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절판되길 바란다.
나만 알고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살의 전설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2014년 최고의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프리츠 오르트만 <곰스크로 가는 기차>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만났던 건 아주 오래전이다.

그리고 몇년 후에 mbc' 베스트셀러극장' 에서 같은 제목의 극을 보게 됐다

우연히, 그것도 막,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놓친 남자의 얼굴을.

 

tv를 볼까 했지만 너무 어색한 외국인 분장이 거슬려서 tv를 꺼버렸다.

책장을 뒤적뒤적, 어딘가 있을 [곰스크로 가는 기차] 가 프린트 된 a4를 찾아 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곰스크-

깨끗하고 멋진 옷을 차려입은 단편집이 출간됐다.

프리츠 오르트만의 다른 단편들과 함께.

 

 


나도 알고 있다.

나는 작품 속 주인공처럼 늘 곰스크로 가는 기차만 기다리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어리석다 할지라도 곰스크로 가는 기차만을 기다리며 살것이라는 것을 안다.

 

 

뽑아 놓은 글귀들은 중요하지만 단지 저것 만으로는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모두 표현할 수 없다.

극이 진행될 수록 유려하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단편의 전체와  조각들의 이미지 .

문단과 문단, 그리고 각각의 행간마다 가득한 인생의 고뇌와 의미가 가혹하리만치 절절하다.

 

기차는 자꾸만 기적을 울린다. 어서 올라타라고.

나는 마음이 조급하고 종종거리면서도 기차에 타지 못했다. 

운명이 라는 것. 살아간다는 것. 살아 내고 있다는 것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도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될 수 없듯이, 아내와 나도 완전히 각자 혼자인 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년 동안의 과부]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일년 동안의 과부 1
존 어빙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왜 <일년 동안의 과부>인가?,가 읽는 내내 가장 궁금했다. 제목이란 것은 사람의 이름과 같은 것이어서 대충 아무렇게나 짓지 않으므로. 작가도 편집자도 고심의 고심을 했을 것이므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루스콜이 ‘1년 동안의 과부’에 대해 쓴 글 때문에? 아니면 루스도 일년 동안 과부였으니까? 그럼, 도대체 과부는 뭘 의미하는 걸까? 문제가 꼬이기 시작할 땐 처음으로 돌아가 원칙을 짚어나가는 것이 제일 빠른 길이다. ‘과부’의 사전적인 의미는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는 여자’이다. 그럼 존어빙은 남편을 어떤 의미로 해석했을까? 아마도 그가 세운 남편의 의미는 ‘세계’, ‘세상’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과부는 ‘세상을 잃어버린 사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또 모르지 존어빙 그의 속내는...


<아이들에게는 안돼>의 제 1장에서 썼듯이 과부가 다시 세상에 나올 적당한 때를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과부가 ‘안전하게’다시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으리라.

                                                                  ...........2권 269p


어쨌건 내 주관적인 해석은 그러하다. 그러므로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빙빙 도는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그 또 ‘세상’이라는 것 또한 극히 주관적이어서 어느 정도의 기준이 제대로 돌아가는 세상인지는 모호할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어빙은 과부가 ‘안전하게 다시 세상에 나오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남은 평생 동안의 과부역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세상으로 어기적거리며 끼어들지 않았냐 말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된 인물인 루스콜도 과부이며(실제로도 의미상으로도!), 에디도 어떤 의미에선 과부나 다름없다. 에디의 기준으로 보자면 매리언을 생각하며 살았던 그 오랜 시간이 정상적인 의미의 세계이며 세상이다. 헌데 루스가 과부가 된 1년 동안 에디는 루스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렇다면 에디는 그 일 년의 시간이야 말로 자신의 세계(매리언)가 흔들리고 있었던 ‘과부’로서의 시간인 것이다.

 

 

존어빙은 ‘안전하게 세상으로 나오는 일은 없다‘고 말하지만 결국 모든 과부들은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세상은 애초부터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다.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부터 우리의 운명은 세상을 향해 있었으니까. 결국 세상은 상상과 다르지 않으며, 상상으로 조차 알 수 있는 세상 따위로 못나갈 이유도 없는 것이다. ‘섹스앤더씨티’처럼 모두의 결말이 훈훈함에 좀 찝찝하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그들이 세상으로 나오는 방식이라면 독자인 우리는 박수를 쳐 줄 수밖에. 하리의 손을 잡고 세상으로 나온 루스, 서로의 품에 안겨 세상으로 나온 에디와 매리언, 그리고 추잡한 생을 죽음의 어깨를 빌려서야 겨우 자신의 조용한 세상으로 돌아간 테드콜까지. 모두 ‘과부’에서 세상으로 나아간 자들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생의 어느 순간쯤은 ‘과부’로 살아 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손바닥만 한 빛이나마 감도는 세상으로 다시 나오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 치면서 말이다.


이제 루스는 과부였고 저 야비한 노인네의 면상을 다시 보고 싶었다. 과부에 대해 자신이 썼던 모든 것이 얼마나 진실 됐는지 그녀의 면전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2권 266p

 

<일년 동안의 과부>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존어빙의 능력이 물씬 묻어나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어지간한 액자소설들은 저리가라 할 만큼 이야기들을 요리조리 직조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에디와 매리언의 이야기 속에 루스의 이야기를 넣고, 루스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가고, 또다시 그 이야기들 속에 소설에서 만든 소설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뭐, 인물들의 직업이 모두 ‘작가’인 탓도 있겠지만 어쨌건. 그렇다는 얘기.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맨 처음과 맨 끝이 아닌가 싶다. 아니 분명하다. 그 강렬한 도입부와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말이라니! 마지막 매리언의 등장과 그녀가 루스에게 던진 한마디는 여느 고전영화의 마무리 보다 몇 백배 낫다. 기실, ‘애수’나, ‘제 3의 사나이’처럼 강렬하면서도 은근한 맛이 있다.(오마주가 아닌가 할 만큼!) 멋지다! 마치 흑백 필름이 촤르륵~ 돌아가는 영사기 소리와 비가 오듯 스크래치 된 화면을 넋 놓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봐도 멋진 마지막 한마디, ‘아가야, 울지 마렴, 에디와 나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강하고 인상적인 도입부, 믿기지 않는 놀라운 줄거리,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들쑥날쑥한 감정의 기복. <이런사랑>을 읽고 난 충격적인 느낌이다. 약간의 추리소설 비슷한 느낌마저 느꼈다면 거짓말이라고 할까? 하지만 진짜로 읽는 내내 주인공이 당하는 일이 실재와 환상 중 어느 것일까 고민했었다. 혹은, 주인공이 다중인격?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만큼 이언 매큐언이 독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닐 줄 아는 능력자라는 것.

이언 매큐언은 뼈에 살을 붙이는 능력 뿐아니라 완벽하게 조각해 내는 능력까지 탁월하다.
과학과 종교, 사랑과 집착, 이성과 광기, 의심, 강박 등을 조물조물 버무려 사랑 이라는 이름아래 보란 듯이 차려 놓는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랑의 다른 모습들을 눈뜨고 보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나마 숭고한 사랑과 순수한 사랑의 출연으로 허허로운 마음에 거세게 들이치는 바람을 한순간이나마 잠재운다.

우리는 달의 한 면밖에 보지 못한다. 달의 이면은 너무도 못생기고 끔찍하여 한 면만을 보게 된다고 누군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사랑의 눈부신 면만을 보고자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우울한 면 또한 찬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위한 일이라고 서로를 다독이곤 한다. 진정한 사랑의 뒷면을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과감하게 사랑의 이면을 들이대는 이언 매큐언의 목소리에 살짝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하지만 진실의 모습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모르는 사랑. 당신은 절대 알지 못하는 사랑.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말려버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이 눈물 흘리는
그런, 당신은 모르는 사랑.

 

*** ****

책을 넘기는 곳곳 줄을 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구절들. 작가의 통찰은 물론, 깜짝 놀랄 만큼 정교한 심리묘사와 상황묘사 들로 정신을 차릴 수 가 없다. (주절주절 백번 지껄이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마이리뷰일 듯)

-우리는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파국은 그 자체로 정체성과 운명을 구부려 새로운 뭔가로 만드는 일종의 용광로였다.
-인간의 다양성을 지켜보는 일도 즐겁지만, 인간의 동질성을 관찰하는 일 또한 즐겁다.

-이기심 또한 우리의 심장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무엇을 우리 자신을 위해 갖고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 포유류들의 갈등이다.
-어느 순간이나 그에 선행하는 이유가 있다. 시작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느 하나를 택하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것에 비해 뒤이어 일어난 일을 더 이치에 맞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선량함이 시험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시험할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밖에는 그 누구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충격은 우리가 받은 충격의 그림자일 뿐이고, 우리 감정을 선의에서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바다 밑바닥에 대한 탐험이 시작되었지만 표면은 잠잠하기만 합니다
-우리 피부 점막 사이에 작은 먼지나 티끌이,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면서도 해변의 모래처럼 손으로 만져지는 무언가가 끼어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의 지적 능력이란 언제나 자기주장이 지닌 허점에 대해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거나 모른 척하도록 도와주니까
-심지어 만족의 표시로 나직이 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 방에 납득시키고 싶은 존재가, 어떤 신적인 방관자라도 있었던 걸까?
-마치 방안에 함께 있는 사람 하나가 감정이란 감정은 모두 독차지하고 있을 때 그러하듯, 난 공허하고 무감각한 중립 상태에 빠진 느낌이었다.

-물론 거의 의식하지 않은 채, 내 시야의 한쪽 구석을 통해 말없이. 그건 언어학자들이 ‘멘탈리스’라고 부르는 찰나적 사고의 언어, 즉 말 이전의 언어였다.
-우리는 반쯤만 공유된 신뢰할 수 없는 지각의 안개 속에서 살아간다.
-... 무자비한 객관성... 우리는 절반의 진실을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확신을 주기위해 스스로도 믿어 버리는 사람들의 후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09-30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