화에 못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저러한 시스루를 그려낼 수 있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당연히 유화겠거니, 했는데 인간이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면, 그저 붓이 아니라 그걸 표현해 내기 위해서 스스로 고안해 내는 그 과정이 이 "봄"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그림도 그렇지만, 많은 명화들의 그림 사이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이 그림을 더 즐기려면 그 이야기들 특히, 모니터의 왼쪽, 저 세 여신인 "삼미신"에 대해서도 알면 좀 더 재미있달까요? 순결과, 쾌락의 교차의 순간이랄까요..? 그런 것들이 담겨있는 것, 그림에 스토리를 자연스럽게 넣으면서 그 아름다움을 훼손치 않았습니다



예술이냐, 외설이냐





지금도 계속해서 말이 도는 것이지만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쿠르베의 그림 <잠>은 동성애를 다뤘습니다. 두 여자의 얼굴이 똑같습니다. 그들이 다른 건 머리색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이 그저 "상상만으로" 그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모델을 연인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걸 읽는데 깜짝, 놀라기도 했고요 이 그림 후, 연인인 조안나와 헤어진 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 그림뿐 아니라 <세상의 기원>에서 역시 외설 논란이 이는 가운데 모델은 추측건대 그의 연인인 조안나 아닐까 하면서요. 물론, 그 진실은 쿠르베만이 알겠죠. 하지만, 이런 쿠르베가,실연을 당해서 자신의 가슴속에 안고 있던 여인을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걸 알아냈을까요..? 바로, X-RAY입니다. 엑스레이는 미술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를테면 위작의 여부를 밝히며 또한 그림의 복원, 그리고 미술사의 오류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는데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이 그림 역시, 그가 실연 후 연인을 지워낸 것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고작 실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은 예술이라 생각했겠지만 시대상도 있을 텐데 어째서 하필이면 연인을 그런 그림의 모델로 삼았는지를 말이죠. 그리고 지워버린 건, 좀.. 아니다, 싶었습니다. 물론, 이 전에도 계속되어온, 예술과 외설 사이의 것들은 많습니다. 되려, 지금 쿠르베 전보다 그전이 외설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때죠. 시대상으로요.

표절?재창조?



네, 그림은 그 유명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입니다. 이 그림은 여러모로 참 많이 도마 위에 올라오기도 합니다. 외설적이기도 하다, 와 저 뒤의 여인에 대한 것.. 등으로 요 그런데, 이 그림이 <표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은, 라이온디의 <파리스의 심판>과 조르조네의 <전원음악회>의 등장인물과의 구도 때문입니다. 그들이 앞서 그린 것을, 마네가 그 구도를 보고 표절한 것일까라는 것이죠.

끊이지 않는 게 외설과 예술, 그리고 이 표절의 문제인가 봅니다. 재미있는 건, 이 그림 직후 이름마저 비슷한 모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을 세잔은 또한 동명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렸단 것입니다. 후대의 화가들이 그의 작품을 오마주, 혹은 제목마저 똑같이 한 걸 보면 마네의 그림이 표절은 아닌 것 같다,고 하지만 저는 다르게 느꼈습니다. 바로, 그 후대의 화가들이 마네를 조롱하는 건 아닐까 싶었으니까요. 물론, 그 진실은 마네와 그 후대 화가들만이 알겠지만 말입니다.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와 마네의 <올랭피아>는. 누가 봐도 너무 똑같아서,일까요? 당시 "표절"보다 "외설" 시비에 휘말린 것이 바로 올랭피아이기도 합니다만, 외설스럽다는 못 느끼겠고, 제 경우는 이건 오마주인가? 싶었으나, 왜 또 마네지? 싶긴 했습니다. 어쨌든 지금이나 예전이나, 표절과 외설의 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은 예술계 전반에 거쳐 있는 것 같긴 합니다. 그 차이가, 뭔지 궁금해지기도 하고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일까요?


그 외에,

네, 그림의 색에 대한 이야깁니다. 밀레의 만종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평화로운 그림은 아닙니다. 장례식이라고 하죠. 또한 <이삭 줍는 여인들>의 경우도 고단한 농부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몫하는 것은 그의 그림 색채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색은 "칙칙하다"라고 합니다. 이 당시,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그로 인한 대기오염으로 그림의 색이 제 색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죠. 묘한 것은 제겐 그 칙착한 색이, 되려 더 마음을 가라앉혀주고 있고요. 그럼에도, 밀레는 누군가에겐 목가적이나 또 누군가에겐 불온한 그림이었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미술의 매력 아닐까 싶습니다.

책은 고흐의 그 유명한 "해바라기" 그림들입니다 열 점을 책 속에 담아내, 전 좋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색이 변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릴 때, 노란색을 얻기 위해서 크롬 옐로와 황산염의 흰색을 섞어 사용해서라고 추정"(본문 298P) 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나 현대사회, 산업혁명 등 공기와 닿으면서 더더욱 위험도는 높아진 것입니다. 아직 걱정할 정돈 아니지만,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니 고흐의 그 "노란 해바라기"가 과연 어떻게 변할까, 싶습니다. 아마, 과학은 또 보전할 방법도 찾고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화학자가 간 미술관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학"도 나오지만, 실제로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합니다. 저는, 조금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 그림을 풀었을까 싶었으나 그보단 모든 것을 과학으로만 풀지 않고 서서히 미술관을 돌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의 비하인드와 가끔씩의 과학을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하긴, 모든 미술을 과학으로만 풀진 않겠지만 제 기대와는 사뭇 달랐던 느낌이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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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화가다 - 페미니즘 미술관
정일영 지음 / 아마존의나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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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지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네, 모나리자가 유명한 이유는 신비로운 미소 때문이 아니라 바로 주인공이 "웃는 여자" 이기 때문이라고도 들었습니다. 그 당신 초상화들은 거의 남성 중심이기도 했지만 그들조차 표정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표정을 짓는 그것도 "여자"가 주인공이라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했단 말에 놀랐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엔 없으니까. 그런데, 여자가 주인공인 것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면, "여자"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또 아주 많은 제약이 있었으니까요. 그것은 미술뿐 아니라 예술계 전반 아니, 사회적 전반에 거쳐 여성들의 활동은 많은 제한과 제약이 있었다는 걸 조금씩 접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번은 그림 속, 여자와 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그린 그림은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실력을 떠나, 그들의 그림에서 "관점, 시선"이 어디에 있는가였습니다.



같은 그림이, 몇백 년이 지나서도 있지만 <아담과 이브>는 변하지 않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림은 어떨까요? 별 차이가 없나요? 아니오, 차이는 명백합니다. 저 사과를 쥔 손 즉, "죄"의 주체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그렇지만, "이브가 아담에게" 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잔 발라동의 그림은 그 사과의 주인이 "함께"로 보여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장 비겁한 건 아담이었습니다.

-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이건, "당신 탓입니다. 그 여자 탓입니다" 일뿐, 그 어디에서도 "내 잘못입니다"라는 없습니다. 아니, 가장 마지막인가요? 네, 아담도 같이 먹었는데 그 모든 것을 "당신이 주신 그 여자 때문" 이니, 그 얼마나 비겁하냐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럼에도, 많은 그림들은 "이브, 혹은 하와의 유혹"으로 귀결을 냅니다. 아니, "여자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은연중, 억압된 여성들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그림들 중에서, 여성은 신체를 다 보입니다. 위의 "아담과 이브"에서 발라동 역시 여성임에도 어째서 여성의 신체는 적나라하게 보이면서 심의 때문에 남성의 그곳은 가렸다고 하니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여성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관음"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렘피카의 그림은, 도발적입니다 좋게 말해서는요.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렇게까지만 말할 수 있을까요? 전 이 그림을 그냥 "그림"으로서가 아니라, 그녀 자체가 "관음"을 아예 대놓고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까지, 보고 싶니? 봐! 인 것도 있지만 어쩌면 역이용을 왜 이렇게 대놓고 했지? 싶습니다. 되려, <네 명의 남성 누드>로 그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저 시선 끌기일 뿐이라고요. 물론, 작품의 구도, 색감 이런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입나다. 그랬다면 좀 더 달라졌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 그림은 그저 그녀의 소위 "관종"적 성격이기도 했습니다. 스캔들 자체를 즐기기도 했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그녀의 후원자인 부유한 귀족과 결혼했다..에서 참 실망스러웠습니다. 동시대, 그러에도 전혀 다른 그웬은 그래서 더 귀하다 여겨졌습니다. 시선을 끌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그림은 여성으로서의 온유한 듯 하나 그 고집이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뚝심으로 그웬은 그의 동생의 말처럼 지금, 상당히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나마, 붓을 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또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화가의 명성 때문에 쏟아지는 찬사들 중,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으로 알려져 상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그가 아니라 그저 무명의 여인인 화가였단 사실은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에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권한" 그게 제한돼 있어서, 어쩌면 내 이름이 굳이 아니라도 그저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만족했을지도요.

카미유 클로델과 로댕과의 관계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어땠든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로댕의 작품은 카미유에게 좋게 말해선 영감을 받았고, 그녀의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라는 것도 그저 영화가 아니라 실제 그랬단 사실을 볼 때, 참, "여차"란 이름이 측은해집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깨만 늘어뜨리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반기의 그림들" 도 있습니다.





이 그림들이 어떻습니까? 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별것인 그림들입니다.

당시 여자로서 "그림을 그리는 나"를 그려낸 젠탈스키와 앙구이슬라의 그림은 <"여자"를 그리는 남자>와, 그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여성이 주체가 돼, 훨씬 위쪽에 배치된 그녀, 앙구이슬라가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리는 것은 바로 화가인 "나" 자신,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처럼,

<내가 화가다> 인 셈입니다. 그때까지 "주체"가 남성인 것에서 여성으로 옮겨오는, 그러한 그림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림 몇 점으로 바뀌지는 않지만, 꾸준한 반기는 한 번쯤 부러트릴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읽다 보면, 도대체 천하의 난봉꾼인 저 제우스가 신 중의 신이란 게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피해자를 낳았습니다. 그저 신화는 신화일 뿐, 일 수도 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째서 헤라는 가해자인 제우스보다 피해자인 "그녀"들에게 뭐라고 하는가? 싶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제껏의 잠재되어 온 억눌린 여성성이란 것이겠죠. 요새는 그래도 많이 깨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가해자에게도 늘 탓은 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은 씁쓸했습니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그 세 여신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은 누구인가?를 왜 인간인 파리스에게 물었는가를 궁금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냥, 신화니까.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파리스의 심판 이야기에는 인간 남자가 여신들보다 서열상 더 위에 있다는 의미가 깔려 있다. 심판하는 자와 심판받는 자, 파리스의 심판은 단순히 서열상 상하관계를 넘어 권력관계를 보여준다.

본문 207p


아, 싶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나간 것은 아닐까 신들 중 그 누구도 세 명의 편을 들기 곤란하니 중립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아마, "여자"가 아닌 "남성"은 결국 여자는 남성에게 어필해야 한다,라는 것 같았습니다. 신화의 곳곳, 이런 코드가 숨겨져 있구나, 싶었습니다. <이브와 판도라> 참으로 많이 닮았습니다. 호기심을 주체치 못한 것 그리고 최초의 여자란 사실. 판도라의 상자는 실상,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 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 그림 속 항아리는 해골입니다. 참 묘합니다. 어쩌면, 여성의 죽음일까요?

이브 이전의 여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릴리스라고 합니다. 동등한 대우를 요구했다고도 하며 그녀를 이브를 꼬드긴 뱀이었다, 라고 하는데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그렇게 해야 이야기가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 팜 파탈>의 기원을 만들기 쉬워져서 일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악녀" 라고 말하는 그리고 사람들의 파멸로 이끄는 여인인 팜파탈_ 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정숙한 여인 또한요.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남성의 잘못이 훨씬 큼에도 두각은 여성의 잘못에만 초점을 맞춘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지금은 바뀌고 있을까요? 아직도 실은 가부장적인 세계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그러할 것이고요 다만, 아주 조금씩은 바뀌겠죠. 그 "조금씩"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시대에서 지금은 어엿이 그림을 그리지만 왜 "여류"가 붙는지..라고 묻지만, 전 부정적으로 생각지 않으려 합니다. 왜냐면, 여자니까요. 그 성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려고요. 물론, 그런 뜻이 아니란 것쯤 알지만 그 부정을 긍정으로 바꿀 때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이 표지의 그림이 불만이기도 했습니다. 왜냐면,

이 표지의 그림은 너무 이쁘기도 합니다. 결국 남성들의 눈을 사로잡자일까? "내가 화가다" 보단, 이게 이뻐서? 라는 생가도 했습니다만, 이 표지의그림이 무명의 여성화가의 작품성을 인정 받았기에, 라는 긍정의 생각을 하기로 했습니다. 네, 조금씩만 진일보 해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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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타워
릴리 프랭키 지음, 양윤옥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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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샤야 나카가와인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닙니다. 아버지가 손을 놓은 것보다는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별거"를 택하신 부모님이셨습니다. 그런 가족의 형태를 택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어머니는 매번, 진학할 때 한 번씩 물어본 것이 있었으니까요. _ 아버지와 이혼해도 되겠냐_ 고 말입니다. 그때마다 이 별거의 형태로 서류상 어쨌든 부부와 가족을 유지하고 있단 것 자체가 신기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마다 괜찮다고 하면서 마지막에 한마디씩 했던 것입니다.

- 나는, 이름 바꿔야 하나? 바뀌는 것 싫은데..

그건, 어쩌면 이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발목을 잡아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또 아이의 핑계를 댈 수 있었을까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아주 나를 방치하고 있었냐하면 그 역시도 아닙니다. 이상한 가족의 형태긴 하지만, 분명 아버지로서 진학 때마다 조언을 하고 도움을 준 것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향 아닌 고향을 떠나, 고교를 왠지 미술을 전공했고 또 도쿄로 가야겠단 생각으로 대학을 진학했습니다. 운이 좋은 건지 떨어진 적도 없었지만요.




이 텅 빈 도시에서 등을 꼿꼿이 세우고 늠름하게 빛을 발하는 그 풍정에서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휩쓸리고 패거리를 만들고, 친해졌다 배신하며 서로 속고 속이며 넘어가는 우리는 그 고독한 아름다움에 저절로 끌려드는 거라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빙글빙글 돌아버리는 우리가 그것을 동경하는 것이라고.

본문 5p-6p



그래서 일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유는요. 도쿄라는 대도시 속의 인간관계와 군상들은 더더욱 손익을 따집니다. 도쿄의 한 가운데 이제는 낡았다 해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이 야경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저 탑은, 어머니니까요. 마사야가 무엇을 하든 그 결정에 그의 어머니는 한 번도 안된다,보단 "해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도쿄로 대학을 와서 다닐 때의 학비도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지만 그럼에도, 가장 기뻐해 준 것도 어머니입니다. 마사야가 그렇게 그의 말처럼 "아버지를 닮아" 성실치 못했을 때도 손을 내밀 곳은 또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마샤야의 이야기라기보단 마사야가 말하는 "나의 어머니"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특히, 동경으로 온 후의 어머니와의 관계, 그리고 그 후, 그가 동경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면서의 관계와 내게 보이는 "나의 어머니"를 이 도쿄타워를 빗대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요. 특히, 어머니 에이코를 그녀의 눈으로고 아닌, "나, 마사야"의 눈으로 말합니다. 얼마나 어머니가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독자들이 느낄 수 있게끔 이야기합니다.





페이지 수가 줄어들수록,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의 구석퉁이 한편에는, 마사야의 이야기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누구나 효자고, 속 한번 썩이지 않고 그런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어머니"일 수 있을까 싶으면, 그건 또 아닙니다.

아버지가 처음이라서 그래, 덕선아. - 응답하라 1988,

엄니는 부부간의 문제와 자신의 앞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고 있었을까.

기껏해야 약간의 교제 기간과 기껏해야 약간의 결혼생활을 거쳐 "어머니"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보내게 된 데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을까. - 본문 77p


엄니와 나, 부모와 자식. 그 관계와 위치도가 조금씩 변해가는 가운데 이따금 엄니를 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생기곤 했다. 어머니라는 절대적인 베일을 벗어냈을 때 드러나는 한 인간으로서의 표정. 그간 엄니 홀로 좌절을 맛보았던 것. 마음속에 걸려있던 것들. 결코 완전하지 않은 한 인간의 탄식을 문득 깨닫는 일이 있었다. 본문 298p


네, 처음부터 아버지고 어머니였던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종종 잊고 있습니다. 왜냐면, 왜냐면, 그냥 내 엄마여야 하기 때문입니다.우리들의 이기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사야가, 그때마다 "이름이 바뀌는 게 싫어"라는 말을 한 그 이기심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나 봅니다.



저는 처음, 의외로 "엄니"란 단어 때문인지 아니면 조금은 익숙지 않아선지 초반은 고전을 한 편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페이지는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사야"의 이야기네, 하고 읽는 어느 순간 계속 어머니(엄니)가 궁금해집니다. 마사야가 조금 소홀해지면 무심한 아들이구나, 하면서도 또 한 번 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마사야보다 낫던가? 하면서요. 그래도, 마사야는 어머니를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중 선택권을 준다면 그는 과감히, 어머니를 택한다고까지 했으니까요.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그 모든 시간이 내게 얼마나 컸는지를 알기에 말입니다. 사실 띠지의 <우는 얼굴..> 어쩌고는 뭐 조금 과장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 소설의 후반부는 그랬습니다. 신파가 아니라, 쿵, 하고 내려앉는 그 무엇이 자꾸자꾸 서걱서걱, 소리 나게 합니다. 조 밑 어딘가가 뻐근해집니다. 뻔한데, 하면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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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작가는 일본의 만능 엔터테이너인 릴리 프랭키, 작중 화자인 이름 나카가와 마사야가 본명입니다. 말하자면, 자전적인 소설이기도 합니다 작품은, 그래선지 그림도 그렸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해선 도대체 뭘 하는..?의 의문점을 품기도 했었습니다. 네, 만능 엔터테이너이고 얼마 전 기생충이 받은 칸의 황금종려상을 작년에 수상한 고레에다 감독의 <어느 가족> 과, 그 전작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등에도 나왔던 그 나카가와 마사야입니다. 이 작품 역시, 오다기리 조 주연으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었습니다. 영화는 보진 못했으나 어떤지는 알 것 같습니다. 사실 작품도 신파적 요소보단 담백한 쪽이 강했으나 겪어본 이가 맛본 그 "상실감"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습니다.




세상의,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온전히 내 편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이름을 여러분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종종 잊습니다.왜냐면, 늘 곁에 계셔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임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지금 아주 잠시만, 그 버팀목의 찬란한 빛이 쓸쓸한 고독 속에서 나오는 것임, 그리고 그 당연한 일들은 실은, 어쩌면 기적의 순간들임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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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불
다카하시 히로키 지음, 손정임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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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유무는 이곳, 히라카와 지방으로 "전학"을 왔습니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잦은 전학이었으나, 그럼에도 이번이 아마도 마지막일 테고 그동안 짧으면 짧은 대로 학교생활을 잘해오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렇게 보내리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고교 진학을 앞둔 터라,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조금은 소년티를 벗으려는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까요. 게다가, 학교는 거의 폐교 직전의 자신이 이 학교의 마지막 중3 졸업생이 된다는 사실도 실은 잊었습니다.


왜냐면, 그는 "타지인", 그들의 말로는 "도시 따라지"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유무는 이 곳은 그저 "거쳐 가는 곳"일 뿐이어서일 겁니다. 그럼에도 학교의 친구들은 그를 마중나와 줬던 것입니다. 별다른 인사도 감정도 없는 아유무에게 말입니다. 잦은 전학은, 그에게 "적응"이라는 것을 선물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반의 아키라를 비롯해 권력서열까지 짧은 시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참새잡기" 놀이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재미였습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갈수록 이 놀이는, 그저 단순한 놀이가 아님을 알아버립니다. 처음은, 그저 우연이겠거니 혹은 그런 운명도 있겠거니 했는데 늘 걸리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도 운명일지 모르겠습니다. 당해야만 하는 운명.

반의 중심인 아키라가, 그렇게 "만들어내는" 운명입니다. 거기에 순응해야만 하는 이유는 섞이고 싶지 않아서였고, 미노루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게임에 아키라의 속임수가 포함되어 있어다 면, 그렇다, 그는 가장 위험하지 않은 상대가 칼을 소유하게 만든 것이다 본문 59p,


공부하다 쉬는 시간에 무심코 국어사전을 찾아보다가 `참새빛 시간' 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황혼녘을 가르킨다고 한다. 본문 103p



그리고,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곳을 떠날 시간이 말입니다. 오봉까지 보낸, 축제의 거의 막바지였습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릅니다. 아유무는 말입니다. 그 "참새잡이" 놀이를 선배들과 함께 하면서 일어난 이 기막힌 일들이요. 어째서, 자신에게 그 화살이 돌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아유무는, 정말 몰랐을까요..? _ 몰랐지만, 알았고 알았지만 몰랐을 겁니다.

왜, 아키라가 아닌 자신인 줄은 또 몰랐을 겁니다.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그 말을 들을 줄은요.

왜냐면, 늘 그러했으니까요. 자신은 그저, 그렇게 "떠나가는 이"였습니다. 제대로 된 "배웅"도 그래서 제대로 된 "마중"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네가 제일 열받았었어!" 본문 154p, 미노루, 아유무에게


그리고,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 마지막 때만 잘 견뎠더라면,일까요..? 아니면,일까요?

이야기는 시종일관 담담합니다. 아니, 고요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뭔가 어딘가의 뇌관이 터질 듯 혹은 아닐 듯했습니다. 다만, 이야기가 주는 그 분위기는 어쩌면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참새잡기"가 그렇게 가혹한가 하면, 네, 그랬습니다. 제 저 마음속의 잔혹함을 끌어냈으니까요. 말하자면 미노루가 당하는 걸 보면서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와 함게 기묘하게 미노루가 당하는 그 일들이 가혹한가?라고 묻습니다. 딱히 아닐 것 같다,라고 말할 수도요.

하지만, 미노루가 당하던 그때, 특히 염산의 장난 등은 가슴을 쓸게 하면서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반짝거리는 저를 봤습니다. 그러다가 아니라서 다행이구나와 동시에 어딘가 서운해서 깜짝 놀랬습니다. 난, 무얼 바랬던 걸까?라는 물음표를 던지면서요. 어쩌면 그 아이들도 그랬을 겁니다. 분명, 그 또래의 잔혹성은 드러내지 않고 숨겨져 있으니까요. "불길함을 태워서, 마을 밖으로.."라는 저 책 뒤의 말은 싸했습니다. 무엇이 불길했던가요? 외지인입니다. 결국, 마을 밖, 이곳을 떠날 사람은 "불길함" 이란 것입니다. 그게, 미노루에게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었단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에 한 말은 아유무의 그 태도에도 있었고 아유무 역시, 이곳에서 배타당하고 있었단 것입니다. 잘 적응하고 있었던 것보단요.





잘 넘어가던 책장이 어느 순간 무거워지면서 갑자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보기 시작하니, 작가는 "대조의 미학"을 너무나도 적재적소에 쓰고 있었습니다. 아키라와 미노루 사이도 실은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가 애증이라고 생각한다면 혹은 아유무의 방관에 대한 조소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불단으로 인해 왔을 때 아유무의 어머니가 내놓은 가지 요리 그건 일본의 오봉에 "가지로 만든 소"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돌아가신 시어머니들이 올 땐 자손들이 보고파 말로 오지만 갈 땐, 늦게 가고 싶어 소를 타고 간다,라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이야기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학교폭력 아니, 솔직히는 "방관하는 모습"들은 사라졌던가요?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쭉, 사람들은 폭력의 모습에서 방관하는 쪽을 택합니다. 그건 예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더디 가는 "가지 소"는 아유무가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하는 모습에서 더더욱 그걸 안다면 아마도 작가의 치밀한 계산을 눈치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봉이란 것은 축제입니다. 축제에 일어난 그 참사는 더더욱다나 핏빛으로 물듭니다.


이 작품은, 초반 상당히 유려한 문장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이래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나? 했으나 그 외엔 뭐가 있을까? 했던 그때에 이 작품이 제게 준 것은 뻐근함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아유무의 자리에 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방관자란 자리에서, 배웅 불을 들고 있어야 하는지 혹은, 내가 그 불의 주인공인지를 말입니다.


참새빛 시간, 그것은 황혼녘의 시간이고 그것은 또, 우리가 말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시간, 개와 늑대의 시간, 그리고 참새빛 시간과 참새잡기. 축제와 참사, 마중 없는 배웅. 그리고, 조용한 방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그 문 너머의 비명 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라면서 외면하는 그런 시간, 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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