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빌려줄래? -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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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나를 이어주기에 책 읽기를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저의 책 읽기는 그렇게 시작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거창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작은 소우주,라는 책이지만 사실 아버지가 선물해 준 책이 그리고 아마도 그 책을 보는 제가 기특해, 아버지의 작은 서재에 들어가면서입니다.러나, 그렇게 시작한 책 읽기는 의외로 재미있었습니다. 밤을 새워서 읽을 정도로요. 그러다, 변덕스러운 저는 어느새 새로운 것들에 흥미를 느끼면서, 책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만 변덕은 심해 계속 바뀌었고 그렇게 지금도 바뀌어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한 번씩의 주기로 돌아오는 것은 바로, 책이었습니다. 독서라고 하기에도 좀 부족하지만요.



말하자면, 이처럼 도돌이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처음 책을 알게 되고, 또 책에 푹 빠지고 그러다, 책으로 무언가들을 대신하고.. 저는 어디까지 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저 6번인 책을 등지고 나서 다른 것에 몰두하고 다시, 1번부터 시작하는 것인지도요.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책덕후들(?!)은 저리 반복을 거듭하면서 아마도, 지금의 고전을 탄생시켰을 겁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사지 않는다면, 그것이 다음 세대로 올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지금의 세대들도 다음에 올 이들에게 어느샌가 아주 자연스럽게 전달해 줄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저도, 마지막까지는 한 번쯤, 동참하고 싶은데 말이죠.


유독, 아끼는 책이 있습니다. 제 경우도 그렇고요. 그래서, 그 책을 책장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지만, 결국 책은 종이고 햇볕을 받으면 변하죠. 그리고, 어쩌면 다음 세대에게 그 책은 누군가가 또 아껴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표지가 이미 약간 누렇게 바래 있는데도, 여전히 소중한 것이고 오래된 그 책의 내음이 좋고..였는데, 요새는 새로이 <리커버 에디션>이 나오는 것은 아마도, 이 "기억 속의 선명한 연결?에서, 같은 여정이 계속 반복되기를 바라면서, 다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긴 합니다.


제가 아끼는 책은,

한 권은 아주 자주 나오지만, 한 권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 주기적으로 바꿔줘야겠구나,라면서 절판이 되기 않기를




책은, 어디서나 읽습니다_ 자투리 시간이거나 어서 무언가를 기다려야 하는 그 대기 시간에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왠지 책을 읽고 있습니다. 다만, 그 집중도는 현저히 떨어지긴 합니다. 요샌 도서관에서 읽는 시간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10시까지 열람하던 도서관은 6시면 문을 닫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간이 참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좀 더 읽어볼걸, 하고요. 그래도 역시, 책은 서재에서 읽거나 제 경우는 가장 편한 시간이 바로, 그 침대에서 모든 걸 마치고 오로지 책에만 집중할 수 있을 때,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는 바로, 나만의 세계로 향하고 그러다, 잠들어도 좋으니까요.


책이, 사라진다면 끔찍하겠죠. 그래서, 아마도 아직 스마트폰의 시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게 뭔지 아니? 책이 연기를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선전을 하면서 그냥 듣기만 해도 되는 오디오북까지 나오고, 편한 이북이 나오는 이 시대에 바스락바스락 책장 넘기는 소리 왠지 꼭 있어야 안심이 되는 것, 그리고 묘하게 넘기면서 나는 책의 종이 냄새, 나무 냄새가 좋아서 여전히 이 무거운 종이책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책 좀 빌려줄래?"는 책덕후들, 독서가들의 이야기가 조금은 작은 카툰으로 돼 있습니다. 저는, 카툰이 조금은 더 컸으면 싶기도 했으니까요.




책은 전반부가 바로 저 같은 "읽는 이들"을 위한 것이라면, 어느새 점점 바로 작가의 에세이기에, 책을 쓰는 사람을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결국, 작가들도 책덕후에서 시작하니까 말입니다. 왜 작가가 되었는가? 이 질문에, 아주 심플한 답이 나옵니다. "글을 쓰지 않으면 못 살아" 바로, 독자들이 책을 읽지 않으면 심심하고 책을 읽어야 하는 것처럼, 작가들은 써야지만, 살아가는 것 같으니까 말이죠. 그리고 계속해서 작가들의 고충들도 고스란히 책에는 나옵니다. 아마 카툰 에세이를 그리면서 느꼈던 점들이 묻어 나와 독자인 저로선 아, 작가는 이렇구나, 싶었습니다. 다만, 그 부분이 의외로 저처럼 평범한 독자는 많이 차지하네, 싶은 경향은 있었습니다.


책덕후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지금 책을 읽고 있다면 한 번쯤은 겪었을 이야기와 또 지금 책을 쓰고 있다면 한 번쯤은 분명 겪었을 이야기들이 귀여운 그림체로 그려져 있습니다. 어떻게 책을 읽게 되셨나요? 책과 만나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생략한 채, "지금"의 책덕후들에게 카툰으로 그 자신이 독자로, 작가로 전하는 에세이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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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지식의 한계 세계관 - 과학적 생각의 탄생, 경쟁, 충돌의 역사
리처드 드위트 지음, 김희주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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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택한 건, 바로 저 "세계관"이란 단어 때문이었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저 세계관의 변화가 궁금했습니다.그리고, 펼친 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 세계관의 이론부터 나왔습니다. 진리대응론, 그리고 진리정합론, 이라는 흥미로움으로 말입니다. 진리대응론의 경우, 실재가 실제인가? 혹은, 실재가 환상인가? 즉, 우리는 "실재"의 실제 모습을 단언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는 말은, <성찰>에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말하자면 그 실재와 실제의 불확실성으로 시작합니다. 조금 어렵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을 만났을 때도, 아주 반가웠습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이 지구, 과학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라는 것은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은 이미, 지구가 구체란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의외였습니다. 또한, 그의 세계관은 촘촘한 퍼즐이며 그것은 그에게뿐 아니라, 메인 명제 즉, 여기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는 것 등만 달라지지 않는다면 하나의 세계가 된단 것이죠 하지만, 만약 그의 생각처럼이 아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면_? 혹은, 이 퍼즐의 중심에 있는 것들 중 메인이 달라진다면, 그 세계관은 어떻게 될까요? 부정되야 할까요?(쓰고도 힘들군요..) 이런 것까진, 저는 재미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철학자답게 물질이란 것에 본질적이고 목적론적인 그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래저래, 말을 해 봤자, 어째든 그의 생각은 지구는, 둥글고(!) 정지해 있으며(??!) 우주의 중심이다. 더 놀란 것은 물론, 지금의 기독교적 신앙처럼은 아니지만(그러나, 그로 인해 발달한 것은 바로 또 종교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었다고 해서 전 놀랬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알아가고 있는데 벽에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의 세계관에서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을 재미있게, 알아가게 한다고 들었는데.. 살짝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그의 체계는 천체의 운동은 오직 완벽한 원형이다, 가 기본이라는데, 반박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무지한 고로 꾹, 하고 있었습니다. 그후,



페니쿠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태양 중심설"로 기웁니다. 신 플라톤주의는 쉽게 "태양은 절대선"이란 것이죠. 이것이 지금의 여러 종교의 유일신, 그리고 <하나님읜 선하다>일까요? 그의 이론도 상당히 주목을 받았으나, 어쨌든 그 기준이 뭔지 몰라도 프톨레마이오스가, 코페니쿠스보다 더 체계적이다, 라고 평가 받고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티코쳬계는, 다시 신플라톤주의와 코페르니쿠스에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다,

"티코 체계에서는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며 항성천은 우주의 가장자리다.

달과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돈다. 하지만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달과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지만 행성 운동의 중심은 태양이다. " 본문 225p

어쨌든, 저는 쇼킹했던 게, "지구가 구"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레이의 주장, 지구가 돌고 있고- 즉,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등에서의 지구가 돈다? 이것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교회는 이 과학적인 견해들을 반대치 않고, 그 새로운 발견들을 성서에 맞게 재해석했을 정도로 융통성이 있었으나, 갈릴레이가 불운한 것인지, 그의 시대에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아주 민감한 상황이라 너그럽지 못한 그런 시대였던 것이죠.

가장 쇼킹했던 건요,

지금도 지구가 우주 중심이라 믿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고, _ 케플러의 1법칙과, 티코쳬계를 따르는 사람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란 것조차, 실은 모른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우주계의 이 넓은 곳에서 서로 돌아가고 있는데, 무엇이 중심일까? 그래서 논란중이란 것에 또 놀랐습니다.





이렇게 보면 참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만,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나오고, 그의 유명한 관성의 법칙, 등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제껏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 본질론에서 뉴턴의 "과학과 밀접하게 연결괸 기계론적 우주관"으로 전환하는 큰 시기를 맞이합니다. 즉, 쉽게 형이상학적인 과학은 더 체계적으로 "철학"과 조금씩 분리되는 시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의 "무게"는 맥락에 따른다는데, 그 "맥락"이 이 책에서는 제 이해력이 부족해선지, 설명돼 있지 않았습니다. (전미도서....미국대학 이걸 못 봤.....ㅠ) 그 후, 나온 공약불가능성 그리고 양자론은 제가 감당하기엔 벅차더군요. 파동함수라던가 이미 잊은 줄 알았던 제게, 저기요....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슈뢰딩거의 방정식이라든가, 표준해석(코펜하겐 해석)_

즉, 표준 해석은 "실재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 실체"가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_ 라는 것이라면,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은, 이들과 다릅니다. 즉, 그는 "숨은 변수 해석"을 주장합니다. 모르시겠죠..? 하지만, 이 말장난은 의외로 재미있기도 합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즉, "다세계"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거기에 따르는 이론들은 어마어마했습니다(물론, 제 기준으로요.)벨/아스페의 국소성 이론도 나오는데, 저는 이 부분, 반박의 여지도 많겠다 싶더군요. 지금의 경우, 이 국소성 이론은, 컴퓨터등의 것으로 많은 오류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또다른 과학의 이론을 반박하면서 새로운 세계로 인도합니다.

특히나, 진화론의 경우, 어떨까요?

물론, 그 진화론에서 제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생존법칙"이었습니다. 첫 딸이나 첫 아들이 각기 이성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는다_ 이것은 인간의 생존본능이라고 듣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말이죠. 찰스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 공작새의 그 화려한 날개는, "열성"이고, 없어져야 한다.

라고 , 기억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작새를 유독 기억합니다. 그것을 인간에 대입하면,

- 인간은 아름다움이 열성이고, 사라져야 한다.

인간은 추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해가 되시나요? 전, 이 할아버지 학자님과 저 책으로 도대체 왜? .... 라고 했습니다만,

이 진화론은 종교론적인 것 때문에 논란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라도 논란거리는 너무나 많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추한가요? 언젠가, 이 진화론도 분명 체계를 잡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저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하지만 도덕 감정의 진화론적 기원을 이해한 우리는 이제 객관성이 환상임을 알 수 있다. (....)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개곽성은 환상이다. 하지만 중요한 환상이다. 그리고 여타 환상과 달리, 환상이라고 지적받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본문 539p

우리의 객관성이_ 도덕 감정의 등_ 환상이라면, 지금 우리가 읽었던 모든 것들 역시 어떨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환상일까요? 네, 데카르트의 말처럼, 실재하는 것들의 실제, 혹은 실체_ 그것을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 지금의 과학이 있는 것인 것 같습니다. 책은,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철학과 과학 즉, 예전의 철학자들이 과학자들임을 알기에 이 지구의 "과학"이 아닌, 철학과 과학을 동시에 가볍게 그 변천사의 세계관을 알고 싶었으나, 이 책은 너무나도 전문적이라선 벅찼습니다. 과학도들이 읽는다면 흥미로울 진 모르겠습니다만.. 그럼에도, 끝으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과학은 참으로 오묘하다. (.....) 우리가 보기에 케플러의 접근법은 상당히 엉뚱하고 기발했다. 그리고 그런 기발함이 없었다면 케플러가 그만큼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본문 239p








요약

전, 과학을 쉽게 읽을 수 있나보다, 해서 읽었다가(.....)저처럼 과학과 거리가 멀면 아.....하고만 있어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ㅠㅠㅠ힘들었습니다. 이건 과학인문서가 아닙니다. 과학전문서입니다.물론, 과학에 상당한 흥미가 있으신 분들에겐 참 좋은 책일터이나, 저같은 평범한 사람은, 너무나 힘든 책이었습니다..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게관, 그리고 예전부터 지구중심vs 태양중심, 이런 것들의 논쟁, 또한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이 실상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의외로 적단 사실에 놀라기도 했습니다만. 너무 어려웠던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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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그림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9
히사오 주란.마키 이쓰마.하시 몬도 지음, 이선윤 옮김 / 이상미디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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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모든 것에 답이 있을 순 있지만 그 모든 답이 똑같을 순 없습니다. 그리고, 또 분명치 않은 명제들과 답들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장르는 분명 미스터리입니다. 그리고 미스터리에 늘 범인이 있냐면 풀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미스터리인 것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내어진 문제를 각자의 몫으로 풀게 내버려 두기도 해서 미스터리인 것 같습니다. 각각의 단편은 참 모호합니다. 특히나, 표제작인 "나비 그림"의 히사오 주란의 작품들은 마치, 그림의 작풍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색채를 띠었습니다.

입헌군주제 아래, 귀족이거나 혹은 명문가 자제를 중심으로 펼쳐진 것, 그 가운데 비틀려 있는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인가 하면, "햄릿"의 경우는

주인공인 노인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리는 그 순간과 함께 기묘하게 나비가 날개를 펼친 순간과 동시에 접는 순간 어?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건 어디서부터 바뀐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접고 펼쳤습니다. 그 정답이 없는 순간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사건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정답을 외칠 때 다른 답 또한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그만큼 명확한 그 무언가가 없는 "모호함"이 어째서일까를 생각해 보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될 수 있을까요? 아니, 존재할 수 있을까요? 감정의 사이사이, 얼마나 많은 희비의 교차점에서도 또한 그 얼마나 많은 점과 선이 잠복해 있는지도 모릅니다(마쓰모토 세이초.. 군요) 그런데 그걸 더 정답입니다,라고 내놓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호반에서의 사랑이, 햄릿에서의 그 기억이, 나비 그림에서의 그 불안을 말입니다. 사랑이 애와 증이 있고 기억에 왜곡이 있으며 불안은 안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듯 말입니다. 마키 이쓰마의 <사라진 남자>와 <춤추는 말>은 어딘가의 오싹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참 흔들거리는 느낌이었다면 하시 몬도의 <감옥방>은 누군가 뒤통수를 탁, 하고 내리친 느낌도 들었습니다. 어째서와 어쩌지,라면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있으되, 풀이는 독자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나비가 날개를 펼치면, 그 순간

두 세계 즉, 과거와 현재가 혹은 꿈과 현실이, 그렇게 펼쳐지면서 혼돈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곳이 태풍의 눈이라도 되는 양 가장 조용합니다. 시끄러운 현재인지 혹은 악몽인지를 잊고 말입니다. 그렇게 소설은 독자들을 과거로도 그리고 있지도 않은 그 무언가에 홀린 주인공들을 보게도 합니다. 주인공들이 혼란스러운 것인지 혹은, 읽고 있는 나 자신이 비틀거리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말입니다.

나비가 날개를 접는 그 순간,

하나의 세계가 접혀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꿈인지 혹은 현실인지를 정해야 해서인지 더더욱 갈피를 잡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제 경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오필리아가 나오던 햄릿의 무대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무대,에서 두 번째 무대로 그리고 세 번째 그렇게 계속해서 넘어갈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햄릿의 비극은 미친 사람의 망상 때문에 주변 사람들 하나하나 희생이 되어 가는 "광기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죠. 도대체 그런 것에 무슨 예술적 가치가 있는 걸까요? 본문 79p, 햄릿 中

과연, 그럴까요..?


요약하자면 야마카와의 인생은 나를 포함해서, 사방팔방으로 눈치만 보던 극심한 겁쟁이 인간의 역사였다. 147p, 나비그림 중

화려한 가면이든 혹은, 피에로의 가면이든, 그 이유는 하나 같습니다. 바로 겁쟁이인 겁니다. 그 가면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피에로이기도 합니다.가만히, 피에로를 보고 있으면, 울지만 웃고 웃지만 울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서 "입만" 웃고 있고 눈은 보이지 않지만 피눈물을 흘리듯, 빨간색이라면 어딘가는 마치 파란색의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그런 느낌입니다. 아니, 모든 색깔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왜 피에로는 그렇게도 빨간색만이 생각났던가 싶기도 합니다. 겁쟁이의 색은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기도 한가 봅니다.

그 햄릿이, 그저 한 광인의 연극이라면 광기만 있다면 결코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상영되고 있지 않고, 오페라의 유령 또한 그럴 겁니다. 광기로만 점철돼 있다면 말입니다. 그 안에, 가면 안에서 울고 있는 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겁쟁이인 내가 쓰고 있는 모두의 가면을 말입니다





그런 작가들을, 만나고 온 시간이었습니다. 몽환적인, 란 말_ 그 경계선상이란 말이 알맞는 작가들을요.그들 앞에, 소설의 마술사라든가, 다면체 작가라는 수식어까진 모르겠지만, 그들이 또한 어떠한 시대를 살아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초반, 조금 적응이 필요했던 문어체와 고문체로 씌여져, 읽기가 아주 매끄럽진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들의 나비의 날갯짓처럼, 선을 넘나들면서 혹은 데칼코마니로 만들면서 접었다 폈다를 하던 작품들과 함께 말입니다. 겁쟁이의 시간이기도 했고, 그걸 굳이 벗어던지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기도 했고, 좋은 연극 무대를 로열석에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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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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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가슴 설레게 합니다. 이번의 작품이 그랬습니다. 남미, 아르헨티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그중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호러"를 만날 수 있음에 더더욱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펼친 후는 초반 "더러운 아이"에선 같이 그 여주인공처럼,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 끈적한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원래 장르가 그런 것이라서가 아니라, 바로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났었던 일이니까요.


기묘한 그 느낌은 다음 이야기로도 쭉 이어졌습니다. 이 장르가 호러일까 싶으면 아닌 것 같지만, 또 아니라고 하기엔 기묘함이 있습니다. 그 기묘함이란 것은 호러가 아닌 듯싶은데, 결코 또 아니어선 안 되는 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딕인가 싶으면 그걸 뛰어넘는 잔혹성 혹은, 또는 아이의 다리를 보는 환영인가 싶으면, 그보다는 그녀 스스로의 죄책감으로 얼룩진 것 때문에 확신하는 것들이 실은 환영인 듯 아닌 듯 알 수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호러의 설렘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책 속의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습했습니다. 초반, 남미의 호러를 기대하면서 열었던 책장은 처음은 이제껏 만나지 못한 문화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구나, 싶음이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가 마칠 때마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미성년자들을 보면서도 그들이 겁나기도 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서성이다가 빠져나오는 골목길이 있었다면 부랑자들만이 어슬렁거리는 뒷골목이 기다리고 있어선 빨리 그들이 접근하기 전에 간신히 빠져나오면 또 다른 습한 골목길이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나는 도망치지 못하고 저 골목길들을 다시 뒤돌아 보는 걸까, 싶었습니다. 그 골목길의 어느 한구석, 깔끔한 곳이 없는데 말입니다. 마치, 이 책의 이 부분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찬장 안에는 썩은 고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구더기들이 고기 위를 하얗게 뒤덮은 채 꿈틀거렸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고기인지 전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중략) 그 고기는 어둠 속에 잠긴 채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고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았다. " 본문 258.259 이웃집 마당 中


그렇게, 뭔가 유쾌치 않은, 그러나 그것이 호러긴 한데,라면서 왜 그렇게 눈을 떼지 않고 들여다보고 있었던 걸까 싶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그 소설 속에서 나 자신을 혹은 누군가 내가 아는 이들을 보고 있었을 겁니다.






아이들, 그리고 청소년들과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약자란 것에 있습니다. 이 책 중, 그들 중 정상이 몇이냐 될까 싶으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아니, 엄마들은 또 살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아이들을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더러운 아이, 검은 물속) 그들이 엄마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설령, 그것을 "사회의 공포"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그 많은 야생 곤충들이 사는 길인 줄 알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싶기도 했습니다.

남자들은 부인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지만 당연한 일인지도요. "이웃집 마당" 에선,

"미겔이 그녀를 미친 여자 취급하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자기 아내가 가엾은 여자아이를 내팽개쳤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아이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와 부러진 발목, 그리고 술 냄새를 풍기며 웃고 떠들었을 아내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본문 255p,

그녀는, 일하고 지쳐 잠시 동안의 망중한을 즐겼다고 그다지 큰 소리로 음악을 틀지도 않았고... 등의 이유를 들었지만, 그 결과는 잔인했습니다. 그녀는 직장을 잃었고 아이는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녀가 또렷하게 보았다는 아이의 다리는 그래서 더더욱 "죄책감"이 만들어낸 호러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호러는 아주 슬프지만, 또 섬뜩하게도 다가왔고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슥 내놓은 표현은 서늘하기까지 했습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사건은 늘 가난, 그리고 불행한 운명과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368p, 검은 물속




이 책의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제가 그 골목길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 거기는 늘 가난하거나 그래서 발생하는 사건들 혹은, 평탄치 않은 운명들 혹은 그 모두가 있었기 때문에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꾸 돌아봤던 이유는, 아마도 그 초반 시작한 <더러운 아이>부터 시작한 그 아이들의 가늘고 여린 더러운 발목을 지나칠 수만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것은 생경함이 아니라 아주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늘 우리가 만나고 있지만 우리는 고개를 기어이 돌려 외면하고 있는 "호러, 공포, 가상의 세계"의 이야기가 아닌, 내 옆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요. 네, 진짜 공포는 그녀의 말처럼 역사적, 사회적인 오늘날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쳐 나오고 싶었지만, 기어이 끌어당기는 것들은 가장 여린 것들, 가장 약한 것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끝끝내 외면하지만은 못하는 것들은 말입니다.


거의 처음 만나는 남미문학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남미의 호러는 예전, 스페인 호러 단편선으로 한번 접했습니다. 일상에서의 그 평범함 속, 기이함을요. 그래서, 무섭지 않음에 실망했다가 돌아오는 발걸음 그 미묘하게 무거웠던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이 이 소설에서 어떤 것인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소설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되려 그 습하면서도 발목을 잡는 기이함 때문에, 어딘가 쉽게 읽히는 "호러"와는 다릅니다. 왜냐면 이건, 생활 속 혹은 평범함 속에서 벌어질 수 있으면서도 그 기묘한 현상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저는 힘들었고 취향이 맞지 않은 것 아니나 이걸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책은, 제 기준에선 상당히 마니악 했습니다. 그만큼 호불호가 너무나 뚜렷할 책이기도 하고요. 그녀, 마리아나 엔리케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공포, 호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스티븐 킹을 언급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공포는 어디에서 오느냐고요. 한 번쯤, 생각해 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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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 서커스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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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일은 하룻밤 사이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은 단순한 오해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세상에 오해는 쉽게 쌓이고 풀리기는 아주 어렵게도 풀리고 간혹,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서커스 단"이라는 특수한 배경이 불러일으킨 것인지 혹은, 그것을 전달한 자가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들킨 것이 잘못인지 그 어느 것 하나 쉽사리 틀렸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일이 아니라 인간과 뱀파이어라 불리는 흡혈귀 사이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그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몰라도,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의 일이지도 모르겠지만, 재정적, 인간적인 대립과 갈등 속에서 갈라진 틈 사이, 그래서 함께 하지 못하는 그날 처음 보는 괴물을 보고, 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괴물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몰래 "서커스 단"으로 위장한 특수부대가 그들을 소탕하려 한다는 정보 때문에 그곳에 나타난 것입니다. 게다가,"란도" 라는 이름을 쉽게 발음하기 위해 부른 랜디, 란 이름은 하필 흡혈귀를 잡는 그 컨소시엄이란 단체의 캡틴인 랜돌프로 오해한 것으로 출발합니다.


서커스가 주는 것은, 손기술로 트릭이 비슷한 마술은 아닙니다. 그들이 직접 갈고닦은 실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 위험천만의 일이기 때문에 서커스는 그렇게도 화려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그날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니까요. 그리하여 서커스를 한 번 본 사람들이 잊을 수 없는 것, 은 어쩌면 "화려함" 안에 숨어있는 그 무언지 모를 그것,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그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 조금은 다른 "마술"을 하고자 들어온 이가 있습니다. 동양인 란도. _ 서커스 단은 처음은, 그를 거부합니다. 마술은, "트릭" 즉, 눈속임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한 명이 그런 트릭을 쓴다면, 모두를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의견이 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또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길 그 무엇, 마술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3년 전 들어온 서커스 단은 그동안 와해되고, 재정적인 파탄을 겪으면서 단원들끼리의 불협화음과 결국, 남기로 한 자와 떠나기로 한 자, 그런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날 발견된 시신 한 구. 인간이 한 짓이 아닌 것만 같은 그 시신의 의문은 곧 풀리게 됩니다. 그들 앞에 왜, 괴물이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 그러니까 서커스 단이 표적임은 맞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게임으로 치면 배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게임에서 그저 "game over"의 자막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목숨과 목숨과의 대결입니다. 그것도 상대방의 능력치는 알 수도 없고, 죽었다 싶은 순간 다시 살아나 뒤에서 언제 내 목을 조일 지 알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도대체 이유조차 모르고 그들은 도망치고, 내 동료와 함께 싸워야 하는 것인지도요. 이야기는, 그렇게 핏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서커스에서 익힌 그 기술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운과 함께, 생에 대한 집착,이죠. 늘 죽고 싶다고 하지만 실상 그 말은 살고 싶다는 것이니까요. 어쨌든, 인크레더블 서커스 단은 모든 문제를 뒤로 한 채, 생존 그 자체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마치, 그들이 서커스의 기술을 관중에게 선보일 때, 실수보다 오늘의 배틀을 무사히 치뤄낼 수 있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한 마음으로, 아무도 도와주지 못할 상황까지 대비해야 하니까요.



고바야시 야스미는 잔혹합니다. 제 경우는, 초반 이 핏빛 곡예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이제껏 그의 작품에서 만난, 잔혹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 속, 진짜 툭, 하고 던지듯 내놓았던 것이기에 저는 좀 더 살짝 즐거웠는지도 모릅니다(응?!) 가끔 우리가 만나는 것들 중,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 별 생각없이 보고 있는데, 옆에서 툭, 하고 튀어나오는 그 무심한 듯한 잔혹성.

그런데, 이번의 고바야시 야스미는, 여기서 호불호가 갈릴 것 같습니다. 제 경우는, 이 잔혹성이 계속되는 것,_ 즉, 한 템포 쉴 때쯤, 방심하고 있는데 툭, 하고 떨어지게 만들어주는 그 무언가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쉴 새 없이 계속 공격을 합니다. 계속되는 핏빛은 어느 순간, 더 이상 끔찍하다기 보다 아, 이번엔 어떤 끔찍함을 보여주려나요? 라는 조금 힘들면서도 살포시 그 흥미가 덜해지면서 심드렁해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또 어떤 이들에겐 쉼없이 쏟아지는 이 공격의 같지 않은 양상에 환호성을 지를 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만큼, 호불호가 갈릴 부분인 것이죠. 제 경우,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죽이기 시리즈, 그리고 국내에 출간된 최근간인 <분리된 기억의 세계>까지 읽었을 때, 늘 좋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나오기 힘든 잔혹, 이라고나 할까요.




"서커스를 얕잡아보면 언젠가 한 방 먹을 때가 있을 거야." 본문 149p, 쿠와이가 란도에게

이 녀석은 완전히 죽었어.

그렇다면 아직 그 흡혈귀는 살아있어. 본문 297p, 란도

네, 서커스가 아니라 그 무엇이든 방심한 순간, 날아오는 게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 고바야시 야스미가 준 선물, 그것 역시 호불호가 될 수도요. 전, 그 파트는 좋았습니다. 의외로요. 그리고, 그 마지막에 남는 씁쓸함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그가 묻더군요. 진짜, 그들을, 흡혈귀들을 다 물리쳤다고 생각하나요? 라고 말입니다. 전, 그의 그런 방심한 듯 할 때의 툭, 치고 오는 게 좋았습니다. 연재하던 작품을 가필, 수정해선지 어딘가 개인적으론 산만한 구석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 과정에서 의외로 많이 지쳐 있긴 했습니다. 그리고 낭자함이 좀 가득해, 그 부분에서도 대중적이진 않겠구나,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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