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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 루비박스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끊임없이 전쟁을 이야기한다. 전쟁이 인간의 주요 화두인 이유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 또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2차 대전에서 독일군은 악당이었고 연합군은 '우리편'이었다.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들과 중공군을 다시 북쪽으로 밀어낸 맥아더의 상륙작전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 독일과 일본은 악당이고 연합군은 고마운 '우리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전쟁을 바라본다면 대지 위에 또아리를 틀고 전쟁을 연출해낸 돼지 같은 놈들이 악당이고 그 돼지가 연출한 전쟁이라는 작품에 소모된 모든 출연자는 그저 불쌍한 소모품이자 피해자들일 뿐이다. 전쟁을 다룬 많은 이야기들은 그래서 劇的이고 슬프고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는 언제라도 불쌍한 소모품이 되어 전쟁이라는 무대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는 그런 불쌍한 소모품의 이야기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잊고 버려야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독일은 세계 대전 당시에 아버지를 독일인으로 둔 사람들이면 모두 징집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 사예르는 징집당한 것이 아니라 지원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인이고 어머니는 독일인이었다. 10대의 청소년일 뿐인 그는 무엇을 위해 전쟁 속으로 걸어 들어갔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전쟁을 모른 채 그 속으로 들어가던 당시의 그에게는 황금빛 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못 가 너무도 철저하게 부서진다.
1942년 가을에 보급 부대의 일원으로 러시아에 들어섰다. 민스크로 가는 길에 바람막이가 되어 쌓인 시체들을 보며 그 역겨움에 추위조차 느끼지 못했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전쟁이란 상황에 대해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 언 손을 녹이기 위해 그 위에 소변을 보고 손가락이 터서 갈라진 것이 낫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자신이 들어서 곳에 대해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나는 이미 공포와 인내의 끝을 보았고 예정대로 고향에 돌아가 내 무용담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스크에서 하리코프를 지나 돈 강까지 겪은 이야기들을 설명하기 위해 모든 단어들을 사용한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일어날 일들을 위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단어들을 아껴두어야 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그는 변했다. 전쟁이 그를 가르치고 길렀다. 아무 것도 모르던 그는 이제 대독일 사단이라는 정예부대의 일원이 되었다. 적군의 시체에도 놀라 추위를 잊던 그는 어느새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나라를 지킨다.' 라는 구호 속에서 농담을 던지며 죽은 동료의 시신을 처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랐다. 그는 죽음에 익숙해졌다. 당연하다. 다른 병사의 시체를 운반하며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을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1943년이 되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지난해의 기 사예르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코노토프의 포위망을 뚫을 때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예전의 즐거웠던 일을 떠올리려 애를 써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앞에 웅크리고 있는 병사의 등을 보고 긴 겨울 저녁에 집안일로 바쁜 어머니의 뒷모습이나 동생, 또는내가 평상시 알던 사람을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보이는 것은 젊은 날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전쟁의 그림자와 러시아뿐이었다. 전쟁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에게 일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기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여자친구, 돈 그리고 행복해지는 법을 잊을 수는 있어도 모든 것(다가올 승리 같은 기쁨조차)을 망쳐버린 전쟁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을 겪은 병사의 웃음소리는 어딘지 어색하고 절망이 느껴진다.
혹독한 기후와 잔혹한 전투 상황을 지나오며 그는 전쟁의 의미를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고, 감정도 없어졌다. 그는 아직 열여덟 살도 되지 않았지만 그저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고 적을 죽이는 괴물이 되었다.
적의 폭풍 같은 공격에 우리는 어디로든 도망쳤다. 그러나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적보다 강한 힘을 발휘해 승리의 영광도 누리지 못하는 영웅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히틀러나 국가 사회주의 또는 제3제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심지어 폭격에 파괴된 도시에 있는 배우자나 어머니, 가족들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힘을 내 싸웠다. 죽음이란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는 분노에 힘없이 아우성 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다. 전쟁이 기른 인간의 모습의 보여준다. 전쟁이 사람을 얼마나 상처 입히고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영웅이 아니다. 살아남은 패잔병일 뿐이다. 프랑스 장교는 그에게 "집으로 가서 이 험난한 모험을 잊어버려라."라고 말했지만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기 안에서 사선을 함께 넘었던 동료들과 자신을 죽여버리는 것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