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우리가 독서에 대하여 생각했지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
탕누어 지음, 김태성.김영화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해야 하는가. 읽으며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의문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책이 별로여서 그러냐고 묻는다면 정색을 하며 '그럴 리 있겠냐'고 대답할 것 같다.

 

"명함은 없지만 누군가가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전문 독자(professional reader)'라고 대답"(485쪽)하는 탕누어가 쓴 '열독 이야기(이 책의 원제다.)'가 어떻게 별로일 수 있겠는가. 그는 내가 만난 '가장 치열한 독서가'다.

 

많은 사람들이 독서를 들먹이며 독서에 대해 안 들어도 되는 말(글)을 떠들지만, 탕누어는 '내공으로 증명하는 사람'이다. 그의 글에는 '독서 내공'이 촘촘하게 담겨 있다. 번역자의 말대로 "다소 뇌를 지치게 만들 수도 있"(487쪽)을 만큼 깊다. 대만에서는 10년 전(2007년)에 출간되었는데 이제서야 우리나라에 번역되는 것이 이상할 만큼 '특별한 책'이다.

 

이런 탕누어의 책을 누구에게 권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유는 이렇다.

 

이 책을 '깊이 있게' 이해 혹은 공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탕누어처럼 유년기부터 계속 치열한 독서를 이어와야 하고, 탕누어가 수도 없이 언급하는 '마르케스,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책을 읽을 때 작가만큼 알기 때문에 읽는 것은 아니다. 또 작가만큼 알아야 그 책을 독해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탕누어 역시 이 책의 예상 독자를 '독서에 관해 궁금한 성인 독자면 누구나'로 잡았을 것도 같다. ("이 책을 쓰게 된 의도는 원래 사람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하면서 그 과정에서 곧잘 부딪히는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5쪽)이며 "도대체 독서가 필요한 것인지 필요치 않은 것인지 스스로 자세하고 분명하게 생각하는 이야기로 써낼 수 있을 뿐"(6쪽)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각장마다 마르케스의 『미로 속의 장군』이 인용하면서 글을 전개하고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수시로 호출하는 그의 글쓰기 기법은 독자를 다소 피로하게 만든다. 쉴 틈 없이 빡빡하게 들어찬 탕누어의 독서 내공은 독서 초보일수록 읽기의 피로감을 과중시킬 것 같다. 의도치 않게 '전문독자'로서의 내공이 넘치게 드러났을 뿐이다. (아마 탕누어는 이런 것이 문제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이런 피로감을 이겨낼 수 있는 독자라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탕누어의 독서 내공'이 궁금한 독자라면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탕누어'야말로 (연구자가 아닌) '순수 독자'가 '독서'로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토록 치열하게 읽는 독자가 말하는 독서론은 '스스로를 독서가라 칭하는 한국의 어설픈 독자 백 명'이 떠드는 이야기를 전부 가져다 조합해도,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경지를 보여줄 테니까.

 

이 책은 머리말과 부록을 제외하고 0장을 포함하여 총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와 책, 독서의 지속 문제,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독서의 곤혹, 독서의 시작과 그 대가, 독서의 시간, 독서의 기억, 독서의 방법과 자세, 독서의 전문성, 유년의 독서, 마흔 이후의 독서, 독서의 한계와 꿈, 소설 읽기, 독자로서의 생각'이 각장의 (소)제목이다. 독서에 관하여 궁금하게 생각할 법한 이야기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는 "0장 서와 책 -벤야민적인, 정리되지 않은 방"에서 독서가 안정된 행위가 아니라 탐닉성과 도약성을 동시에 지니는 변화무쌍한 행위에 가깝다고 말한다.

 

"독서는 물이 흐르듯이 날과 달, 계절과 세월의 교체에 따라 들쭉날쭉 변화무쌍하면서도 출퇴근과 삼시 세끼 식사에 융화된다. 잠이 오지 않거나 어딘가 바삐 가야 한다면 읽던 책을 바닥에 내려두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서 자체가 탐닉성과 도약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항상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나타난다) 어떤 책을 읽다가 그 책으로 인해 다른 책을 펼치게 되어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게 다반사다. 매일 심경의 미묘한 변화 때문에 읽고 있던 책을 다른 것으로 바꾸기도 할 테고, 글을 쓰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겨 한꺼번에 열 권 내지 스무 권의 책을 뒤적이는 일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독서의 상황과 유형은 한없이 다양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독서란 깨끗하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22쪽) 

 

독서의 여정에서 우리가 따라갈 것은 의문이라고도 말한다.

 

"의문은 독서 전에 생긴 것이든 독서 과정에서 생긴 것이든 모두 독서를 이끌어주는 동시에 종종 독서의 여정에서 유일한 지도 역할을 한다. 책의 세계에는 이로 인해 독특한 경로가 생겨나고 책 읽는 사람은 그 경로의 부분적인 모습만 펼쳐게 된다."(30쪽)

 

굳이 0장을 넣은 이유는 이 책의 가장 큰 줄기를 설명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전문 독자 탕누어는 의문을 따라 정리되지 않은 독서의 길을 갔고, 또 그런 과정으로 독서를 안내하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1장부터는 실제로 독서에서 부딪히는 문제로 들어가 이야기한다.

 

사실 독서를 '시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독서를 지속하는 일이다.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독서가 순전히 심심풀이가 되는 시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문을 닫아걸고 책을 읽는 과정에서 극복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없애버릴 수는 없는 어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문 밖에는 꽹과리 소리와 북소리가 하늘을 찌르며 사람들을 공격하는 괴로운 세계가 존재한다. 독서와 심심풀이가 서로를 배척하면서 용납하지 않고 있지만 독서를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항상 없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일부 사람은 분명하게 묘사할 수 있지만 대개는 몹시 애매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책을 읽는 이들은 세계와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꺼지지 않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호기심과 상상력은 지나치게 체계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을 혐오한다. 다시 말해 그들과 이 세계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소박한 연계, 그윽하고 미묘한 대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자 세계의 일부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수시로 회의를 품지만 시종 손을 놓치 않는다. 완전히 결별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이 반드시 볼리바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계와 사람들을 바꾸려는 큰 꿈을 추구하면서 그 해답과 방법 그리고 역사적 결함을 찾아야 한다."(61쪽, 1장 좋은 책은 갈수록 줄어드는 걸까? - 독서의 지속 문제)

 

물론 이런 독서도 "가능성이지 해답은 아니다." "이런 가능성이야말로 독서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하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가능성이야말로 절망의 반의어다. 가능성은 영원히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포착할 여지를 남겨준다."(62쪽)

 

그렇다면 계속 독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독자들은 책 속의 세계에서 더 큰 유혹을 받을수록 상대적으로 눈앞의 현실 세계에서 더 멀어지고, 책 속의 갖가지 훌륭한 세계를 이해하면 할수록 눈앞 세계의 빈약함과 초라함, 무미함과 불의를 더 쉽게 알아차리며, 심지어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더 자극적인 사실은, 독자들이 보고서 보물처럼 여기는 더 좋은 세계들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대개 하나하나 '패배당한 세계'라는 것이다. <중략>

 

책 속의 세계가 더 훌륭하며 그 안에 사는 것들이 더 즐거울수록 혼탁하고 오염된 현실 세계의 공기 중에서는 살아가기가 더 힘들어진다. 결국 독자는 두 배의 속도로 눈앞의 세계에서 멀어지는 셈이다. <중략>

 

독자는 확실히 자연스럽게 어떤 고독감을 느끼고 좀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더 선명하고 구체적인 것을 감지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의 언어란 원래 이처럼 간단하고 초라하며 쓸모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현실 세계에 내놓아진 유한한 우리가 실제로 보는 풍요로운 세계를 우리는 아예 묘사할 수 없을 것이고, 설득하거나 변론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할 것이다." (82-83쪽, 2장 의미의 바다, 가능성의 세계 -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남들이 지금 이 순간의 '이 세계'만 갖고 있을 때 그는 하나 또 하나 교차되고 호응하며 계속 파생되는 다른 세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주 깊고 무거운 풍요로움의 행복이지만 이렇게 많은 행복을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로서 상당한 인내력과 체력을 요구한다. 게다가 이처럼 많은 행복으로 충만한 마음과 몸을 남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 한밤중에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외롭고 고독하다.

 

이리하여 이렇듯 힘들고 고독한 일이 수시로 독자들 마음의 지혜와 인내심을 시험하고, 눈앞의 세계 및 사람들에 대한 독자들의 제한된 동정과 그리움을 느끼도록 시험한다. <중략> 독자는 자신의 익숙한 실존 세계에 서 있지만 자신을 이방인이라 느끼게 된다. 언어마저도 이방의 언어다."(84쪽, 2장 의미의 바다, 가능성의 세계 - 독서의 전체적인 이미지) 

 

내가 왜 항상 이방인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왜 내 언어는 소통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명확하게 설명한 글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외로워서 시작한 독서가 끊임없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탕누어만큼은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나쁜 책은 왜 이렇게 많아서 나를 분노케 하는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한 탕누어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책의 세계는 만신창이가 된 실존 세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일독의 가치가 없는 쓰레기 같은 책이 너무나도 많다. 그렇다고 그런 책들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전부 스린에 있는 폐지 공장으로 보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언젠가는 가려지지 않는 질병의 증상으로서 진실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이 세계를 얼마나 형편없는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는지를 증명하는 증거물이 될 수도 있다."(136쪽, 4장 첫번째 책은 어디에 - 독서의 시작과 그 대가)

 

 

그래.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그런 책들은 계속 출간될 것이다. 그렇다면 탕누어처럼 생각하는 편이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유리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 시간에 한 권'을 읽는 '독서법'이 많이 팔리는 상황에 탕누어는 이렇게 말한다.

 

"이미 죽어버린 부호를 하나하나 깨우고 그 시의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원저자가 걸었던 길을 반복하면서 그가 본 것을 보고, 그가 생각한 것을 생각하며, 그가 고민했던 것을 고민해야 한다."(187쪽, 5장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면 - 독서의 시간) 

 

"아무리 훈련이 잘되어 있고 소질이 있는 중량급 독자라 해도 갑자기 책을 펼쳐 읽으면서 처음부터 텍스트를 전체적으로 충분히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따라서 어떤 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그 책과 저자로 하여금 계속 말이 없는 죽음의 상태에 남아 있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아니라면 반드시 다시 읽는 행위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준비가 자신을 정확한 사람으로 만들어 다시 책을 대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보르헤스의 말에 담긴 진정한 함의일 터이다. 그는 일찍이 「책」이라는 제목의 또 다른 글에서 자신의 독서와 관련하여 "나는 늘 광범위하게 책을 읽는 것보다 몇 권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 편이다. 나는 여러 권의 책을 폭넓게 읽는 것보다 몇 권의 책을 새롭게 다시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시 읽기 위해서는 먼저 한 번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213쪽, 6장 외워야 할까 - 독서의 기억)

 

그렇다면 탕누어는 '재미있어서' 계속 읽는 것일까.

 

"독서에는 본질적으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고통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주 중요한 것들은 곤경 속에서만 발생하고 잔존한다. 이를 일부만 조금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260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전문적인 독서에는 부득이하게 강제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스스로 감지한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초점과 색깔이 있다고 해도, 이는 장시간 형성된 사유의 전통에 포함된다. 이런 사유의 전통이 그 문제에 모종의 견고함과 엄숙함을 부여하기 때문에 개인의 기분에 따라 마음대로 이를 없애버릴 수 없는 것이다. 전문적인 독서에는 또 상당히 무미건조한 부분이 있다. 전문적인 독서를 위해선 사유의 전통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고 이 사유의 흐름 가운데 자신은 어디쯤 서 있는지, 남들은 또 어디쯤 서 있는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긴 사유의 전통이 지니는 가설과 언어, 방법 및 역사의 연혁에 대해 어느 정도 개념을 가져야 하는데, 이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과거에 실패한 사례와 그 내용도 매우 중요하다 과거의 실패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 어떤 계시(예컨대 어떤 잠재력을 갖는 실패)이든 아니면 교훈(이 길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또다시 뼈아픈 대가를 치르지 않게 해주는 것)이든 간에, 보통 이것은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재미도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와 대등한 다른 사유자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부분도 집착과 병적인 증상까지 포함하여 이 영역의 현상들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우리의 이해에서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274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뒤를 돌아보면서 '학점을 보충'하는 일, 너무나 황급히 서둘러 쫒아가느라 놓칠 수밖에 없었던 지식의 틈들을 견고하게 메우는 일, 과거에 다른 사람들(다른 사람들이라서 다행이다)이 처참하게 실패했던 경험을 주워 모아 가슴에 새기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타이완의 독서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다."(274쪽, 8장 왜 이류의 책을 읽어야 하는가? -독서의 전문성)   - 타이완을 '한국'으로 바꿔 넣어도 될 것 같다.

 

탕누어는 "전문적인 독서"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 대신 "독서를 계속 지속해가는 것"으로 바꿔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탕누어의 생각처럼 나 역시 애시당초 독서는 '재미'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며 '의문'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지옥' 같은 현실 속에 살고 있는가. 사회는 정말 바꿀 수 없는가. 아니. 나는 정말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그런 질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서를 이어가는 힘이 되게 한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 것인가. 서두에서 던진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 '옮긴이의 말'을 포함하여 487쪽에 달하는 이 빡빡한 책을 누가 읽었으면 좋겠는가.

 

'독서'가 '자기계발'이라 믿는 사람들, 독서를 많이 하면 성공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 '지적 허영심'으로, '재미'로 책을 읽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유년기부터 독서를 했든 안 했든, 마르케스, 보르헤스, 벤야민, 스티븐 제이 굴드, 칼비노를 몰라도. 이 책이 '독서 판타지'를 깰 희망이기에 서두에 내가 쓴 모든 이야기를 지워버리고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 서평이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할, 미완의 글로 남는다고 해도.

 

덧- 옮기고 싶은 구절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줄이고 줄였다. 탕누어라는 전문 독자가 있는 한 그가 멈추지 않고 계속 읽는 한, 나는 조금 덜 외로울 것 같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우주 2017-07-22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엔 글이 안 붙어 있는데 책으로 가면 왜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ㅜㅜ

cyrus 2017-07-23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는 이의 뇌를 지치게 만들고 싶을 정도의 좋은 글을 쓰고 싶군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쓰면 읽기 힘들어서 안 읽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연우주 2017-09-06 14:34   좋아요 0 | URL
너무 늦게 답변을 답니다. ^^;;; 뇌를 지치게 하는 글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글 같아요. 다만 그럼에도 좋은 글은 읽히는 것 같습니다. ^^
 
자살론 -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천정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자살은 왜 이토록 흔한 죽음이 되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이 고통스러울 때 자살을 생각해봤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자살을 실행할 세부적인 계획을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관념 속에서 막연하게 죽어버리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죽음이 구체적인 옷을 입고 나타난 건 몇 년 전 한 분의 죽음을 가까이서 목도했던 때부터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죽음은 복잡했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죽은 사람과 관계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고통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오래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어쩔 수 없는 죽음 앞에서도 남는 자들의 고통이 이토록 큰데, ‘선택한 죽음을 대할 때의 고통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10년 넘게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인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천정환의 <자살론>은 그런 고민들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자살은 고통과 해석 사이에 있는 무엇이다. 고통과 해석은 자살과 관계하는 주체성의 두 계기, 즉 경험과 인식을 뜻한다. 또는 자살의 실재표상된 것에 대응한다. 인간은 자살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서 고통을 경험하며, 고통을 회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자살한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의 죽음과 죽음에의 의지를 해석하며 삶의 의미를 성찰한다.”(26)

 

이 책에서 다루는 자살은 한국인의자살이 아니라 한국에서의자살이다. ‘한국인의가 아닌, ‘한국에서의라는 관형구는 자살하는 사람이 놓이는 삶의 구체적인 조건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중략> ‘한국인 고유의심성과 그 집단적 발현태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특정한 시대의 사회문화정치경제의 상황과 그것과 상호작용하는 집합적 심성의 구조가 있을 뿐이다.”(36)

 

작가는 한국에서의자살을 계보학적인 관찰을 통해 한국 사회/문화의 어떤 문제점과 자살이 연관되어 있는지 살피는 한편, 자살행동에 연루된 여러 가지 문제상황들이 어떻게 서로 다른 계층젠더 주체들에 작용하는지도 서술”(34-35)한다.

 

조선 시대부터 식민지 시기, 그리고 현대의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사례를 정리하고 제시하며 해석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런 시도들은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말로 타인의 자살을 막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또한 자살이 자살자의 개인적이거나 내면적인 문제나 정신질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인 변인들과 맞물려 일어나는 일임을 지적한다.

 

“(대부분의) 자살자들이야말로 어떤 면에서는 진정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최후의 궁지에 몰려, 인간으로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최후로 타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자살한다. 자살생각을 하는 순간 그가 누구든 일종의 사회적 약자이며, 거기에는 반드시 자살 원인을 제공한 상황과 구조가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해야 한다. 그리고 자살은 대부분 일종의 차악의 선택이다. 또한 모든 자살에는 반드시 원인을 야기한 복잡하고 구체적인 관계의 상황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우울과 고립을 줄여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고, ‘미래를 살아갈 용기를 줄 수 있다.”(285)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지 않는 이상, 자살은 늘 타인의 문제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을 용기로 살지같은 말로 자살자를 루저로 인식하는 시선은 폭력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유 없이 타인의 삶을 함부로 폄하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없다.

 

어쩌면 삶을 사랑했을 자살자들을 위해(혹은 앞으로 자살을 선택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자살예방법이나 자살예방센터, 혹은 자살예방핫라인과 같은 전화 상담이 아니다. 자살을 야기하는 복잡하고 구체적인 원인에 대한 대책이다.

 

자살이 만연한 사회는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중략> 즉 자살을 야기하는 사회구조를 고치고 삶의 질행복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을 고쳐나가는 것, 특히 학교나 직장에서 경쟁으로 야기되는 소위와 폭력의 상황을 줄이는 것, 자살위험군에 속하는 노인과 빈곤층 및 정신장애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물질적정신적 지원을 확충하는 것, 그리고 종합적인 긴급구제를 행할 수 있는 예방센터를 전문적인 인력의 힘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물론 자살에 대한 바람직한 앎을 증대시키는 것도 선행과제다.”(325)

 

여기, 지금 한국에서의 자살은 흔한 죽음이다. 흔해질수록 자살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도 점차 줄어드는 것 같다. 왜 자살은 이토록 흔한 죽음이 되었는가. 이런 현상을 마냥 지켜봐도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 책을 읽으며 같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치광이, 루저, 찌질이 그러나 철학자 - 은둔형 외톨이 칸트에서 악의 꽃 미셸 푸코까지 26인의 철학자와 철학 이야기
저부제 지음, 허유영 옮김 / 시대의창 / 201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서양철학입문서다. 작가가 들어가는 말에서 밝혔듯이 철학을 공부하고 싶지만 너무 어려워 이해할 수가 없다고 푸념하는 사람에게 재미있고 통속적인 철학사 책을 쓰겠노라고 건넨 농담이 이 책의 시작이다. “인터넷 게시판에 쓰기 시작한 글이 호평을 받았고 덕분에 출간까지 하게 되었으니 인터넷의 수혜를 듬뿍 받은 책이다.

 

작가는 책이 가진 한계까지 밝혀둔다. 이 책은 통속서이며 독자들의 흥미를 높이는데 주력한 책이자 철학의 성대한 만찬을 시작하기 전에 가볍게 마시는 식전주같은 내용이니 원서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이 책에 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토록 정직한 들어가는 말에 있다. 위선이나 허영을 싫어하고 정직 혹은 솔직함을 미덕이라 여기는 나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싶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기대 이상으로 웃겼고 명확했다. 유머가 넘치면서도 유려한 필력을 자랑하고, 또 그런 필력만으로 승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철학자들의 핵심사상을 분명하게 요약해냈다. (서양철학전공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이 아니다. 위대한 사상가의 이면에는 미치광이거나 루저이거나 찌질한 본성이 공존하고 있음 역시 놓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의 업적과 인격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면 위로를 받는다. 나만 미친 짓하고 찌질한 거 아니지? 너네 위대한 척하지만 니네들도 나보다 더 심하게 망가진 거 맞지? 그 어느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밤새 이불킥도 하는 거지?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우리라는 공감대를 형성할 때 용기가 생긴다. 거, 나만 바보 클럽 아니잖아! 

 

완벽해 보이는 서양철학자들의 사상도 또다른 사상가들이 발견할 수밖에 없는 허점을 갖고 있다면 지금의 이 완전해 보이는 자본주의 시스템도 그 언젠가 무너질 허점을 안고 있겠지. 어쩌면 그 허점을 발견하고 싶어 서양철학을 뒤적이는지도 모르겠다. 서양의 역사, 철학, 시스템은 헤겔의 변증법이 그러하듯 --의 과정을 거쳐 왔으니 앞으로도 그런 과정의 연속이겠지.

 

서양철학은 인간이 가진 사유의 힘이 얼마나 큰지 배우게 하는 동시에 또 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도 깨닫게 해 준다. 하이데거의 생각처럼 죽음의 가능성이 생존의 진정한 의의를 환기시킬 뿐이다.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인간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해도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존재일 테니. 그러므로 니체의 권유처럼 끊임없이 자아를 초월하는 인생관을 붙잡고 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철학이 가진 힘은 멈춰 서지 않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아무리 위대해 보여도 완벽할 수 없고, 아무리 높아 보여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심하게 제 블로그 링크만 걸어둡니다. ^^

http://blog.naver.com/dreamerfs/220915584850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7-01-2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서재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물만두님은 투병 중이었어요. 그래서 물만두님과 직접적으로 어울린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분 때문에 헌책방이나 중고매장에 갈 때 절판된 장르소설을 삽니다. 지금도 물만두님이 살아계셨다면, 책으로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연우주 2017-01-20 14:19   좋아요 0 | URL
물만두님은... 원래 투병 중이시다가 책을 읽으신 분이신데요.... 참 다정하시고 좋은 이웃이었어요.

감사한 분들이 언급한 분들의 두 배 이상 되지만, 지금은- 교류도 없는데... 감히 언급하기가...

알라딘의 경영 방식이나 경영 철학은, 참으로 싫어하지만 제가 아직까지 알라딘에서 책을 사는 이유는, 알라딘 서재로 알라딘에 빚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스24를 문제집 출판사에서 인수했기 때문이기도 하구요. ㅋㅋㅋ 늘 선택은 차악이죠.) 물론 여전히 좋은 서평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하구요.

그나저나 알라딘 온라인 서점을 초창기에 시작한 덕 참 많이 봤네요.

연우주 2017-01-20 14:20   좋아요 0 | URL
그나저나 저는 변덕 병이 있어서 알라딘에서 달인 된 적 단 한 번도 없는데 cyrus님 대단하신 듯! ^^

cyrus 2017-01-20 15:48   좋아요 0 | URL
누구나 꾸준히 글을 쓰면 달인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재에 남기는 글은 하루 동안 책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한 일기와 가깝습니다. 일기 대신에 리뷰를 쓰고 있는 거죠. ^^;;

연우주 2017-01-20 15:53   좋아요 0 | URL
네. 훌륭하십니다. ^^
 
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 민들레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치다 타츠루를 좋아한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이나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를 재밌게 읽었다. <하류지향>은 오래 전에 신간 소개 기사에서 소개받고는 읽어야지 하다가 이제야 읽었다.

 

조금 더 빨리 읽었으면, 학교에서 왜 배워요?”, “뭐에 써 먹어요?”라는 식의 질문에 대해 부드럽게 응대했을 수 있었겠다. 2005년에 강연을 하고 2007년에 이 책이 출판되었으니 10년이나 지났다. 일본이 한국보다 몇 십 년 앞서 있다고 하니 현재 한국 사회를 설명하기 유용한 책이다. 2013년에 쓴 우치다 타츠루의 서문에 의하면 그도 절판되었던 이 책을 다시 출간하는 것을 보니 한국에서도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유효해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

 

일본 번역서들이 대체로 그렇듯 쉽게 잘 읽힌다. 우치다 타츠루는 필력이 좋은 저자인 덕도 있겠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몇 대목 있지만 대부분은 우치다 타츠루가 가진 문제의식과 분석에 공감했다. 신자유주의는 공부와 노동으로부터 도피하는 세대를 양산했고 자본화되지 않는 것들은 유효하지 않게 만들었다. 공장의 레일이 돌아가듯 24시간 살아가는 노동자에게 시간성은 사라지고 없다.

 

몇 년 전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을 공약으로 걸었던 정치권의 후보(이 사람은 싫어한다)가 있었을 만큼 우리는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책을 읽으며 일본과도 너무나도 흡사한 한국 상황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한국은 일본보다 훨씬 노동조건이 나쁜 나라이기 때문이다.

 

햄버거 세트 하나 맘 편하게 사 먹기 힘든 최저시급, 언제 짤려도 이상하지 않은 계약직 노동자, 쉴 공간이 없어 화장실 한 켠에서 쉬어야 하는 청소 노동자. 그런 생각을 하니 우울함이 밀려든다. 무엇이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인간답게 살게 할 것인가. 자꾸 되물을 수밖에 없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정치와 사회에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대답이다. 우치다가 말했듯, “주제넘은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청년 실업에도, 최저시급에도, 청소 노동자 문제에도, 세월호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한 사람이 없도록. 그에 대한 관심이 나에 대한 관심이므로.

 

무지는 죄이다. 늘 그렇게 믿었다,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