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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개성도 없고 딱히 특이할 것도 없는 ‘아파트’라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 그러니까 오래전의 낡고 허름했던 내 집에는 벽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벽속에 마련된, 그러나 벽과 일체가 되어 손잡이만 아니라면 결코 벽 속에 무엇이 존재하리라고 믿어지지 않는 그런 공간. 손잡이를 잡고 양손으로 밀어내면 그 어둠속에서 풍겨오던 습하고 매캐한 책의 곰팡내.
부모님이 늦어지시던 날에는 나는 늘 그곳으로 기어들곤 했다. 그 안에 쌓여 있던 수 많은 책들. 보이는 문과는 달리 그 안은 넓고도 깊었다. 때때로 끝이 보이지 않는 저 어둠의 끝에는 무엇이 존재 할까 궁금했다. 내게 그 벽장 안은 책들의 도시였다. 친척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시고도 연약한 품성에 돈을 받아 오지 못한 아버지는 대신 몇 십 권의 책을 들고 돌아오셨다. 집 앞에서 흙을 만지면 놀고 있던 나는, 얼굴엔 그늘이 가득한 채 양손에 붉은 노끈으로 동여 맺던 주황빛 하드커버의 책들을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날 책 더미들을 안방 벽장 속에 던져 넣으시곤 마루에 앉아 소주를 드셨다. 어렸던 나는 아버지가 벽장 속에 던져 넣은 것이 궁금해 그날부터 몰래 벽장 속을 드나들었다. 그 벽장 속에서 나는 점점 책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며 난생처음 이야기라는 것을 만났고 나의 세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벽장은 이제 내가 만든 책들의 도시가 되었다. <톰소여의 모험>, <왕자와 거지>, <소공녀>, <십오소년표류기><안데르센 동화집>등등을 여행하며 다녔다. 어린 계집아이의 호기심을 지독히도 자극했던 주황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 하드커버의 낡은 계몽사 책들. 그때 그 도시 속을 파고들며 만났던 내 보물들. 그래, 발터 뫼르스의 말대로 호기심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추진력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에게나 자신만의 도시는 존재한다.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타지이든 존재하고 있는 현재의 순간이든 생각해보면 자신만의 도시는 있다. 누군가는 음악의 도시를 만들고, 누군가는 음식의 도시를 만들며, 춤의 도시, 금전의 도시도 존재한다. 그리고 당신과 나의 경우는 책들의 도시이다. 발터 뫼르스의 경우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자신의 도시를 가장 완벽하고 기발하며 독창적으로 발굴해 냈다는 것이 우리와 다를 뿐이다. 만약 당신이 그가 만들어낸 도시가 궁금하다면, 저자의 상상력에 몸을 맡기면 그뿐이다. 필요한 것은 ‘호기심’이라는 추진력이면 족하다.
뫼르스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 온갖 은유와 상징을 바탕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얼핏 보면 신나고 흥미진진한 판타지소설에 불과하나 한 번 더 생각하면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에 때때로 정신이 번쩍 들거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퍼지곤 한다. 그 상징과 은유들은 단지 소구가 된 책뿐이 아니라 온갖 문화들, 책과 음악. 영화와 모든 매체를 아우르고 있다. 가령, 책에 독을 묻혀 살해하는 모습은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며, 음악으로 영혼을 뺏는 장면은 17세기의 그 치명적인 ‘카스트라토’를, 그리고 부흐하임에서 일어나는 작가와 편집자 출판업자들의 관계는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고, 주인공을 공격하고 물어뜯던 살아있는 책들은 끝도 없이 출판되는 악서(惡書)를, 스마이크가 어둠의 제왕을 만드는 장면은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또한 결정적으로 주인공을 인간이 아닌 공룡으로 삼은 것은 왜일까? 그리고 인간은 그저 라이덴 병속의 ‘소인간’으로 전락시켜버린 의미는? 이 꿈꾸는 책들의 도시 속에는 환상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면 나름대로 찾아 낼 수 있는 해석의 범위가 무궁무진하다. 생각해보라. 인간이 아닌 공룡이라니! 병속에서 죽음을 맞는 하찮은 인간이라니! 맞다. 당신들의 짐작대로 우리는 발터 뫼르스의 호기심의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것 하나! 그 악랄한 권력자 ‘피스토메펠 스마이크’ 이름의 문자를 재 정렬하면? 바로 파우스트의 무시무시한 악마 ‘메피스토’가 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물론 독일어의 순차로는 아니다 이러쿵저러쿵 하더라도 그냥 웃어넘기기에 어째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왜 일까? 이것은 단지 우연이었을까? 언어의 오류를 문체로 간주한다던 ‘가가이즘’, <기사 헴펠>이라는 위대한 책, 골고, 알리 아리아 에크미르너, 블로른, 아구 프로스트라는 책 속의 작가들과 그 외의 내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수많은 작가들과 여러가지의 상징들, 이것들도 우연일까? 과연? 정말?
숨막히는 폭염의 여름, 그저 롤러코스터와 같은 신나고 시원한 책을 읽고
가볍게 돌아서려는 내 소매끝을 이 모든 것들이 자꾸만 끌어대니 이 어인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