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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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선생님(존경하는 분들을 언급할 때 반드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을 두 번 뵈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을 따라 '홍명희 문학제'에 갔을 때와 2009'한국작가회의'에서 주최한 '젊은 작가와의 대화 -김사이 시인'에서 였다. 홍명희 문학제 땐 아주 잠시 뵈었다. 내 앞을 먼저 걸어가던 선생님이 문을 여시곤 내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주신 기억이 오래 남았었다. 나보다 앞서 홍명희 문학제에 참석했던 선후배들이 도종환 선생님을 뵙고는 친절하시고 인자하신 분이라는 평가를 했었는데 나도 그 말에 공감을 하게 되었었다.

 

2009년에는 길게 뵈었다. 당시 도종환 선생님은 '한국작가회의'의 간사셨다. 용기를 내어 따라간 뒷풀이 자리에서 여러 명의 작가들과 함께 몇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역시 도종환 선생님은 따뜻하시고 유쾌하신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선생님이 정치인이 되다니. 여전히 놀랍다. 하지만 어느 일면 이해도 된다. 세상을 바꾸려면 무엇보다 정치를 바꾸어야 하니까.

 

인간적으로야 도종환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선생님의 시를 많이 좋아하진 않았었다. 시의 매력은 역시 은유와 상징, 멋들어진 언어에 있다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럼에도 송경동 시인처럼 도종환 선생님의 몇몇 시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오늘 하루>라는 시는 자주 읽는 시들 중 하나다.

 

며칠 전, 선생님이 시집을 내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외였다. 정치를 하시는 선생님이 시집을 내시다니. 사월 바다를 산 이유는 시인이자 교사이던 시절의 선생님의 시 경향과 정치인이 된 후의 선생님의 시 경향이 달라졌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의 말부터 읽었고, 작가의 말에 반했다. 왜 하필 정치를 택했을까에 대한 선생님의 대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골집에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 수련 한 포기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련에게 왜 더러운 진흙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존재의 바탕이요 수련의 현실이며 운명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왜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느냐고 묻습니다.

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현실 아닐까요.

아비규환의 현실, 고통과 절규와 슬픔과 궁핍과 몸부림의 현실.

 

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까요.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찍으려면 몸에 흙이 묻습니다. 집을 고쳐 지으려면 흙먼지를 뒤짚어쓰게 됩니다. 지난 사년간 온몸에 흙을 묻히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이 시들을 썼습니다.

 

구도의 길과 세속의 길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행을 통해 가고자 하는 길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고자 하는 길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 201610월 도종환"

 

사람들의 우문에, 이보다 명쾌하고 현명한 대답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런 대답을 듣고 있노라니, 정치인으로서 선생님의 시가 달라졌을까 싶었던 생각도 어리석었음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그랬듯, 사월 바다의 시들도 정직하고 분명했지만 깊었다.

 

슬픔의 통로

 

별들이 유난히 가까이 내려오는 밤이 있다

그믐이 다가올수록 어둠은 더 많은 별을 내보낸다

동굴 속에서 몇날 며칠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킨

한 사내를 생각한다 불씨를 만든 것은

얼어터진 두 손이었을까 혹독한 한파였을까

삼나무를 쪼개 배를 만들게 한 것은 거친 물결

지도를 만든 것은 오랜 방황과 잃어버린 발자국

기도를 알게 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을까

사랑을 가르친 것은 형언할 수 없는 외로움

경전을 쓰게 한 것은 해결할 길 없는 고뇌

시인을 만든 것은 열망이 아니라 슬픔 아니었을까

이 통증의 끝에는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삶과 죽음이 완만한 속도로 임무를 교대하듯

슬픔 속에서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시간이 오리라

지금은 다만 천천히 깊은 슬픔의 통로를 걸어나갈 것

서둘러 눈물을 닦지 말고 흐르게 둘 것

여기까지 우리를 밀고 온 것이 좌절의 힘이었듯

약초를 알게 한 것이 상처와 고통이었듯

패배를 딛고 처절하게 한발 한발 걸어나갈 것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다스려 온기로 바꿀 것

지금은 따뜻한 위로의 물 한잔을 건넬 시간

남을 찌르지 말고 피 묻은 분노의 칼을 거둘 것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마음의 안부를 물어볼 것

그리고 창을 열 것

그러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되리니

그쪽으로 갈 것

그러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가시리니

 

"시인을 만든 것은 슬픔"이었을지 몰라도 "통증의 끝에 어제와 다른 아침이 기다리고 있으""좌절의 힘""한발 한발 걸어나갈" "온기"이자 "위로"가 되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쪽으로" 가면 "신도 우리 옆에서 그쪽으로 함께" 간다. "슬픔의 통로"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 되어 우리뿐만 아니라 신도 안내한다. 그러니 섣불리 절망하지 말 것.

 

정치인으로서 정치의 한복판에 서 있어도 희망을 놓치 않는 시인의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현실이 암울해도 여기서 끝이 아닐 것이라는 희망은 포기하지 않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이 시는 현실의 어두움에 오래 좌절했었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이뿐이 아니다.

 

희망의 이유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 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하늘 꼭대기에서 거기까지

햇살의 화살 한개를 쏘고 있는

태양의 따스한 손길에 있다

국경을 넘어와 땅속 깊이 감춰진 벽을 뚫어버리는

가공할 폭탄의 힘에 한 시대의 가능성을 걸지 말라

밤의 거리에서 평화를 구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촛불과

그 불을 받쳐든 어린 두 손에 희망이 있다

이웃나라를 손쉽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만년을 녹지 않는 히말라야 숫눈처럼

빛나는 순백의 영혼

오체투지로 낮아지고 가난해져서

다시 일어서는 정신에

영원한 미래의 날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잔인하게 쓰러뜨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승리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식탁과 살찐 육신은

우리가 죽이고 짓밟은 것들의 묘지를 이루고 있나니

오래오래 주류로 살아온 이들이 잘 차려놓은

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고 손가락질하는 소수가

소박하고 정결하게 차린 두레반에 미래가 있다

어미 잃은 어린 짐승을 감싸안으며 눈물겨워하는

모성과 연민과 자비 아니면 희망 아니다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도 그대는 일주문 밖이다

속도와 경쟁과 승리의 갈망에 휘둘리지 말고

그만 내려서라

댓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

낙화 이후의 긴긴 날을 걸어가는

꽃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면

그대가 달려가는 속도의 끝은 반드시 벼랑이다

증오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경전 같은 말들이 있음을 가르치되

시인의 음성으로 하라

나약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은 목소리로

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라

거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 오래도록 희망이다

    

이 시는 사월 바다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이다. 이 시를 통해 다시 한 번 도종환 선생님의 가치관을 깨닫는다. 선생님이 끝까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는 "시인의 음성"으로 "새 한마리의 목숨""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고 말하는 혜안을 가졌기 때문이겠다.

    

​『사월 바다를 읽으며 시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한다. 그동안 도종환 선생님의 시를 폄하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한다. 시의 힘은 문재(文才)가 없는 범인(凡人)은 흉내낼 수 없을 만큼 빼어난 언어적 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 손을 잡고 나아갈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 의지에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점검한다. 어둠이 짙게 깔린 여기, 지금, 아직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음성이야말로 시가 아닐까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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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쓰는 법 - 독서의 완성 땅콩문고
이원석 지음 / 유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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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omn.kr/m0uh

- 오마이뉴스 책동네에 기고한 글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았다,라고 말하면 지루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셨는지 아버지는 내가 8살 때 이사를 택하셨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친구가 생기려고 할 무렵에 경기도에 있던 목장으로 이사를 갔다. 원래 사슴을 키우는 목장이던 곳이 수련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수련원의 식당에 손이 필요했던 이유였다. 아버지는 수련원 식당의 주방장이 되셨고 우리 남매들은 난데없이 시골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곳은 인근의 초등학교에서도 꽤 먼 곳에 있었다. 한 시간을 걸어서 이십여 분을 버스를 타고 내려야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오빠와 등교 시간이 겹치는 오전에는 오빠와 같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반이 되는 날-당시의 초등학교 저학년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뉘어 있었다-에는 혼자 한 시간을 걸어서 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감당하기에는 조금 힘든 생활이었지만 닥쳤으니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와야 어두워지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지는 않았을 것도 같다.

 

친구 사귀기 대신 책을 즐겨 읽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막상 책을 다 읽은 후가 문제였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왜 그렇게 책에 관한 수다를 떨고 싶은지 오히려 더 쓸쓸해졌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독후감도 쓰고, 일기도 썼다. 작품을 모방하며 작가가 되기를 꿈꿨다. 그런 시간을 거쳐 책을 읽고 나면, 글을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원석 작가의 <서평 쓰는 법>이 반가웠던 이유는 이런 내 삶의 이력이 있어서였다. 작가는 서평이 독서의 완성이라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잘 읽을 수 있고, 또 깊이 읽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읽어야 책을 내 것으로 만들고, 책을 통해 나를 만들 수 있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읽은 책에 대해 서평을 쓰는 것입니다. 서평이야말로 독서의 심화이고, 나아가 독서의 완성입니다.”(9-10)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독서의 심화법을 배우고, 완성에까지 이르렀다는 칭찬을 받으니 이 책이 안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냥 책을 읽는 것도 물론 좋지만, 서평으로 흔적을 남기는 경우와는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서평이야말로 제 독서의 결산인 셈입니다. 서평으로 독서가 일단락되는 것이지요.”(10)

 

어설펐지만 어린 시절부터 써 온 서평(혹은 독후감)이 있었기에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책을 오래 사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서평 쓰는 법>은 기존의 내 독서법이 독서를 할 때, 꼭 필요한 과정임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서평과 독후감을 혼동해서 사용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작가는 이 부분을 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독후감과 서평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첫째, 독후감이 정서적이라면, 서평은 논리적입니다. <중략> 둘째, 독후감이 내향적이라면, 서평은 외향적입니다. <중략> 셋째, 독후감이 일방적이라면, 서평은 관계적입니다. <중략> 이렇듯 서평은 그 서평을 읽는 독자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서평 읽기는 하나의 단계에 불과합니다. 서평을 읽은 독자가 해당 책을 읽거나 읽지 않는 구체적인 반응으로 화답해 주어야 서평은 제 구실을 다한 것이 되며, 이로써 서평을 통한 대화가 완성됩니다.” (23-25)

 

1부 서평이란 무엇인가의 시작은 서평과 독후감을 구분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서평의 본질과 서평의 목적을 짚어낸다.

 

서평, 즉 북리뷰(Book Review)에서 리뷰는 책을 다시(re) 보는(view)' 겁니다. 새롭게 읽는 것이지요. 이는 해석의 주체인 독자가 각기 다른 자리에 서 있기에 가능합니다. 모든 서평은 독자/서평가의 다시 읽기입니다. 나아가 다른 독자에게 다시 읽기를 제안합니다.” (33)

 

서평 쓰기의 일차 가치는 독자 자신의 내면 성찰에 있습니다. 서평 쓰기는 작성자가 그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독서 자체가 그러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서평 쓰기는 심화된 독서 행위입니다. 더욱 깊게 책을 읽는 가운데 자신을 더욱 깊게 읽는 것이지요.” (44)

 

자아 성찰이 서평 쓰기의 결론은 아닙니다. 진정한 종결은 어디까지나 삶을 통한 해석이자 실천입니다. 이는 물론 서평이 보여 주는 가능성을 극대화한 이상적인 논의일 겁니다. 그렇더라도 이상은 중세의 선원이 기준으로 삼던 밤하늘의 북극성과도 같습니다. 항해를 통해서 북극성에 다다를 수는 없어도 북극성을 보며 항해의 방향을 바로 잡을 수는 있습니다. 서평이 독서의 완성이라면, 그 완성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47)

 

이에 대한 확장으로 2부에서는 서평을 어떻게 쓸 것인가로 이어진다. 작가는 서평의 전제, 서평의 요소, 서평의 방법으로 구분하여 서평 쓰는 법을 꼼꼼하게 안내한다. 고추장 만드는 비법은 며느리도 모른다는 여느 떡볶이집 할머니의 명언을 무시라도 하듯, 오랜 독서가이자 서평가로서 작가가 찾아낸 서평 쓰기의 정수를 모두 알려준다.

 

서평을 잘 쓰기 위해서는 우선 독서의 목적독서의 태도(69)”를 제대로 점검(서평의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서평가는 무엇을 위해 책을 읽을까요? 기본적으로는 앞에서 말한 목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저 각각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읽고 독자와 공개적으로 소통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읽느냐보다는 왜 읽느냐에서 도출되는 질문인 무엇을 소통하려 하느냐가 중요합니다.”(70)

 

왜 읽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떻게 읽느냐입니다. 방법이 아니라 태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책에 대한 태도가 양가적이어야 합니다. 한 면으로 숭배자가 되고, 다른 한 면으로 비판자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서평을 쓰려면, 다루는 책이 뭐가 됐건 이런 이중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책에 매료되어 다가가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책으로부터 냉철하게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물론 책에게 다다가 흠뻑 빠져드는 것이 우선입니다. 공감의 해석학이 선행되어야, 이어서 비판의 해석학도 충분히 제 몫을 하게 됩니다.”(74)

 

서평의 전제를 점검했다면, 서평의 핵심 요소 역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그 핵심을 요약과 평가”(85)에서 찾는다.

 

요약 없는 평가는 맹목적이고, 평가 없는 요약은 공허합니다. 맥락화에 기초한 평가가 없다면 서평은 의미가 없지만 그 평가의 근간에는 충실한 요약이 자리해야 합니다.”(85) 

 

이를 토대로 요약과 평가가 필요한 이유를 제시하고 평가의 의미와 요소를 짚어낸다.

 

좋은 서평은 바른 맥락 속에 책을 자리매김합니다. 하나의 책을 다른 책과 연결해 특정한 자리를 찾아 주는 것이 서평의 역할입니다.”(100)

 

이 과정은 서평을 쓰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독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독서의 완성이 서평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책을 어떤 기준으로 골라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이원석 작가가 제시한 평가의 요소-제목, 목차, 문체, 지식과 논리, 번역, 감정 이입-를 살피라고 권하고 싶다. 평가의 요소는 서평을 쓸 때뿐만이 아니라 책을 고를 때와 책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평의 방법에 와서는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일단 생각하라. 지금 바로 글을 쓰라. 첫 문장에 대해서 고민하되 지나칠 필요는 없다. 문단은 하나의 생각을 중심으로 축약하라. 인용은 전채일 뿐이고 서평의 주체는 서평가임을 잊지 말라. 마무리 역시 부담을 가지지 말되 서평을 썼던 이유를 잊지 말라. 다 쓰되 고쳐 써라. 어려우면 좋은 서평을 참고하되, 분량에 너무 집착하지는 말라.’

 

간단하게 요약했지만, 책은 내 방식의 요약보다 구체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서평 쓰기에 관해서 이토록 구체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저자가 말미에 언급하듯, 이 책이 앞으로 나올 책들의 디딤돌이 되(165)”도록 포문을 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내가 작가에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책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없었던 시절, 쓸쓸했지만 덤덤하게 걸어온 길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이제는 네 마음을 알아줄 지침이 있으니 함께 같이 가자고.

 

물론, 지금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온라인에 글을 쓸 공간이 생긴 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책에 관한 소감을 나누면서 블로거끼리 교류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원석 작가처럼 조근조근 서평의 의미에 대해 알려주지는 않았다. 서평을 어떻게 써야 작가, 서평가, 독자 사이의 교류를 끈적하게 만들 수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독서법이 궁금한, 독서를 통해 깊이 교류하고 싶은, 책을 깊이 이해하고 싶은, 글을 잘 쓰고 싶은... 수많은)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일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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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문제들 - 인간과 철학
버트란드 러셀 지음, 박영태 옮김 / 이학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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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관한 가장 좋은 리뷰는 이미 출간되었다. <곁에 두고 읽는 철학가이드북>의 20-23쪽에 실려 있다.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http://blog.naver.com/dreamerfs/220883300855 의 가장 아래 사진 부분만 참고하시면 된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섯 번에 걸쳐 <철학의 문제들>을 읽었기에 뭐라도 적어두어야 할 것 같아서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적으라고 한다면, 이 책에 관한 (온라인에서 찾을 수 있는) 리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철학의 문제들>과 <철학이란 무엇인가>는 같은 책인데 번역자만 다르다. 후자의 책을 먼저 샀다가 번역 문제로 전자의 책을 다시 샀다. 전자의 번역이 더 원문에 가깝다. 대신 원문에 가까운 만큼 한국어는 지저분해졌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철학의 문제들>이 더 읽기 편하다. 다만 드물게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더 나은 번역이 있을 때가 있다. 두 권을 함께 두고 읽으면 더 좋다. (당연하게도, 영어의 원문을 읽으실 수 있는 분들이라면 원문을 추천한다.) 대체로 <철학의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읽은 만큼 이 리뷰는 <철학의 문제들>의 리뷰로 한정해도 상관없다.

 

이 책은 '지은이의 말'에서 목표를 분명하게 한정한다. "나는 이 책에서 주로 긍정적이면서도 건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철학적인 문제들에 국한시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문제들만 논의한 이유는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한 부정적인 비판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하여 이 책에서의 논의는 형이상학보다 인식론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였으며, 다른 철학자들이 많이 논의한 그 밖의 문제들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소개하는 데 그쳤다.(7쪽)"

 

앞뒤의 내용을 바꿔보자면 이 말은 곧 '형이상학은 부정적이면서도 건설적이지 않다'는 말이 된다. 바로 그러한 입장에 서서 러셀은 관념론자들을 비판한다. 이 책에 언급된 관념론자는 버클리,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칸트, 헤겔인데 러셀은 줄곧 이들을 비판한다.

 

​이 책이 (서양)철학입문서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그 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서양 철학의 근원인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시작하지 않고, 인식론적 입장에서 바라 본 철학입문서임을 알아야 한다. 분석철학의 창시자인 러셀이 쓴 만큼 분석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 역시 알고 읽어야 한다.

 

​목차는 총 1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문장은 "이성을 가지고 사리에 맞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신할 수 있는 지식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가"로 시작한다. 이 문장은 러셀이 우리를 철학적 사고로 초대하기 위해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1장에서 14장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믿고 넘겨왔지만 실은 당연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에겐 이 과정이 1+1=2인 이유를 증명하는 수학적 공식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1+1=2라고 믿고 있지만 막상 왜 1+1=2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학창 시절에 배웠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증명해봤자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결론이 2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과정을 충실히 밟아간다. 독자는 그 증명을 따라가면서 논리적(혹은 철학적)인 사고 없이 믿을 수 있는 것들은 실상 아무것도 없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인식 범위 역시 생각만큼 당연하지 않으며 확실한 것조차 없다.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증명을 거쳐 확정된 것들밖에 없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조차 확실한 것이 없는데 인식할 수 없는(형이상학적인 것들)은 더더욱 알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것이 러셀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토록 확실한 것이 없는데도 증명(혹은 사고)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15장에서 밝힌다. "철학적 사유의 가치"라는 제목의 15장은 14장까지의 피로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한다. (15장이 없었으면 나 역시 러셀을 좋아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앞에 실려 있는 '책의 내용 소개'에 의하면 비스겐슈타인은 이 책을 싫어했고 특히 15장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하지만, 내가 비스겐슈타인까지 알 바 없지 않은가!!! 과감하게 지른다.)

 

"철학이란 무지한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으나, 하찮고 세세한 문제들을 따지며 어떤 지식이 불가능한가에 관한 문제를 놓고 쓸데없이 따지는 논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경향(200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철학적 사유의 가치"를 감동적으로 설파한다! 15장까지 다 읽고 나면 이 책을 읽은 것이 마치 대단히 뿌듯한 일을 한 것과 같은 착각까지 생길 정도로 감동적이다! 그 감동은 1-14장까지 충실히 읽은 독자만이 느껴야 할 몫이다!

 

형이상학(혹은 관념론)을 과감히 무시('칸트, 헤겔 따위야 우습지'로 가볍게 무시)하는 러셀의 무례함에 너그러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덧1- 러셀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여타의 철학자와 다르게) 장수했고, (여타의 철학자와 비슷하게) 결혼도 여러 번 했으며, (놀랍게도) 노벨문학상도 받았다. 사회참여(촌스러운 용어지만)에도 열성적이라 반전운동도 했다. (<철학의 문제들>에서 보이는 태도를 보면) 거만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 같다.

 

덧2- 리뷰의 허접함을 <곁에 두고 읽는 철학 가이드북>을 읽으며 용서하시길.

 

덧3- <철학의 문제들>이 <철학이란 무엇인가>보다 별로였던 점(몇몇 번역 제외하고)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쓸데없이 앞 부분에 "책의 내용 소개"를 넣어두었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또 하나는 중간중간에 '옮긴이의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없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 같다. 두 가지 모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방해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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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주 2016-12-27 0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가 아닌 알라딘 메인에서 보면 왜 자꾸 문단 앞에 물음표가 붙는 것인가. ㅜㅜ

cyrus 2016-12-2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보라빛우주님이 소개한 리뷰도 잘봤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연보라빛우주님의 글을 참고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연우주 2016-12-28 01:48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리뷰는 이미 나와서... 별로 크게 도움이 안 될 거에요. ^^ Cyrus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용. ^^
 
곁에 두고 읽는 철학 가이드북 - 플라톤부터 곰돌이 푸까지, 지적 수다를 위한 철학 에센스
제임스 M. 러셀 지음, 김우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독서모임을 새로 시작하면서 알라딘 사이트에 들어가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졌다. 책을 한 권 검색해서 책 아래 달린 서평들을 읽는다.  서평을 읽다 보면 이 책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된다. 또 알라딘은 이 책을 산 사람들이 산 다른 책들 역시 링크해두었기 때문에 이 책과 (어쩌면) 성향이 비슷한 다른 책들 역시 볼 수가 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좋은 책이나 좋은 서평가를 만나기도 한다. 이 책 역시 그 과정에서 만난 책이다. 철학 공부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철학사의 흐름이나 철학자를 요약한 책들을 여러 권 읽었는데 이 책 역시 그런 책 중에 하나인 줄 알았다. 다만, 한 권의 책을 중심으로 작가의 견해를 쭉 제시하는 정도의 차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어보니 유머 책(!)이었다. 올해 내가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작가는 철학의 고전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한다. 1부에서 7부까지로 나누어 재기발랄한 제목을 붙여 놓고 나름의 흐름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한 권의 책을 중심으로 그 책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풀고 말미에, "Speed Read"라는 제목을 붙여 그 책에 대한 작가의 요약을 붙인다. 

 

작가가 쓴 책에 대한 평가도 재미있지만 말미에 붙인 "Speed Read"는 웃지 않을 수가 없는 내용이다. 누가 이토록 재기발랄하면서도 정확하게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싶다. 작가의 필력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는 이 책에 첫번째로 실린 책이 바로 러셀의 <철학의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의 이름도 러셀이라서-두 사람이 관련이 있는 것도 같다. 둘다 영국 사람이고 성이 특이하니까.- 버트란드 러셀의 책을 가장 먼저 실어둔 것인지 아니면 러셀의 이 책이 '철학'의 문제들을 대중에게 쉽게 제시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해서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겠다만.)

 

어쨌든 정말로 동감이 가는 평가라서 이 책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덕분에 다른 부분들도 발췌독을 했는데 읽은 부분들 중에서 박장대소를 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이 책의 장점은 책의 흐름은 분명 있지만 한 권, 한 권씩의 평가를 담아두었기에 발췌독 역시 편하고 발췌독을 해도 상관없다는 점이다.

 

요즘 웃을 일이 없었을 많은 분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덧- 이 책에는 '알랭 드 보통'에 대한 평가도 있는데 "Speed Read" 부분이 정말로 웃기다. 읽으면서 박장대소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안 웃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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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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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은 있지만 안다는 생각이 안 드는 분야가 있다. 몇 권의 책들을 읽어보아도 여전히 잘 모르겠고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기도 어렵다. 내게 미술은 그런 분야이다. 

미술관을 좋아해서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 등을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다. 오르세 미술관 전시회나 보테로전, 유명한 국내 화가들의 전시회에 가 보기도 했다. 여전히 미술에 대한 지식은 늘지 않고 내 취향에 맞는 그림만 좋아한다. 

솔직히 말하면 전시회의 그림보다는 전시회에서 파는 그림엽서나 마그넷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그런 탓에 나는 절대 교양인이 될 수는 없구나 좌절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물론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른'이란 말이 붙여졌음을 알았지만 원제 역시 "보는 방식들"이니 크게 걸리지는 않았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목차가 없다. 1-7이라는 숫자가 매겨져 있고 7장이 모두 글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세 편은 이미지만 있다. 네 편도 이미지와 글이 함께 실려 있다. 전체의 페이지수도 190쪽밖에 안 되는데 글마저 적으니 빨리 읽을 수 있다. 물론 함께 실린 이미지를 천천히 감상하며 읽는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1장에서 벤야민의 영향을 받았음을 대 놓고 밝히는 이 책은 이러한 미술작품이 왜 위대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미술작품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인가에 접근한다.

우리가 왜 원작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는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누드화가 왜 그러한 방식으로 그려졌는지, 유화가 왜 흔히 물건들을 묘사하는지, 유화로 그려진 인물화에 어떠한 배경들이 함께 포함되는지, 그들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는지에 주목한다. 나아가 유화가 현대의 광고와도 대비될 정도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까지 밝힌다.

이 책을 다 읽은 후, 미술에 관해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음(10쪽)"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재에 남아 있는 미술작품이 갖는 가치가 단지 고차원적인 예술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을 옮기며 서평을 마무리하겠다.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는 만인의 권리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사회적 환경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력하게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는 그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와 현재 그 자신의 상태와의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그 모순과 원인을 충분히 깨닫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투쟁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의 무력감과 함께 뒤섞여서 백일몽으로 융해되어 버린 선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야 한다.


왜 광고가 그럴듯해 보이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대답은 바로 여기에 있다. 광고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과 광고가 약속하는 미래 사이의 간극은, 광고를 보고 물건을 사는 사람 자신이 느끼는 현재의 처지와 그가 되고 싶어하는 처지 사이에 벌어진 간극과 일치한다. 그 간극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실제 행동과 생생한 경험에 의해서 다리가 놓여져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간극은 매혹적인 백일몽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171-172쪽)


덧-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은 <불손하고 건방지게 미술 읽기>가 생각이 났다. 유명한 화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그들의 작품을 조금은 삐딱한 시선에서 쓴 책이다. 나는 이런 책들에 끌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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