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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여, 요리하라! - 자립 지수 만렙을 위한 소년 맞춤 레시피 ㅣ 우리학교 소년소녀 시리즈
금정연 외 지음 / 우리학교 / 2015년 11월
평점 :
난 여자이지만, 결혼 전에는 요리의 '요'자도 몰랐다. 어릴 때의 부엌은 뜨겁고 날카로운 것들이 가득한 위험한 곳이라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고, 조금 큰 뒤의 부엌은 침범해서는 안되는 엄마의 고유영역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부엌을 다른 사람이 이용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내가
부엌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할 때 뿐이었다. 싱크대의 물이 하나도 없이 반짝반짝하게 닦아놓으면 엄마는 아주 기뻐하면서
칭찬해주셨다. 요리를 한다며 부엌을 어지럽히고 엄마한테 싫은 소리를 듣는 것보다 말끔하게 설거지를 하고 칭찬을 듣는 편이 훨씬 살기 편했다.
아니 어쩌면 난 지금 구차한 변명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요리를 못하는 이유는 다 따로 있었다면서.
아무튼 요리젬병이었던 내가 결혼을 했다. 자취도 하지 않았던 나에게 결혼이란 곧 부모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진정한 어른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독립은 그냥 하는 게 아니었다. 막상 독립을 하고 스스로 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나는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스무살이 넘은 이후 내가 요리를 해 본 경험은 남자친구와 함께 여행을 갔을 때 만들어봤던 카레 외에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결혼 후 처음
했던 요리도 물론 카레였다. 하지만 매일같이 카레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 그렇다. 어설픈 요리보다
확실한 외식이 답일 수 있다. 그런데 뭐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 해 줄 수 없음을 느꼈을 때, 아니 그보다 나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서 끼니를 해결할 수 없음을 느꼈을 때의 기분은 답답함이었다. 된장찌개도 먹고 싶고 스파게티도 먹고 싶은데 그걸 할 줄 모른다는 게
답답했다. 결혼 후 남편과 단 둘이 살 때, 내가 요리를 좀더 잘 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이제 결혼 5년차가 되었다. 아이도 태어나서 나는 나와 남편의 요리 뿐만 아니라 아이의 요리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솔직히 남편이랑 둘이서
살 때에는 대충 먹어도 별 상관이 없었다. 뭐하면 외식을 해도 괜찮았고.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그럴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
접하는 음식을 그냥 아무거나 주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무작정 해봤다. 사실 요리라는 것은 많이 해봐야
느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엄마가 스파르타식 속성 코스로 온갖 레시피를 알려주었지만, 한 두번 해봐서는 그 요리를 마스터할 수 없었던
거다. 난 이제 나만의 부엌이 있고 내가 손수 고른 식재료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무언가 충족되기 시작한다. 진정한 독립을 위한 첫 걸음은 바로
요리에서 시작된다.
너무나 장황하게 나의 짧디 짧은 요리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 책이 바로 나와 같은 요리젬병들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싶었다. 제목부터
'소년'을 위한 책이라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요리에 소외된 모든 어린 양들을 위한 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모두 11명의 든든한 선배들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한 비장의 레시피를 둘러보면 요리 초보자들도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볶음밥,
파스타, 분식, 전, 국에서 요거트에 이르기까지 모두 군침이 도는 익숙한 메뉴들이지만, 노하우가 듬뿍 담긴 레시피는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매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제목만 보면 요즘 방송에서 질리도록 나오는 요리 열풍이 출판계에도 옮겨 왔구나 싶겠지만, 책의 마지막장 까지 읽고 나면 사실 이 책이 담고
싶었던 것은 음식에 대한 레시피 뿐만 아니라 인생을 먼저 산 선배들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추천하는 '어른의 낯선
취향'이 담긴 노래, 영화, 책들도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11명의 저자들이 음식을 대하는 자세나 인생을 논하는 태도, 취향 그리고 문체도 전부
각기 다르지만, 후배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고 가볍게 읽어나갈 수 있지만, 그 안의 내용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 10대가 아닌 나도 인생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10대가 되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물론 주방도 함께 내어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