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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그림 ㅣ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9
히사오 주란.마키 이쓰마.하시 몬도 지음, 이선윤 옮김 / 이상미디어 / 2020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에 답이 있을 순 있지만 그 모든 답이 똑같을 순 없습니다. 그리고, 또 분명치 않은 명제들과 답들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장르는 분명 미스터리입니다. 그리고 미스터리에 늘 범인이 있냐면 풀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미스터리인 것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내어진 문제를 각자의 몫으로 풀게 내버려 두기도 해서 미스터리인 것 같습니다. 각각의 단편은 참 모호합니다. 특히나, 표제작인 "나비 그림"의 히사오 주란의 작품들은 마치, 그림의 작풍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그런 색채를 띠었습니다.
입헌군주제 아래, 귀족이거나 혹은 명문가 자제를 중심으로 펼쳐진 것, 그 가운데 비틀려 있는 젊은 청춘들의 이야기인가 하면, "햄릿"의 경우는
주인공인 노인에 대한 미스터리가 풀리는 그 순간과 함께 기묘하게 나비가 날개를 펼친 순간과 동시에 접는 순간 어?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건 어디서부터 바뀐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접고 펼쳤습니다. 그 정답이 없는 순간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사건들은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정답을 외칠 때 다른 답 또한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그만큼 명확한 그 무언가가 없는 "모호함"이 어째서일까를 생각해 보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감정이란 것이 얼마나 될 수 있을까요? 아니, 존재할 수 있을까요? 감정의 사이사이, 얼마나 많은 희비의 교차점에서도 또한 그 얼마나 많은 점과 선이 잠복해 있는지도 모릅니다(마쓰모토 세이초.. 군요) 그런데 그걸 더 정답입니다,라고 내놓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호반에서의 사랑이, 햄릿에서의 그 기억이, 나비 그림에서의 그 불안을 말입니다. 사랑이 애와 증이 있고 기억에 왜곡이 있으며 불안은 안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듯 말입니다. 마키 이쓰마의 <사라진 남자>와 <춤추는 말>은 어딘가의 오싹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참 흔들거리는 느낌이었다면 하시 몬도의 <감옥방>은 누군가 뒤통수를 탁, 하고 내리친 느낌도 들었습니다. 어째서와 어쩌지,라면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있으되, 풀이는 독자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나비가 날개를 펼치면, 그 순간
두 세계 즉, 과거와 현재가 혹은 꿈과 현실이, 그렇게 펼쳐지면서 혼돈 속으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곳이 태풍의 눈이라도 되는 양 가장 조용합니다. 시끄러운 현재인지 혹은 악몽인지를 잊고 말입니다. 그렇게 소설은 독자들을 과거로도 그리고 있지도 않은 그 무언가에 홀린 주인공들을 보게도 합니다. 주인공들이 혼란스러운 것인지 혹은, 읽고 있는 나 자신이 비틀거리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말입니다.
나비가 날개를 접는 그 순간,
하나의 세계가 접혀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꿈인지 혹은 현실인지를 정해야 해서인지 더더욱 갈피를 잡을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제 경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바로 오필리아가 나오던 햄릿의 무대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무대,에서 두 번째 무대로 그리고 세 번째 그렇게 계속해서 넘어갈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햄릿의 비극은 미친 사람의 망상 때문에 주변 사람들 하나하나 희생이 되어 가는 "광기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죠. 도대체 그런 것에 무슨 예술적 가치가 있는 걸까요? 본문 79p, 햄릿 中
과연, 그럴까요..?
요약하자면 야마카와의 인생은 나를 포함해서, 사방팔방으로 눈치만 보던 극심한 겁쟁이 인간의 역사였다. 147p, 나비그림 중
화려한 가면이든 혹은, 피에로의 가면이든, 그 이유는 하나 같습니다. 바로 겁쟁이인 겁니다. 그 가면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피에로이기도 합니다.가만히, 피에로를 보고 있으면, 울지만 웃고 웃지만 울고 있다는 것이 보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래서 "입만" 웃고 있고 눈은 보이지 않지만 피눈물을 흘리듯, 빨간색이라면 어딘가는 마치 파란색의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그런 느낌입니다. 아니, 모든 색깔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왜 피에로는 그렇게도 빨간색만이 생각났던가 싶기도 합니다. 겁쟁이의 색은 그래서 사람마다 다르기도 한가 봅니다.
그 햄릿이, 그저 한 광인의 연극이라면 광기만 있다면 결코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상영되고 있지 않고, 오페라의 유령 또한 그럴 겁니다. 광기로만 점철돼 있다면 말입니다. 그 안에, 가면 안에서 울고 있는 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겁쟁이인 내가 쓰고 있는 모두의 가면을 말입니다

그런 작가들을, 만나고 온 시간이었습니다. 몽환적인, 란 말_ 그 경계선상이란 말이 알맞는 작가들을요.그들 앞에, 소설의 마술사라든가, 다면체 작가라는 수식어까진 모르겠지만, 그들이 또한 어떠한 시대를 살아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초반, 조금 적응이 필요했던 문어체와 고문체로 씌여져, 읽기가 아주 매끄럽진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들의 나비의 날갯짓처럼, 선을 넘나들면서 혹은 데칼코마니로 만들면서 접었다 폈다를 하던 작품들과 함께 말입니다. 겁쟁이의 시간이기도 했고, 그걸 굳이 벗어던지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기도 했고, 좋은 연극 무대를 로열석에서 보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