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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개
양쯔쥔 지음, 이성희 옮김 / 황금여우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흔히 인정스럽고 반듯하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을 보고 '인간적이다' 라는 표현을 쓴다. 이와는 달리 거칠고 제멋대로이며 도리를 모르는 사람을 욕할 때 '개 같다' 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앞서 말한 '인간적이다' 에서 그 인간이란 우리가 그렇다는 것일까? 난 당연히 아니며, 우리의 이상이 녹아든 관용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욕을 할 때 개를 들먹이는 것 또한 우리의 오만한 천성이 깃든 표현일 뿐이지 실제로 개들의 습성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 난 것 중에 싸잡아 한 마디 말 안에 구겨 넣을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사람과 개도 그리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특히나 요즘처럼 연일 경악할 만한 사건과 범죄가 일어나는 인간세상이나, 사람대신 그 눈이 되어 평생을 사는 개의 이야기를 접한다면 무엇이 인간적이고 무엇이 개 같은 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야야 할 것이다.
『사자개』는 인간이면 마땅히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개 이야기를 읽고 왜 인간성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여기 등장하는 사자개들 한 마리 한 마리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티베트 초원을 지키고, 초원의 사람들을 수호하는 사자개는 우선 그 겉모습부터가 다른 개와는 다르다. 티베트 사람들이 사자개를 지칭하는 썬거라는 말이 사자를 뜻한다니, 게다가 칭기즈칸의 유럽 정벌에 한 역할을 담당했고 당시 유럽으로 건너간 이들에 의해 현재의 대형 견종 상당수가 탄생했다니, 이 녀석들이 그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개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곰이나 늑대들도 두려워하는 야수보다 더한 야수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그 육체의 강함을 그에 못지않은 정신의 강인함으로 더욱 공고히 하여 자연과 인간을 지킨다.
이야기는 작가의 아버지가 기자로서 티베트 초원에 파견되었을 때 겪은 경험을 기자가 들려주는 형식이다. 아버지가 발령받은 시제구 초원으로 가는 길에 샹야마 초원의 일곱 아이들과 깡르썬거라는 황금빛 갈기를 가진 사자개를 만났다. 그리고 이들의 길고 긴 모험담이 펼쳐진다. 깡르썬거와 일곱 아이들은 지난 사자개 전쟁 당시 원수지간이 된 시제구 초원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시제구 초원의 영지견들을 상대하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독자는 앞으로 깡르썬거의 반려가 될 나르, 시제구 초원의 사자개 대왕과 나르의 언니 궈르, 대왕의 충신인 회색 사자개, 양치기 개지만 야심만만한 까바오썬거, 그리고 송귀인이 복수의 도구로 기른 음혈왕까지 수많은 사자개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아버지, 티베트 사람들, 초원에 와서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포섭 정책을 펼치는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작품 안에서 주요한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작품은 이들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있다. 많은 개가 마치 사람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다.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글이 유려하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번역은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지 못하고 교정을 본 건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오타들이 끊임없이 눈에 띄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도 사자개들은 인간을 위해 그들을 지키고 그들의 원수를 꺾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몸의 피 한 방울까지 젖으로 만들어내는가 하면, 무리의 왕을 죽게 한 원수조차도 그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도울 수밖에 없다. 그들의 피가, 태고부터 기억된 영혼 속 인자가 그들을 그렇게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초원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숭배된다. 초원의 사람들에게 사자개는 가뭇없이 사라지는 하찮은 생명이 아닌, 신의 현신과 같은 존재다.
깡르썬거가 온갖 고난을 이기고 초원의 사자개 왕이 되는 것, 아버지가 많은 어려움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사자개를 구하고 초원의 평화를 끌어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박진감도 넘치고 재미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진정한 인간성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있어 유익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단순한 주제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성이란 것이 사라져 가는 현대에 개를 통해 인간을 말하는 역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힘이 있다.
이야기의 진행은 답답하고 때때로 부조리한 상황에 도달하기도 한다. 왜 저렇게 꼬여만 가는 걸까, 왜 저렇게 막무가내일까. 그러나 그것이 당시 중국의 모습이고 당시 티베트 초원의 모습일 것이다. 신과 함께하는 사람, 자신들만의 종교와 법률을 지키고 숭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