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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영혼
필립 클로델 지음, 이세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5년 2월
평점 :
품절
누구나 그런 날들이 있다. 열망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고, 생은 모든 정열을 소진하여도 원하는 곳으로 흘러가지 않아, 우리는 때로 좌절하고, 때로 쓸쓸하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아름답고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면서도 문득 ‘삶이, 얼굴에 정면으로 뱉은 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달리 어쩔 방도가 없다. 그저 손으로 스윽 닦아내고 다시 살아내야 할뿐.
인생은 이 사람과의 관계로 시작해 저 사람의 관계로 다시 넘어간다. 마치 박지성의 응응캔버스 광고처럼, 삶은 사람과의 관계를 다시 돌려보고돌려보고 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고 보니 그것은 입에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신화 속의 뱀, 우로보로스를 닮지 않았나! 실상, 이렇듯 눈만 뜨면 만나고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의 영혼이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아, 흰 놈도 검은 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필리핀 애들과 인도네시아 애들을 구별 못하듯 영혼도 그저 이놈이 그놈이고 그놈이 저놈일 뿐이라고. 이 기막힌 생의 아이러니, 영의 아이러니를 발견해 낸 자가 바로 아무도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는 더러운 한 여인이라니, 이 또한 재미있는 파라독스.
데스티나 검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쓸쓸한 무채색의 얼굴로 어느 오래된 벽화의 흐릿한 그림처럼 하루하루를 보냈을 사람. ‘사랑과 범죄가 그에게서 하나가 되는’ 고결한 모습이라니... 그의 아내와 여교사와 벨드주르의 흑백사진이 눈앞에 현현하다. 그 여인들과 데스티나 검사의 뒷모습에 가슴이 벅차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액의 양이 돌연 증가한다. 전쟁을 간신히 비껴간 한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어린 벨드주르의 싸늘한 시체의 입술만이 푸른빛일 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형상은 흐릿한 회색이다. 토악질 나오는 판사와 그의 동종, 그들을 떠받드는 시종들, 경악하는 사람들, 도덕적 관념으로 자신을 합리화 하는 주민들, 알코올중독자 여인, 탈영병, 그리고 충격적인 마지막의 화자 자신조차... 누구하나 벨드주르의 보랏빛 입술보다 선명한 영혼을 지닌 자가 없다. 심지어 신을 섬기는 신부조차 벌거벗고 아귀처럼 음식을 씹어 육체를 살찌운다. 벨드주르를 죽인 자는 정말 남들보다 더러운 영혼을 가졌을까? 이곳의 살인은 마을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살인보다 지독한 것인가? 필립클로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관념상의 살인에 비해 진짜 살인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의 병든 욕망과 절대적 현실 사이의 평형이 이루어지는 때는 사실 전쟁 때 뿐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우리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많은 살인을 저지르며 표현할 수 없는 악행을 행하고 사는가. 누군가의 머리가 부숴지기를, 누군가의 인생이 초토화되기를 빌고 또 비는 것이 당신과 나의 마음이다. 그래서 작가는 ‘타인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아도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생의 이면을 날카롭게 포착해낸 작가가 놀랍다. 무릇, 우리는 헤헤호호 웃는 낮으로 생활의 모든 이들을 대하고 존경하고 우러르나 돌아서면 어떠한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관념의 살인과 실재의 살인, 너머의 살인과 지척의 살인, 이 모든 것의 경중을 따질 수 있을까? 죽음의 이미지 또한 다르지 않아. 너와 나를 포함한 모든 죽음의 모습도 그러하다. ‘범죄자와 희생자가 모두 순교자가 된 살인. 그건 흔치않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검사가 범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작품에서의 범인은 작품의 특성상, 작품의 구조상, 인물의 설정상, 주제상 순교자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연민을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짜맞춘 말 그대로 소설이고 픽션이라고는 하나, 책을 읽는 내내 순교자의 뒷모습에 쓸쓸해하고 가슴이 아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작가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흐릿하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끊이지 않는 하나의 원으로 이루어진 피의 형제! 당신의 영혼이 그러하듯 나의 영혼도 그러하다. 색도 명암도 없는 흐린 회색의 빛깔... ‘개새끼들이 개새끼들이라서가 아니다. 아마도 우연이란 없으리라,. 나는 곧잘 그런 생각을 했다. 모두들 각자의 드라마 안에서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들이다.’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시작하여 끝도 없이 만들어 내는 완전하고 완벽한 구(毬).
필립클로델은 ‘짜샤,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 거야!’ 라고 말하며 둔기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정신이 아득하고 눈앞은 온통 회색빛... 마지막까지 떨리는 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내내 놀랍기도 하고 그 치밀한 구성과 인간과 인간의 미세한 감정까지 이리저리 마음대로 부릴 줄 아는 능력이 부러울 뿐.........................
헌데, 너와 내가 같다면, 너와 내가 어찌 생을 살아내든, 영혼의 색은 같은 것이라면 우린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 내야 하는 걸까? 우습지 않은가! 하늘 꼭대기에서 날고 뛰는 인생일 지라도, 진흙을 뒹구는 더러운 인생일 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모두가 같다는 것. 마지막엔 결국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나저나, 그것을 좋아해야하나.. 싫어해야 하나... 때론 참, 얼굴에 정면으로 뱉은 침처럼 생이 느껴져 몹시 쓸쓸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