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개
양쯔쥔 지음, 이성희 옮김 / 황금여우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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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흔히 인정스럽고 반듯하며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을 보고 '인간적이다' 라는 표현을 쓴다. 이와는 달리 거칠고 제멋대로이며 도리를 모르는 사람을 욕할 때 '개 같다' 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앞서 말한 '인간적이다' 에서 그 인간이란 우리가 그렇다는 것일까? 난 당연히 아니며, 우리의 이상이 녹아든 관용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욕을 할 때 개를 들먹이는 것 또한 우리의 오만한 천성이 깃든 표현일 뿐이지 실제로 개들의 습성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세상에 난 것 중에 싸잡아 한 마디 말 안에 구겨 넣을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사람과 개도 그리 단순하게 나눌 수는 없다. 특히나 요즘처럼 연일 경악할 만한 사건과 범죄가 일어나는 인간세상이나, 사람대신 그 눈이 되어 평생을 사는 개의 이야기를 접한다면 무엇이 인간적이고 무엇이 개 같은 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야야 할 것이다.


『사자개』는 인간이면 마땅히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개 이야기를 읽고 왜 인간성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 여기 등장하는 사자개들 한 마리 한 마리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티베트 초원을 지키고, 초원의 사람들을 수호하는 사자개는 우선 그 겉모습부터가 다른 개와는 다르다. 티베트 사람들이 사자개를 지칭하는 썬거라는 말이 사자를 뜻한다니, 게다가 칭기즈칸의 유럽 정벌에 한 역할을 담당했고 당시 유럽으로 건너간 이들에 의해 현재의 대형 견종 상당수가 탄생했다니, 이 녀석들이 그저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개들이 아님은 분명하다. 곰이나 늑대들도 두려워하는 야수보다 더한 야수가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그 육체의 강함을 그에 못지않은 정신의 강인함으로 더욱 공고히 하여 자연과 인간을 지킨다.


이야기는 작가의 아버지가 기자로서 티베트 초원에 파견되었을 때 겪은 경험을 기자가 들려주는 형식이다. 아버지가 발령받은 시제구 초원으로 가는 길에 샹야마 초원의 일곱 아이들과 깡르썬거라는 황금빛 갈기를 가진 사자개를 만났다. 그리고 이들의 길고 긴 모험담이 펼쳐진다. 깡르썬거와 일곱 아이들은 지난 사자개 전쟁 당시 원수지간이 된 시제구 초원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시제구 초원의 영지견들을 상대하게 된다.


이를 시작으로 독자는 앞으로 깡르썬거의 반려가 될 나르, 시제구 초원의 사자개 대왕과 나르의 언니 궈르, 대왕의 충신인 회색 사자개, 양치기 개지만 야심만만한 까바오썬거, 그리고 송귀인이 복수의 도구로 기른 음혈왕까지 수많은 사자개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아버지, 티베트 사람들, 초원에 와서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포섭 정책을 펼치는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작품 안에서 주요한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된다. 작품은 이들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있다. 많은 개가 마치 사람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는 힘이다.


이야기는 매력적이고 흥미롭다. 그러나 글이 유려하다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번역은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지 못하고 교정을 본 건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오타들이 끊임없이 눈에 띄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도 사자개들은 인간을 위해 그들을 지키고 그들의 원수를 꺾기 위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몸의 피 한 방울까지 젖으로 만들어내는가 하면, 무리의 왕을 죽게 한 원수조차도 그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도울 수밖에 없다. 그들의 피가, 태고부터 기억된 영혼 속 인자가 그들을 그렇게 이끄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초원의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숭배된다. 초원의 사람들에게 사자개는 가뭇없이 사라지는 하찮은 생명이 아닌, 신의 현신과 같은 존재다.


깡르썬거가 온갖 고난을 이기고 초원의 사자개 왕이 되는 것, 아버지가 많은 어려움을 뛰어넘어 믿음으로 사자개를 구하고 초원의 평화를 끌어오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박진감도 넘치고 재미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진정한 인간성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주고 있어 유익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단순한 주제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성을 잃어가는, 인간성이란 것이 사라져 가는 현대에 개를 통해 인간을 말하는 역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힘이 있다.


이야기의 진행은 답답하고 때때로 부조리한 상황에 도달하기도 한다. 왜 저렇게 꼬여만 가는 걸까, 왜 저렇게 막무가내일까. 그러나 그것이 당시 중국의 모습이고 당시 티베트 초원의 모습일 것이다. 신과 함께하는 사람, 자신들만의 종교와 법률을 지키고 숭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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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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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흥미롭다. 정답이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들이 더욱 거대해져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릴지, 신의 영역까지 도달한 인간의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 유토피아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미래지만 그것이 창작물의 대상이 된다면 아무래도 디스토피아가 더 환영받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비극은 특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데다 우리 마음 어디쯤에선 현실의 문제를 빚은 자신들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오늘의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세상이 지탱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일군의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로 한 모양이다. 그들이 바꾼 세상에 조너스가 살고 있다. 환경문제, 노인문제, 빈부의 격차와 다양한 차별이 불러온 폭력과 전쟁 등 산재한 현실의 문제를 모두 제거하고 철저히 통제하여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조너스가 사는 세상이다.
"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는 없나요? 왜 색깔들이 사라졌나요?"
"우리들이 그쪽을 선택했어, '늘 같음 상태'로 가는 길을 택했지. 내가 있기도 전에, 이 시대보다도 전에,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말이야. 우리가 햇볕을 포기하고 차이를 없앴을 때 색깔 역시 사라져 버렸지. 그럼으로써 우리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었지.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은 포기해야 했단다."

 

   조너스가 사는 마을의 주민들은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면 된다. 매해 기념식을 통해 마을에서 정해준 길을 묵묵히 걸으면 된다. 무례함을 금지하는 규칙 덕분에 타인과 반목할 일도 없다. 성욕을 비롯한 일체의 감정을 제어받기 때문에 감정적 혼란이 생길 리도 없다. 장래에 대해, 부에 대해, 행복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고민이란 것이 애초에 선택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날 때부터 박탈되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늘 같은 상태에서 늘 평화롭게 살면 된다.

 

   조너스도 평화롭게 잘 살았다. 그런데 조너스는 사물 너머를 보는 능력을 지닌 선택받은 아이였고 12살 기념식에서 기억 보유자로 선출되었다. 前代의 기억 보유자는 조너스가 선택된 시점에서 기억 전달자가 되어 자신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기억을 조너스에게 전한다. 이들이 나누는 기억이란 '늘 같음 상태'가 되기 전, 아주 오래 전 세상에 대한 기록이다. 햇볕과 눈, 뱃놀이와 크리스마스 파티, 그리고 전쟁과 살육 같은 것들 말이다. 오직 한 사람의 기억 보유자만이 그 모든 행복하고 아름답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짐을 져야 한다. 왜? 모두가 평화롭게 고통 없이 살도록 하기 위해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이 그렇게 정했다. 조너스는 기억을 전해 받으며 오래 전의 세상을 알게 되었다. 위험하고 혼란스럽지만 아름답고 달콤하기도 하다. 감정을 깨닫고, 색깔을 보게 된 조너스는 더 이상 마을의 주민으로 평화롭게 살 수가 없었다.
"저는 사랑이라는 느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우리에게 아직 사랑이 있었으면 해요." 그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그 방식으로는 마을이 잘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건 이해해요. 그리고 지금 우리 마을이 더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요. 어쩌면 사랑이란 살아가는 데 위험한 방식일지도 몰라요."  

 

   조너스와 그가 사는 마을을 눈으로 쫓다 보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에워싸고 점점 목을 조여 오는 많은 문제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범죄자에게 칩을 넣어 언제나 감시하거나 더 나아가 그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뇌수술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빈부, 인종, 종교 등의 차이가 불러오는 많은 분쟁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통합해야 할까?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관리하고 어느 시점이 되면 그들을 임무해제 시켜야 하는 걸까?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를 강제적으로 조절해야 하는 걸까?

 

   책은 과거의 기억을 얻은 조너스의 입을 통해 계획된 통제가 문제를 없앨 수는 있지만, 선택의 자유와 감정을 빼앗긴 인간이 얼마나 차갑고 무서운지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님을 말한다. 실제로 조너스의 아버지가 쌍둥이의 임무해제식을 하는 장면은 작품에서 가장 차갑고 무도한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왜 그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아마 지쳤기 때문일 테지. 생각하지 않고 바동거리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서 길을 잡아주고, 서로 거리를 두며 맘 상할 일을 안 만들고, 그저 평화롭게 그저 지금에 충실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지친 사람들이 늘어가고, 세상이 계속 예측할 수 없는, 혹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언젠가는 조너스의 마을 같은 세상을 대안으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 폭탄을 안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일까, 안전하게 통제받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일까. 아무것도 모른다면 후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이미 혼란과 부조리와 무질서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조너스는 나의 현실로 들어오고 싶어한다. 색깔이 없고, 눈도 비도 없는, 선택할 수 없는 자기 마을을 부정한다. 나는 그런 조너스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인간은 자기 손으로 선택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조너스를 말릴 수 없다. 그의 마지막 선택을 나무랄 수 없다.

 

   『1984』와 『시녀 이야기』를 거명한 뒷 표지의 광고 문구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고 너무 순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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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 루비박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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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끊임없이 전쟁을 이야기한다. 전쟁이 인간의 주요 화두인 이유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 또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2차 대전에서 독일군은 악당이었고 연합군은 '우리편'이었다.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들과 중공군을 다시 북쪽으로 밀어낸 맥아더의 상륙작전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 독일과 일본은 악당이고 연합군은 고마운 '우리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전쟁을 바라본다면 대지 위에 또아리를 틀고 전쟁을 연출해낸 돼지 같은 놈들이 악당이고 그 돼지가 연출한 전쟁이라는 작품에 소모된 모든 출연자는 그저 불쌍한 소모품이자 피해자들일 뿐이다. 전쟁을 다룬 많은 이야기들은 그래서 劇的이고 슬프고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언제라도 불쌍한 소모품이 되어 전쟁이라는 무대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는 그런 불쌍한 소모품의 이야기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잊고 버려야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독일은 세계 대전 당시에 아버지를 독일인으로 둔 사람들이면 모두 징집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 사예르는 징집당한 것이 아니라 지원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고 어머니는 독일인이었다. 10대의 청소년일 뿐인 그는 무엇을 위해 전쟁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전쟁을 모른 채 그 속으로 들어가던 당시의 그에게는 황금빛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못 가 너무도 철저하게 부서진다.

 

1942년 가을에 보급 부대의 일원으로 러시아에 들어섰다. 민스크로 가는 길에 바람막이가 되어 쌓인 시체들을 보며 그 역겨움에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전쟁이란 상황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언 손을 녹이기 위해 그 위에 소변을 보고 손가락이 터서 갈라진 것이 낫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자신이 들어서 곳에 대해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미 공포와 인내의 끝을 보았고 예정대로 고향에 돌아가 내 무용담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스크에서 하리코프를 지나 돈 강까지 겪은 이야기들을 설명하기 위해 모든 단어들을 사용한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일어날 일들을 위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단어들을 아껴두어야 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그는 변했다. 전쟁이 그를 가르치고 길렀다. 아무 것도 모르던 그는 이제 대독일 사단이라는 정예부대의 일원이 되었다. 적군의 시체에도 놀라 추위를 잊던 그는 어느새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나라를 지킨다.' 라는 구호 속에서 농담을 던지며 죽은 동료의 시신을 처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랐다. 그는 죽음에 익숙해졌다. 당연하다. 다른 병사의 시체를 운반하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1943년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지난해의 기 사예르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코노토프의 포위망을 뚫을 때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예전의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려 애를 써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앞에 웅크리고 있는 병사의 등을 보고 긴 겨울 저녁에 집안일로 바쁜 어머니의 뒷모습이나 동생, 또는내가 평상시 알던 사람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보이는 것은 젊은 날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전쟁의 그림자와 러시아뿐이었다. 전쟁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일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여자친구, 돈 그리고 행복해지는 법을 잊을 수는 있어도 모든 것(다가올 승리 같은 기쁨조차)을 망쳐버린 전쟁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을 겪은 병사의 웃음소리는 어딘지 어색하고 절망이 느껴진다.

 

혹독한 기후와 잔혹한 전투 상황을 지나오며 그는 전쟁의 의미를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고, 감정도 없어졌다. 그는 아직 열여덟 살도 되지 않았지만 그저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고 적을 죽이는 괴물이 되었다.

적의 폭풍 같은 공격에 우리는 어디로든 도망쳤다. 그러나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적보다 강한 힘을 발휘해 승리의 영광도 누리지 못하는 영웅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히틀러나 국가 사회주의 또는 제3제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심지어 폭격에 파괴된 도시에 있는 배우자나 어머니, 가족들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힘을 내 싸웠다. 죽음이란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는 분노에 힘없이 아우성 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다. 전쟁이 기른 인간의 모습의 보여준다. 전쟁이 사람을 얼마나 상처 입히고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영웅이 아니다. 살아남은 패잔병일 뿐이다. 프랑스 장교는 그에게 "집으로 가서 이 험난한 모험을 잊어버려라."라고 말했지만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기 안에서 사선을 함께 넘었던 동료들과 자신을 죽여버리는 것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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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밤 기담문학 고딕총서 3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준래 옮김, 이애림 그림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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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고골은 가장 위대한 러시아 작가 중 한 사람이지만, 정작 그는 일생동안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월의 밤』에는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짙게 풍긴다. 언제나, 어김없이, 카자크인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이교도에 대한 비웃음이 감초처럼 숨어있다. 자, 이런 고골의 손을 거친 슬라브 설화의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오월의 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서 인간은 악마와 공존하고 있다. 악마의 존재는 두렵고 기이하지만 위화감을 주지는 않는다. 악마는 인간의 고통스럽고 시끌벅적한 일상의 한 부분일 뿐이다. 「비이」의 마녀, 「무서운 복수」의 마법사, 「성 요한제 전야」의 바사브류크. 사람들은 이들 존재에 화를 내고, 맞서고, 욕을 하면서도 그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마치 이웃처럼. 인간은 왜 그들을 이야기하게 되었을까? 우리의 삶은 유한하다. 그러니 그 한계도 뚜렷하다. 한 마디로 인간의 삶이란 초라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다. 이런 우리라서, 닿지 못할 것과 이르지 못할 곳에 대한 바람과 두려움으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지.
 
중단편 6작품을 모아놓은 이 책에서 앞 부분에 수록된 두 편은 어둡고 무섭다. 「비이」에서 난데없이 나타나-등 뒤에 붙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당하는 입장에서는 더 큰 공포다-알 수 없는 곳으로 끝도 없이 달리게 만드는 마녀는 무섭다. 「무서운 복수」에서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담보로 이루어진 복수의 요구는 너무도 어둡다. 하느님 앞에서 죽은 이가 요구했던 그 끔찍한 복수는 어둡고 무섭고 깊고 지독하다. 이 두 작품에 비해 뒤에 수록된 나머지 작품들은 절망의 빛이 덜하며 조금은 교훈적이고 혹은 밝고 명랑하기까지 하다.

악마와의 마주침은 「저주받은 땅」의 할아버지처럼 잠시 고생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하고, 「물에 빠져 죽은 처녀」의 레프코처럼 호박이 넝쿨째 굴러오는 행운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성 요한제 전야」의 페트로처럼 한 줌 재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그 과정과 결말은 제각각이지만 그 시작은 결국 한 뿌리에서 나온다. 인간의 탐욕과 공포다.

그러니 악마의 이야기를 즐기기는 하되 악마와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지 않거들랑 욕심도 그만그만하게, 두려움도 그만그만하게 자신을 단속하시기를.

"나는 그가 왜 죽게 됐는지 알아. 그건 그가 두려워했기 때문이야. 만일 무서움만 타지 않았다면 마녀는 그에게 아무 해코지도 하지 못했을 거야." p88-「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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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양장) 기담문학 고딕총서 1
라프카디오 헌 지음, 심정명 옮김 / 생각의나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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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옛날 이야기는 무섭지도 않고 유치하잖아." 冊張을 뒤적이던 동생이 하는 소리다. 어떤 면에선 맞는 이야기다. 라프카디오 헌의 1904년작 『괴담』은 일본의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설화를 그의 아내 입으로 한번 거르고, 그리스인인 작가 본인의 글로 한번 더 거른 것이 『괴담』이다. 설화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본다면 이 작품도 우리에게는 그저 원형 그대로인 설화로 다가올 수 있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이 보여주는 무언가 결핍된 듯한 이야기.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얼마나 많은 환상적인 세계가 탄생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이 작품을 그저 유치한 옛날이야기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이 100년 전의 이야기는 세련되지도 치밀하지도 않다. 그러나 이 작품의 미덕은 수많은 환상문학의 밑거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21세기를 사는 독자라고 해도, 『괴담』에 수록된 이야기 한 편 한 편이 지닌 재미와 매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친숙하다. 도깨비나 이승을 떠도는 인간이 아닌 것들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책읽기는 더욱 수월해진다.

 

이승에 남은 미련 때문에 떠도는 혼, 애달픈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서도 인연을 맺는 연인, 귀신까지 홀리는 뛰어난 재주, 선녀와 나무꾼을 생각나게 하는 설녀의 이야기 등 하나같이 애절하면서도 서늘한 매력을 품고 있다. 특히 '귀신도 울린다' 할 정도의 뛰어난 비파 솜씨를 뽐내던 호이치가 정말 귀신들의 연회에 초대되었던 「귀 없는 호이치」이야기.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죽은 천황의 무덤 앞에 앉아 촛불처럼 환하게 타오르는 도깨비불 가운데서 비파를 타던 호이치의 모습을 그려보면 그 괴기스런 분위기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이 잊히지 않는다. 우리나라 전래동화 '은혜 갚은 까치'를 생각나게 하는 「원앙」. 배가 고파 수컷 원앙을 사냥한 손조 앞에서 제 부리로 배를 찢어 목숨을 끊은 암컷의 모습은 섬뜩하면서도 반려자에 대한 지독한 사랑과  손조에 대한 깊은 원한이 선명하게 그려진 이야기다. 이처럼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짧지만 붉은 핏빛처럼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괴담』의 아쉬움이라면 「해바라기」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들이 앞에 수록된 이야기들과 자연스런 흐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편집이지만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면 작품집에 대한 인상이 더 강하게 남을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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