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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동안의 과부 1
존 어빙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왜 <일년 동안의 과부>인가?,가 읽는 내내 가장 궁금했다. 제목이란 것은 사람의 이름과 같은 것이어서 대충 아무렇게나 짓지 않으므로. 작가도 편집자도 고심의 고심을 했을 것이므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루스콜이 ‘1년 동안의 과부’에 대해 쓴 글 때문에? 아니면 루스도 일년 동안 과부였으니까? 그럼, 도대체 과부는 뭘 의미하는 걸까? 문제가 꼬이기 시작할 땐 처음으로 돌아가 원칙을 짚어나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 ‘과부’의 사전적인 의미는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는 여자’이다. 그럼 존어빙은 남편을 어떤 의미로 해석했을까? 아마도 그가 세운 남편의 의미는 ‘세계’, ‘세상’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과부는 ‘세상을 잃어버린 사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또 모르지 존어빙 그의 속내는...
<아이들에게는 안돼>의 제 1장에서 썼듯이 과부가 다시 세상에 나올 적당한 때를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과부가 ‘안전하게’다시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으리라.
...........2권 269p
어쨌건 내 주관적인 해석은 그러하다. 그러므로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도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그 또 ‘세상’이라는 것 또한 극히 주관적이어서 어느 정도의 기준이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인지는 모호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어빙은 과부가 ‘안전하게 다시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남은 평생 동안의 과부역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세상으로 어기적거리며 끼어들지 않았냐 말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인물인 루스콜도 과부이며(실제로도 의미상으로도!), 에디도 어떤 의미에선 과부나 다름없다. 에디의 기준으로 보자면 매리언을 생각하며 살았던 그 오랜 시간이 정상적인 의미의 세계이며 세상이다. 헌데 루스가 과부가 된 1년 동안 에디는 루스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면 에디는 그 일 년의 시간이야 말로 자신의 세계(매리언)가 흔들리고 있었던 ‘과부’로서의 시간인 것이다.
존어빙은 ‘안전하게 세상으로 나오는 일은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모든 과부들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세상은 애초부터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우리의 운명은 세상을 향해 있었으니까. 결국 세상은 상상과 다르지 않으며, 상상으로 조차 알 수 있는 세상 따위로 못나갈 이유도 없는 것이다. ‘섹스앤더씨티’처럼 모두의 결말이 훈훈함에 좀 찝찝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그들이 세상으로 나오는 방식이라면 독자인 우리는 박수를 쳐 줄 수밖에. 하리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온 루스, 서로의 품에 안겨 세상으로 나온 에디와 매리언, 그리고 추잡한 생을 죽음의 어깨를 빌려서야 겨우 자신의 조용한 세상으로 돌아간 테드콜까지. 모두 ‘과부’에서 세상으로 나아간 자들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생의 어느 순간쯤은 ‘과부’로 살아 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손바닥만 한 빛이나마 감도는 세상으로 다시 나오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면서 말이다.
이제 루스는 과부였고 저 야비한 노인네의 면상을 다시 보고 싶었다. 과부에 대해 자신이 썼던 모든 것이 얼마나 진실 됐는지 그녀의 면전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2권 266p
<일년 동안의 과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존어빙의 능력이 물씬 묻어나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어지간한 액자소설들은 저리가라 할 만큼 이야기들을 요리조리 직조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에디와 매리언의 이야기 속에 루스의 이야기를 넣고, 루스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가고, 또다시 그 이야기들 속에 소설에서 만든 소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뭐, 인물들의 직업이 모두 ‘작가’인 탓도 있겠지만 어쨌건. 그렇다는 얘기.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맨 처음과 맨 끝이 아닌가 싶다. 아니 분명하다. 그 강렬한 도입부와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말이라니! 마지막 매리언의 등장과 그녀가 루스에게 던진 한마디는 여느 고전영화의 마무리 보다 몇 백배 낫다. 기실, ‘애수’나, ‘제 3의 사나이’처럼 강렬하면서도 은근한 맛이 있다.(오마주가 아닌가 할 만큼!) 멋지다! 마치 흑백 필름이 촤르륵~ 돌아가는 영사기 소리와 비가 오듯 스크래치 된 화면을 넋 놓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봐도 멋진 마지막 한마디, ‘아가야, 울지 마렴, 에디와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