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미래를 그려보는 일은 흥미롭다. 정답이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문제들이 더욱 거대해져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릴지, 신의 영역까지 도달한 인간의 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 유토피아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미래지만 그것이 창작물의 대상이 된다면 아무래도 디스토피아가 더 환영받지 않겠는가. 모름지기 비극은 특유의 매력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데다 우리 마음 어디쯤에선 현실의 문제를 빚은 자신들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을 테니까.

 

   오늘의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세상이 지탱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일군의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로 한 모양이다. 그들이 바꾼 세상에 조너스가 살고 있다. 환경문제, 노인문제, 빈부의 격차와 다양한 차별이 불러온 폭력과 전쟁 등 산재한 현실의 문제를 모두 제거하고 철저히 통제하여 '늘 같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조너스가 사는 세상이다.
"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는 없나요? 왜 색깔들이 사라졌나요?"
"우리들이 그쪽을 선택했어, '늘 같음 상태'로 가는 길을 택했지. 내가 있기도 전에, 이 시대보다도 전에,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말이야. 우리가 햇볕을 포기하고 차이를 없앴을 때 색깔 역시 사라져 버렸지. 그럼으로써 우리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었지.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은 포기해야 했단다."

 

   조너스가 사는 마을의 주민들은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면 된다. 매해 기념식을 통해 마을에서 정해준 길을 묵묵히 걸으면 된다. 무례함을 금지하는 규칙 덕분에 타인과 반목할 일도 없다. 성욕을 비롯한 일체의 감정을 제어받기 때문에 감정적 혼란이 생길 리도 없다. 장래에 대해, 부에 대해, 행복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고민이란 것이 애초에 선택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날 때부터 박탈되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다. 늘 같은 상태에서 늘 평화롭게 살면 된다.

 

   조너스도 평화롭게 잘 살았다. 그런데 조너스는 사물 너머를 보는 능력을 지닌 선택받은 아이였고 12살 기념식에서 기억 보유자로 선출되었다. 前代의 기억 보유자는 조너스가 선택된 시점에서 기억 전달자가 되어 자신의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기억을 조너스에게 전한다. 이들이 나누는 기억이란 '늘 같음 상태'가 되기 전, 아주 오래 전 세상에 대한 기록이다. 햇볕과 눈, 뱃놀이와 크리스마스 파티, 그리고 전쟁과 살육 같은 것들 말이다. 오직 한 사람의 기억 보유자만이 그 모든 행복하고 아름답고 무섭고 고통스러운 짐을 져야 한다. 왜? 모두가 평화롭게 고통 없이 살도록 하기 위해 아주 오래 전의 사람들이 그렇게 정했다. 조너스는 기억을 전해 받으며 오래 전의 세상을 알게 되었다. 위험하고 혼란스럽지만 아름답고 달콤하기도 하다. 감정을 깨닫고, 색깔을 보게 된 조너스는 더 이상 마을의 주민으로 평화롭게 살 수가 없었다.
"저는 사랑이라는 느낌을 좋아하게 되었어요. 우리에게 아직 사랑이 있었으면 해요." 그러고는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그 방식으로는 마을이 잘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건 이해해요. 그리고 지금 우리 마을이 더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요. 어쩌면 사랑이란 살아가는 데 위험한 방식일지도 몰라요."  

 

   조너스와 그가 사는 마을을 눈으로 쫓다 보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를 에워싸고 점점 목을 조여 오는 많은 문제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범죄자에게 칩을 넣어 언제나 감시하거나 더 나아가 그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뇌수술을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빈부, 인종, 종교 등의 차이가 불러오는 많은 분쟁을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일률적으로 통합해야 할까? 노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그들을 관리하고 어느 시점이 되면 그들을 임무해제 시켜야 하는 걸까?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를 강제적으로 조절해야 하는 걸까?

 

   책은 과거의 기억을 얻은 조너스의 입을 통해 계획된 통제가 문제를 없앨 수는 있지만, 선택의 자유와 감정을 빼앗긴 인간이 얼마나 차갑고 무서운지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제대로 된 해결책이 아님을 말한다. 실제로 조너스의 아버지가 쌍둥이의 임무해제식을 하는 장면은 작품에서 가장 차갑고 무도한 부분이다. 그러나 나는 왜 그 상황을 이해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아마 지쳤기 때문일 테지. 생각하지 않고 바동거리지 않아도 누군가 알아서 길을 잡아주고, 서로 거리를 두며 맘 상할 일을 안 만들고, 그저 평화롭게 그저 지금에 충실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지친 사람들이 늘어가고, 세상이 계속 예측할 수 없는, 혹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언젠가는 조너스의 마을 같은 세상을 대안으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 폭탄을 안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일까, 안전하게 통제받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일까. 아무것도 모른다면 후자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이미 혼란과 부조리와 무질서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조너스는 나의 현실로 들어오고 싶어한다. 색깔이 없고, 눈도 비도 없는, 선택할 수 없는 자기 마을을 부정한다. 나는 그런 조너스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인간은 자기 손으로 선택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조너스를 말릴 수 없다. 그의 마지막 선택을 나무랄 수 없다.

 

   『1984』와 『시녀 이야기』를 거명한 뒷 표지의 광고 문구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고 너무 순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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